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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설명 |
☏ 041-688-3183
☏ 041-688-4886
수녀원
소재지 : 충남 서산군 해미면 읍내리
죄수를 한 명씩 처형하는데 지친 관헌들은, 병인 박해인 1866년부터 1872년에 이르는 대 박해 때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서쪽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서, 아무 곳이나 땅을 파고 산채로 구덩이에 몰아 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처형과 매장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것이 생매장이다. 이 곳에서 순교한 신자는 대개 신분이 낮은 평민으로 수천이라 추측하지만, 70여명만의 이름과 출신지를 불확실하게나마 남기고 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감옥 터와, 고문 형구로 쓰던 호야 나무는 지금도 살아서 꿋꿋하게 증언하고 있다.
성가 490. 십자가에 가까이
시복시성청원자 : 이보현 프란치스코(덕산 해미 1800년 1월 9일 27세) 장살
이보현 프란치스코의 친인척 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이보현 프란치스코 |
본인 |
1800/ 1/ 9 |
남 |
해미 |
시복시성청원자 |
27세 |
황 |
아내 |
|
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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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심 토마스 |
처남 |
1801/10/24 |
남 |
서소문 |
백서사건육시 |
45세 |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덕산 황모실에서 탄생했다. 이 황모실에서는 1839년 전 베드로가 순교하였으며 1857년 12월에 메스트르 이 신부가 선종하여 묻혔고, 1863년 9월에는 랑드르 홍 신부가 이곳에서 선종한 곳으로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였다.
이보현은 황모실의 부유한 양민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격이 꿋꿋하고 약간 고집스럽기로 유명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자 바람을 피우며 어찌나 난폭했던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가 천주교를 알게된 것은 스무 살이 넘어 덕산 용머리(삽교읍 용동리) 출신의 황심을 만나 그에게 교리를 배우고 황심의 누이동생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신앙의 결실을 더욱 굳게 해 주었다.
복음을 깨우친 그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하여 조용하고 단정해진 처신으로 모든 이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는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하여 논산 땅 연산으로 이주하여 1795년 지방 순방에 나선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와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금욕을 실천하던가 순교하여 목숨을 바치던가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797년 정사 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가족과 신자들을 격려하고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유하였다. 그 뒤 어느 날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술을 빗고 음식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과연 이틀 후에 포졸이 나타나 “네가 천주교 신자냐?” 하고 묻자 “그렇소 내가 천주교 신자요. 뿐만 아니라 이틀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소.”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포졸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연산 현감 앞으로 꿀려갔다.
“네 선생은 누구이고, 공범자는 누구누구이며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
“제 선생과 동료들은 고향에 있습니다. 책은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만 모두 중요한 문제를 다룬 책이기에 사또께 바칠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내게 보일 수 없단 말이냐?”
“그 책은 만물의 대군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또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사또는 기분이 매우 상하여 혹독한 매질을 하고 나서 감사에게 보고를 하고 하명을 기다렸다. 공주 감사는 그를 해미로 넘기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인언민 마르티노라는 열성적인 신자를 만난다.
“영장은 너는 어찌하여 부모와 조상들의 산소를 버리고 500리나 되는 연산에 와서 고약한 도를 따름으로써 국왕이 금하시는 것을 하느냐?” 하고 묻자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성교를 모욕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대군 대부이시므로 공경해야 합니다.”
두 번째 문초를 해도 그의 태도가 바뀌지 않자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고 했다.
이보현은 판결문을 내밀자 기쁜 마음으로 서명하고 다음날 사형수에게 주는 음식을 기쁘게 먹고 장터로 끌려나가 조리를 돌리고, 망나니들은 거적을 앞에 두르고 그에게 오랫동안 매질을 가해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불두덩을 짓찧어 1800년 1월 9일(음력1799/12/15) 27세에 순교했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390, 422) (순교는믿음의씨앗이되고184)
다블뤼 신부의 활동 |
說明 |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다블뤼 신부는 미래를 위하여 큰 사업을 하였다. 한한불사전(韓漢佛辭典) 즉 한글과 한문과 불어 사전을 준비하였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년표(年表)에 대한 조선 책들을 번역하고,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천주교 서적들을 재검토하였다.
한편 메스트로 신부는 영해회(嬰孩會)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무서운 박해 중에도 고아원 사업을 하면서 대세 주는 사람 3명을 임명하였다. 또 여인들이 어린아이들을 구제하고 접근하는데 남자보다 쉬우므로 이를 위하여 여인 2명을 지명하였다. 영해회 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봉사자도 증가될 것이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206-210)
포교 성성에 보낸 조선의 교세 통계표를 보면, 1853년 말에 선교사들의 명단에 오른 신자의 수효는 12.175명이었다. 이 신자들을 모두 찾아가 볼 수는 없었지만 사규 고해자(四規告解者)의 수가 7.660명이었고, 성체를 모신 사람이 6.000명 이상이었다. 외교인 자녀의 임종 대세(臨終代洗)가 550건 이상이었다.
