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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10편)]
/ 옥토 밭과 같은 신앙 (1)
(막 4:10-20)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우리가 전도 시에 어떤 결과가 임하는가? 4가지의 밭은 전도할 때의 결과를 말씀한다. 4명을 전도했을 때에 길가 밭, 돌짝밭(자갈밭), 가시떨기 밭과 옥토 밭과 같은 자를 만나 3명으로부터는 열매가 없고 옥토 밭과 같은 자를 만나 열매를 거두는데 그의 신앙은,
1. 기도가 있는 신앙이다.
아무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옥토 밭을 만든다. 눈물로 기도할 때에 깨어지고 부서져서 씨를 잘 자라게 한다. 감옥에서 바울이 기도할 때에 착고가 풀어지고 감옥 문이 열리면서 간수의 마음을 옥토 밭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환란 가운데에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함으로 옥토 밭을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게 한다. 곧 기도가 옥토 밭을 만든다.
2. 희생이 있는 신앙이다.
기도의 희생, 순종의 희생, 봉사의 희생, 감사와 사랑과 믿음과 기쁨의 희생이 옥토 밭을 만든다. 농부의 수고로 굳어진 흙을 부수고 돌멩이를 골라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아름다운 마음으로 만든다.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온 인류를 구원했고 믿음의 조상들의 수고가 말씀받기에 좋은 밭을 만들었다.
3. 준비가 있는 신앙이다
길가의 밭은 단단해서 말씀을 받지 못한다. 돌짝밭은 말씀을 받으나 햇빛이 비칠 때에 타서 죽는다. 가시떨기 밭은 세상의 재리와 염려로 넘어진다. 그러나 옥토 밭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면서 아멘 하는 신앙으로 어떤 환경 시간 상황 고난에도 준비가 된 밭을 만들었다.
4. 열매가 있는 신앙이다.
수많은 나날을 이긴다. 고난을 이긴다. 비바람을 이긴다. 그 속에 눈물도 고통도 외로움도 유혹도 있었다. 그러나 신앙을 지켰다. 하나님의 돌보심도 받았다. 말씀만 의지했다. 풀무불속에서 사자굴속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리하여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 밭을 만들었다.
/ 1% 부족한 전심 (2)
(렘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백지연 MBC 전 앵커가 국내외의 많은 유명인을 인터뷰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 알마 2011)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책의 핵심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능력의 유무, 가능과 불가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크리티컬 매스’를 만들어내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였다.”
도대체 크리티컬 매스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만들어내느냐 못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는 것일까요? 크리티컬 매스란 물리학에서 나온 개념으로 ‘임계질량’이라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충분한 수나 양’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물을 끓이기 위해 필요한 100도의 온도가 크리티컬 매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티컬 매스는 단지 세상의 성공과 실패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도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기도 응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의 크리티컬 매스’를 만들지 못한 상태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기도의 크리티컬 매스를 만드는 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경우의 크리티컬 매스는 ‘전심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전심으로 구하지 않으면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말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병에 걸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 20:1)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통곡하며 전심으로 기도해 15년 수명을 연장받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1% 부족한 전심’으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두 사람 이상이 함께 기도하는 경우의 크리티컬 매스는 ‘한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한마음을 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심으로 신약교회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120명의 성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기도의 크리티컬 매스’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합심으로 기도하면 구하는 것마다 모두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크리티컬 매스를 만들어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가 구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안창천 목사 서울 우리가하나되는교회
/ 창조주의 큰 그림 (3)
(창 5:1-24)
저희 가정은 최근에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 계획한 날은 이사 업체에서 ‘손 없는 날’이라고 비용을 10% 더 요구하였습니다. 비용을 절감하려고 다른 날로 바꾸어 이사를 했는데 마침 그날만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좋았습니다. ‘손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믿음으로 내가 필요한 대로 정했는데 가장 좋은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과거 전통과 문화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사조차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지요. 믿음을 가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악한 영의 권세가 끊어지고,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새로운 가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새로운 믿음의 계보’를 있는 ‘영적 후손들’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은 서로 비교되는 두 개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장은 ‘가인의 계보’, 5장은 ‘셋의 계보’가 나옵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그들의 나이와 생존 연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셋의 계보는 나이와 연수가 제시되면서 그들이 매우 장수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4장에 드러나는 죄의 산사태에도 불구하고, 5장에서는 새로운 경건한 후손들이 제시됩니다. 창세기 5장은 재미없는 옛사람의 계보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열 명의 조상들이 제시되는데, 그들의 평균나이는 900세가 넘습니다. 그들이 살던 당시 지역과 환경은 지금의 우리와 달라서 장수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 믿고 연구와 묵상을 더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처럼 장수할 뿐 아니라 영생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만일 900년 이상 산 사람들의 일생을 자세히 묘사하면 성경의 분량이 얼마나 많아질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 계보가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될 것을 멀리서 증언할 뿐입니다.
