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사진 편지 제 330 호 (06/5/15/월)
3. 성환에서 조치원까지
5월 4일 목요일 맑음
저는 이번에 미리 세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걷기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걸어가다가 날이 저물면 숙소를 정해 쉬고
또 밝으면 걷고, 걷다가 좋은 곳을 보면 구경도
하고, 맛있는 집을 찾아 별미도 즐기면서 가자.'
이런 아주 낭만적인 생각으로 소박하게 시작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머리속에서 이미지로는 가능한데
실제 걸어보면 현실적,물리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어떤 지역에 도착하면 유명한 성벽도 있고 유적도
있고 별미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곳까지 찾아가 볼 마음이 도무지 나지 않고
우선 씻고 빨리 눕고 싶어서 숙소를 찾아
기어 들어 가기 바빴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해서
무사히 이 걷기 여행을 잘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이 저 자신을 시종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이번 걷기 여행을 알고 있는
한밤의 사진 편지 독자 123명에게 '함수곤은 결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을
보여주어겠다는 욕심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저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걷기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저를 무척 괴롭혔습니다.
단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힘든 고행을
스스로 선택했단 말인가?
정말로 어처구니 없고 어리석은 바보 멍청이
같은 짓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속에서 계속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울한 기분으로
별도리 없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철학자는 걸으면서 고상한 생각을
많이 하며 걸을 것인데
나는 걸으면서 기껏 이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면서 걷는 단 말인가? '
수준이 낮고 머리 속이 비어 있는
천박한 사람은 걸어 보아도 다리만 아프지
걷는 보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신을 짓눌렀습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신호 소리가 울려 전화를 받으면
친구나 선후배들은 한결같이
"정말 대단하다. 누가 감히 그런 일을 생각하고
실행하겠는가? 정말 너는 별난 사람이다.
부디 무리하지 말고 건강을 조심해서 성공하길 바란다.
넌 꼭 해낼거다. 아자 ! 아자 ! 함 수곤 화이팅!"
이렇게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침울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응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거야.
이렇게 먼길을 옛날 사람들 처럼
우직하게 걷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누가 있어.
선인들은 자동차도 없는 조용한 흙 길을 걸었으니
공기도 좋고, 위험도, 소음도 없고, 발바닥 감촉도 좋고
주막집도 좋고 술과 주모도 좋고 걸을 만했겠지.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걷는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고 위험한 악전고투인데.
선인들보다 내가 훨씬 훌륭하지.
친구들의 칭찬대로 함수곤은 위대하다"
이런 생각으로 신명이 나기 시작하면서
지친 몸과 우울했던 기분은
마치 컴퓨터의 엔터키를 눌렀을 때처럼 신기하게도
금새 변환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 걷기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 123명 독자들이 보아 주지 않는다면
또 무슨 재미냐? 그러니 함수곤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매우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것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에 아침 6시에 성환에서
출발한 이후 두 시간이 더 흘러
직산 사거리 삼은리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까지도 인도가 없어 불안하게
걷기는 어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 길가에 있는 추어탕집인데
창문에 '아침식사됩니다'라는
노란 쪽지가 붙어있어 얼른 들어갔습니다.
추어탕을 시켰더니 반찬도 여러가지 주고
공기밥은 그냥 더주겠다고 많이 드시라고 40대의
주인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살다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2년전에 와서 밥 장사를 시작했는데
근처에 직산역 건물 신축과 아파트 단지 개발이
시작되어 한 때는 경기가 좋았었지만
요새는 그 공사가 모두 끝나버려
손님이 없고 제주도에 비해 살기도 엄청 불편하다는
푸념을 늘어 놓았습니다.
식사후에 사과를 깎아 먹으면서
한 조각을 주인 아주머니에게 건네주니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해서 아내가 억지로
겨우 주었습니다. 얌전하고 순박한 주인이었습니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 천안에 도착했습니다.
천안은 충남 최대의 대도시입니다.
서울에서 전철이 이곳까지 연장 운행 되는 바람에
개발붐이 일어나고 급속도로 발전되어
이제 수도권에 편입된것 같았습니다. 높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섰고 어딘가 어수선해 보였습니다.