1854년 3월 고난 주일 주간에 매스트로 신부가 실패한 입국 시도 때 그와 동행했던 쟝수 신부가 다행히도 조선에 잠입하였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가 타고 있던 조그마한 중국 배를 일체의 위험에서 지켜주신 후 그를 맞이하러 보낸 조선 배를 어렵지 않게 만나게 하셨다. 폐낭 포교지 신학교로 가게 되어있던 조선 학생 3명을 쟝수 신부가 타고 온 배에 태우고 즉시 중국으로 되돌아갔고, 그 자신은 경험 있는 안내인들의 인도로 며칠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렇게도 오래 기다리던 이 원군(援軍)을 맞이하며 선교사와 교우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쟝수 신부는 심한 뇌염에 걸려 거의 이성을 잃게 되었다. 그는 두 주일 동안 서울에서 매스트로 신부와 같이 머물렀다. 그러다가 그의 병세가 차도를 보였으므로 산골에 있는 다블뤼 신부에게로 그를 데려갔다. 산골에서는 좋은 공기를 마시고 그 당시 더 큰 자유를 누렸으므로 빨리 병이 낫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은 약이 없었고, 몇 주일 동안 육체적 정신적 허탈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 때때로 무서운 신경 발작을 겪은 후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6월 18일 다블뤼 신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다블뤼 신부는 이런 말을 썼다. “천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러나 그분의 뜻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려우며, 우리 가엾은 포교지에 대한 그분의 심판은 얼마나 엄혹합니까! 이 죽음이 우리와 우리 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지를 말씀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친애하는 동료가 그 무서운 병을 앓고있는 동안에 그렇게도 착하고 그렇게도 능력 있고 그렇게도 훌륭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였거든요. 모든 것이 조선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 그의 얼굴까지도 이 포교지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는데, 천주께서는 그를 즉시 불러 가셨습니다. 천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1854년은 제법 평온하게 지나갔다. 조정에서는 아무런 적의도 보이지 않았고, 비록 여러 신자가 이곳 저곳 옥에 갇히기는 하였지만, 돈을 많이 써서 석방시킬 수가 있었다. 천주의 사업은 전진하고 있었고, 때때로 몇몇 충격적인 입교로 은총의 권능이 드러나고 신자들이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하루는 70세 된 노인이 자식들과 다른 식구 몰래 달려와서 세례 받기를 청하였다. 이 노인은 여러 해 전에 어떤 중요한 직책을 사퇴하였고, 또 천주교를 자유롭게 봉행 하기 위하여 장래의 희망을 포기하였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하여 어떤 때는 병자처럼 행세하고 어떤 때는 바보 노릇도 할 수밖에 없었다. 박해 때 신자들과 헤어져 그들과 도무지 연락을 다시 취할 수가 없었는데,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가 알고 있던 몇 가지 천주교 규율을 혼자서 계속 지켜 왔었다. 천주께서는 마침내 그에게 신부를 만나는 은총을 내려 주셨다
또 한번은 꽤 이상한 상황에서 신앙으로 이끌어진 한 가족이 있었다. 살림이 유복한 이 사람은 이 세상 사물의 원인과 방법, 자기 자신의 존재이유와 참된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자 하여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매우 오랫동안 아주 무익한 탐구를 계속하였었다. 절에도 다녀보고 모든 종파의 책을 연구하고 점쟁이란 점쟁이, 사주쟁이란 사주쟁이는 다 찾아보고 점술도 하였는데, 그때 인자하신 섭리는 그가 천주교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 들게 하셨다. 그가 찾아갔을 때 처음에는 많은 냉대를 받았으니, 신자들은 위험을 당할까 봐 겁이 나서 그에게 자기들의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진심을 확신하게 된 어떤 신자가 중요한 신조를 설명하여 주며 말하였다. “모든 사물의 근본을 일러주었으니 곰곰이 잘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이 내용이 건실하다고 인정되거든 다시 오시오. 그러면 기꺼이 천주교를 완전히 알려 주겠소. 그렇지 않으면 제발 이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마시오.” 그 사람은 지금까지 하던 것과는 반대로 20일이나 지나도록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신자는 그 사람을 다시 못 보게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다시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종교가 참된 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국왕이 이 종교를 사형으로 금지하고 계시지만 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책들을 주었더니 그는 며칠 동안에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웠다. 그 나름대로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이교들을 반박하는 글과 천주교에 대한 호교의 글을 지어 3개월 후에는 아버지까지 개종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는 아내의 친척 여러 명도 천주교로 인도하여 그 수효가 12명이나 되었다.
또한 신자들에 대한 성무 집행 중에 생기는 많은 여가를 이용하여 다블뤼 신부는 미래를 위하여 일하였으니, 한한불사전(韓漢仏辞典)을 준비하고, 이 나라의 역사와 년표(年表)에 대한 조선 책들을 번역하고,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천주교 서적들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사전 편찬 사업은 그에게 많은 피로를 겪게 하였다. 한번은 한문과 국문에 정통한 유명한 박사인 고관에게 문의하려고 엿새 길을 걸어가기도 하였다. 아침내 조선말 단어의 상당한 목록을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일로는 이것이 처음 시도된 것이었으니, 모든 선비가 거의 전적으로 한문과 한문책 연구에만 몰두하며 자기네 국어를 아주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완성된 이 사전은 다른 귀중한 많은 서류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박해 때에 없어지고 말았다.
