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당 최남선의 학병 권유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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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면서 -
시대 상황이 바뀌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에 살아야만 했던 조선인들,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했는가?
내가 지금 그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해야 했을까?
젹극적으로 친일파가 되느냐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아니면 적극적으로 그 반대의 입장에서 독립운동권이 되어야 하는가?
또는 이도 저도 아닌 중간적 입장에서 속으로만 삭이면서 겉으로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실제로는 겉으로는 친일인 척하면서 내면으로는 또는 뒤로는 독립군을 지원하는 행동을 취한 사람도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이런 모든 상황이 명료해졌다.
아직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친일파다 아니다, 일본 국적이다, 한국국적이다 하는 국적론까지 나오는 상황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또 한번 겪게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 4.3폭동사건이며 여수 순천반란사건까지에서도 양민과 군인과 반란군 편가르기가 명확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매우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임을 깊이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어떠한 역사가 우리 앞에 전개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마침 일제 학병징집에 관한 책 속에서 한 편의 글을 읽고 함께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고자 소개한다.
육당의 강의를 들은 바 있는 제자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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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은 친일파인가 ?
< 학병권고의 육당(六堂)의 진의(眞意) >
강영훈(姜英勳 : 1922∼2016) 전 국무총리의 글에서
( 출처 : 학병사기 권 3 광복과 흥국 : 1065∼1068 쪽에서 옮김) .
육당(六堂)께서 만주건국대학(滿洲建國大學)교수로 부임한 것에서부터 학병 출전을 권고한 일 등, 일련의 사실을 들어 그의 변절을 규탄하며 민족반역행위로 비판하는 소리를 해방 후 듣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육당(六堂)의 건국대학시절 제자의 한 사람으로 자기가 아는 범위내에서라도 한 번도 변론을 꾀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여왔다.
그러던 차, 장기 해외거주로 인하여 뒤늦게 알게 된 학병사(學兵史)편찬계획을 호기(好機)로 건국대학생시절 육당(六堂)의 훈도를 받으며 직접 듣고 아는 바를 기술하여 학병 권고의 육당(六堂)진의를 밝히고자 한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만주에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왕족협화(王權協和) 왕권락토(王權樂土)를 건설한다고 하며 육당(六堂)을 조선민족대표교수로 초빙할 때, 육당은 흔연히 수락하였다. 육당으로서 일본군국주의 본체를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호혈(虎穴)에 들어가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육당이 건국대학 1기생에게 강의한 제목이 동방문화론(東方文化論)이었다. 그 내용인즉 백두산(白頭山)을 중심으로 한 고대 조선민족문화로서 불함문화(不咸文化 ; 밝 문화)라고 호칭할 수 있는 것이며, 동북아세아문화의 주류였다는 점이었다. 그와 같은 동방문화론에 의거하여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몽고, 일본열도도 한민족고대 고유문화권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 역설되었던 것이다.
동방문화론에서 육당은 만주에 있어서 정치정국이 어떻게 되든지 만주는 고구려의 고토(古土)로서 그 땅에 있어서의 한민족 생활권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며, 민족우월성을 강조하는 일본인들에게 일본문화도 고대조선문화권에서 발전하여 왔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육당의 이와 같은 함축성있는 동방문화론강의를 대학 당국이 좌시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육당(六堂)의 강의는 1회로 끝났던 것이다.
동방문화론과는 달리 한국계 학병들에게는 기회 있을 때 마다 한민족 주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였으며, 소위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 따위의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그 당시에는 일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또는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소리가 들려올 때 마다 육당(六堂)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조선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조선 사람이지 절대로 일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개탄하였다.
육당은 드디어 대학당국으로부터 조선계 학생들의 민족주의감정을 선동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럴수록 육당은 일본인 교수 이외의 교수나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청조(淸朝)가 패망할 때 어린 황제를 업고 북경을 탈출하여 후에 만주국 초대 국무총리겸 건국대학 총장을 지낸 정효서(鄭孝胥)씨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만주에 있어서의 왕족협화(王權協和) 왕권락토(王權樂土)건설을 위하여 후사를 부탁한다고 하면서 소장 서적 둥 귀중한 청조실록(淸朝實錄)을 일인(日人)이나 중국인 학자 중 어느 사람에게도 주지 않고 육당(六堂)에게 양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육당의 학문적 입장과 민족적 긍지가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헤아릴 수 있는 일이다.
