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걸리 삼층탑을 보고 나와서 이제는 곧장 횡성쪽으로 내달렸다.
오는 길, 408번 도로를 타고 내촌천을 거슬 가는 길이지만 길은 좋았다.
내촌천은 봉복산과 태기산에서 발원해서 홍천의 화양강으로 들어가는 강이다.
강을 따라서 도로가 나 있고 그 도로 옆에는 마을에서 공원으로 꾸미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벼락바위를 비롯해서 군데 군데 경치가 좋은 곳에 안내판을 세우고
그냥 지나가기가 서운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한가하게 머물 수는 없었다.
언제 시간이 되면 다시 찾을 날이 있으리라...
거기서 서석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서석만 하더라도 많이 들었던 이름이고 몇 번은 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석만 와도 마음이 좀 푸근해 졌다.
위도상으로 보면 홍천과 수타사, 서석이 비슷한 곳인데도...
서석에서 청일을 거쳐 횡성댐까지는 30-40분이면 될 것이었다.
그 길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강원도에서는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 산다.
그런데 횡성에 중금리가 있었던가...
횡성은 문막과 더불어 원주의 위성도시 정도이고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며
횡성댐까지는 바람결 삼아 자주 들러는 곳인데도 중금리도, 탑이 있다는 소리도 듣지 못 했다.
그건 곧 내가 무관심했다는 것이고 무식의 소치에 다름 아니다.
횡성댐은 원주에 수도물을 공급하는 청정지역인데
댐이 건설되고 나서 상류지역에 이쁜 마을들이 생겨났다.
지금은 금지되어 있지만 초기에는 마을이 들어설 여유가 있었나 보다.
외지에서 늦으막에 살러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아는 교수들도 몇 분 들어와서 살고 있는,
별로 낯설지 않은 곳이다.
해는 서녘으로 자꾸 밀려 내려가고 있었고 빨리 탑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앞섰지만
그렇다고 초조하지는 않았다.
이제 집 가까이 왔으니 뭐, 어두워서라도 거기는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이다.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횡성까지 온 일도 많지 않은가...
점심으로는 횡성공항 앞에 있는 장수촌 보신탕이 제 격이거늘...
누구한테 전화라도 해서 금세 탑의 위치를 알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도로 표지판을 살펴보아도 중금리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노인 한 분이 길 옆에 계시기에 혹시 이 근방에 탑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저 고개 너머에 있어요. 저 밑에걸 옮겨 놨지요. 바로 가까워요.
그게 끝~~
내가 작은 고개를 넘어 왔는데 거기라는 것이었다.
다시 차를 돌려 조금 더 올라가서 목을 빼고 두리번거려도 탑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할머니 두 분이 길을 가길래 다시 물었다.
바로 그 앞 망향의 동산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댐 상류를 따라 그 길을 수도 없이 다녔지만 망향의 동산이 있는지도 몰랐고
거기에 탑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수몰민을 위로하는 마음에서 호수 옆에 작은 공원을 꾸미고 기념관을 하나 지었으며
그 앞에는 세상에~~ 잘 생긴 탑이 두 기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조금씨 어두워 오는 시각, 나는 잘 생긴 두 기의 탑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사는 원주 옆에 이런 탑이 있었다니...
하루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사진을 찍기 바빴다.
정말이지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이 정도의 탑이라면 경주, 아무리 넓게 잡아도 경상도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하물며 경상도 북부만 하더라도 이미 경주의 양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변형을 가하여 지방색을 첨가하거늘...
준수한 모습에 나는 마치 경주의 탑을 이리로 옮겨 놓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것도 쌍둥이 같은 두 기를...
원래 이 탑이 있던 곳은 여기서 2.2km 떨어진 중금리 절터였는데
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자 이리로 옮겼다고 한다.
강원도에 쌍탑양식이라...
강원도에 쌍탑이 있는 곳은 치악산 상원사에 있고 이 곳 뿐이던가?
그렇다면 이 탑이 있던 중금리 절은 철저하게 통일신라의 양식에 충실하였다는 뜻이 될 것이다.
탑의 높이가 5미터라고 하니 규모도 상당한 편이고 무엇보다도 준수한 그 모습이 처녀들을 많이 울렸을 법하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을 올린 일반형을 따르고 있고 1,2층 기단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하나씩 새겼다.
기단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고 특히 상층기단 면석에는 각 면당 불법을 지킨다는 2구씩의 팔부중상을 새겼다.
조각은 양각이 뚜렷하여 생동감이 넘치는 것으로 보아 매우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연은 따로 두지 않고 상대갑석에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는데
하대갑석은 경사가 조금 있는 반면 상대갑석은 편평하게 처리하였고 지붕이 많이 나오지도 않았다.
각 층의 몸돌 받침은 2단으로 하였고 몸돌에는 우주만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다른 통돌로 구성하였으며 지붕돌받침은 1~3층 일정하게 5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고 추녀선은 수평이며 끝에서 반전을 주었는데
1층 몸돌과 2,3층 몸돌의 비율은 3;1 정도로서 안정감 있는 잘 짜여진 구조이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등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는데 특히 복발부분에 불상이 새겨져 있어서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탑재도 질이 좋고 조각기법도 치밀하며 신라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은,
균형잡힌 우수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아쉬운 점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서 손상을 입은 곳이 있고
또 부분 부분 다른 석재로 보강한 것이 눈에 거슬린다면 거슬릴 뿐
그 준수함은 어디에 내어 놓아도 밀리지 않을 품세다.