한편 메스트로 신부는 영해회(嬰孩会)의 사업을 튼튼히 하고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영해회의 이사회에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귀하의 첫 번 편지를 받자마자 내 주위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것을 알렸는데, 그때 뿐 아니라 그 뒤로 여러 번 그들의 눈에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일어나서 벌써 전 세계에 불을 붙이고 있는 그 큰불에 비하면 저희들의 박애 심은 참말이지 겨우 불똥 한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 산채로 거두어진 아이들을 위한 기관을 하나 세웠으면 합니다. 그러나 여기는 박해령이 여전히 발효 중에 있으므로 그들 모르게 또 흔히는 그들이 원치 않는데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을 일체 피하기 위하여 그 귀여운 어린아이들을 신자 가정에 나누어주어 그들이 나이 차서 다른 보살핌이 필요할 때까지 먹이고 키우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다음에는 그들에게 생업을 가르치고 신자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알선해 줄 것입니다. 나는 특별히 이 사업을 맡아 일하면서 대세 주는 사람 3인을 임명하였고, 또 여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접근하기가 아주 쉬우므로 이를 위하여 여인 2명을 지명하였습니다. 이 숫자는 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증가될 것입니다. 비용이 다른 나라보다 약간 더 드는 것으로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생활 필수품이 다른 데보다 비교적 비싼데서 오는 것입니다. 가령 지방에 맡길 수 없어 서울에서 유모에게 맡겨야만 하였던 아이들을 위하여 각각 매달 8프랑씩 지불해야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을 구원하시는 주는 당신의 거룩한 사업에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시고, 저들이 저희들의 모든 권고에 그렇게도 자주 귀를 막고 자기들 자신의 행복에 무감각한 저 가엾은 비신자들의 아이들만이라도 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소서.
성가 419. 밀알 하나가
베르뇌 장 주교의 편지 |
說明 |
작년에 편지를 보내드릴 시기에는 우리의 전망이 어두웠습니다. 전반적인 박해 이야기가 나오고 이미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겨울에 이곳 저곳에서 신자들이 붙잡혀 갇혔습니다. 아꼰 주교(다블뤼) 구역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포졸들의 추적을 면하기 위해 집과 논밭을 버리고 산골로 피신했는가 하면 그 근방의 다른 가족들은 살길을 찾아 먼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해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잡혔던 사람들은 산골에서 내려오고 역시 도피했던 보좌 주교도 자기 은신처로 돌아갔습니다. 몹시 슬퍼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렇게도 여러 번 혹독한 시련을 겪어온 이 작은 양떼에 연민의 눈길을 돌리셔서 폭풍우가 별안간 가라앉았던 것입니다. 붙잡혔던 신자들은 놓여 나왔는데, 1백 여명의 세대주인 신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관장과 암행 어사에게로 갔던 고발자 중의 한 사람은 결박을 당하고 투옥되고 매를 흠씬 맞았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이 승리는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다만 공포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외교인들을 안심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멀리 이사가는 가족들은 몹시 곤궁하게 되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시련을 동정하면서도 거기에서 초래될 이익에 대한 희망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이 이주자들은 복음의 빛이 아직 비치지 않은 지방에 그것을 가져다주어 거의 언제나 약간의 외교인들을 끌어들입니다. 이것은 폭풍에 날아간 씨앗이 불모지에 떨어져서 이내 그 땅을 기름지게 만듭니다.
개인 영세자의 수효가 올해는 작년 숫자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더 배울 것과 더 오랜 시험 기간을 요구하기로 결의 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예비 신자의 수는 거의 3배로 증가하였습니다. 내 명단에 오른 사람이 근 1.200명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천주께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온 교구 안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을 주시했습니다. 특히 서울에서 많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교리를 배우려고 놀라운 노력들을 하고,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열성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신자들의 이 움직임이 미신자들에게로 옮아가고 서울 밖으로 넘쳐흐릅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양반가 중의 하나가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임금님의 가까운 친척 한 분의 장인인 이 집 가장은 겨울 동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만일 이 집안이 열심 해지면 이 집안에서 많은 개종이 뒤따를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읍내에서는 수단 좋고 열성 가득한 예비 신자가 한사람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관할구역에는 교우촌이 8개소가 생겼고 또 다른 7개소가 내년에 신설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듯 개종은 많은 성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왜냐하면 천주의 뜻이 거기에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년 뒤, 전에 조선 배 한 척이 폭풍에 밀려 광동 해역에 이르렀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허기로 굶고 있었는데, 그때 어떤 영국 배에 발견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만이 구조될 수 있어서 우리 조선 학생들 중 한사람이 있던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 어린 학생이 건강을 회복하라고 페낭에서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섭리는 한 영혼을 구하고, 또 그 영혼과 함께 아마도 다른 많은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서 그를 이용하려고 하셨습니다. 룻세이 신부의 지도 아래 난파자인 이 학생은 교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행히 금년에 조선에 돌아와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그에게 책을 주면서 나와 연락을 취할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영리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겨자씨를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비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감동을 주는 신앙과 끈기를 보여주어서, 그중 몇 가지 행위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즐거움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행위들은 여러분에게 유익할 것이고, 또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할 것입니다.
