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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진리 안에 있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모든 존재가 이미 진리 안에 있었고,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닌 진리는 저만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토록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이미 처음부터 진리 안에 있었고, 그랬기에 이렇듯 무언가 애쓰고 노력하여 진리를 얻으려던 나의 일체의 시도 자체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이미 진리 안에 있으면서 진리를 찾으려는 어리석음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럴수가! 아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심지어 목숨마저 내놓을 각오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믿고서 그렇게 달려왔고, 그러면서도 일체 경계(境界)가 사라진 밝은 깨달음의 경지가 쉽게 나타나 주질 않아 자신의 수행력의 부족함 앞에 몇 번이나 절망하며 안타까워 했었는데,
더구나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서 달려들었다가 두번씩이나 단식에 실패한 참담한 마음이었는데, 아아 이렇듯 지치고 일그러진 이 모습 이대로가 이미 완전하다니! 이 모습 이대로가 이미 진리라니! 아니, 이젠 이 말도 합당치가 않다.
완전이니 진리니 하는 이 말도 설 수가 없구나! 여긴 그 어떤 이름(名)도 붙여질 수 없는 자리가 아닌가!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질 않는가!
아아, 이럴수가! 언어이전(言語以前)의 세계는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 그 깨달음 속에서나 나타나는 무엇이 아니라 깨달음과는 무관한, 깨달음과 수행과 체험 이전의 지금 이대로가 아닌가!
그냥, 어쩔 수 없이, 이름하여 번뇌(煩惱)요 이름하여 보리(菩提)였지 번뇌도 보리도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닌가! 아아,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였다! 새로이 깨달을 무엇도, 얻을 무엇도 없는!!! |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나의 모든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이젠 이 말도 성립되지 않는구나!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방황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디에다 종지부를 찍는단 말인가? 허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
처음 이 글을 읽었을때 그분의 처절했을 구도생활과 고통스런 삶을 극복하고 얻는 한생각에 공감이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분의 강의나 책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위안을 얻은 것을 보며,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그런데, 한편으로 소위 "도"란 것이 그저 한생각의 얻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나? 내가 알고 있던 부처란 것이 정녕 있는
그대로의 나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더군요.
물론 제가 이분만큼 절실하게 구도의 길을 가보지 않았고, 그쪽으로 아는 것이 없기에 반론을 제기할 만한 능력도 없습니다만,
인터넷에서 이분의 주장에 반대하는 분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처럼 혼돈의 시대에 자기 중심을 잡는 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좀더 합리적인 안목으로 수 많은 정보나 환경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나 진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좀더
정확히 해보자라는 의미에서 반론 글을 올려 봅니다.
펌] 해오자의 문제 - 이동규 씨의 글 [6] 산야 san**** 번호 439658 | 09.02.21 02:05 조회 263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 ‘김기태의 도덕경 다시 읽기’ 식구님들께 드리는 글-
지언 xxxxxx@hanmail.net
이제 나는 ‘생각 한 끗으로 얻은 평화’를 단연코 부정한다.
난 구도자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체험을 해왔다. 그 중에서 한 때 “추구하는 마음[=분별심]만 내려놓으니 여기가 바로 그 자리로구나!”하며 환희한 적이 있었다. 한 마음 내려놓고 나니 그 자리에선 ‘그냥 살아도 아무 문제없음’ 외에 달리 더 구해야 할 도가 없었다. 단지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미래의 이상적인 나를 꿈꾼 것이 고통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어려웠던 선문답이나 선지식들의 법문도 70%는 다 알아졌고, 마음의 짐이 내려져 삶은 대번 룰루랄라가 되었다. 대승경전들이나 ‘신심명을 비롯한 선가의 명저들도 바로 이 소식을 전하고 있는 듯 하여 읽을수록 흐뭇하였다. 도는 정말 별것 아니었다. 누구 말마따나 ‘생각 한 끗’ 사이에 있었다. 여태 코를 쥐고 코를 찾고 있었으니 실은 코 잡기 보다 쉬운 게 도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정녕 이게 다인가?”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삐죽 싹을 내밀었다.
“이렇게 막 살아도 정말 좋은가? 안 것 같긴 한데 무엇이 달라졌지? 분명 무언가 모를 것이 있는 것은 또 왜인가? 왜 공안 ,법문들을 100% 알 수는 없는 거지? 선지식들이 아는 것을 왜 난 알 수가 없는가? 그들의 초범성(超凡性)이 왜 내게는 없는가? 이렇게 쉬운 도리라면 여태까지 부처님을 비롯한 위대한 스승들이 왜 계율과 수행이란 무거운 짐을 제자들에게 지워주었단 말인가? 과연 내가 그들이 간 데까지 가기는 간 것일까?”
