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리>
김은주
바람이 고개를 넘는다.
곳곳에 바람이 쓸어 놓은 흔적이 풀잎을 뉘이고 있다. 쓰러진 풀잎 사이에 간간히 매실이 박혀있다. 몇 걸음 떼 놓기가 무섭게 떨어진 매실의 수는 더 많아 진다. 많이 익은 것은 제 스스로 물러 속살까지 다 보이고 있다. 일부러 청 매실 일 때를 한참 지나 이제야 매실 수확을 하러 온 것은 익은 매실의 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익은 매실 향을 한 번쯤 맡아 본 사람이라면 청 매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오월부터 시장에 매실이 판을 쳐도 나는 짐짓 모른 척 유월까지 기다린다. 매실이 스스로 농익어 제 안으로 맛을 들일 때 쯤 과수원을 찾는 것이다. 매실나무 뒤로 탱자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흰 탱자 꽃이 흐드러졌다. 탱자 꽃 사이로 한 줄금 바람이 인다. 나무들이 제 몸을 흔들 때 마다 어린 열매들은 속절없이 땅으로 제 몸을 던진다. 열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무의 자정현상인지 아니면 열매 스스로 나무에게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과수원 바닥은 도사리 천지다.
떨어진 도사리 같은 모습으로 아들 녀석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밤송이 같은 머리를 긁적이며 까칠한 것이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본데 선뜻 물을 수가 없었다. 평소 성격이 얼마나 좋고 붙임성이 많은지 소풍이고 운동회 때도 늘 내가 사다준 도시락을 먹으며 자랐다. 녀석에게 엄마가 없는 걸 미리 알은 터라 나는 우리아이 도시락을 늘 이 인분으로 준비 했고 녀석은 보이지 않는 그런 관심이 좋았던지 내게는 이물 없이 대했다. 형과 아빠 이렇게 셋이서 생활하기는 했지만 지켜주는 이가 없다보니 집안은 녀석에게 늘 쓸쓸한 공간이었다. 아침이면 깨워주는 이가 없어 지각을 일삼았고 오후에도 가끔씩 수업을 빼 먹고는 했다. 울타리가 없다보니 스스로 통제 할 수 있는 능력을 참 많이도 상실한 채 중학시절을 보내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석의 밝은 성격을 믿었다. 그랬기에 좀 더 자라면 스스로 여물어 질것이라는 기대감에 어떠한 일탈의 모습도 다 수용했던 터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우리아이랑 떨어지면서 점점 내 집에 걸음도 줄어드는가 싶더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 막막한 표정으로 날 찾아 온 것이다. 인문계를 선택하지 못하고 공고로 가면서 몸이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는지 나 또한 녀석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어깨 죽지를 접고 앉은 녀석의 모습에 불쑥 그간 소원했던 나 자신이 미안해 졌다. “어머니 저 학교에서 사고 쳐서 잘렸어요.” 하며 제 목을 제 손으로 치는 시늉을 한다. 놀라 되 묻는 내게 걱정 말라며 대안학교로 갈 것이고 그곳에서는 열심히 할 거라며 내게 다짐을 한다. 순간 녀석의 얼굴이 과수원 바닥에 처연하게 널린 도사리 모습 같다. 늘 몸 담아온 환경에서 제 뜻이 아닌 어른들의 잣대에 밀려 인위적으로 솎아진 도사리. 과수원에서는 열매의 개체수가 많다보면 개중 실한 놈만 남겨두고 부실한 놈은 접과를 한다. 어쩌다 녀석이 그 접과의 대상이 된 모양이다. 이렇게 무리로부터 솎아져 나온 도사리나 병이나 바람에 떨어지는 도사리나 하나같이 나무가 그리운 것은 정한 이치일 것이다.
유배 떠나듯 대안학교로 향하는 녀석을 나는 지금 당장의 모습으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청춘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속으로 아프게 농익다 보면 제 맛이 나는 것이 열매이거늘 어찌 잠시 가지를 버리고 땅으로 추락하였다 하여 못쓸 열매로 치부 할 것인가. 내가 가지에 달린 매실보다 땅에 떨어진 매실을 먼저 줍는 것처럼 녀석 역시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다면 더 나은 열매의 구실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 불운하여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땅에 제 스스로 떨어진 도사리는 흙속에 육신을 묻고 새로운 움을 틔우거나 거름이라도 될 것이다. 녀석에게 가까이 가 손을 잡았다. 아직 뜨겁고 손등에 정맥은 푸르다. 그 어릴 때도 녀석은 엄마 없이 잘 견뎠다. “야! 심심하고 친구들보고 싶어 어쩌누.” 하는 나의 염려를 거뜬히 물리치며 녀석은 자주 올 거라고 한다. 혼자 시간을 견디는 법 따위는 엄마 없이 산 녀석에게는 이력이 난 일중에 하나일 터이다.
제일 반듯한 항아리에 많이 익어 땅에 떨어진 매실부터 효소를 담는다. 켜켜이 단것을 방석 삼아 한철을 지나다보면 많이 익은 매실이 가장 먼저 발효 할 것이다. 푸르고 단단한 것은 훨씬 더 긴 시간이 지나야 제 맛을 낸다. 녀석 또한 겪을 만큼 겪었으니 제 길을 찾아가는데 한결 수월할 것이다. 먼 길 떠난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제일보고 싶더라는 녀석 말에 내 가슴이 매운 고추 맛이다. 홧홧한 내 마음을 녀석이 읽었는지 어깨를 감싸 안고는 “어머니 밥 좀 주세요.” 한다. 있는 대로 차려내도 녀석은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우고 밥을 더 청한다. 녀석 입맛 다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녀석에게 들려 보낼 보따리를 싼다.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대로 내 마음을 뭉치며 몇 해 묵어 진갈색 빛이 나는 매실 효소 한 병도 같이 싼다. 피곤할 때 마다 물에 타서 먹으라는 말을 하며 나는 녀석이 몇 년 후 이 효소 보다 더 멋진 색깔의 사나이가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도사리- 병이나 바람 따위로 말미암아 자라는 도중에 “떨어진 과실”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을 일컫기도 함.
첫댓글 무슨 소리인가? 하고 사전 찾아 보았네요. 끝에 부기 해 놓은 것을, 재미 있네요 잘 보고 갑니다.
가슴이 짠 하네요. 어릴 적의 이런 아픈 경험이 자라면서 사람을 실하게 만들지요. 작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참 사람으로 분명히 거듭 날겁니다.
사물과 인간사를 바로 접목시키는 기술이 수필의 정석이라던데 전 잘못 써먹는데 이제 은주님 스승삼아 꼭 나도 이렇게 쓰리라 굳은 걸심 해봅니다. 그런데 중간에 과실을 솎는 것은 '적과'인데 두 곳에 '접과'로 되었네요 고치시기를--
많이 배웁니다.
선생님 늘 제 글을 살뜰히 읽어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적과로 고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좀 전에 '등'을 읽다가 눈물이 뚝 떨어지더니, 이 글을 읽고 다시 눈물이 핑 도네요. 글을 잘 쓰려고 애쓰기보다 우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필을 왜 삶의 문학이라고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