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 善山, 오늘날의 경북 구미시 일대)에 있다”는 조선시대의 옛말은 우리 역사에서 활약한 인물을 상기한다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져 일선은 안동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그만큼 안동에서 인물이 많이 났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안동을 대표하는 씨족이 어디인가? 하고 묻게 된다. 이 때 그 기준을 설정하기에 따라 해답이 달라진다.
그래서 그 기준이 중요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문과와 생원 진사, 그리고 벼슬, 도학 계통, 문집 간행 여부, 혼맥 등이 일차적인 고려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것을 따질 때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안동 지방에서 야화로 전해오는 말 가운데, ‘천금(川金)이 쟁쟁(錚錚)이요 하류(河柳)가 청청(靑靑)이라’ ‘천전에 사는 의성 김씨들이 크게 울리고, 하회에 사는 풍산 류씨들이 잘 되었다’는 것을 예로 들어 내앞(川前)에 터전을 둔 의성 김씨와 하회에 기반을 가진 풍산 류씨가 집중적으로 인물이 배출된 씨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퇴계 선생으로 상징되는 진성 이씨가 이들보다 아래에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는 대부분의 이 지역 씨족들의 현조가 퇴계 선생의 문하인이며 학맥과 혼맥으로 잘 엮여져 있기 때문이다.
김승태(金昇泰, 1954l년생) 씨는 본래 운천 김용의 부친인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의 주손이다.
그런데, 예법에 엄격한 안동인들은 불천위인 경우만 ‘종손’의 호칭을 부여했기 때문에 김승태 씨를 종손이라고 부를 때는 ‘운천 종손’이라고 하는 것이 관례다. 그리고 달리 이 집을 ‘내앞 작은 종가’라고 부른다. 이는 큰종가가 귀봉의 부친인 청계 김진으로부터 내려오는 큰집이기 때문이다.
종택전경
운천 선생 종가는 큰종가와 이웃하고 있다. 건물 규모를 보면 큰종가에 못지않은 웅장한 모습이어서 양 종가가 중심이 된 내앞 마을은 고색창연(古色蒼然) 그 자체다.
내앞 의성 김씨들은 인물이 많이 난 것으로 유명하다. 우선 청계 김진 선생의 다섯 아들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이가 3인, 초시에 합격한 이가 2인으로 지역에서는 이들을 함께 ‘오현자(五賢子)’로 기렸다. 운천의 부친은 둘째 아들로 생원이며 내앞 의성 김씨들 특히 귀봉파의 학문연구의 중심 공간이었던 백운정(白雲亭)을 조성하신 장본인이다.
내앞 의성 김씨의 문한(文翰)은 운천을 거쳐 경와 김휴, 금옹 김학배, 적암 김태중, 제산 김성탁, 구사당 김낙행으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리고 운천의 현손(玄孫)인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 귀주(龜洲) 김세호(金世鎬)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이들은 세상에서는 ‘천전삼문관(川前三文官)’이라 기렸다.
필자는 내앞이 배출한 그 많은 인물 가운데 특히 일송 김동삼(1878-1937)을 소개하려 한다.
일송은 운천의 후손으로 1907년 고향에다 동산 류인식 등과 함께 안동지역 최초의 중등 근대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해 운영했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들어가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의 별명이 ‘만주벌의 맹호’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운동 지도자로 일제에 당당히 맞섰다. 불행하게도 1931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에 옥사한다.
지난 1999년에 안동댐 공원에 건립한 어록비(語錄碑)에는,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은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필자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운천이 36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아우와 함께 사람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던 역사를 떠올려 보았다. 안동부의 수성장(守城將)에 추대되었고 격문을 작성해 떨쳐 일어나라고 외쳤다.
문집에 올라 있는 이 격문은 당시 74세의 고령으로 격문을 지었을 뿐 아니라 의병을 이끌고 경주까지 달려갔던 매암 이숙량(농암 이현보의 아들, 퇴계 제자)과 숙부인 학봉 김성일의 초유문(招諭文, 조정의 관리로서 선비와 백성들에게 유시하는 글)과 함께, 분기를 내어 일어나 적과 맞설 수 있게 한 대표적인 글로 인정된다.