난 “이건 비교하는 마음이야.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일 뿐! 나는 나답게, 부처는 부처답게! 지금 모르는 것은 삶이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려줄 거야. 그건 내가 간섭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야!”하고 그 싹을 짓밟아 버리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줄기를 내고 자란 ‘불안과 의혹의 나무’는 나의 그 얄팍한 평화를 깨뜨려 버렸다. 나는 결국 ‘양심적’으로 나의 이 평화를 부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 한 끗의 평화’와 ‘원초적 불안’ 사이의 내왕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제 나는 ‘생각 한 끗으로 얻은 평화’를 단연코 부정한다. 그것은 처음엔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것이고, 나중에는 자기 기만이 됨을 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전체’[=신, 공, 순수의식]를 증오(證悟)하지 못하고 알음알이[=解悟)로 깨달은 것은, 그것이 에고[=자아의식, 아상(我相]의 농간이기 때문에, 절대 영원한 평화에 가 닿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일시적 심리 치료술’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일체고로부터의 해탈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나에게는 정도와 사도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있다. 아래에 내가 지금까지 이 정(正)과 사(邪)에 관해 깨달은 바를 밝혀 여러 도반님들께 나의 간절한 노파심을 전하고, 이제는 초발심으로 돌아가 오직 화두 하나만 간절하게 들려 한다. 화두 들기는 의정(疑情) 키우기가 핵심이다.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되도록 다른 모든 일로부터 벗어나 오직 이 한 길을 가려고 한다. 에고의 농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 바로 이 길임을 이제서야 비로소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해오( 알음알이) 에 빠져 허송세월 하였다.
개별의식[=‘나’라는 인식주체에 대한 존재감, 에고의식]은 분리감[=‘분리의식’]을 동반한다. 이 분리감은 착각이다.[=‘원초적 착각’] 왜냐하면 전체에서의 분리는 없으며, 모든 개별자는 언제나 전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전체는 무와 유를 다 포함한다.
그럼 개별자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체의 놀이에서의 개체로 분한 전체의 한 역할이다. 그것은 바다[=전체]의 파도[=개별자] 같은 것이다. 파도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한 바다의 일시적 작용이다. 파도가 전체로서의 자신을 망각하고, 개별자로서의 의식을 가져야만 ‘바다의 춤’이라는 대 연극이 공연될 수가 있는 신비가 있다.
우리는 바다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인식주체와 대상이 분리되기 이전이므로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무어라 말할 수 없으므로 古人들은 이 본체를 ‘空 또는 ‘無’라 하고, 바다가 파도가 되는 현상을 ‘진공묘유’라고 명명하였다.
개별자는 개별적 육체와 에고의식을 갖고 있다. 에고의식[=개별자로서의 의식]은 곧 분리의식이다.
그것은 자신을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는 바 이것이 ‘원초적 불안’을 낳는다. 에고는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외연(外延)을 확장하려는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하여 재산, 건강, 지위, 명예, 권력, 각종 공동체 등 여러 가지 안전판들을 마련하고, 그 최종 바탕으로서 신념체계[=이데올로기, 종교]를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리하여 에고의식을 가진 개별자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충돌하게 된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과 네 입에 들어가는 것이 다르고, 내 사랑과 네 사랑이 다르며, 나의 조국과 너의 조국은 다르니 각자의 안전 확보를 위해 개별자들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에고의식이 주도하는 세상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없다. 세상의 우정과 사랑은, 그래서, 다 가짜다. 더 좋은 것 더 안전한 것이 오면 친구고, 아내고, 자식이고, 선후배이고가 없다. 모두 흔들린다. “우리가 남이가!”, “우리는 하나다!”란 외침도 다 가짜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신나게 외치고 돌아서면 어쩐지 공허해지는 것이다. “나는 진실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자에게 그의 안전을 위협할 정도의 구원을 한번 청해 보라. 그러면 바로 그 사랑이 가짜임을 알 것이다. 에고의식이 주도하는 한 거기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다. 거기 사랑과 평화, 그리고 ‘더불어 살기’란 없다.
구도자는 본능적으로 이 에고의식이 바로 고통의 뿌리임을 알기 때문에 이것과 씨름한다. 그리하여 “대체 ‘나’는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 에고의식의 주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도자는 에고의식의 뿌리를 파헤쳐서 전체에 닿으려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구도자란 영원한 평화를 누리는 스승들의 경지를 신뢰하고서 그처럼 깨달음을 얻어 그 평화에 도달하려는 자이다.
