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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1:1-40
▣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사도행전 21장-
1. 예루살렘으로의 여행(21:1-16)
지도에서 항로를 추적해 보라. “발견하였다“는 3절의 말씀은 “눈에 들어 왔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배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두로에 머물렀는데, 그 곳에 있는 신자들과 교제할 기회를 얻었다. 성령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다시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 곳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계획을 그의 영광을 위한 일로 바꾸어 놓으셨다.
5절에서는 “교회 구성원들“이 바닷가에 모여 기도 시간을 가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된다 ! 부모들은 집에 있고 자녀들이 교회에 나온다거나, 아내와 자녀들이 다른 곳에 있는데 남편이 예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란 참으로 슬픈 일이다(20:36-38 비교).
일행은 돌레마이에서 하루를 머물렀다가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으로 갔다. 빌립은 사도행전 6장 5절에서 집사가 되었다가 8장 4절 이하에서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이제는 그의 가족과 함께 정주하였으며 영혼을 인도하는 데 분주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집사 빌립은 복음 전도자 빌립이 되었다. “재능은 자기의 처소를 찾아가게 한다.“
결혼하지 않은 그의 네 딸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행 2:17). 물론, 하나님은 여자들에게 영적인 은사들을 주신다. 그러나, 신약은 남자를 다스리는 영적인 지도력이나 공식 모임에서 가르치는 일을 여자들에게 분명히 금지한다(고전 11:5/고전 14:33-40/딤전 2:9-15 참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전할 멧세지가 있을 때 남자인 아가보를 사용하였음을 주목하자. 네 여인들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으셨다. 바로 이 예언자가 11장 27-30절에서 기근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있다.
극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20:22)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박되고 목베임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준비되었다“는 말은 바울의 표어였다.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로마서 1장 15절-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사도행전 21장 13절
-제물로 드려져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디모데후서 4장 6절.
15절에 나오는 “행장“(carriages)이란 “짐“(baggage)을 뜻한다."
행 21:17-26
2. 유대인들과의 거래(21:17-26)
사도들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인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행한 모든 일들은 옳은 일이라고 믿기가 쉽다. 바울의 서신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그의 행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그의 마음과 동기가 바르다고는 하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하겠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그 곳에 도착한 후에도 또다른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으며(15장 참조) 이방인 중에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교회 생활에 있어서 유대적인 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수 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아직도 모세의 계명을 실행하고 있음을 20절에서 주목하자. 다른 어떤 곳보다도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기는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바로 눈 앞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과 은혜, 왕국과 교회 사이에 혼란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도 역시 같은 혼란에 빠져 있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에 저항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기하는 이 유대인들에게 입증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나쁜 거래였으나 바울은 빠져 들었다. 그는 이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써서,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성별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였고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제 그는 유대인들과 타협할 목적으로 “종교적인 거래를“ 하여 이 영감된 진리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바울은 서약을 마친 네 사람을 동참시켜 희생제사를 드렸으며 이레 동안에 전체의 사무 처리를 마쳤다. 이것은 나실인의 서약인 것이 분명하며 머리를 민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민 11:1-/행 18:18 에서 바울 자신의 행동을 보자). 이러한 속임수가 통했는가? 아니다 ! 그 결과, 바울은 체포되었다! 하나님께서 여러 도시에서 그에게 경고하셨던 바로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하였다."
행 21:27-40
3. 성전에서 체포됨(21:27-40)
이방에 사는 유대인들 중에서 바울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에베소 사람으로서 이방인인 드로비모가 사도 바울과 동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금지된 지역에 이방인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거짓말이었으며, 사단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이다. 야고보가 막으려고 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나게 되었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믿음이란 속임수 없이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또는 즐겁게 하기 위해서 계획이나 책략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성밖으로 끌려가 돌로 맞게 되어 있었는데 성전 수비대장이 달려와 그를 구했다. 자주 반복된 예언이 성취되었다. 바울은 두 개의 쇠사슬에 묶였다.(33절/ 21:11) 군중들의 소요가 에베소에 있는 이방인들의 소요와 별다를 것이 없는 것에 주목하자(19:32). 사단은 혼란을 일으킨다.
수비대는 바울이 문제를 일으킨 악명 높은 애굽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로마의 시민권을 사용하였다. 정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창설하신 기관이다(롬 13:1-). 복음의 촉진을 위하여 법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바울이 층대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히브리말로 연설하자, 이들은 조용해졌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바울의 변호 내용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사도를 판단하는 죄를 짓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두 가지 실수를 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가지 않도록 금했는데도 예루살렘으로 갔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알고서도 유대인들과 타협하였다. 후자는 교리적인 잘못이고 전자는 실행의 잘못이다.
바울의 마음이 육신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만큼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에서는 전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었다(22:17-21). 안디옥과 에베소는 교회의 지속적인 중심이 되어 있어야 했다. 예루살렘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율법과 은혜에 대한 혼란은 무서울 정도로 대단하다. 촛대, 분향, 법의(法衣), 화려하게 장식한 대교회, 제단, 희생제사, 제사장직등, 이 모든 일들은 옛 언약에 속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지된 것이다. 은혜와 율법에 대한 이 같은 마귀의 혼합은 믿음에 무엇을 더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 복음을 산출했던 것이다.이러한 미신의 쇠고랑을 수 세기 전에 깨뜨린 것은 마틴 루터가 연구한 바울의 로마서였다.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속박이 있던 곳에 자유를 가져왔다. 그리고 수 세기를 거쳐 내려오며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내어 놓는 신실한 집단들이 존재해 왔다. 율법과 은혜를 혼합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그 무엇과도 타협해서는 안된다 !