15세 된 어떤 소년이 신자가 되고 싶어서 몇 달 동안에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그 결심을 알고 갖은 방법을 다 써서 결심을 꺾으려고 합니다. 발각되는 날에는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그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줄 것이므로 그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심하게 매질을 합니다. 그는 잠자코 매를 맞다가 아버지가 매질에 지치면 몸을 일으켜 가지고 신자가 되겠다고 항변을 합니다. 이 소년은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께서는 이 신입 교우들의 신앙에 감동되시어, 이 땅에서 피를 흘려 신앙을 용감하게 증거한 이들을 영광스럽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페롱 신부가 내게 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강원도 만산에서 성사 집행을 하고 있던 중에, 날 때부터 불구자인 황이라는 12, 3세 된 아이를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팔꿈치와 무릎으로 밖에는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점으로 본다면 신심이 있고 교리를 꽤 잘 배웠습니다. 그의 처지가 너무나 가엾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전구로 천주께 그를 고쳐 주시기를 청하라고 종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제안이 일종의 불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엄명한 까닭으로 제가 떠나던 날인 11월 30일에 9일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기억나는 대로 중요한 순교자 40명의 명단을 주고 9일기도가 끝나는 날인 성모 원죄 없으신 잉태 대 축일(孕胎 大祝日)에 미사 성제를 드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만산 신자들의 편지에 의하면 그 아이의 병이 바로 그 날 나았다고 합니다. 그가 회복된 시간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도무지 모릅니다. 제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교우촌에서 그 아이의 삼촌이 말한 것으로는 기도문을 외고 신자들이 일어날 때에 그 아이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 그 원인을 조사하고 평가할 수 있으실 한 가지 상황을 말씀 아니 드릴 수 없으니, 그 아이가 아직 지팡이를 짚고야 걸을 수 있다는 점으로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나는 아직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내 관할 구역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병이 나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문서가 충분하고 정확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그 자세한 내용을 적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께서 우리들에게 마련해 주시는 위안입니다. 그러나 시련도 없지 않습니다. 천주께서는 올해에 우리 모두를 몹시 슬프게 한 시련을 보내셨으니 매스트르 신부가 별세한 것입니다. 이 사랑하는 동료가 작년 3월말 성사 집행을 마치고 나를 보러 왔었습니다. 몹시 피로했지만 건강은 좋은 것 같았습니다. 8월중에는 내가 2백 리 떨어진 그에게 가서 함께 하루를 지냈는데 그의 건강은 좋았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지난번 성사 집행으로 인해 피로했다는 것을 알고 좀 덜 고생스러운 구역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11월초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2월 18일 나는 이 사랑하는 동료가 중병이 들어 내가 포교하고 있던 마을에서 80리 떨어진 곳에서 임종하고 있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 나는 급히 떠나 밤에 그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과연 그의 병세는 매우 걱정스러웠습니다. 너무 쇠약해져서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나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잡았습니다. 밤을 넘기지 못할까 봐 염려가 되어 사죄경과 성체를 영해 주고 종부 성사를 주겠다고 했더니 손짓으로 아직 위험이 급박하지 않았으니 기다리고 싶다는 것을 알리며 거절했습니다. 그 이튿날 19일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20시간을 계속 걸어서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그 날 하루를 병자의 방에서 지내며 우리가 마련해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었습니다. 병세가 때로는 약간 희망의 빛을 나타내는 듯 하다가는 이내 사그라지곤 했습니다. 12월 20일 날이 밝기 전에 나는 노자 성체를 영해 주고 종부 성사와 전대사를 주었습니다. 그 동안 병자의 방에서 물러가게 하려고 내가 명령을 했는데도 듣지 않고 있던 많은 신자들이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와 같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던 분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고 성인의 죽음을 지켜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가 혼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오래지 않아 모시게 되었던 천주와 대화를 나누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아침 10시, 11시께 경본을 읽고 있는데,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간다고 알리러 왔습니다. 프티니콜라 신부와 나는 병자의 방으로 가서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움직이지 않고 숨결은 짧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침 정오에 거칠지 않게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 같지 않고 평온하게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 내가 이 소식을 마당에 모여 있는 신자들에게 알렸을 때 진실한 고통을 나타내는 통곡은 그들이 아버지를 잃었음을 온 마을에 알렸습니다. 12월 20일 이날 조선 신자들은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사도를 잃었고 선교사들은 모든 사도적 덕행의 귀감을, 그리고 나는 이 포교지에서 여러 번 유익한 조언을 해준 친구를 잃었습니다. 마침내 12월 25일 밤 9시에 프티니콜라 신부의 보좌를 받고 3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산꼭대기에 마련한 무덤에 시체를 장사 지냈습니다.