그러나 에고의식을 넘어 전체에 닿는다는 말은 인생사 중 가장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에고의식의 죽음[=‘나’의 죽음] 내지는 주도권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고의식은 이를 알기 때문에 술수를 부려 이를 한사코 방해하려 한다. 그 중 구도자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해오를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선경어, ‘동어서화’ 등 선가의 지침서 등에는 이 빠지기 쉬운 위험에 대한 경고가 수도 없이 나온다.
에고의식을 굴려서 문득 한 생각을 얻은 이들 해오자들은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고 새 하늘 새 땅이 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하여 곧잘 이렇게 기고만장해버린다.
“번뇌를 일으키는 이 에고의식의 작용[=파도]이 이미 전체[=바다]이다. 바다가 따로 있는 게 아닌데 어디서 따로 바다를 구한다는 것인가? 온 천지가 바닷물 일색인데 이를 떠나 어디서 바다를 구할 수가 있겠는가? ‘번뇌즉보리’라고 경전에도 나와있지 않던가? 그러므로 도를 구하는 자는 절대 도를 못 얻는 것이로구나. 하하, 이 엄청난 비밀이여! 어리석은 수행자들은 오늘도 제 코를 잡고는 코를 찾고 있구나!”
이리하여 그들은 평생을 구도에 바치는 수행자들을 바보로 여기기 시작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수행이란 업이야말로 정말 바보들의 행진이요, 코미디 중에 코미디인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의 행운을 즐긴다.
“딱한 사람들. 그러나 이 코앞의 진리를 아는 것도 다 시절인연이 익어야만 알 수가 있는 법이지!”
한 땐 내가 그랬으니까 나는 이 형편을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오 이후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내게 있었으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것이 있었다면 해오를 의심해야 한다. 다 아시겠지만 사실 나는 여러분의 경지를 의심한다.
부처님은 끝까지 수행의 모범을 보인 분이다.
첫째, 난 싯달다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이후에도 규칙적으로 선정에 들고, 제자들에게도 엄한 계율과 수행을 강조하며 나머지 생애를 산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원래 중생인 적이 없었던 이 도리만 잘 설명해주고 즐겁게 살도록 하면 될 터인데 그 무슨 개나발 같은 선정과 그 무슨 죽을 놈의 수행의 단계 같은 것들을 설하여 이 장난꾸러기 부처님들의 무궁한 자유를 억압한단 말인가? 그것은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분명하게 알 것 같다. 그것은, 어느 해오자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그 시대 중생들의 근기가 둔했기 때문에 둘러 가는 고된 수행의 길을 제시한 게 결코 아니라 해탈을 위한 필수 불가결의 길이었다.
보라. 처음 싯달다는 에고의식들이 낸 욕망들이 분투하는 화택(火宅)과 같은 삶의 현장을 고통이라고 직관하였고, 바로 이런 ‘원초적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출가하였기에 그는 욕망의 뿌리인 이 에고의식을 뚫고 들어가야만 했었다. 그는 여러 명상법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에고의식의 작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행법의 하나인 위빠싸나를 통해 어렵게 삼매에 들어가 마침내 무상등정각을 얻음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탈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 최종적인 삼매는 에고의식[=파도]의 저 너머에 있는 순수의식[=심해(深海]에의 체험이었다. 능엄경 등의 경전을 보라. 거기 무수한 삼매들, 즉 그 깊이에 따른 각각의 색다른 바다체험에 대한 자세한 부처님의 설명들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알음알이 해오자들이 도무지 알지 못할 부분들이다. 붓다가 설한 여러 가지 삼매의 종류 또는 수행의 단계란 바로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만 굴려 ‘바다=파도’의 도리를 알아낸 해오자들이 삼매체험이나 기타 수행의 단계들을 도매금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숫제 망발에 다름 아니다.
해탈 후 붓다가 된 그는 완전히 변했다. 그는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여러 욕망의 존재를 느껴 알고 있었지만 그것[=파도, 욕망]이 전체[=바다, 순수의식]의 한 작용에 불과한 것임을 진실로 아심으로서 더 이상 욕망의 작용에 끄달리지 않는 대자유인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선사들은 왜 끝까지 화두를 챙기라고 하는가?
