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存齋公과 위씨의 黨色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당색과 무관할 수 없다. 관산의 위씨도 한미한 향촌사족이지만 당색에 무관할 수 없었다. 정치인들의 당색은 그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지 백성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권력을 위해 공연히 무고한 민초를 끌어들인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민초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당색의 영향을 받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관산의 위씨들도 몇 차례에 당색에 관련된 경우가 없지 않았다. 먼저 조선대 이종출(李鍾出)교수의 소론을 보기로 하자.
'조선조의 붕당은 건국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다 계유정난(癸酉靖亂)을 거쳐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국가재조의 방략과 주도권, 나아가 군권(君權)과 신권(神權)의 관계를 둘러싸고 강화되기 시작했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전반기에는 '남인(南人)의 궁금(宮禁) 세력과의 결탁을 어떻게 보는가'와 '희빈 장씨와 세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로 충돌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종(景宗)이냐 영조(英祖)이냐'는 왕의 선택을 놓고 싸우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으로 폭발했다. 이로 인해 동인들은 재기불능이 됐다.
이러한 격렬한 붕당(朋黨)대립은 향촌사회까지 파급되어 향론의 분열을 야기했던 것인데 이 과정에서 위씨가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위씨가는 가훈에 '거붕당(祛朋黨)'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인(東人)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위씨가 형제들은 광해군의 폐모(廢母)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또 위정훈(魏廷勳)이 병자호란에서 서인(西人)인 안방준(安邦俊)의 창의에 부응하였다는 것 등으로 보면 서인측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안방준에 대한 협조는 붕당과는 하등 관련이 없이 애군애족의 충정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 되면 향촌에서의 동인 사족과는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다. 숙종(肅宗) 초기 남인정권의 집권기의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영하(嶺下) 아홉 고을의 동인계(東人系) 사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비판하는 소회(疏會)를 열려고 하였는데 魏東晛(1628~1677)에게 장흥 소회의 장의(掌議)의 직임이 맡겨졌던 것이다. 이때 위동현은 '서인이 동강(東岡)을 무고할 수 없듯이 동인도 율곡(栗谷)을 무함할 수 없는 것이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의(異議)를 제기하여 결국 장흥의 소회는 열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사환국(1689) 전야의 일이었다. 이때는 남인이 정세의 반전을 꾀하여 집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 지음에 위세호(魏世瑚․1656~1698)는 동생 세련(世璉)과 시대를 개탄하면서 '후일 남인(南人)은 대북(大北)에 못지않게 화를 당할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어 '당론이 일어나 온 나라에 공론이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피차에 어찌 완인(完人)이 있겠는가? 백년 후에 하늘로부터 의론이 정해질 것이니 어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왜곡하여 두호하고 망령되이 비방(誹謗)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렇듯 위동현-위세호 부자는 가훈대로 '祛朋黨'의 자세를 견지하며 당론에서 중립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동인 성향의 본래의 입장에서 후퇴하여 가세하지 않았다면 이는 서인편으로 기울고 있었음에 다름이 없다. 이때가 대략 17세기 후반이었다. 방촌 위씨가의 효우(孝友)와 검약(儉約) 그리고 가족간의 인화 노력은 17세기 후반에도 의연히 지속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상에서 적시한 이교수의 지적은 관산의 위씨가 본래 동인성향이었으나 숙종의 기사환국을 계기로 서인으로 기울었다는 것이 핵심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정치적 사건의 반응을 놓고 동인성향 운운함은 옳은 지적이라 할 수 없다. 가령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기축옥사(1589)는 전라도 동인들에 대한 보복과 조작된 사건이라서 백성 모두가 서인들의 작태에 공분했었다. 이점에서 관산의 위문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위덕화가 동인정권의 배려로 현감에 발탁된 것으로 보는 것이나, 인조반정 후 위정열이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에 의해 막하로 들어가 기피를 당한 점을 동인(東人)성향의 당파로 규정한 것은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덕화는 선조를 호종하고 언양(彦陽)현감으로 나가 왜적을 방어했다. 여기다 형인 청계공(聽溪公) 덕의(德毅)도 90일을 걸어서 의주의 행재소로 왕을 알현한 공(功)이지 동인들의 배려는 아니다. 동인의 영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행재소에서 청계공의 충심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했다. 그러나 자신이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에서 '魏德毅怠慢聯事狀近來國網蕩然其在不僚 云云'하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서애가 청계공을 동인이라고 여겼다면 과연 이런 글을 남겼겠는가. 그만큼 당색과는 무관한 소이이다.