매스트르 신부는 우리 신자들 사이에 큰 성덕의 명판을 남겼는데, 그 명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교화가 된 그의 모든 덕행의 근본은 천주의 뜻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는 데 있었으니, 그는 선교사직에 입문한 때부터 천주께 자기를 남김없이 바쳤습니다. 그가 이 포교지에 들어오고자 10개성상을 끊임없이 무익한 걸음걸이를 하는 동안 고통을 얼마나 겪었는지 천주만이 아십니다. 그렇게도 많은 고통을 오랫동안 당하는 중에도 그의 온유함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렇게도 많은 덕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조선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지경이었습니다. 매스트르 신부의 전 생애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내게 말한 한마디 말로 요약됩니다. “천주께 기꺼이 목숨을 희생으로 바치느냐”하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얼마 남아 있지 않는 힘을 다 모아서 “주교님, 저는 첫날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기회에 신자들의 청을 들어 그의 취미에 맞지 않을 것 같은 임지를 그에게 주었더니, 그는 거룩한 선교사다운 이런 말을 내게 써 보냈습니다. “모든 것을 기꺼이 했습니다.”
성가 1. 나는 믿나이다
성거산 성지
성지 설명 |
☏ 041-584-7199
041-585-4872
소재지 : 충남 천안시 입장면 신덕리 198-9 (입장성당 )
성거산 성지 제 1묘역
'병인박해 치명사적' 중에서 배문호, 고의진, 최천여, 최종여에 관한 부분(절두산 기념관 원본 소장 드르베 주교편 1925년)에 배문호 베드로와 고 요셉, 최씨 형제의 신앙 생활과 감옥 생활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최천여 베드로 :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며 묵상, 염경 기도를 부지런히 하고 늘 치명 원의를 자주 말하더니 병인 1866년 10월 10일에 포졸에게 붙잡혀 관청에 끌려갔다. 천주학을 믿느냐는 질문에 믿는다고 하니 배교하도록 권유 당했다. 그러나 듣지 않자 다시 투옥, 옥중에 들어가 배교한 교우들에게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의 세계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를 살기 위하여 배교를 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병인년 11월 8일에 55세에 치명 하였다.
2. 최종여 라자로 : 최천여 베드로의 아우로 목천 소학골에서 그 형과 함께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더니 병인 1866년 10월 10일에 목천 포교에 붙잡혀 혹독한 역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니 포교들이 목을 매어 끌고 본관으로 가 며칠 갇혔다가 공주 진영으로 가 형 베드로와 같이 11월 8일에 42세에 치명 하였다.
3. 배문호 베드로와 고의 요셉 : 배문호 베드로는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았고 열심히 수계 생활하며 부모에게 배우고 열심히 믿었다. 치명 하기를 원한 배문호는 아내와 의논하고 신자의 본분을 지키며 강 신부가 준 철사 띠를 주야로 띠고 강 신부에게 나아가 고신 극기하는 법을 배우더니 병인년 10월 8일에 목천 포교에게 고 요셉과 함께 붙잡혀 관가에 들어가 배주배교를 강요받았다. "만만코 죽사와도 배교하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배문호는 십계명을 풀어 이야기하니 "그것을 누구에게 배웠으며, 믿은지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은 다하지 못했나이다" 하자 즉시 하옥 2차, 3차 물 고문에 형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천주를 배교하라 명하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 만과를 서로 통경하니 경문 외우기에 자신만만하더라.
11월 8일 공주로 끌려가며 경문을 소리 높여 읽었다. 창교배(인솔자)도 즐겨 듣고 배교한 두 사람도 이 모양을 보고 즉시 통회하고 자원으로 따라와 공주 진영에 함께 들어갔다. 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로 나이는 2살 차이라고 하며 공주 감영으로 끌려갈 때도 어깨동무하며 성가를 불렀다고 하였다.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도무지 굴하지 않자 즉시 하옥하여, 병인년 11월 8일에 치명하니 배문호 24세이었고 요셉은 26세였다. 배문호는 모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님도 뒤를 따라 오소서. 또 이르오니 동곳(머리를 감아 상투를 꽂는데 필요한 것)을 보내오니 나를 보는 듯이 이 동곳을 보시며 생각하고, 나와 고 요셉은 목마름을 오줌으로 푸나이다" 하였다. 이들의 순교 후 "두 사람의 시체는 지금 청주 절골에 사는 강치운이가 찾아 묻었느니라" 하였다.
4. 최천여의 며느리는 치명일기에 '채 서방 며느리'로 나와 있지만 최근 최천여의 며느리임을 밝혀졌다. 다만 "배문호와 한가지로 치명 하였다 하더라"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1998년 7월 22일 성거산 성지가 대전 교구 성지로 승인된 이곳에 현재 십자가, 예수 성심상, 성모상, 14처상, 제대 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지 성역화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성인 : 박종원 아우구스티노(서울 당고개 1840/1/31 49세 참수)
† 여섯 쌍의 부부 성인 가운데 한 쌍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
본인 |
1840/ 1/31 |
남 |
당고개 |
성인 |
48세 |
고순이 바르바라 |
처 |
1839/12/29 |
여 |
서소문 |
성녀 |
41세 |
고광성 |
장인 |
1801/ |
남 |
서소문 |
순교자 |
|
서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박종원(朴宗源) 아우그스티노 성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매우 궁핍하게 살면서 불평하지 않고 효도하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박종원은 장성하여 순교자의 자손인 고순이와 결혼하고 삼 남매를 두어 다같이 열심히 봉교하였다.