행 22:1-30
▣ 바울의 변호-사도행전 22장-
1. 바울의 변호(22:1-21)
이것은 바울의 회심에 대하여 사도행전에 나오는 세 번의 설명 중 두번째 설명이다(9, 26절).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는 사실이 유대인들을 진정시키고 흥미를 가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바울의 초기의 경력(1-5절)-바울은 귀중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이었다. 28장에서 그는 자신이 “자유로운 몸으로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그의 초기 교육은 위대한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의 가장 훌륭한 훈련을 받았다(5:34- 참조).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의 또다른 모습은 빌립보서 3장에서도 나타난다. 젊은 바리새인으로서의 바울이 모세의 율법에 열성스러웠던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의 열의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데까지 이르렀었다.
참된 기독교는 결코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오히려 언제나 박해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그리스도 없는 종교이다. 5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묶어오려고“ 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두 쇠사슬에 묶여 그곳 예루살렘에 서 있기 때문이다 !
바울의 놀라운 회심(6-16절)-하늘의 빛이 가장 밝을 때에(정오)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사단의 어두움은 가장 깊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찾아낼 수 있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죽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위대한 빛으로 바울을 “체포하셨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그 위에 빛을 비춰 주시기까지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후 4장). 바울은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바울이 아나니아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것에 유의하라.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 기간 동안에는 왕국에 대한 멧세지에서 교회에 대한 멧세지로의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 곳 유대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아나니아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사실이 바울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바울의 세례(침례)는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빛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전환의 시기 동안에(8-12장) 회심하여 세례(침례)를 받았는데, 이 때는 세례(침례)와 안수가 성령을 받는 데에 있어 중요했던 시기였다. 오늘날 모든 신자들을 위한 본보기로서, 바울의 경우를 사용하는 것은 구원과 세례(침례)에 대해 하나님이 제시하신 형식을 모르는 소치이다.
바울의 특별한 사명(17-21절)-바울은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에 와서(행 9:26), 성전에서 기도하며 몽환 가운데 빠졌었다. 이것과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이방인에게 갈 준비를 시킬 때 베드로가 겪은 몽환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베드로는 육신적으로 배고픈 상태에 있었으며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마음으로 “주려“ 있었다. 요한복음 4장에서의 그리스도와 같이 이것은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사도의 변론과 논쟁은 거룩하신 명령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바울의 간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아마도 체포하여 돌로 쳤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의 사역은 너무 빨리 끝나게 된다. 또한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관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의 왕국 프로그램이나 또는 베드로의 사역에 밀착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21절에서 이방인이란 증오스러운 단어가 언급되기까지는 바울의 설명을 열중하여 들었다."
행 22:22-30
2. 민족의 책임(22:22-30)
그리스도의 예고는 사실이 되었다. 이 민족은 바울의 간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반대로 폭동이 일어났다 ! 수비대장은 매질하여 그를 조사할 수있는 가까운 성으로 바울을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무서운 경험이었다. 많은 죄인들이 이런 식의 고문으로 인하여 죽었다.
다시 한 번 바울은 자신과 그의 사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사용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로마 시민을 취급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 아니었으므로(16:35-40 참조), 바울은 법적인 특권의 유리한 면을 이용하였다. 수비대장은 로마 시민권을 돈으로 사고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 것 같다. 반면에, 바울은 그가 “자유의 신분으로 태어났다“고 알렸다. 이 말은 그의 아버지가 인정받는 로마 시민이었음을 뜻했다.
수비대장은 결박을 풀고 다음 날 유대인 공회를 소집할 때까지 바울을 지키도록 했는데, 23장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을 다룬다.이 시점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재고찰해 보는 것이 좋겠다. 이 민족은 이미 세 번의 살인을 범했다(세례 요한, 그리스도, 스데반). 로마수비대의 개입을 통하여 바울을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네번째 살인을 범했을 것이다.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였으며(22:20), 어떤 의미에서 이 민족의 죄악에 대해 돌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제 제쳐졌고, 그들의 유예 기간이 끝났으므로 그리스도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것을 금하셨다(22:18).
사도행전의 남은 부분은 죄수로서의 바울, 유대인들 앞에서의 그의 시련, 그리고 그가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것을 설명한다.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 장들을 어떻게 읽을 수 있었겠는지 모를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의 실수를 그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로마에서 죄수로 있는 동안 바울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는데, 이들은 오늘날 없어서는 안될 교회의 진리들로 가득 찬 서신들이다.
▣ 실천적인 교훈들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 하나님의 뜻에서 우회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우리의 마음과 동기가 옳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잘못 딛은 발걸음은 또다른 잘못으로 인도해 간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왔으며 유대인들과 거래를 하게 되고, 체포되어 굴욕을 당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에게는 닫혀졌다. 이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며, “새 사람“(교회,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마음에 가득 찰 것이었다.
우리는 외부 사람들을 향하여 지혜롭게 행해야만 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할 때 은혜스럽게 하였다. 그의 마음은 그들을 향한 사랑과 동정심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걸림이 되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