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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암(馬巖)
穹窿馬巖石(궁륭마암석)-하늘같이 두터운 마암 바위
斑駁亦奇景(반박역기경)-아롱진 색깔 또 기이하구나.
江流齡其根(강유령기근)-흐르는 물이 수억 년을 씹었는데도
萬古堅不壞(만고견부괴)-단단하여 만고에 버티고 있네.
怒濤方蕩蕩(노도방탕탕)-성난 물살이 무차별 두드리다가
分此勢漸殺(분차세점쇄)-이곳을 지나면 차차 누그러지네.
孤城賴以完(고성뢰이완)-이 산이 바위의 덕을 힘입은 것은
論功難償債(논공난상채)-그 공로로 보상하자면 한도 끝도 없네.
人看一頑石(인간일완석)-사람들은 견고하고 기이함만 보지만
吾獨取其介(오독취기개)-나는 굽히지 않는 그 기개를 높이 사네
최숙정(崔叔精
늙은 어부가 마암(馬巖)의 역사를 어찌 알리오
경기도 여주시내 번화가에서 신륵사로 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기 전에 우측
언덕 위 절벽 바위산 위에 영월루(迎月樓) 정자가 있다.
달맞이 누각(樓閣)으로 어디다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낭만이 있는 정자이다.
우리나라에는 달과 관련이 있는 정자가 많다.
황간 월류정(月留亭), 소쇄원의 제월당(霽月堂), 서울 종로 풍월정(風月亭),
마산의 월영대(月影臺), 청도의 득월정(得月亭), 함양 농월정(弄月亭),
산청 취월정(醉月亭) 부산 해월정(海月停) 단양, 주앙산 망월대(望月臺)-----
등 이외에도 여러 곳이 있다.
달과 정자는 시를 쓰는데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다
중국 북송(北宋)때 유명한 문학가인 범중엄(范仲淹)은
近水樓臺先得月(근수루대선득월)-물가에 세운 누각에 달이 먼저 뜨고
向陽花木易爲春(향양화목이위춘)-햇빛이 잘 드는 나무에 봄이 쉬이 온다.
고 하였다.
영월루(迎月樓)는 여강(驪江)의 언덕 마암(馬巖)이라는 바위위에 자리하고 있다.
마암(馬巖)은 여주읍 상리에 위치한 영월루 아래의 벼랑 중간에 있는 괴암(怪巖)
을 말한다.
영월루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위에 음각(陰刻)
으로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 오래되고 희미하여 사진으로는 글체를 잘 볼수가 없다.
마암(馬巖) 글씨의 위쪽과 좌측에서 각각 “이인응(李寅應)”과
“???시월(十月) 일각(日刻)”
우측의 또 다른 바위에서 “신현태(申鉉泰)”라는 글씨가 있으나 지형이 험하고
접근이 어려워 더 이상 상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
이인응은 1870년(고종 7)에 여주목사로 부임한 인물이다.
신현태(申鉉泰) 군수는 1925년 당시 여주군청 정문이었던 영월루(迎月樓)를
이곳 마암(馬巖)위로 옮기고 바위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알려놓은 것이다.
이 마암(馬巖)은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의 시에
雙馬雄奇出水涯(쌍마웅기출수애)-두 마리 웅장한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 나와
縣名徒比得黃驪(현명도비득황려)-황여라는 이름을 이로부터 얻었네.
詩人好古煩微喆(시인호고번미철)-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캐 묻지만
來往漁翁豈自知(내왕어옹기자지)-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야 어찌 알리오!
하여 황려현(黃驪縣)이라는 지명이 마암(馬巖)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옛부터 시인묵객들이 여주팔경(驪州八景)을 아래와 같이 읊었으니
여주팔경(驪州八景)
神勒暮鐘(신륵모종)-신륵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馬巖漁燈(마암어등)-마암(馬巖)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鶴洞暮煙(학동모연)-강 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燕灘歸帆(연탄귀범)-강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洋島落雁(양도낙안)-양섬에 기러기떼 내려앉는 모습
八數長林(팔수장림)-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二陵杜鵑(이릉두견)-영릉(永陵)과 영릉(寧陵)사이의 두견새 우는
婆娑過雨(파사과우)-파사성(婆娑城)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그 가운데 그 가운데 마암(馬巖)의 경치가 포함되어 있다.
황려현(黃驪縣)은 여주(驪州)의 옛 지명이다.
신라 경덕왕때는 여주(驪州)를 “황효(黃驍)‘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여주(驪州)라는 지명은 예종 1년(1469) 세종의 영릉이 옮겨오면서
천령현(川寧縣)과 여흥(驪興)이 병합되어 만든 이름이니, 그 이름이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 마암(馬巖)에서 숲속에 파묻힌 신륵사(神勒寺)의 대가람이 보이고,
여주팔경(驪州八景)을 볼 수 있으니 마암(馬巖)의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마암(馬巖)에 관련된 구전(口傳)으로는 마암 근처의 암혈(巖穴)로부터
고종황제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시조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어느 날 한 늙은 어부가 낚시를 하면서 건너편의 경치에 넋을 잃고 있는데,
한 여인이 강을 건너달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 여인은 무척 다급하게 애걸하며 손을 흔들었다
바로 이때 여인의 뒤에서 험상궂은 한 남자가 여인에게 쫓아오고 있었다.
어부가 황급히 건너가 여인을 구해주려고 하자 별안간 뇌성벽력이 일며 세찬
바람과 물결이 휘몰아쳤다.
배는 요동하고 어찌할 줄 몰랐다.
그때 어디선가 황마(黃馬)와 여마(驪馬당나귀)가 나타나 그 여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여인은 재빠르게 황마(黃馬)에 올라탔고 뒤이어 그 사나이도 여마(驪馬)에
올랐다.
하늘엔 자욱한 물보라가 일고 어부의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 바람과 물결이 조용해지자 그 광경에 놀란 어부가 말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니 여인과 사나이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가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그 바위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왔다 하여 마암(馬巖)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여주)의 지명도 황려(黃驪)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 마암(馬巖)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을 남겼다.
서두(序頭)에 있는 한시는 여주목사를 역임했던 소요재(逍遙齋) 최숙정(崔叔精)
의 시다.
“당나귀 여(驪)”자의 지명을 쓰는 여주(驪州).
명성황후의 여흥 민씨(驪興閔氏).
모두 영월루(迎月樓)가 자리한 마암(馬巖)에서 근원(根源)을 찾을 수 있기에
마암의 전설을 모르고 여주를 찾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되어
여주(驪州)의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마암(馬巖)과 영월루(迎月樓)”를
소개하는 것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