그는 “언제나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를 위하여 치명 함이 마땅하다.” 고 늘 치명 준비에 힘썼다. 앵베르 범 주교가 입국한 뒤 서울 회장직을 맡아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이름이 드러나 피신해있던 그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이면 감옥을 찾아가서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여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피신한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에 체포되었고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高順伊)도 체포되어 같은 포청옥에서 재회하였다. 그들은 포도청에서 아내와 함께 문초와 고문을 받을 때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부부가 똑같이 고문을 이겨냈고 순교를 준비하였다. 형조로 이송된 박종원은 주장질이 가해지는 문초로 살이 떠지고 유혈이 낭자했지만 아내와 함께 혹형을 끝까지 이겨냈다. 그는 아내가 먼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뒤 양력 1840년 1월 31일(음력1839/12/27) 6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천주교인의 처형장을 당고개로 옭긴 것은 서소문 밖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보기 위해 형조판서에게 사형장을 옮겨줄 것을 진정하기에 그들의 청을 들어 형장을 당고개로 옮기게 된 것이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中권468, 489, 490, 518, 531)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2권204)
공세리 성당
성지 설명 |
수녀원 ☏ 041-533-8172
소재지 :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과 사제관의 설계는 드비즈 신부가 하였고, 1921년에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감독하여 지은 건물이다. 이 성당에는 순교자 박의서 사바스,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 (본명미상) 삼 형제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이 곳에 안장되어 있는 박씨 3형제는 겨우 이름과 구전으로 전해지고 몇 가지 행적만 남아 있다.
성가 174. 사랑의 신비
김대건 신부의 옥중 편지 |
說明 |
지극히 공경 하올 주교님께.
주교님께서는 우리가 하직한 이후로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 준비를 마친 후 닻을 올리고 순풍을 만나 무사히 연평 앞 바다에 도착하여 보니 바다는 어선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저희 일행은 생선을 사 가지고 순위도 항구로 가서 되팔려고 하였으나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선을 육지에 풀어놓고 사공 한 사람을 시켜 소금으로 절이게 하였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항해를 계속하여 소강, 마합, 터진목, 소청, 대청 등 여러 섬을 지나 백령도 근처에 와서 닻을 내렸습니다. 거기에는 백 척 가량의 중국 산동반도의 어선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들은 해안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마는 그 배에 탄 어부들은 아무도 조선 땅에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 해안의 높은 곳과 산꼭대기에서 포졸들이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근처 섬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호기심에 끌려 중국 배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밤중에 중국 배를 찾아가서 그 배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교님의 편지와 또한 제가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신부님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중국 신자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들 편지에 황해도 해안의 섬과 바위와 그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 지도 두 장을 동봉하였습니다.
이곳은 중국인들의 중개를 조심스럽게 잘 이용하기만 하면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하고 서로 편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유리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 어선들은 고기를 잡으러 해마다 음력 3월 초순에 이곳으로 모이고 5월 하순에는 돌아간답니다.
우리는 주교님의 지시대로 실행한 후 그곳을 떠나 순위도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여행은 그때까지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기에 끝까지 성공하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우리가 해변에 펼쳐 놓았던 생선이 아직도 마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저의 복사 베난시오가 박해를 피하여 7년 동안 어떤 사람의 집에 숨어 있었을 때 그 집에 맡겨 두었던 돈을 찾으러 가겠다며 뭍에 내리게 해 달라고 하기에 허락하였습니다.
그가 떠난 다음에 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배에 와서 중국 배를 쫓으려고 하니 우리 배를 빌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조선 법에 따르면 양반의 배는 공공 부역에 동원되지 않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은 저를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베난시오가 이런 경우 취할 태도를 일러준 바가 있어 저는 관장에게 우리 배를 빌려주게 되면 제 체면이 깎일 것이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일을 보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제게 욕을 퍼붓고는 키를 맡은 으뜸 사공을 잡아가더니 저녁때 다시 와서 두 번째 사공을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관장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은 결과 저의 신분에 대하여 중대한 의혹을 일으키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관장은 사공 한 사람이 신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30명이나 되는데, 만일 저 사람이 참으로 양반이고 그자가 우리에게 폭력을 쓴다고 해도 30명이 다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한두 명만 죽을 테니 함께 그자를 잡으러 가자.”하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중에 여러 명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미친 듯이 저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움큼 잡아 뽑고 포승으로 결박하여 발길질과 주먹질과 몽둥이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아있던 사공들은 어두운 밤을 타서 종선으로 빠져나가 힘껏 노를 저어 달아났습니다. 해변에 이르자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퍼부으면서 관가로 끌고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어찌하여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라고 심문하기에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관장은 저를 고문하게 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죽이겠소.”라고 말하였습니다.