종손 김승태 씨
“지금부터 죽고 사는 것은 적을 토벌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니, 국가를 위한 충성이 어찌 벼슬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겠는가? 일에 성공하면 신령과 사람에게 원통함을 씻을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헛된 죽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장한 격문이다.
퇴계의 적전(嫡傳)을 이은 학봉 김성일과 조정에서 벼슬하며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염두에 두고 운천 김용을 ‘학봉에게 훌륭한 조카였고(鶴爺有姪) 국왕에게는 충성스러운 신하였네(穆陵有臣)’라는 평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고사를 생각해보면 운천의 후손에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비서(賁西) 김대락(金大洛)과 같은 탁월한 독립지사가 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난 8월 10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초대 관장, 김희곤 안동대 교수)이 운천 종가가 있는 내앞 마을 협동학교 옛터에 건립ㆍ개관되었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린 이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도 있었다.
이날 학봉 김성일 선생의 차종손인 김종길 박약회 부회장으로부터 운천 종손 김승태 씨를 소개받았다. 필자는 우연이었으나 아주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학봉은 운천의 숙부였을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은 선생님이기도 했다.
학봉은 임진왜란이 나던 이듬해에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뒤 그곳에서 순절했다. 학봉 사후 20년간 운천은 학봉의 언행록을 다듬었다. 언행록을 읽어보면 운천이 얼마나 철저하게 학봉을 모시고 배웠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운천은 어린 시절 학봉으로부터 ‘문호(門戶)의 장래(將來)’를 책임 지우려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조부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으로부터 세전(世傳) 보물인 문장검과 함께 장학기금 격인 문장답을 받은 사실도 이러한 평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양 종가 주손들이 좌석을 ‘손님’들에게 양보한 채 나란히 행사장 뒤편에 서서 감개무량하게 식에 참여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행사를 마친 뒤 종손을 따라 종가로 들어서니 노종부인 안동 부포 출신의 봉화 금씨가 안마루에 계셨다. 노종부는 몇 해 전 궁중음식 연구가 일행과 함께 답사했을 때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 노종부는 너무나 겸손하게 집안과 유가의 음식문화에 대해 말씀을 주셨고, 일행 모두는 인상 깊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종손은 현재 인천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 종택을 잠시 떠나 있다.
그날 종가에서 종손의 동생인 김건태 성균관대 교수도 함께 만났다. 김 교수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신예 학자다. 김 교수는 조선시대의 호적을 통해 당시의 사회 경제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해 학계에 기여한 한 바 있다.
또한 지난 2004년에 발간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역사비평사)이라는 저술은 학술원으로부터 올해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바도 있다.
이 집에는 명실상부한 ‘가보(家寶)’가 전하고 있다. ‘의성 김씨 사보(四寶)’라고 이름 지어진 이 물건은, 신라 경순왕의 옥적(玉笛, 옥피리)과 문장검(文章劒), 그리고 연하침(煙霞枕, 나무 베개), 매죽연(梅竹硯, 매죽 문양 벼루) 등 네 점이다. 그 유래를 보면, 옥적은 신라시대에 경순왕 때의 것이라 하고, 문장검도 유래가 오래다.
그리고, 연하침은 운천의 손자인 경와 김휴가 금강산에 유람 갔다가 만폭동 청룡담에서 건져온 것이며, 매죽연은 경와의 외조부인 백암 김륵(퇴계 제자, 임란 당시 안동부사)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종 황제로부터 하사받았고, 이를 외손자인 경와가 선물로 받아 세전한 것이라 한다.
아쉽게도 문장검은 6ㆍ25한국전쟁 중 후손이 보관했다 행방이 묘연해 지금은 세 점만 남았다.
