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과 효와 학문을 사랑하는 선비정신을 이은 함창 김문 삼봉서원과 두릉서당 이야기
[삼봉서원과 두릉서당을 고찰하면서]


삼봉서원현판(한국국학원소장) 김개국의 유적인 영주 만취당(삼봉서원 자료보관)


두릉서당 현판(퇴계선생 친필) 두릉서당(봉화 봉화읍 덕적리)


두릉서당 물암할배 시판

물암할배 문집(영주 소수서원 소장)
三路公 爾音의 中始祖는 德原君 文貞公 宗悌이고, 2세 御使公 金鈞으로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고려 말 선비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린 낭장공(郞將公) 重瑞(함창 9세)의 아들 삼로공(三路公) 이음(爾音 함창 10세)은 강원관찰사를 지냈고, 친상을 당했을 때 묘 아래 움을 짓고 살며 하루에 세 번씩 묘를 돌아보았는데, 좌·우로 지팡이 자국이 길을 이루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기리어 사람들이 삼로(三路)선생이라고 불렀다. 조선 태종조(太宗祖)에 정려(旌閭) 되었으니 정려각(旌閭閣)이 있었다. 지금은 봉화읍 문단리 요산(腰山 허리뫼)에 있다. (大同普대동보)
당대의 효자(孝子)로서 태조조(太祖朝)에 정려(旌閭)를 받은 삼로공(三路公) 이음(爾音)의 후예는 효와 학문을 면면이 이어 시(詩), 문(文), 서(書)에 으뜸이라는 물암공(勿巖公) 융(隆)을 거유(巨儒)로서 추앙(推仰)받는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이 어찌 함창김씨(咸昌金氏)의 영광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충과 효와 학문을 사랑한 함창 가문은 선비의 지조를 전통으로 면면이 이어왔다.
삼로공의 子 부정공(副正公) 속(續)은 용궁, 진보, 의성, 영산 등지 현령을 지냈으며 명환록(名宦錄)에 등재되었다. 부정공(副正公)의 아들 정곡(正谷) 한진(漢珍)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고성현령 동래부사 진해부사를 역임했으며 문종(文宗) 원년(元年) 거제성(巨濟城)을 축조하였다.
삼로공의 6세손 勿巖 隆(1549∼1594 함창 16세)은 전성서 주부를 지낸 諟敬(시경)이 증조이고, 전주교수 龜息(구식)이 조부이며, 사재감 참봉 應麟(응린)이 부이다. 勿巖公 隆의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연구하고 산법(算法)과 천문학에도 능통하여 스승의 격찬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년) 집현전 참봉(集賢殿參奉)을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상주(喪主)의 몸으로 창의(倡義)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토적휼민(討賊恤民)하는 방책(方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효종(孝宗) 2년(1651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물암(勿巖) 김융(金隆)이 후진 양성을 위해 1569년에 세운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두릉서당(杜稜書堂). 현판은 이황의 친필이다.
김융은 14세에 지방의 선배인 嘯皐 박승임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융은 놓지 않았고, 행동거지와 말씨가 매양 조용하고 단정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어른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탄복하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중하게 여기며 매양 “이 아이는 끝내 큰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때 퇴계 이황이 동남쪽에 도학을 크게 일으켜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김융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고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 때 김융의 나이가 18세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보내며 시 한 수를 주었다.
