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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2019.6.9
본문 말씀의 원어적인 의미는 ‘마지막으로 아무도 나에게 매질을 제공하지 말라 왜냐면 내가 나의 몸 가운데 예수의 낙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제는 더 이상 바울을 괴롭히기 시작했던 것을 중단하고 복음을 누리고 살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괴롭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전도 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물론 갈라디아 교회는 한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지역에 세워진 여러 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세례도 받고(3:27), 성령체험도 했습니다(3:5). 그러나 대부분 이교도들이었던 관계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들이 전에 섬겼던 신앙이 혼재된 양상이 두드러졌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이 가르친 복음을 훼방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교회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대혼란을 겪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갈라디아 교회는 성숙함이 없는 초보적인 교회였던 셈입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원리와 구원의 도에 대해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더 이상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오직 복음으로 살아야 함을 당부하는 말입니다. 즉,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으로 보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받고도 율법으로 살려고 할 때 바울의 마음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아픔을 겪었던 것이지요. 바울은 복음을 위해 이 땅에서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문제로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흔적을 남깁니다. 이른바 삶의 족적입니다. 좋은 족적이든지, 혹은 좋지 않은 족적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남길 수 있는 최고의 흔적이 무엇일까요? 물론 사람마다 생각을 달리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보다 더 좋은 흔적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입니다. ‘스티그마타’는 문신을 새겨 표시하거나 낙인을 찍어 소유를 확인하는 표시입니다. ‘스티그마타’는 신원 확인의 수단으로 몸에 바늘로 찍어 만든 문신이나 표적을 말합니다. 주로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자기 가족의 동물이나 종들에게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신체에 흔적을 새겼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어떤 유명한 성직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나 손과 발에 난 못 자국들, 옆구리에 난 상처들이나 가시 면류관이나 채찍의 흔적까지 지녔다고 전해집니다. 심지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런 흔적들을 보고 성자로 추앙하거나 시복을 받은 자로 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흔적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절대 위험합니다. 모든 흔적이 주님으로부터 기인된 흔적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이는 흔적이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대변해주는 것도 아니요,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새겨진 흔적보다 더 소중한 흔적은 마음에 새겨진 흔적일 수 있습니다. 모든 흔적이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흔적도 있고, 보이지 않는 흔적도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에 새겨진 흔적보다 더 분명하고 선명한 흔적들이 마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른바 거룩한 흔적입니다. 바울의 흔적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스스로 새겼던 종교인의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흔적이었던 것입니다(롬8:18).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최고의 흔적은 내 마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흔적이 아닐까요?
(1)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이 보이십니까?
세상에 가장 위대한 흔적은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완전한 흔적이요, 완벽한 흔적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시다니요? 이보다 더 복된 흔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당신의 흔적을 새기셔서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충만했고, 선명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흔적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증언하십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흔적이요,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흔적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직 이 땅에서 하나님의 흔적만 나타내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흔적이 드러나면 하나님의 흔적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흔적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흔적으로만 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흔적만 나타내며 사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흔적이셨습니다. 그분의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의 흔적이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흔적이요, 예수님의 사역 전체가 다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흔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백성들마저도 하나님의 흔적을 부정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부인하고 거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적과 표적을 숱하게 보았던 유대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흔적으로 믿지 않고 대적하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도대체 그들의 믿음의 기준은 무엇이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흔적을 목격하고서도 믿지 않는 사악한 무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려고 발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성령잉태에서 성육신에 관한 모든 것을 다 거부했던 것이지요. 이른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흔적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어떤 흔적도 찾지 않았고, 발견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설령 그들의 눈에 발견되었을지라도 오히려 그런 자들을 무시하고 겁박하며 인정치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까지 지우려는 유대인들의 간사함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주시는 최고의 흔적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자기 죄로 죽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른 죄인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 그 이상도 아니요,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발견되어져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복된 십자가요, 얼마나 존귀한 십자가인지 깨달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 사랑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냥 모든 죄수들이 자기 죄 값으로 당하는 평범한 십자가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사랑하시는 흔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최고의 결정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사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인간들에게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온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 사랑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자기 마음에 맞는 시간을 정하시고, 자기 마음에 맞는 일정을 따라 지셨던가요? 아닙니다. 모든 일정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었고,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구했고, 하나님의 방법을 구했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흔적인 것입니다. 흔적은 고난도 흔적이고 영광도 흔적입니다. 아픈 것도 흔적이나 기쁜 것도 흔적입니다. 모든 흔적이 아픈 흔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으시는 흔적은 아프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는 흔적은 영광스러운 흔적입니다. 고난도 흔적이고 영광도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흔적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흔적만 나타내며 사셨습니다. 아들 안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너무나 선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는데 발광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억측을 마다치 않았으며 거짓을 꾸며대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는 것이구요. 그러니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려웠던 셈이지요. 때문에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흔적을 보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흔적은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흔적입니다. 감히 세상의 어떤 이가 예수님의 흔적을 모방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예수님의 흔적을 모방하려고 온갖 꼼수를 다 부립니다. 속칭 자기들이 그리스도라고 사기를 칩니다. 심지어 사단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는데 혈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폄하하고, 부활의 흔적을 지우려고 발광을 합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도난당했다는 둥, 혹은 예수님이 잠간 기절했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그들이 예수님의 흔적을 지운다고 지워집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이 그들의 꼼수로 지워질 수 있냐는 말입니다.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기록하고,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감히 누가 무엇으로 지울 수 있단 말입니까!!!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묻겠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흔적이 보이십니까?