우리의 생애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역사의 흐름과 방향을 정확히 살피면서 멀리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언제나 희망을 갖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방향이 과연 옳은가? 우리 역사는 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역사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증권시세에 목메고 불안해하는 모습,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남을 짓밟고, 경쟁에 뒤처질까 초조해하는 모습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을 보는 여유와 소망을 가집시다.
본문에 나오는 에녹같이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믿음의 후예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에 대하여도 긍정과 희망을 말합시다. 나를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생애와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하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보며, 오늘도 희망과 용기를 갖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read.asp?page=1&gCode=all&arcid=0005249397&code=23111212
김석진 목사 (파주 예수로교회)
/ 나를 누구라 하느냐? (4)
(막 7:27-29)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1. 미신이 홍수를 이루는 곳입니다.
인근 각 나라 상인들이 신변안전과 무역성과를 위하여 자신들이 미신을 끌고 와서 제사하는 곳인데 14개의 신전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2. 신화의 발생지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헐몬산의 산자락의 희고 큰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는데 큰 동굴과 작은 동굴이 있고 거기서 만년설(萬年雪)산인 헐몬산의 눈이 녹아서 동궁에서 솟아나와 샘물과 내를 이루는 요단강의 첫 물줄기입니다. 특별히 팬신(물신)_을 섬기고 신화를 탄생시키고 상시(常侍)사제들이 모인 곳입니다.
3. 가라사랴 빌립보는 그 어원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로마황제 ‘가이사’와 그 곳 분봉 왕 ‘빌립’의 이름을 따서 이름 한 곳이기도 합니다.
황제를 위해 충성을 맹세한 장교와 검투사들이 이곳에 와서 피를 흘려가며 의식을 행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미신과 우상이 판치는 곳입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미신과 우상과 영웅에게로 향하고 있고 맹신하고 있었습니다.그 때 주님이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누라 하느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하여 성자(聖子)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한 제자의 대답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나를 책임져 주시는 분, 나의 힘, 나의 길,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 나의 전부, 나의 영웅과 영광..의 뜻입니다. 이 시대에도는 점치고 부적을 사고 템플스테이 등 반 기독교적 영적흐름과 황금만능주의가 난무하고 팽배합니다. 인기연예인들이 청소년들의 영혼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이 것입니다. ‘너에게 나는 뭐냐?’
홍천온누리교회 이인용목사
/ 작은 사랑의 큰 열매 (5)
(마 25:31-46)
지난 16일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가수 인순이는 로널드 루이스라는 사람을 만나 뜨겁게 포옹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38년 전인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뮌헨 올림픽이 열린 해이고, 10월 유신이 선포된 해입니다.