둘째, 해오 이후 선사들의 법문을 읽어보니 바로 내가 서 있는 경지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법문은 속 시원히 곧잘 하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화두 챙기기를 간절히 독려하는 데 대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그냥 살라하면 될 일을 그 무슨 죽을 놈의 화두 오랏줄로 수행자들의 삶을 묶으려들어?” 그래서 우리끼리는 곧잘 “이 양반들 잘 나가다가는 꼭 이렇게 삼천포로 빠진단 말이야.”하면서 낄낄거렸었다.
하이구. 이것이 얼마나 큰 망발인지를 난 거의 10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전체에 닿아보지 못한 해오자는 여전히 에고의식의 작용에 끄달린다. 그에게는 오후(悟後)오전(梧前)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에고는 오히려 더욱 간교해 져서 끄달릴 때조차도 “이것 외에 달리 무슨 부처성품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나의 ‘청정한’ 부처성품인 게야. 청정하고 안 하고가 붙을 수가 없는 자리이니 이를 다만 ‘이름하여 청정하다’라고 한 것이지.” 라고 큰소리치며 불안을 잠재우곤 한다.
그러나 증오자는 그렇지 않다. 그는 전체[=심해]에 실제로 가 닿았다. 심해에 가 닿은 그는 이제 파도의 작용이 한 눈에 이해된다. 그리고 그 역시 파도가 곧 바다[번뇌=보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바다를 안 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 맛도 못 본 자가 머리만 굴려서 하는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해오자는 바다를 안 적이 없다. 그는 머리만 굴려서 파도가 곧 바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니 그 차이는 바로 욕망들에 대한 끄달림 여부로 나타난다. 바다를 안 자[=증오자]의 중심은 언제나 바다에 있다. 그는 중심이동을 했다. 파도는 여전히 작용하더라도 중심은 언제나 바다에 있으니 파도[=에고의식]에 더 이상 끄달리지 않는다.
이를 ‘여여하다.’, ‘동중정(動中靜)’이라 한다. 그에게도 여전히 에고의식의 흔적이 남아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거기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에고의식을 갖고 노는 격이 된다.
이에 비해 해오자의 깊은 내심에는 여전 불안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그는 경전이나 법어집을 구석구석 뒤져서 그의 해오와 일치하는 내용들을 찾아내어서는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타인에게는 이를 인용한 장광설을 펼치고 찬탄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에고의식을 만족시킨다. 물론, 잘 모르는 부분은 살짝 뛰어넘는 간교함도 보인다.
“알 필요가 있고, 알 때가 되면 모르는 것들도 자연 알 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핵심만 꿰차면 된다. 핵심은 바로 분별심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가장 중요한 분별심을 내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여기’의 삶에 아무런 장애가 없고, 삶이 지극히 가볍게 되지 않았는가? 놀랠루야!”
해오자는 여전히 에고의식에 끄달린다. 다만 그 끄달림 조차도 부처성품(불성)]의 발로라고 머리를 굴려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해탈한 것이 아니다. 그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이것이 증오자와 해오자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들이 아는 맛을 내가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셋째,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전들과 화두, 그리고 법문들이 상당부분 이해되는데도 100%는 이해되지 않은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다 때가 있는 법이고,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내가 꼭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으면 저절로 이해가 올 것이다. 그걸 모른다고 사는 데 무슨 지장이 있는가? 그걸 모른다고 나의 부처성품이 어딜 가는가? 모르면 모른 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하면서 별 문제가 되지 않다가도 풀이 좀 죽어지면 그것은 곧 바로 불안이 되었다.
“어째서 깨달은 이들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바를 나는 알 수가 없는가? 깨달음, 즉 순수의식은 한 맛일텐데 그들이 아는 맛을 내가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과연 그들이 맛본 것을 맛보기나 한 것일까?”
하고.
선사들이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숙(熟眠一如) 여부를 점검하는 것은 다 까닭이 있다.
바다의 깊이가 다른 만큼 삼매의 경지도 다르다. 그래서 무슨 각(覺), 무슨 각이 있고, 최종적으로는 구경각이란 게 있다. 그렇다. 삼매를 체험했다면 일단 각자이긴 하다. 그러나 구경각, 즉 무상정등각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반드시 미세불안, 즉 업식과 습 등 털어 내야할 에고의식에의 끄달림이 남아있고, 그러므로 더 수행해야할 부분이 남아있는 것이다.
한 화두는 이해가 되는데 다른 화두는 꽉 막히고, 이 경전은 쉽게 이해되는데 저 경전은 도무지 모르는 현상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한 화두를 돌파하고도 또 다른 화두를 들고는 죽을 때까지 가기도 한다.
