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19~29)
율법. 우리가 온전하다면
하나도 어겨서는 안 되는 것.
어기지 않는 것.
율법이 기술하는 것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는 것.
그러니까 율법은 어떤 부정적 이미지에 의해서
폄훼될 수 없는 정당성이 있는 것.
문제는
우리가 죄로 인해
그 율법을 도저히 지키고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
죄, 그리고 죄로 인해
삶의 법도들을 지키지 못하는 어그러짐 속에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죄의 대가를 받아야 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잃는, 죽임임.
그때 율법을 포함한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위대한 사랑,
하나님 그 자체이신 사랑으로,
하나님은
아들을 극한의 고통과 죽음으로 희생시키는 것을
감당하면서까지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어그러지고 죄성 가득한
극복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를 건지셨다!
그것을 순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그 사랑에 의해 감동과 설득이 내재되고
입으로 당당히 고백한 사람이라면,
이제 율법은 어떻게 다루어지는 것이 된 걸까?
율법은 우리에게 지금 무엇인가?
그것은 자발적으로 하나씩 준수해 가는
부수적 행위가 된다.
즉, 사랑이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붙들림된 이들에게 따라 오는 당연한 실천이다.
율법 준수가 하나도 힘들거나 피곤하지 않은,
즉 사랑이 기관차가 되고
율법이 객차가 되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 복음, 기쁜 소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으로 시인한 이들이
타자에게 율법으로 제단하고
강조하고, 심지어 강요한다.
조언, 도움, 교육 수준이 아니라 강제하고 통제한다.
일체의 강요와 강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으로 재정립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 복음이 있기 전의 상황으로
다시 회귀하려 한다.
사람의 실존에서 다소 삶의 법도 실천에
의지와 노력, 진통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때
그 의지와 노력, 진통은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
자신에게 투영되는 것들이어야 한다.
자신에게는 그런 노력을 하되
타자에게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실천해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가난한 마음이 존재한다면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자의 털끝만큼의 가난한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 때문에
큰 이익이나 부분을 손해 볼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셈법, 또는 방법, 문화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율법의 완성은
바로 그런 점에서 차별이 된다.
사랑에 의해 감동과 설득되어 율법을 자발적으로
하나, 둘씩 지켜나가는 것. 그렇게 율법이 완성되어진다.
실존에서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기 위해 쏟아붓는
사랑의 투자금이 엄청나게 큰 액수라는 것.
인내, 봉사, 설득, 기다림, 변호, 옹호, 대화, 베풂 등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큰 타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 수용의
투자금을 쏟아부을 때
하나님의 결정적 힘으로 비로소 열매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
그런 투자금 하나도 없이
그저 예수님 이전의 시대의
율법 준수를 위한 건조하고 잔인한 통제가
믿는다고 하는 우리 사이에 너무 만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오늘 아침이다.
<오늘의 명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십자가 보혈로 회복되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다. -팀 켈러-
여기서도 ’십자가의 보혈로 회복‘이라는 표현.
십자가의 보혈은 결국 도저히 형언할 수 없이 크고도 넓은 사랑,
위대한 사랑으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그 아픔이 정말 하나님의 복음의 사랑에 비추인 것입니까?
아니면 제 논리에 대한 주장, 그 예민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많은 부족함 속에 있습니다.
죄악도 많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항상 제 마음의 귀와 눈, 문을 두드리실 때
제가 반응하게 해 주십시오.
깊은 사귐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그것만이 저의 생명을 움트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일체의 순간이 제게는 죽음과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3차 항암을 마친 정환이에게 회복의 힘을 주시옵소서.
이제 한 번 남은 항암이 그에게 완치를 위한
마지막 항암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족 지켜주시고
내일 지현이가 놀러 오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고 행복한 시간 누리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