“좋을 대로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져 버리지 않을 것이오. 우리의 종교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보시오. 내가 공경하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사람과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선인들은 상주시고 악인들은 벌하시는 분이오. 그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느님을 공경하여야 마땅하오. 관장 나으리,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니 감사하오. 그리고 우리 하느님께서 당신을 더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하여 이 은혜를 갚아 주시기를 바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관장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길이가 여덟 자나 되는 긴칼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즉시 제 손으로 그 칼을 목에 쓰니, 둘러섰던 사람들이 또 한번 껄껄 웃어댔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미 배교한 두 사공과 함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저는 손․발․목․허리를 꽁꽁 결박당하여 걸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호기심에 끌린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밤이 이슥토록 저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더니 그들은 관심 있게 듣고 나서 임금님이 금하지만 않으면 자기들도 믿겠다고 말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제 보따리에서 중국 물건이 나오자 저를 중국인인 줄로 믿었습니다. 이튿날 관장은 저를 출두시킨 뒤 중국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니오. 나는 조선 사람이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말을 믿지 않고 “중국 어느 지방 출신이오?”라고 묻기에 “나는 중국 광동성의 마카오에서 공부하였소. 나는 천주교 신자요. 구경도 하고 천주교를 전하기도 할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를 다시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닷새가 지난 후에 한 포교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저를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 감영으로 이송하였습니다. 감사가 저에게 중국인이냐고 묻기에 순위도 관장에게 대답한 것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혼의 불사 불멸, 천당과 지옥, 하느님의 존재, 죽은 후의 행복을 위하여 하느님을 공경할 필요성 등을 그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감사와 그 부하들은 “당신이 한말은 다 좋고 이치에 맞는 말이기는 하지마는 임금님께서 천주교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시지 않소.”하고 대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지에 해를 끼칠 여러 가지 정보를 묻기에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화가 나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혹독한 고문을 할 것이오.”라고 큰소리로 호령하였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대답하면서 저는 여러 가지 형구가 있는 데로 달려가 그것을 감사의 발치에 던지며 “나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치실 테면 치시오. 나는 당신들의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소.”하고 말하였습니다. 포졸들은 이내 그 형구를 집어치웠습니다. 감사의 부하들은 저에게 다가와서 “감사 앞에서는 누구라도 소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요.”라며 일러주기에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장성한 어른이고 양반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 감사가 다시 저를 출두시킨 뒤 중국의 여러 사정을 진력이 나도록 캐물었습니다. 때때로 제가 중국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통역을 통해 묻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저에게 배교하라고 명하기에 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소롭다는 표시로 빙긋이 웃었습니다.
저와 함께 잡힌 신자 두 사람이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제가 살고 있는 서울 집 주소와 주교님의 복사 이 도마와 그 동생 마태오 그리고 그 외 다른 몇몇 신자의 이름을 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가 중국 배와 연락한 것과 배 주인에게 맡긴 편지 등에 대해서도 실토하였습니다. 그 즉시 포졸 한 부대가 중국 배에 파견되어 그 편지들을 빼앗아 감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후에는 저와 사공을 각각 다른 감옥에 가두어 놓고 네 명의 포졸들이 밤낮으로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였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에 쇠사슬이 채워지고 목에는 칼이 씌어졌습니다. 우리 세 사람의 허리에는 긴 줄로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그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하였습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이 어떠하였겠는지 상상에 맡겨 드립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병을 앓았을 때 치료하기 위하여 거머리를 가슴에 붙여서 생긴 흠집이 일곱 군데나 있는 것을 보고 포졸들은 저를 북두칠성이라는 등 별별 조롱을 다하며 야유하였습니다.
임금님은 우리가 체포된 사실과 또 제가 중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포졸을 보내어 서울로 압송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는 동안에도 감옥 안에 갇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도둑이나 큰 죄인처럼 붉은 포승으로 팔을 묶고 머리엔 검은 자루를 씌웠습니다.
구경꾼들이 우리를 귀찮게 괴롭혀서 길을 걷기가 몹시 피곤하였습니다. 제가 외국인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나가는 우리를 구경하려고 나무 위나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울에 도착하여 포도청에 수감되었습니다. 포도청 사람들은 저의 말투를 들어보고는 “분명히 조선 사람이다.”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이튿날 재판관들이 저를 출두시켜 놓고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묻기에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중국에 가서 공부하였소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중국어 통역을 불러서 저와 이야기를 시켜 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배반자 김순성이 조선 소년 3명이 서양말을 배우러 마카오로 떠났음을 일러바쳤습니다. 또 저와 함께 잡힌 신자 한 사람이 제가 이 나라 사람임을 실토하였으므로, 저의 신분이 오랫동안 감춰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판관들에게 “나는 그 세 소년 중의 하나인 김대건 안드레아요.”라고 자백하는 동시에 조국에 돌아오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판관들과 구경꾼들이 “가엾은 젊은이로다. 어려서부터 엄청난 고생을 많이도 하였구나.” 하며 혀를 찼습니다. 그런 다음 임금님의 명령에 따라 배교하기를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임금님 위에 하느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공경하라고 명하시오. 그러니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님의 명령이라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큰 죄악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신자들을 대라고 독촉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애덕의 의무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천주교에 대하여 묻기에 저는 하느님의 존재와 단일성, 우주 만물의 창조, 영혼의 불사 불멸, 천당과 지옥, 창조주를 경배할 필요성, 이교의 허위성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가 말을 끝내자 재판관들은 “당신의 종교도 좋소. 우리도 우리 종교가 좋기 때문에 믿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당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우리를 편히 지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당신들은 우리를 박해하고 극악한 범죄인보다 더 가혹하게 다루고 있소. 