사진 상으로만 보아도 경이로운 이들 가보는 그럼에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한편 이 집에는 지정된 문화재가 있다. 운천이 쓴 운천호종일기가 보물, 종택과 운천재사(지동재사), 백운정이 지방문화재로 각각 지정되었다. 호종일기는 운천이 37세 때 왜란을 만나 의주로 피난 간 선조를 호종하며 쓴 일기다.
평상시의 정원일기(政院日記)와 유사한 이 책은 당시 국가 최고의 기밀문서로, 후일 정사와 왕조실록 편찬 때 매우 중요한 고증사료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귀중한 사료였지만 그 존재조차 모른 채 1925년 9월에 이르러서야 종가의 비장된 상자 속에서 발견되었다. 실로 작성된 지 332년만의 일이었다.
필자는 십여 년 전 종가 안채에서 김 교수의 안내를 받아 백운정 현판을 구경한 적이 있다. 당대의 명필이며 남인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미수 허목의 멋진 현판글씨와, 청계 선생의 원운,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학봉 김성일, 운천 김용, 동악 이안눌, 표은 김시온, 죽서 심종직 등의 시판이 남아 있었다.
본래 그 현판들은 백운정 정자에 걸려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떼서 종가에 보관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이제 그 현판들은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되고 있다. 그렇지만 본래의 정자에는 현판이 떨어진 채 말끔하게 수리만 된 상태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번호판이 떨어진 모습은 어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경우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문화재 절도 사건 앞에 그 보존에만 신경 쓴 소극적 대응이 아닌가 싶다. 이 현판들이 보관되어 있을 한국국학진흥원 수장고에 들어가 작품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보물에 대한 단상도 해본다. 보물로 지정된 운천호종일기(제484호)는 3책 80장 160면 분량의 운천 친필(草書)로 되어 있다.
이 일기는 최고급 일차 사료다. 그래서 필사본이 보물로까지 지정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임진왜란 회고록 중에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이 있다.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 그 대표다.
징비록의 경우 역시 이면지에다 난해한 초서로 쓴 기록물이다. 그럼에도 진작 탈초(脫草)와 번역이 이루어졌고 근자에는 영역(英譯)까지 되어 읽히고 있다. 그에 비해 운천호종일기는 아무런 작업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그저 보물로 지정만 해두고 방치한 느낌이 든다.
번역 우선순위가 있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관심권 밖에 있어야 했을까 싶다. 1977년에 14대손 종해(鍾海) 씨 명의로 간행한 운천전집(雲川全集, 영인본)에 처음으로 실린 호종일기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다.
● 김용 1557년(명종12)-1620년(광해군12) 본관은 의성.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숙부 김성일의 도학 계승… 청렴·지조를 겸비한 조선의 선비
운천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자리 잡고 있는 귀봉 종가의 주인인 귀봉 김수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에 퇴계의 손녀 진성 이씨와 혼인했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운천은 퇴계 사후 3년 뒤에 도산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직접 퇴계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평생의 아쉬움으로 여겼다 한다.
운천이 급제한 선조23년(1590) 증광시의 합격자의 면면을 보면 역사적으로 알려진 여러 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운정 현판
이 방에서 의령 남씨의 남이공이 갑과 1등으로 급제했고, 후일 학봉 김성일의 종사관으로 의병활동을 했던 송암 이로가 갑과 3등에 올라 있다.
그리고 운천이 병과 1등인데, 조선 중기 4대문장가 중의 한분인 월사 이정구가 병과 20등,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서에 이른 연안 이씨 해고 이광정이 병과 2등, 안동 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선원 김상용(청음 김상헌의 형님)이 병과 8등, 선조의 장인이며 형조판서에 오른 봉주 박동량이 병과 13등, 판서를 지낸 한산 이씨의 석루 이경전이 병과 5등이다.
이들은 관직이나 정치적인 위상 면에 있어서 운천보다 혁혁함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우선은 당파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노론과 북인 세력 하에서 남인의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개인의 신념이다. 운천은 맹자의 말씀인 ‘궁불실의(窮不失義) 달불리도(達不離道)’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아무리 궁하더라도 의롭게 살고자 했고, 세상에 현달하더라도 도라는 것을 떠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있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보니 조정의 벼슬이 마음에 맞을 리 없었다. 또한 난이 끝난 뒤 맞은 만년에는 광해군의 폭정이 이어졌다.