그때 인순이는 경기도 동두천에 살고 있었습니다. 흑인 미군 병사였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 소녀였습니다. 단일 민족국가인 우리나라가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합니까? 특별히 흑인 혼혈인이었던 인순이는 많은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당시 인순이 나이는 15세였고, 그녀는 항상 혼자였고, 외톨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혼혈 소녀를 따뜻하게 위로해준 로널드 루이스라는 미군 병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 병사가 인순이에게 매우 큰일을 해준 게 아닙니다. 시간을 같이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격려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인순이의 인생에 가장 큰 힘과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러한 작은 관심, 작은 사랑만 있다면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도움이 아닙니다. 작은 관심, 작은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해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인자가 오른편에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구분된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요 나와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하시면서 엄청난 복을 선언하십니다. 반대로 왼편으로 구분된 자들에게는 저주를 선언합니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엄청난 저주를 선언합니다. 이러한 저주를 받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받은 자도, 저주를 받은 자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복을 받았는지 어리둥절하더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은 자도 내가 왜 저주를 선언 받았는지 의아해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내가 모르면서 하는 것’이 심판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행한 평상시의 일들이 심판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으로, 성품으로 드러나는 기억나지 않는 평상시의 작은 일들이 심판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큰일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일입니다.
그 작은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웃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는 것,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는 것,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심과 사랑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삶으로, 습관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입니다. 작은 자에게 대한 작은 사랑, 이것은 우리 모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에 그분의 우편에서 복의 선언을 받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김영걸 목사 (포항 동부교회)
/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 (6)
(빌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게 하려는 것뿐 아니라 현세의 삶을 천국같이 살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본받아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살기 위함이며,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본받을 것은 무엇보다 낮아지는 겸손한 모습입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사랑과 평화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그에 합당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으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춰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고, 또 나름대로 주를 위해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평소에 자기를 자랑하기 좋아하고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물론 교인들조차 존경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복음을 위해 많은 충성을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존경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자기 부인’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세상에서 사도 바울만큼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안 자가 몇이며, 복음증거로 여러 번 매 맞고 감옥에 갇혀 죽을 뻔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본문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면 자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행위로 완벽을 기하려는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열심은 결코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회심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천국과 부활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삶을 돌아볼 때, 그리스도 앞에서 자만할 수 없는 존재임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아니요’의 신앙고백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절) 여기서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이미 잡고 있음을, ‘부으신 부름의 상’이라는 말은 상급이 이미 예비 돼 있음을 뜻합니다.
‘아니요’의 신앙은 기존 사고방식과 달리 거꾸로 생각을 하고, 거꾸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자기를 부인하며 ‘아니요’라고 고백한 겸손한 믿음을 본받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규왕 목사(수원제일교회)
/ 믿음은 기다림이다 (7)
(창 15:12-21)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두 가지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일의 진전이 없어도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바보’이고 둘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참는 바보’입니다. 이는 무슨 일이든지 노력과 인내와 함께해야 빛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흔히 비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는 힘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비전을 이루기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사실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삽니다. 언제 이뤄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고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흔히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기다리고 인내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약속하시고 ‘자손들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이 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런 약속을 주셨지만 항상 우리는 의심하고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과 현실과의 간격을 보며 조급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인내로 극복해 왔고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기다림이며 결실은 인내로 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믿지 않으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비전을 갖고 있다고 만사가 다 형통한 게 아닙니다. 당장 비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전을 갖고 나아가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자에겐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응답하시고 약속을 이뤄주시며. 아브라함처럼 증거를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가 있을 때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인내하는 사람에게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 확실한 증거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너 가는 길을 누가 비웃거든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어라 성령이 친히 감화하여 주사 저들도 참 길을 얻으리.” 찬송가 401장 가사처럼 믿는 사람은 확실한 증거와 믿음의 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이 능력을 주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문도들이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면서 기다릴 때, 불같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임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약속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성교 목사 (수원 두란노교회)
/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 (8)
(요 1:14)
하나님께서는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명을 주시고 이를 지키라고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 경고하고 교육도 했지만 그들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를 보십시오. 많은 사사와 선지자가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이 달라졌습니까? 매로 아프게 다스릴 때 순종하기도 하지만 그때뿐입니다.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셨습니다. 기적으로 말씀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여러 증거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귀가 아프게 듣고, 수 없는 기적을 예수님 곁에서 직접 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제자는 배신했고,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그중에 의리 있다는 제자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며 부인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란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현실이 된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값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즉,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말이 영향력을 상실한 시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성경 말씀이 그렇습니다. 분명히 예전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내용이나 표현들이 세련돼졌고, 음향기기들도 나날이 발전되고 있지만 이를 듣는 사람들의 삶 속 변화는 요원해 보입니다.