이처럼 에고의식의 밑창을 뚫고 들어가서 순수의식의 심해에 닿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각자들이 죽을 때까지 삼매를 추구하고, 수행을 계속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생각 한 끗’으로 해오한 자가 이들을 비웃는다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사들이 누누이 경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해오자는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인다. 그리하여 봉사가 봉사를 인도하는 업을 짓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안광낙지시가 다가와 시간의 심판대에 서게되면 그는 자신이 진정 안 것인가를 되물으며 불안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에 반해 순수의식에 닿아 중심이 늘 깊은 바다에 있는 자는 죽음이 와도 정신이 흩어질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주시자 늘 깨어있는 사람이다. 죽음이란 현상을 통과할 때도 그 과정을 끝까지 주시한다. 정신이 흩어지지 않는다. 그는 에고의식의 끄달림으로부터 진실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에고의식에 중심이 있는 사람은 죽음이 찾아올 때면 에고의식의 끄달림이 최고조에 달해 혼수와 산란 속에서 제 정신을 잃고 만다. 그에게는 수행으로 쌓아 둔 선정력 즉 주시력이 없기 때문이다.
막판에는 그 좋던 유유자적함 다 잃어버리고 팔다리 버둥대며 허우적거리다 ‘죽음에 잡혀서’ 간다. 그리하여 자연의 이법에 따라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갈 곳도 모른 채 휩쓸려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의 최후이다. 그의 경지는 이렇게 뾰록이 난다. 적어도 죽음의 순간에 제 오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볼 수가 없다면, 그 때에도 늘 깨어있지 못하다면, 그는 중심이 전체에 있지 못한 자가 분명하다. 이처럼 진실은 속일 수가 없다.
이를 검증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진실한 구도자라면 자신이 잠잘 때를 한번 잘 살펴 보라. 잠이 깨어있을 때 해오자는 얼마든지 각자인척 연극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잠이 들면 그의 현재의식은 셧아웃된다. 이 때 그는 어디에 있는가? 더 깊은 의식세계에서 꿈을 꾸게 되면 그는 꿈속에서 한없이 끄달리게 된다.
중생심이 곧 불심이라는 그의 뛰어난 법문도 다만 에고의식이 낸 한 생각에 불과했던 까닭에 꿈속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중심은 늘 에고의식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꿈을 잘 살피면 자신이 깨어있는 자인지 에고의식에 끄달리는 자인지를 대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전체에 닿은 자는 다르다. 그는 중심이 바다에 있다. 그는 에고의식의 작용을 늘 지켜본다. 그는 늘 깨어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깨어 있으므로 그는 에고의식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어있을 때나 잠 잘 때가 똑 같다. 그는 꿈을 꿀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꿈을 꾸면서도 꿈꾸는 줄을 알고 꾼다. 휩쓸려 들어가 정신을 잃고 번뇌 속을 헤매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각자는, 꿈처럼, 죽음이 오면 그것도 흔들림 없이 주체적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죽음을 미리 알리고 최후까지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그저 여행 떠나듯 좌탈(: 앉아서 숨을 거둠)입망(: 서서 숨을 거둠)의 모습을 보이는 선사들의 초범(超凡)한 최후는 그가 무슨 특이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에고의식의 발로 때문이 아니다. 이 또한 후학들에 대한 우뢰와 같은 법문인 것이다. 오직 중심이 바다에 있는 자만 이런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 해오자들이 선사들의 이런 모습까지 비웃어 대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특별하게 죽어? 그냥 오는 대로 죽으면 되지.”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수작이다.
모 선사는 깨달음을 점검하러 오는 수자에게 “자네, 그 좋은 것[=평화]이 일상 생활 속에서 바삐 움직일 때[=동정일여]나 꿈을 꿀 때[=몽중일여] 그리고 꿈도 없는 깊은 수면 속[=숙면일여]에서도 여전히 있던가?” 라고 꼭 물어보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이 또한 문법자가 언제나 깨어있는 경지를 체득하고 있는가에 대한 점검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구도자들이 도달해야 할 진정한 목표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중심이 늘 바다 쪽에 있는 상태라야 파도의 작용에 끄달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우리 도덕경 식구님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다. 나는 위 물음에 대해 우리 식구님들이 자신에게 진실하게 대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해오를 끝까지 깨달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에고는 다시 또 이렇게 교묘한 변명을 해 댈 가능성이 있다. “진실해야할 고정된 자신이란 게 애당초 없는데 어디다 대고 진실을 논할 것인가?”라고. 이런 자는 이미 천석고황의 병에 걸려버린 자이다. 이런 자라면 부처님도 구할 수가 없다.