이 탑들이 경주에 있었다면 성골 반열에 올라서 일가를 이루었겠지만
신라의 변방, 이 강원도 산골에 살게 된고로 진골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신라계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팔부중상이나 지붕돌의 형태 들로 보았을 때
건립시기는 통일신라 후기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나는 항상 탑을 보면 주지와 석공이 주고 받았을 대화를 떠올리곤 한다.
예산은 얼마인지, 어느 정도의 탑인지, 어떤 양식을 택할 것인지, 건립기간은 얼마인지...
사세가 약한 절에서는 주변의 돌로 거칠게, 빨리, 대충 만들 것이고
좀 부유한 곳에서는 석재의 선택과 운반, 탑의 규모, 석공의 예술혼, 새로운 양식의 시도...등등이 부가될 것이다.
이 탑은 석재도 석재려니와 이 정도의 탑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경주에서 일류석공을 초빙하여 왔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싼 돈을 들여서, 기간도 오래, 옥개석받침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 세우고, 조각에는 더 엄청난 공을 들이고...
그래야 저 강한 화강암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세밀하게 조각이 될 것이 아니던가...
이 탑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19호라고 하니 나는 화가 나는 것이다.
이 탑이 경주에 있어도 경북유형문화재에 그칠 것인가?
홍천 군청 앞에 있는 희망리삼층석탑이 보물 79호인데 그 탑과 이 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가 곧 보물과 지방문화재의 차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비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탑이 품위면에서 진골 정도의 귀족이라면 희망리삼층석탑은 (대단히 미안하지만)
마당쇠에 견주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
하루의 일정을 다 소화하지는 못 했다.
어찌 보면 일정을 너무 힘들게 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냥 아는 길이려니, 근방에 가면 바로 찾을 수 있으려니 하고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내가 필요할 때 주민들을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탑이 길 옆에 간판을 크게 달고 있는 것도 아니며
때로는 가지도 못 할 깊은 산중에 있을 수도 있으며
혼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도, 뱀에게 물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내가 다니면서 기대했던, 무슨 무슨 탑 방향이라는 안내판을 도대체 나는 몇 개나 보았단 말인가?
적어도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하고
위성지도나 평면지도에서 그 위치를 확대해서 점찍고 찾아가야 하며
모를 때는 아무에게라도 한 번 더 물어보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횡성 읍내의 석탑은 아침에 처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서 바로 상동리로 향했으며
홍천에서 비발디 골프장으로 나가는 양서원탑은 방향이 틀려 아예 다음으로 미뤘다.
(며칠 전에 알기로 5년 전에 도둑을 맞아 지금 거기는 빈 터라고 함)
횡성 위 갑천면에 있는 봉복사지 절터 탑은 이미 시간이 늦은 관계로 또 다음으로 미뤘다.
여태 길게 이야기한 괘석리 삼층탑은 또 어땠던가???
생각없이 대충 잡고 가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처음 계획한 횡성 홍천 전 지역의 탑 11기를 보려고 하던 계획은 6군데 8기를 친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양서원의 한 기는 도둑을 맞았으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고
봉복사지탑과 횡성읍내 탑은 마음만 먹으면 금세 갈 수 있는 곳이니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괘석리 삼층탑은 언제 홍천을 지나고 인제로 갈 때에 작정하고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피날레를 저렇게 준수한 두 기의 탑으로 마무리 했으니 정말이지 하나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나는 호숫가에 떨어지는 저녁의 빛깔과 건너편 마을에서 비취이는 불빛을 물위에서 흐려보며
한 동안을 그렇게 서 있었다.
천 년...
탑들은 평균 천 년을 기다려 오늘 나를 맞는다.
나는 겨우 50년이 넘는 동안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기다려 주었던가...
갑자기 설움이 왈칵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서 눈시울을 적신다.
세월...
그렇게 우리는 살다 가지만 다시 천 년 뒤에는
나를 닮은 누군가가 이 탑 앞에서 다시 눈물을 뿌리리라...
2010. 9. 29.
첫댓글 와~~!!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대번에 경주 남산리 쌍탑인줄 착각할 정도였으니까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서탑과 흡사해요..
경주박물관에는 경주남산에서 가져온 앙화에 가릉빈가상이 새겨진게 있는데 앙화에 불상이라...대박입니다.
너무 기뻐 눈물이 날 정돕니다.....머루눈님의 오늘 하루 흘린 땀과 찾아헤맨 가슴조림이 크나큰 보상으로 되돌아오네요....
앙화는 아니고 확대해 보니 복발에 새긴 것 같습니다. 확대해서 다시 사진 첨부하였습니다. 본문 확인 요망.
확대 사진 확실히 보았어요...어쩜 이런 높은 곳의 작은 부분까지...대단한 사진술이에요...본문도 확인했어욤!
인간의 세파에 시달림에도 저리 아름다울수 있다는것이
아직또한 누구에겐가 희망을 주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페사지 위에서 굿건히 서 있는 한쌍의 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와서 소망을 빌었고 상처를 달랬을까..??
아들과 함께 꼭 한번 가고프네요.....즐감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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