열다섯 남아의 뜻
3천 제자와 나아가는 길이네
이 길을 지남으로 삼아 똑바로 달려가
자신을 책찍질 해 방황이 없기를
김융은 퇴계의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날로 공부가 성취하였다. 문하를 떠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퇴계 이황은 시를 주어 물암의 공부를 독려 하였다.
그대의 몸은 모습을 바꾸려는 물고기와 같으나
나의 가르침을 아직 그대 속에서 완성 되지 않았네
세월이 흘러가 이제 그대를 보내니 가서 공부에 힘쓰라
궁벽지고 한적한 곳에서도 뜻은 크게 자라나니
퇴계 이황은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어 학문에 힘쓰도록 격려하였다.
“그대는 책을 볼 때 글 하나까지 세밀하게 살피는데 이 점에서 무리 중에서 그대와 겨눌 사람이 없다. 전에 잘못 보았던 것을 그대로 인하여 새로 보게 된 부분도 많았다”
이황은 특히 김융과 함께 산법을 窮究하지 못하게 된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김융의 공부방법과 그 장점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김융은 잠시도 나태하지 않고, 공부에 힘썼으며, 산 속에 작은 亭舍를 짓고 杜稜亭舍 라고 편액을 걸었다. 특히, 중용과 대학을 김융이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던 책이다. 그는 언제나 “요순의 도리는 효제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스승 이황이 타계하자 김융은 心喪을 3년 하였는데 매월 삭일마다 제물을 갖고가서 제향을 올렸다. 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예문이 정한 대로 빈틈없이 행하여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임진왜란에 왜적이 침범하자 격문을 여러 지역에 보내 충의를 부추겼으며, 布衣 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 이 때 왜적의 문제 뿐 만아니라 기아의 문제가 심각해서 어떤 지주가 구휼미를 내어 김융에게 구휼의 책임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상중이었으므로 사양하고, 뒤에서 돕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상이 끝나자. 천거되어 집경전 참봉이 되었으나 사은하고 돌아왔다.
1594년 타계하니, 향년이 45세였다. 두릉서당 뒷산에 장례 하였다.
인조 때 사림에서 그의 篤行을 추천하여 司瞻奉事(사첨봉사)에 추중 되었고, 효종 때는 동정대부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차관에 추중 되었다.
물암공 륭의 對松亭(대송정) 板上詩(판상시)에
對松亭(대송정) 晩眺(만조)
高巖松檜翠相交(고암송회취상교) 早暮登臨瞰遠郊(조모등임감원교)
沙水迢迢蘆帶冷(사수소소노대냉) 滿汀鴻雁自相呼(만정홍안자상호)
대송정의 만경을 조망하며
높은 바위 소나무 회나무 푸르름 엉켜 있어
아침저녁 오르며 먼 들녘 내려다 본다.
沙川(사천)의 물은 멀고 갈대에 찬 기운 서리니
갯가 가득 크고 작은 기러기 서로 부르네.
물암공은 시와 서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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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峯書院
영주, 이산면 신암리 실내 마을 삼봉골에 斗岩山(두암산)이 있고 三峯(삼봉)이 있으니 三峯(삼봉)을 面對(대면)하여 三峯書院(삼봉서원)을 士林(사림)에서 세웠다. 四先生(사선생)을 奉安(봉안)하였으니 位次(위차)는 三路(삼로) 金先生(김선생 爾音), 溫溪(온계) 李先生(이선생 瀣 퇴계의 형), 晩翠堂(만취당) 金先生(김선생 蓋國), 勿巖(물암) 金先生(김선생 隆)이고 享祀日時(향사일시)는 春秋(춘추)로 仲月(중월) 下旬(하순) 丁日(정일)이었다고 勿巖公(물암공)의 玄孫(현손) 鐵南公(철남공)(始鏵(시화) 進士(진사 1662-1731)의 三峯誌(삼봉지)는 伝(전)하고 있다.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설립자 : 지역 유림
년 도 : 1650년
승 격 : 미상
배 향 : 김이음, 이해, 김개국, 김융
소재지 :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삼봉골)