아, 이 땅에 지금 부처 사태가 난 것 같다. 이런 해오자들이 저마다 싸이트나 회상을 열고 심리치료업을 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의 자신이 그 어떠하더라도, 그것을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수용하기만 하면, 그 현재가 바로 천국으로 변한다고 약속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추태도 가감 없이 보이면서 그것이 무애행인양 한다. 그리고는 구미에 딱 맞는 경전이나 어록들을 인용한 도올식 장광설로서 해탈을 성취시켜준다고 전을 벌리고 있다. 수행과 삼매의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경전들, 예컨대 능엄경 같은 경전은 절대 교재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돈오법이라고 내심 자부한다.
맙소사. 해탈이 ‘여기가 바로, 그리고 이미, 거기이다.’란 강의로서 그토록 간단히 성취되는 것이라면 일찍이 위빠사나 명상법과 엄한 계율을 가르치신 부처님은 너무나 잔인한 분이셨다. 오직 “구하는 그 놈이 바로 그걸세.”라는 도리를 요리조리 알아들을 때까지 재미나게 설명하면 될 일을 구도자로 하여금 남녀간 그 좋은 사랑도 못하게 하고, 그 좋은 술도 못 먹게 하고, 오직 누추한 옷을 입은 채 구걸[=탁발]하여 연명하며, 평생을 꼼짝없이 내면만을 응시하며 살게 하였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또 그들은 언필칭 언하대오를 말한다. 그러나 화두를 들고 의정이 꽉 차서, 에고의식의 작용이 차단된 자가 눈밝은 스승의 한 마디에 깨지는 것하고 에고의식으로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가 “아하, 이것이로구나!”하고 해오한 자의 언하대오가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오직 눈밝지 않은 엉터리 스승만이 그런 자를 인가하며, 사제가 서로 한 세월 탱자탱자 하다가 그만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음에 휩쓸리고 마는 것이다.
삼생을 아는 것이 삿된 길인가?
넷째, 깨달으면 삼생을 통찰하는 지혜가 열린다고 했는데 나는 왜 전생을 비롯한 사후의 삶에 대해, 영혼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까막눈인가 하는 의문이 늘 있었다. 이것도 “알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런 초능력들을 가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모습[=부처성품]을 부정하는 분별심의 발로이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가는 가장 소중한 ‘지금 여기’ 놓치고 만다. 그러니 이런 분야는 이미 분별심을 내린 자가 관심 둘 일이 아니다.” 하며 넘어갈 때도 있었으나 풀이 죽으면 역시 “이것은 전체에 닿은 자라면 저절로 알게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안 쓰는 것과 모르고 못 쓰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라고 흔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윤회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다. 그 원리가 인과응보 자업자득임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의식에 각인된 것들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날 때부터 봉사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피아노 교습이라고는 단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7세 아동이 피아노 연주 소리만 들으면 한 치 오차도 없이 건반을 두들겨대는 현상을 최근 TV를 통해 보았다. 이 이론이 아니라면 이런 현상을 설명할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의식세계를 섭렵하여 그 실체를 증득한 진정한 각자라면 의식세계에 원인을 둔 일체의 고통을 치유하는 도리를 일러줄 수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부처님을 의왕이라고 한다. 그는 중생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해탈의 길을 열어줄 수가 있다. 법구경 등에는 부처님께서 실제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그 전생을 일러주어 고통의 업을 받은 원인을 밝히고, 이어지는 법문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씩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는 장면들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하다 못해 구병시식 전문가들도 의식 요법을 통해 중생들의 갈 길을 열어주고 고통을 덜어주는데 한 몫을 한다. 그런데 소위 돈오를 했다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깜깜해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깜깜할 뿐 아니라 그런 고통을 다스리는 일을 폄하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태도는 ‘신 포도 이론(Sour Grape Theory)’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법문을 통해 심리적 짐을 내려놓게는 한다. 그렇다. 분명 한 자락의 시원함은 줄 수가 있기 때문에 심리치료 효과는 있다. 더러는 기적 같은 효과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물리적?신체적으로도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능한 해오자는 환자의 현재를 혐오함으로써 생기게된 무거운 짐을 한 자락 법문으로 순식간에 시원하게 내려버리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기대할 수가 없다. 더욱 복잡한 영적, 심리?정신적인 복합 질병들은 그들의 능력 밖이다. 예컨대 그들은 심하게 빙의)된 자를 결코 치유할 수 없다.