(2) 바울 안에 새겨진 예수님의 흔적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전에 율법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었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후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선명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율법 안에 살 때도 하나님을 믿었고, 복음 안에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안에 살 때는 하나님의 흔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보니 하나님의 흔적이 예수 안에 온통 새겨져 있었던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흔적으로 보였고 믿어졌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율법 안에 있을 때 자기 안에 하나님의 흔적을 새기려고 오만가지 못된 짓을 다했습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흔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나름대로 율법을 지킨다고 열심을 냈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쫓아다녔습니다. 누구에게도 없는 종교적인 흔적을 열심히 자기 몸에 새겼습니다. 마치 그런 열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흔적인 것처럼 착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흔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사단이 내어준 흔적이요, 가장 빨리 지옥으로 달려가는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 어떤 흔적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 흔적이나 새기면 안됩니다. 바울은 그 흔적으로 영원히 버림을 받았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안에 새겨진 율법의 흔적들을 모두 다 지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흔적을 새겨주신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새겨주신 것입니다. 이 흔적은 생명의 흔적이요, 구원의 흔적입니다. 이 흔적이 없으면 아무도 생명을 얻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의 흔적이 구원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바울에게 새겨진 예수의 흔적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조건으로 볼 때 말입니다. 바울에게 새겨진 것은 영광의 흔적들이었지만, 그에게 새겨진 흔적들은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흔적들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새겨진 흔적들은 주로 고난과 환난과 아픔의 흔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흔적은 복음을 전하다가 새겨진 흔적들이었습니다. 오직 생명을 사랑하고 복음을 증거 하다가 당하는 흔적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누구도 새기기를 싫어하는 흔적들이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에게 새겨진 흔적들을 보실까요? 고린도후서 11장 16-28절입니다. 바울의 고난리스트입니다(23-27절). 과연 이런 흔적들을 자기 몸에 새긴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솔직히 여러분 안에는 바울이 고백한 이런 흔적들이 몇 가지나 새겨져 있을까요? 한가지라도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면 당신은 그래도 꽤나 괜찮은 성도가 아닐까요? 저는 거짓없이 고백하겠습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 믿음의 훈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바울의 삶을 보건데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데 합당한 흔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3) 당신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당신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흔적이 있습니까?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게는 그분을 위해 고난 받았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억울함을 당했던 흔적도 없습니다. 아니 제 기억으로는 전무합니다. 솔직히 흔적 같지도 않는 것을 흔적이라고 일부러 떠오르려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 몸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흔적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흔적은 내가 새긴다고 새겨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흔적을 새기기 위해 스스로 몸부림을 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기기 위해 스스로 어떤 일을 하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그런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자기 몸에 흔적을 새기려고 한다면 그는 율법의 함정에 빠질 것입니다. 그는 흔적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흔적은 내가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흔적을 새겨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스스로 어떤 흔적을 새기려는 의도는 결코 중단해야합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 때문에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그 흔적이 어떤 것입니까? 굳이 육체의 흔적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육체의 흔적보다 더 소중한 영적 흔적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새겨진 흔적이 가장 가치있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은 성령이 친히 내 마음에 새겨주신 흔적입니다. 그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성전 삼고 내 안에 오심을 믿는 흔적이요, 그가 나의 주되심을 믿는 흔적이며, 나의 왕 되심을 믿는 흔적이고, 생명 되심과 머리되심을 믿는 흔적입니다. 그 흔적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그 흔적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의 흔적이 있어야 함을 말입니다. 다만 흔적을 종교적인 훈장처럼 자랑하지 마십시오. 율법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본문에서 말씀하는 몸에 새겨진 흔적이란 굳이 육체에 새겨진 흔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흔적은 마음에 새겨진 흔적입니다. 할례를 보십시오. 할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친히 부탁하신 대표적인 흔적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로마서2장28절을 보십시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진정한 흔적은 주님이 내게 새겨주시는 흔적입니다. 비록 그 흔적이 아픔과 고난의 흔적이든지 혹은 영광의 흔적이었든지 말입니다. 무엇보다 아무도 주님이 새겨주신 흔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무엇으로도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원수마귀 악한 것도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새겨진 예수님의 흔적은 성령의 인치심이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새긴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새겨주신 지울 수 없는 영원한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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