삼봉서원 현판 김개국의 유적인 영주 만취당
만취당에 보관되어 오다가 국학진흥원에 기타 보관되고 있는 삼봉서원 현판
연혁
삼봉서원은 1650년(효종1)에 창건한 후 1654년 1654년 삼로 김이음, 온계 이해, 만취당 김개국, 물암 김륭 선생을 배향하고 삼봉서원이라 하였다. 1714년(숙종 40) 김개국金盖國, 김륭金隆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창건 당시 서원의 건물로는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인 박약재, 서재인 수양재가 있었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다. 그후 후손들과 지역의 사림이 강당만을 새롭게 건립하여 서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강당은 정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 우측에 마루 반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강당만이 홀로 삼봉서원을 지켜오다가 무너져 지금은 서원의 흔적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찿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삼봉서원 현판과 명교당 현판은 만취당(晩翠堂)에 보관을 하고 있다가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관리하고 있다.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
배향인물
1) 김이음(金爾音) ?∼1409(태종 9).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백옥(伯玉), 호는 삼로(三路). 아버지는 용(勇)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지평이 되었으며, 2년 뒤 문하사인이 되었다. 조선건국 뒤에는 우사간이 되었고, 1405년((태종실록 태종 5년 7월 8일(신축) 유관(柳觀)으로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를 삼고, 성석인(成石因)으로 충청도 도관찰사를, 함부림(咸傅霖)으로 경기 도관찰사를, 김이음(金爾音)으로 강원도 도관찰사를, 유습(柳濕)으로 충청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겸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강사덕(姜思德)으로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를 삼았다. 太宗 九年(己丑:1409年) 3월 16일(기미) 전 강원도 도관찰사 김이음(金爾音)이 졸(卒)하였다.)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김이음은 친상을 당했을 때 묘 아래 움을 짓고 살며 하루에 세 번씩 묘를 돌아보았는데, 좌·우로 지팡이 자국이 길을 이루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삼로(三路)선생이라고 불렀다. 태종 때 효행이 뛰어나 정문이 세워졌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감사(監司) 김이음(金爾音) 묘는 화천(花川) 만운동(滿雲洞)에 있다.
권근의 입학도설 전집 단간본을 1397(태조6)년에 진양에서 김이음이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발문을 썼다.
2) 이해(李瀣) 1496(연산군 2)∼1550(명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황(滉)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眞城(진성) 李氏(이씨) 실내 入鄕祖(입향조) 山冥(산명)(溫溪(온계) 瀣(해)의 손자)은 강보에 싸여 실내 외가로 왔으니 副正公(부정공)의 玄孫(현손) 參奉公(참봉공) 應麟(응린)이 외조부이고 勿巖公(물암공) 隆(륭)(贈左承旨(증좌승지1549-1594)은 외숙이다.
參奉公(참봉공) 따님(山冥(산명)의 어머니)이 分財(분재) 받은 산이 20여 町步(정보)라고 李氏(이씨) 新川派門(신천파문)에 전승되어 오고 있다. 新川派祖(신천파조) 山冥(산명)의 묘가 있는 이산면 지동리 산 195번지 임야 132,784M2 와 이산면 신암리 산 46번지 임야 97,074M2 가 그 산이다.
山冥(산명)의 아들은 燦漢(찬한)(掌令(장령),1610-1680)이고, 6세손 孝燮(효섭1759-1821)이 水害(수해)로 흑석으로 移去(이거)했다 하니 200여년을 실내에서 世居(세거) 했다.
3) 김개국(金蓋國) 1548(명종 3)∼1603(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晩翠堂). 영천출신. 아버지는 몽득(夢得)이다. 1573년에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고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랑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껏 모셨으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임해서는 의리로써 털끝만큼도 굽히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불우한 세상을 살다가 죽었다. 뒤에 집의에 추증되었고, 1643년(인조 21) 영주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 《만취일고》가 있다.
延安(연안) 金氏(김씨) 入鄕祖(입향조) 世衡(세형) (俱(구)의 아들)은 단종 때 禍(화)를 피하여 하녀 등에 업혀 어머니(仁川(인천) 李孝仁(이효인)-호조참판-의 아들인 繼長(계장)의 딸) 선외가인 실내로 왔으니 三路公(삼로공)이 외조부의 외조부이다. 晩翠堂(만취당)(盖國(개국) 의병대장 강원都事(도사)은 世衡(세형)의 증손이다.
4) 김륭(金隆) 1549(명종 4)∼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 아버지는 참봉 응린(應麟), 어머니는 현풍곽씨로 자보(子保)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소학》·《가례》·《태극도설》·《통서 通書》 등을 수학하였으며, 《중용》·《대학》 등 경서와 산법(算法),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려 기병(起兵)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듬해 학행(學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주 삼봉서원(三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물암집》·《삼서강록 三書講錄》 등이 있다.
건축물
창건 당시 서원의 건물로는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인 박약재, 서재인 수양재가 있었으나 어느 해인지 다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후손들과 지역의 사림이 강당만을 새롭게 건립하여 서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강당은 정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 우측에 마루 반 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강당만이 홀로 삼봉서원을 지켜오다가 무너져 지금은 서원의 흔적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삼봉서원 현판과 명교당 현판이 연암김씨 만취당 종중에 보관되어 오다가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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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稜書堂
봉화 적덕리 두릉서당은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253호로 1991년 지정됐다.
두릉서당은 물암 김융(金隆1549∼1594)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김융은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받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김융의 자는 도성(道盛)이고, 호는 물암(勿巖)이며, 본관은 함창이다. 아버지는 참봉 응린(應麟), 어머니는 현풍 곽씨로 자보(子保)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할 수 있는 방책을 류성룡에게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죽은 뒤에 승정원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선조 2년(1569)에 세운 이 서당은 앞면 4칸 · 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 양 옆으로는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김융은 14세에 지방의 선배인 소고(嘯皐) 박승임에게 배웠다.
종일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행동거지와 말씨가 매양 조용하고 단정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어른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하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중하게 여기며 매양 “이 아이는 끝내 큰사람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 때 퇴계 이황이 동남쪽에서 도학을 크게 일으켜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김융도 이황의 문하에 들었다.
김융이 세운 두릉서당(杜稜書堂)
소재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경북도 문화재 자료 253호>