믿기 힘들겠지만 능력 있는 제령 전문가라면 단칼에 그들을 치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오자들은 의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실은 의왕인 부처가 아니라 중생이다. 부처라고 착각하고 있는 중생인 것이다. 해오에 집착하는 이들은 사실은 여늬 중생보다 오히려 더 위태롭다. 왜냐하면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업을 저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도와 정도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나는 사도와 정도의 분기점이 아주 명확하게 보인다. 그렇다. 그 중심이 에고의식에 있어, 그 작용에 끄달리는 자가 에고의식을 끝없이 확장해 나가는 길은 사도이다. 이런 식으로 에고가 한껏 확장된 자는 마침내 천지를 마음대로 주무를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자신이 우주의 주인인양 자처하거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여기며 막행막식을 해대고, 추종자들의 절대 복종을 강요한다. 이런 자는 양심이란 게 없다. 그야말로 양심에 화인을 맞아버린 자이다.
그는 때로 상당한 초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신도 속고 신도들도 속인다. 인간은 본래 이런 신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 미세불안이 남아 있다. 처음엔 자신도 속지만 숭배의 대상이 되고 나면 점차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연은, 시간은, 그의 가장 준엄한 심판자이다. 언젠가는 그가 한 말이 그를 심판할 때가 온다. 자신도 헷갈리는 때가 오지만 대부분 에고의 교묘한 변명에 속아넘어간다. 이 시점에서 “아! 내가 잘못되었구나!”하고 돌이키는 자는 매우 드물다. 이처럼 자신에게 진실하기란 어렵다. 이런 자는 결국에는 측근이 그를 배신하거나, 불치병에 걸리거나, 발광하여 혼수 상태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어느 귀신이 그를 잡아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사도의 최후는 이와 같다.
정도는 고통으로부터의 영원한 해탈을 지향하기 때문에 에고의식으로부터 전체[=순수의식]로의 중심이동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에고의식의 약화 내지는 주도권 박탈을 위한 수행이 반드시 수반된다. '위빠싸나', '화두선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신의 이름이나 부처의 이름을 염송하는 것도 염송하는 자신을 지켜보는데 중심을 둔다면 그것은 정도이다.
그러나 신의불에 의지하는 마음을 내어 부른다면 이는 사도로 빠진다. 왜냐하면 그 의지심이 극한에 가면 '에고가 창조한 신'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의 에고의식은 이를 참 신 또는 참된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자신이 우주의 주관자인양 착각하여 날뛰다가 최후에는 위에서 말한 낭패를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모세가 산에 올라 절박한 심정으로 신의 도움을 청했을 때 ‘여호와’ 신이 응감하였다. 이것이 참 신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에고의식이 창조한 신이다. 그러므로 매우 이기적인 성품을 갖고 있다. 그는 선인과 악인에게 고르게 햇빛과 우로(雨露)를 주는 공의(公義)의 신이 아니다. 보라. 여호와는 유태민족만 사랑하기로 작정했기에 다른 민족은 노인에서부터 갓난아이까지, 육축의 새끼까지도 죽일 것을 명령하는 잔인성을 보인다. 그리고 생명을 도륙하여 번제를 바치게 하고, 이를 잘못 바치면 잔인하게 보복한다. 혹 다른 신을 섬기면 질투의 화신이 되어 광란한다. 이것이 과연 참 신이겠는가? ‘여호와’는 모세와 유태민족의 에고의식이 반영된, 즉 그들의 에고의식이 창조한 신인 것이다.
그럼 이슬람의 ‘알라신’은 어떨까?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모하메드와 그 민족의 에고의식이 창조한 신이다. 그러므로 알라는 유태민족을 선민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하메드를 최후?최고의 신의 사자로 선택한다. 그리고, 코오란을 읽은 바 없어 잘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알라신을 믿지 않은 자에게는 징벌을 가한다는 내용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곧 모하메드와 그의 민족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에게는 징벌을 가하게 된다는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종교와 신화는 인간의 에고의식이 창조한 것이다. 에고의식이 창조했으니 에고의식을 가진 개별자나 민족들이 서로 충돌하듯 종교와 신화의 신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 모든 신들은 참 신이 아니다.