잘 아시는바와 같이 천안은 호도과자가 유명합니다.
70년 전통의 호도과자 원조 가게는 천안역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는 따끈따끈한 호도과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내에게 그 가게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신기한듯 둘러보는 호도과자 원조 가게에서
금방 구워낸 호도과자 2000원어치를 사들고
천안역 앞 광장 등나무 밑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았습니다.
간식으로 먹는 호도과자 맛은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아내는 처음으로 저보다 빨리 먹고 많이 먹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빨리 먹고 많이 먹을 수 있는가 봅니다.
저도 반찬이 제 입맛에 맞는 것이 있을 때는
엄청나게 밥먹는 속도가 빨라지거든요.
맞은 편 벤치에서는 홈리스로 보이는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자리타툼을 하는지 큰소리로 상욕을 하며
시끄럽게 싸우고 있어 편하게 쉴수 있는 곳인데도
서둘러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교원대로 출퇴근할 때
천안에 오면 조치원역까지 기차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잘 알기 때문에 오늘은 저와 관계가 깊었던
조치원까지 걸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안에서 조치원까지의 도로는
4차선으로 직선화된 신국도가 있고
고개도 있고 좀 돌아가는 옛길인
구 국도 1호선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구 국도를 택했습니다.
구 국도는 자동차의 통행이 좀 뜸하고
더 정취가 있으며 친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후 2시 반경에 충남 연기군 전의면
소재지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보였습니다.
'꽁지 쌈밥 꽁지 생삼겹'(041-863-0288)
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깔끔하고 조용한 식당이었습니다.
쌈밥 1인분, 청국장 백반 1인분을 주문했는데
상치를 비롯한 쌈거리 채소를 네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
한 광주리 푸짐하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전에는 정육점이었는데 밥집으로 개조해서
어머니와 남편과 부인 등 가족끼리 최근에 시작했답니다.
식당안에서는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우리만 먹고 있었는데
연달아 전화로 주문이 쇄도해 남편이 오토바이로
쉴새없이 음식을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누가 그렇게
밥집에 전화로 배달시켜 식사를 하고 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여기는 배달이 많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전의에서 조치원까지는 16km였습니다.
제가 교원대에 근무한 만 10년간을
서울에서 기차로 왕래했기 때문에 언제나
차창밖으로 내다보며 눈에 익혔던 아주 친숙한
길을 걸으니 마치 내 고향인듯 감회가 깊고
옛날 생각도 많이 떠올랐습니다.
이길은 철도와 나란히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기차로 달려가면서 보았던 낯익은 곳들이
실제 가까이서 지나며 보니 전혀 느낌이
다른 곳도 많았고 더 아름답고 근사한 곳도 있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훌륭하고 위대하게 보였지만
가깝게 사귀어 보면 형편없는 사람이 있고
멀리서 보면 그냥 무덤덤했던 사람이
가까이 대해보니 정말 존경스럽고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길은 가 봐야 알고, 사람은 사귀어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냥 멀리서 보이는 일면만 피상적으로
보고서 그 사람의 진면목을 쉽게 평가하는것은
경솔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습니다.
얼마를 가니 전동역이 길가에 보였습니다.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반가와서 역대합실에서
좀 쉬었다가 가려고 문을 밀어보니 문을 잠겨있었고
마치 폐가처럼 방치되어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천안근처에 도착했을 때부터 교원대의
정 재경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자주 걸려왔습니다.
조치원의 숙소는 정했는지, 어디서 저녁식사를
할 것인지, 조치원에는 대강 몇시쯤 도착할 예정
인지를 수시로 물어오고 있었습니다.

유위준 박사도 전화를 해오면서 오늘 저녁
학교의 공식행사가 있는데 되도록 빨리 마치고
숙소로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계속 해 왔습니다..
두 친구 모두 같이 근무하며 가깝게 지낸 후배들이며
한밤의 사진 편지 독자들이기 때문에
제가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메일을 통해 저의 행보를 알고
신경을 많이 쓰며 계속 추적해서 연락을 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마운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들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는것 같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원체 피곤하고 아쉬운 터라 정 부장에게는
조치원의 깨끗한 숙소를 알아보아 예약을 해준다면
숙소를 찾는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식사는 제가 과거 10년동안 수십번도 더 가보았고
아내도 데려간 적이 있는 단골집인 조치원역 앞
'우보설렁탕' 집을 오랜만에 다시 가보고 싶었기에
신경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조치원에 거의 다 와서 경부선 철도를 건너는 오버패스에
왔을 때 정 부장이 조치원에서 제일 깨끗하고 좋은 모텔을
알아내어 에약했다면서 지금 어디쯤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차로 저한테 달려와서 데려가고 싶다고했습니다.
저는 안된다고 대답하고 조치원역 앞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오후 6시 45분에 드디어 제가 10년 동안 기차를 타고 내렸던 낯익은 조치원역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조금후에 정부장이 자동차로 도착하여 약 4개월만에 반가운 해후를 했습니다. 바로 미리 예약한 '워커힐 모텔'로 안내해서 따라 갔는데 이제 새로 신축한 호텔처럼 보이는
깨끗한 모텔이었습니다.

우선 배낭을 방에 넣고 저녁식사집은 제가 안내했습니다.
우보설렁탕은 TV에도 소개된 유명한 집이고 서울과 청주에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본점입니다.
이집 갈비탕은 5000원인데 정말 맛이 좋습니다.
맥주 한컵으로 축배를 들고 갈비탕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막나가려고 하는데
유위준 박사가 전화를 주었습니다.
서둘러 행사를 마치고 저에게 오기위해
먼저 나왔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마쳤고 지금 사우나에 가려고 하니
오지 말라고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후에 정 부장은 내일 우리가 걸을 코스를
자세히 조사해서 복사해온 지도를 보여주며
계룡시를 거쳐 논산시로 가려고 한 저의 본래 계획을
수정하는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조치원에서 지방도로 공주로 가서 갑사에서 숙박하고
갑사에서 논산을 거쳐 연무로 가는 것이 걷기에 더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조언을 수용하여 당초의 코스를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장은 비싼 홍삼 농축액 2병을 내놓으며
매일 조석으로 한수저씩 들고
물을 마시면 피로가 풀리고 체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라고 했습니다.
잊지 말고 조석으로 꼭 복용하라고 몇번이나
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차에 우리를 태우고 달려서
내일 한적한 지방도로 빠져나가는 코스를
미리 상세히 알려주고 최근에 새로 생긴
'드림 사우나' 앞에 내려주고 떠났습니다.
정부장의 집은 대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귀가가 늦어졌고
여러가지로 깊이 신경을 써주어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왔습니다.
지금 아무 실속도 없는 늙은 퇴물을 잊지 않고
이렇게 자상하게 보살펴준
그의 정성과 사랑에 저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 순수한 우정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습니다.
드림 사우나는 과연 시설이 무척 좋은 곳이었습니다.
다리가 아픈데는 사우나에서 물 맛사지를 하는게
최고의 특효약이었습니다.
금새 아픈 것이 거짓말같이 풀립니다.
산뜻하고 가벼운 기분으로 숙소에 돌아와서
지도를 펴놓고 내일 코스를 들여다보다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내일은 공주를 향해서 걸을 것입니다.
함 수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