당신들은 우리 종교를 옳고 좋은 종교라고 인정하면서도 마치 극악한 종교처럼 박해하고 있소. 이것은 자가 당착이고 모순이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대답 대신 그저 바보처럼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압수된 여러 통의 편지와 지도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한문으로 씌어진 편지 두 통은 관장이 직접 읽었으나 거기에는 안부의 말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양 글씨로 쓴 편지를 저에게 내 밀며 번역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천주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번역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신부님에 관해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중국에 사는 큰 학자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주교님의 편지와 저의 편지 글씨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고 누가 썼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통틀어 제가 썼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주교님의 편지를 내보이면서 써 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꾀를 쓰는 모양이기에 저도 꾀를 내어 그들을 이겼습니다. “그 글씨는 철필로 쓴 것이니 내게 철필을 갖다 주시오. 그러면 분부대로 하겠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는 철필이 없소.”라고 하기에 저는 “철필이 없으면 그와 같은 글씨를 쓸 수 없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새 깃을 가져왔습니다. 재판관은 그것을 제게 주며 “이것을 가지고 쓸 수 없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철 필과 같지는 않지만 서양 글씨는 한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릴 수는 있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서 새 깃을 뾰족하게 깎아 아주 가는 글씨 몇 줄을 써 놓고 그 다음에는 새 깃의 끝을 잘라 버리고 굵은 글씨를 써 놓은 뒤에 “자, 보시오. 이 두 글씨가 다르지 않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족하게 여겼던지 편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주교님이 보시다시피 우리 조선의 학자는 서양의 학자와 같은 수준이 아님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와 함께 잡힌 신자들은 서울에서 아직 고문을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현석문 가룰로는 자기와 함께 잡힌 신자들과 다른 감옥에 갇혀 있어서 우리와는 연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같은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10명의 신자 중에 4명이 배교하였는데 그들 중 3명은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1839년에 나약하였던 이신규(李身逵=이승훈아들) 마태오가 지금은 용기 넘치는 용맹으로 순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배의 키를 맡았던 으뜸 사공 선설의 부친과 그리고 전에 신자들에게 좋지 못한 표양을 주었던 남경문 베드로도 이 마태오를 본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형장에 끌려갈 날짜는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고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주교님의 복사 이 도마와 그 밖의 주요한 신자들을 기어이 체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졸들도 지쳤는지 신자들을 수색하는데 열성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이천, 양지, 은이,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각처로 갔다고 합니다. 주교님과 안 다블뤼 신부님은 제가 죽은 후에도 깊숙이 숨어 계시기를 바랍니다. 재판관의 말을 듣자니 외연도 근처에 정박한 세 척의 군함이 프랑스 군함으로 믿어진다고 합니다.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어 온 그 군함은 조선에 큰 환난을 내릴 듯이 위협하고 나서 두 척은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고 떠나갔고 한 척은 조선 근해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조선 조정은 I839년에 순교한 3명의 프랑스인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무슨 목적으로 군함이 왔는지 아느냐고 묻기에 저는 그들이 왜 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프랑스인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니까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강력한 나라지만 그 정부는 관대한 도량을 가졌다고 하였더니 제 말을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사람을 3명이나 죽였는데도 아직 아무런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만일 프랑스 함선이 실제로 조선에 왔다면 주교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저에게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 한 장을 주면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화려한 여러 가지 색깔로 두 장을 그렸는데 이것이 그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한 장은 임금님께 바칠 것이랍니다. 지금 저는 대신들의 지시로 간단한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큰 학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참으로 딱한 사람들입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슬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 보았을 뿐인데 또 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진정으로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이시고 지극히 공경 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또 베지 주교님께도 같은 인사를 드립니다. 다블뤼 신부님께 지극히 공손한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주교님께 올리는 편지의 추신 : 감옥 안에서, l846년 8월 29일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왔다는 확실한 소식을 오늘 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협만 하고 돌아간다면 도리어 우리 교회에 크나큰 재앙만 남게 하고 저도 그로 인하여 죽기 전에 가혹한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 하느님, 모든 일을 잘 보살피시어 좋은 결과가 있게 하소서.
감옥 안에서 1846년 8월 26일
성가 68. 기쁨과 평화 넘치는 곳
☞천주교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 성지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어농, 단내,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 성지.
제 2차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 성지.
제 3차 배론 성지, 묘재, 용소막성당, 부엉골신학당.
재 4차 초남이 유항검생가터. 치명자산.
제 5차 갈매못 성지, 다락골줄무덤 성지, 홍성읍성 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지, 연풍,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 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 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 정약종 유적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 숲정이 성지, 천호산 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은이 공소, 골배마실.
제12차 나바위 김대건 신부 귀착지. 김대건신부 출생지.
제13차 해미 성지, 성거산 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 성지, 이승훈 묘 성지, 남양 성모 동산.
제15차 대구 관덕정 성지, 한티 성지, 신나무골 성지,
부록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도착 : 매월 3번째 주일 사당역 1번 출구 아침 8시출발․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명동 2가 1번지 가톨릭 회관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