자신은 죄인이지만 ‘구세주’가 저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고서는 마치 아주 믿을 만한 보험에 든 듯 인생을 룰루랄라하는 신앙인들도 있다. 그들은 믿을 만한 구원자의 기차에 올라탔다고 여긴다. 기차 안에서는 이제 더 이상 짐을 지고 서있을 필요가 없다.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버린다. 마음이 놀라울 정도로 가벼워진다.
정말 구원을 받은 듯한 기분이 된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할렐루야!’, 병이 물러가는 놀라운 기적도 일어난다. 이렇게 쉬운 구원의 기차에 탄 자신들은 선택받은 행운아라고 확신한다. 이런 믿음은 과연 정도일까?
아니다. 이 또한 정도가 아니다. 이들은 해오자와 하등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에고의식의 밑창을 뚫는 작업은 전혀 하지 않고 다만 ‘머리 굴려서 얻은 평안’을 참 평안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나는 비록 못났지만 우리 아버지는 대통령!”이라는 믿음과 비슷하다.
대통령 아버지란 빽을 믿다보니 자신의 못남은 전혀 반성할 줄 모른다. 이런 자들의 에고의식은 ‘믿기만 하면 천국에 공짜로 보내주는 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엄청나게 확대된다. 그러다가 이들 중에는 막판에 “내가 바로 신이다. 예수, 부처, 마호메트도 내가 보낸 나의 부하들이다.”, "내가 바로 우주의 주재자다. 나는 세상을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다. 나는 태풍의 진로도 마음대로 바꾼다", “
내가 바로 재림주이다.”, “내가 바로 말세의 마지막 종이다. 예수가 직접 와서 성경을 창세기부터 개인교습하고 있다.”라고 광언하며 삼천포로 빠지는 자들도 생긴다. 이는 대통령 아들이란 빽을 믿고 점점 가관으로 날뛰어 가는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나는 비록 에고의식의 작용이 죽 끓듯 하지만 이 또한 불성의 작용이니 분별심을 내려놓은 자에게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해오자들의 믿음도 이와 다름이 없다. 머리를 굴려 그것을 믿기만 하면 가장 크고 좋은 것을 그야말로 공짜로 얻게 된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이 양자의 에고의식이 엮는 수작은 매우 비슷하다. 실인즉 그들은 자신의 에고의식이 낸 간교한 술수에 희생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해오자들이 애용하는 ‘육조단경’에서 육조의 '나는 에고의식의 작용이 죽 끓듯 한다.'는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된다. 그는 이미 중심 이동을 한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작용에 조금도 끄달림이 없다는 경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끄달림 있는 이 상태가 뭐 어떠냐?’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이동을 위한 수행을 일체 부인한다면 이는 사도이다. 에고의식이 여전하고, 욕망이 그를 삼키는데도 이를 불성의 발휘로 여기거나 자신은 절대자의 빽으로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면 이는 흠뻑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의 에고의식은 불성 또는 신이란 개념으로 엄청 확대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무엇이든 합리화할 수 있을 정도로 기고만장이 되어버린다.
나중에는 어떤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자들을 수없이 농락하고 재물을 사취해도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거리낌이 와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자연현상쯤으로 치부해버리니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우리는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에게서는 오직 불행만 나온다고 큰소리치며 막행막식하는 자의 에고는 이렇게 교활하다. 너무나 교묘하게 확장되어있기 때문에 정사를 분간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처음엔 그 자신도 자신의 에고의식에 속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사 의 갈림길은 중심이동이 되어있는가의 여부이다. 이런 자들이 참된 수행자를 비웃으며 자신도 중심이동을 하지 않고 남도 그런 수행을 못 하게 막는다면 그 폐해가 실로 엄청나다. 그러므로 선사들이 재삼이를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맺으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버리게 되었는가? 나는 도덕경 식구님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슬프다. 사랑한다는 말을 극히 조심해 온 내가 어느덧 그대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대들처럼, 또 그대들과 어울려 인간본색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면서 막 사는 재미를 교환한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이 말들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심과 혼란 속에서 방황해 온 내 정신세계가 점차 안개 걷히듯 분명해지면서 나와 그대들의 위험한 모습이 눈앞에 드러나 버렸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그대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경우에 처하면 그냥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말을 뱉어내었으니 다시 주어 담을 수는 없다. 나는 또 구도자로서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삶이 나를 그리로 재촉하니 어쩌겠는가? 다만 그렇게 떠날 뿐이다.
좋은 추억을 남겨준 여러분 모두에게 안녕을, 여러분 마음 속에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첫댓글 이분도 나름 고생을 많이 하신분 같은데 영구법을 만났으면 더욱 좋왔을것 같은데 좋은글이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