두릉서당 현판은 이황의 친필임

두릉서당 시판

소수서원에 소장 물암 할배문집
두릉서당(杜稜書堂)에 걸려 있는 시판(詩板)이다. 앞부분은 퇴계 이황이 김융을 위해 지어준 「차운금도성삼절(次韻金道盛三絶)」 중 2수가 적혀 있다.
첫 번째 적혀 있는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몸은 모습을 바꾸려는 물고기와 같으나,
나의 가르침은 아직 그대 속에서 완성되지를 않았네.
세월이 흘러가 이제 그대를 보내니 가서 공부에 힘쓰시라.
궁벽지고 한적한 곳에서도 뜻은 크게 자라나니.”
김융에게 학문에 힘쓰라는 권면의 내용이다.
뒷부분의 6수는 김융이 직접 지은 것으로 스스로 학문에 힘쓰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릉서당은 김융金隆(1549~1594)이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고 나서 스스로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장소로서 건립한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려 기병(起兵)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듬해 학행(學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영풍(榮豊) 삼봉서원(三峯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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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전고대방典故大方』『태학지太學志』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한국 서원 이야기, 한국 국학진흥원 자료
* 始祖 古寧伽倻國 太祖 古露王(白珍) - 中始祖 德原君 文貞公 宗悌-2세監察御使 鈞 3祿文 4仁
5鏡高 6鏋 7中正8上護軍[龜]-郞將公(重瑞), 錄事公(重寶), 評理公(重器)
9세 이산면 신천(新川실내) 榮州派 郞將公(重瑞) 10 三路公(爾音)- 11續 -12 漢珍 -13諟敬-14龜息
-15참봉應麟 -16勿巖公(隆)-18 부정공 속-20 始鑌 -24 참판공 진하-25세여류공 호조참판
-29세 태두 태하(독립운동)- 30세 정하(독립운동)
9세 단산면 파회(波回, 바우) 順興派 錄事公(重寶)-12세 將仕朗 金嗣宗-13세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 희준 (希俊) -通政公派(14세 宗貞) 14세 西峴 金九鼎-15세 동고(東皐) 김경원(金慶遠)
9세 比安派 評理公 (重器) 10세 中訓大夫司宰監正 天降 11세 歸齊公 觚 12세 副司正 世老
13세 敬差 官守智 14세 將仕郞 參奉 世潘公 15세 奉直郞 司宰監僉正德隣(比安) 15세主簿 以 廉公(大里, 錦泉 宗中) 16세 習讀 通訓大夫 俊昌公(大里入鄕祖) 17세 燦碩公 18世 周興公- 19錦泉宗中 遠湖(大里분파 錦泉宗中)
첫댓글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사진이 나타나지않아 정말 아쉽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