육당(六堂)이라하면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을 기초하고 자신의 인쇄소에서 직접 조판, 인쇄한 분이라는 것은 세인(世人)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육당(六堂)은 민족독립이 단발적인 만세 궐기로 성취될 수 없다는 소신이었으며, 민족 각원(各員)이 응분의 노력으로 필요충분한 민족 실력을 배양하며 확고한 민족주체의식을 확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고 생각된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理想論)은 공론(空論)에 떨어지기 쉬우며, 이상(理想)을 무시한 현실주의(現實主義)는 패배주의로 타락하기 쉽다는 견지에서, 이상적인 것을 잠재능력으로 보면서 실지로 현실에 구현되는 정도는 현실 제반 요인에 달려있다는 견지에서 육당(六堂)의 사상은 기계론적이 아니고 유기론적(有機論的)이었다. 오늘 심은 씨는 아무리 폭풍우가 심하다 하여도 시간을 두고 꾸준히 기다리며, 나에게 허락된 노력으로 가꾸어 나가면 반드시 개화 결실(開花結實)의 날이 온다는 신념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와 같은 신념(信念)에서 어떠한 기회(機會)든지 그 기회가 민족 실력을 배양하는데 보탬 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주저할 것 없이 포착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건국대학민족대표교수직 수락의 육당(六堂) 저의가 그러했고, 학병 권고 입장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일이다.
일제(日帝)의 대륙침략전쟁이 여의치 못하며,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만회할 수 없는 국면으로 진전됨에 따라 고갈된 병원(兵員) 보충원을 보강하기 위하여 한민족에게도 징병제도를 확대할 때에 국내에서는 윤치호 선생 등 민족지도자들이 그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을 때였다. 육당(六堂)은 주저할 것 없이 자기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일제가 전세 만회를 위한 궁여지책으로 우리 민족에게 징병제도를 적용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이 기회를 적극 이용(積極 利用)하여 민족 청년들을 군사적으로 훈련하며 필요시 민족주체 입장에서 조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당(六堂)은 기회있을 때 마다 군사력(軍事力)이 민족 실력의 핵심(核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군사력 배양은 고도의 기술 습득에 속하는 것임을 역설하며 해외민족독립 운동에서의 군사력 배양의 한계점을 인식한 육당(六堂)으로서 일제(日帝)의 한민족(韓民族)에 대한 징병제도(徵兵制度)의 이용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병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육당(六堂)은 동일한 맥락에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무장군사조직에 있어서 장교양성문제는 더욱 더 중요한 것으로서 지도력양성 견지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육당(六堂)이 건국대학생들에게 한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출전(出戰)하는 학병들 중에는 애석하게 귀환하지 못하는 학우들도 있겠지만 학우의 시체를 넘어 생환(生還)하는 사람들이 민족 장래를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사명은 현시점에서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막중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담담한 이야기 속에 잠겨 있던 육당(六堂)의 민족 장래를 위한 열화같은 민족혼(民族魂)을 건국대학생들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한 육당(六堂)이 한반도나 일본 등지에서 학병제도 지지의 공개연설을 어떻게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니 하여 일본(日本) 사람이 되기 위해서 병역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학병제도(學兵 制度) 지지자들과 동일시할 수 없음을 그의 제자의 한 사람으로 명확히 하고자 한다.
민족 실력 배양을 위하여 또는 민족독립 투쟁방법을 위하여 입장(立場)이 다르다고 해서 민족 반역(民族反逆)이란 말로 육당(六堂)을 매도(罵倒)함은 천부당만부당(千不當 萬不當)한 일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068쪽)
(*원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쓴 것을 가급적 한글로 바꿔 썼음을 밝혀 둠. 2024.8.31.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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