그는 삼강(三綱)이 끊기고 하늘의 이치가 무너졌다고 여겨 벼슬을 버린 채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운천의 거주지를 보면, 오늘의 종가 터에서 줄곧 산 것이 아니라, 일직면 망호동에서 태어난 뒤 만년까지 한 칸 초가조차 온전히 마련하지 못한 채 산수 간에 의탁하여 안동의 일직 구미 인덕리, 임하 현리, 임하 고산 아래 사외촌, 내앞 초당, 백운정 등지로 전전 이거했다.
이것이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여러 내직과 선산부사, 상주목사, 예천군수, 홍주목사, 여주부사 등 다섯 고을 수령을 지낸 관료요 학자의 살림이었다. 한 고을 수령만 지내고도 살림이 달라진 예와 비교한다면 공직자로서의 귀감이라고 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운천이 퇴계 선생의 손서라는 사실과 조선 시대의 남녀간 차별 없는 분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운천 종가에서 한국국학진흥원 측에 위탁한 고문서 가운데 1586년에 작성되어 1611년에 완성된 재산 분배기록 문건에 의하면 퇴계 선생의 노비 160면 가운데 손서인 운천에게 63명의 노비를 내려준 기록이 있다.
이를 이 기관의 수석연구원은, 퇴계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이 있었으며, 이를 조선시대 사림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당시의 농업 생산성에 근거해 문헌을 해석해야 할 소이가 여기에 있다. 이 분야에 전공자가 종가의 김 교수다.
운천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문과에 급제한 2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 때 운천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 몸이 좋지 않아 사직한 뒤 고향에서 조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위급한 상황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일어나 의병활동을 전개했고, 또 직접 의주로 가 국왕을 호종하기도 했다.
운천은 임란 발발 이후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8년간을 동분서주했다. 그 기간 중에 태산 같이 의지했던 숙부인 학봉 김성일의 죽음을 맞았고, 6째 아들을 난리 중에 잃기도 했다.
운천은 가정적으로도 26세에 부친상을, 54세에 모친상을 당했고, 슬하의 6남매 중에 4남을 제외하고 모두 자신에 앞서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아우이면서 큰집으로 입후해 내앞 큰종가의 종통을 계승한 대박(大朴) 김철(金澈) 역시 자신보다 4년 먼저 보냈다.
운천은 ‘살아서는 열사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되어야 하니 헛되게 목숨을 버리지 말아라(生當爲烈士 死當爲忠魂 而無爲徒死)’라는 학봉 선생의 말씀대로 헌신한 거룩한 삶이었다.
운천은 강한 선비의 지조를 지녔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는 난세의 썩은 선비들을 거리낌 없이 지적해 글을 올렸다. 무옥(誣獄)으로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수우당 최영경의 신원(伸寃) 문제를 제기해 윤허를 받기도 했다.
수우당이 송강정철의 무고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합계(合啓)를 운천이 주도한 것이다.
학봉 김성일이 조정에서 비록 상급자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사실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정론 직필로 일관해 당시 궁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호를 얻었다는 고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불의를 눈감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먼저 걱정하는 것은 이 가문의 오랜 전통이라 할만하다. 일제 때 온 문중이 독립운동에 투신해 정작 집안의 문화적 전통마저 흔들렸고 또 관계로도 진출하지 못해 타 문중에 다소간 뒤지기도 했던 근현대사가 일정부분은 이로서 설명될 것이다.
운천은 사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유덕을 기려 유림에서 노림서원, 덕봉서원, 묵계서원, 임호서원 등에 모셔 향사했다. 문집 6권 4책과 속집 3권 외에 호종일기 등을 남겼다.
행장은 옥천 조덕린이 모지명은 조카인 표은 김시온이 각각 지었고, 신도비명은 이재권연하가 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