주님께서 재판받으실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주님은 통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악한 세대에 말씀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택하신 것입니다. 대신 몸으로 말씀을 대신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백 마디의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내 죄 대신 맞는 채찍 한 대가 더 효과적이란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이 안 통하는 인간에게 말 대신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악한 세대에게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마 12:39)는 주님의 말씀 또한 몸으로 말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주님의 찢긴 몸이 바로 설교이시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친히 오셔서 그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말씀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썩지 않은 밀알처럼 말씀이 삶이 되지 않고 그저 말로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에 가치가 없어집니다. 또한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치지 못한 채, 남만 가르치려고 하니 말씀이 허무해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이 육이 되지 못하면 무지한 말이 되고 맙니다. 말로만 신앙을 이야기했던 욥의 친구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남만 가르치려고 한다면 믿음은 그저 ‘무지한 학문’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말씀은 가치가 없습니다. 말씀이 몸 되는 삶을 사십시오.
이동준 목사 (서울 은광교회)
/ 은혜 받은 자의 주의할 점 (9)
(막 5:19-20)
은혜 받은 성도 중에 물의를 일으키는 자가 종종 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 받은 자는 어떠한가? 그리고 교회나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은혜 받은 자로 합당한 자가 되는가? 은혜 받은 자의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
1. 은혜 속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은혜 속에 푹 빠져서 은혜만 받으려고 하거나 은혜만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 은혜는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또 자신 만을 위하여 주신 것도 아니다. 변화산상의 영광은 제자들만의 것이 아닌 산 밑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고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은 더 큰 일거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로 은혜 속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2. 은혜 받은 자를 좇지 말아야 한다.
은혜를 받은 자도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고로 그들도 우리와 심성이 같은 인간이다. 고로 은혜를 받았는가? 그 은혜를 주신 주님을 좇고 따르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왜냐 그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기 때문이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책망이 임하기 때문이다.
3. 은혜 받은 사실을 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것이 은혜이다. 생명 있는 믿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구속받은 성도의 최고의 임무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고로 은혜 받은 자의 할 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역사를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잠잠하지 말고 주의 역사를 전하는 자가 되자.
4. 은혜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받은 은혜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주의 일을 하면서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받은 은혜도 소멸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를 잘 간직하면서 계속 충전할 수 있도록 은혜생활을 계속 하기 위해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순종하고 봉사하는 성도의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소경이 눈을 뜨는 곳에 (10)
(요 9:1-12)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눈이 보이게 되었다.
1. 제자들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 이오니까 라고 죄의 출처를 묻고 있다. 즉 그에 대한 뜨거운 동정심이나 불타는 열애가 없이 소경이란 현실 앞에 사색적인 눈초리로 배타적인 눈초리로 냉담만 하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통해 더 큰 진리를 말씀한다.
2. 이웃이 있다
이들은 저가 소경이었다가 눈이 떠진 사실을 안다. 그리고 흥 분된 호기심으로 눈을 뜨게 한 예수님에 대해서 묻고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고 책잡으려고만 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예수님을 시인하면 출교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자들이다.
3. 부모가 있다
소경된 자의 부모이다. 자녀가 눈이 뜬 사건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에게 소환을 당했다. 그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은폐한다. 자식의 눈을 뜨게 해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출교가 두려워서 예수님께 받은 생명의 빛에 대해서 증거를 거부한다.
4. 소경 자신이 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기에 너무나 처량했던 과거를 가진 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어두움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는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증거 했다(11). 예수님을 그 사람이 라고 했다(15). 선지자라고도 했다(17).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도 했다(33). 이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다(38). 여기에서 그의 신앙의 성장함,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