이원익과 위정열(魏廷烈)의 관계도 당색과 무관하다. 그가 정묘호란(1627) 때 호소사(號召使) 이원익의 체부군관(體府軍官)으로 추천받았으나 동인이어서 발탁된 것은 아니다. 만일 동인이어서 이원익의 체부군관이 되었다면 왜 호란이 종결되자 귀향했겠는가. 그리고 폐모사건에 대한 위정명의 반응이나 숙종 때 동인들의 율곡과 우계에 대한 비판 소회에 위동현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비롯된 바닥 민심일 뿐이다. 특히 위명준(魏命峻)의 '尤庵․東春堂 兩先生 文廟從享上疏文'도 당색과는 거리가 있다.
관산 위씨 가운데 확실히 당색을 표방한 주인공은 3인이다. 즉 남해군수를 지낸 위동전(魏東峑)과 아들 간암공(艮庵公), 영이재공 그리고 존재공(存齋公) 등이 그들이라 할 수 있다. 위동전은 그가 모신 상사가 서인들이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인으로 볼 수 있으나 행세한 사례는 발견할 수 없다. 아들 위세옥도 동문수학한 절친한 친구들이 모두 서인의 자제들이라 아무래도 서인편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기는 해도 그가 하향해서 일가친척이나 주민들에게 당색을 강조한 행동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간암공은 존재를 친구인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제자로 삼게 했다. 이를 굳이 따진다면 당색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간암공의 부친은 줄곧 서인 상사를 모셨기기 때문이다. 존재는 병계의 문하로 들어간 이후 스승과 같이 자신도 서인으로 간주한다. 당색을 규정한 시와 인물성이론에 대한 학문적 견해가 그것이다. 즉 25세 봄 병계를 사문(師門)으로 정한 후 스승의 '三難 韻'에 화답한 시와 가을에는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의식하며 지은 시들이다. 27세에 지은 시도 인물성론의 화두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존재공이 30세에 지은 '尤春兩先生從祀聖廟韻'은 당색을 보다 분명하게 하고 있다. 즉 尤庵과 東春堂의 공자묘 배향을 기뻐하며 지은 시기에 그렇다. 시를 음미해 보자. 絶學歸東土/ 배우기를 끊고서 동토로 돌아오니 懷川道不窊/ 품은 천도는 우목하지 않는 것 洛濂明水月/ 주자와 정자가 물의 달을 밝게 하고 沮澤遠龍蛇/ 못에는 용사를 멀리했네. 冠冕三韓國/ 삼한국의 면류관을 쓰고 淵源兩宋家/ 연원은 양송씨 집안이라 聖祠尊俎豆/ 성인 사당에 조두를 올리니 天聽定非遐/ 하늘이 들어줌이 정해져 멀지 않으리.
본디 당색이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이념이 특정 당의 이념과 동일하거나 흡사할 때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 마음은 별로 내키지 않더라도 부모나 스승 등이 그 당에 소속되어 있을 경우 참여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여기서 존재공은 어느 경우에 해당되는지 알 수 없다. 집안에 정치가가 별로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스승의 편에 동조하는 모양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암과 동춘당에 대한 흠모는 당신의 처지와 다른 모양새로 비친다. 큰 벼슬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암과 동춘당의 종묘배향은 노론으로써는 뜻이 깊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우암이 1689년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며 올린 상소로 말미암아 제주도로 귀양보내졌다가 다시 국문을 위해 상경도중 사사한 것을 절치부심했다. 그래서 숙종과 영조(32)대까지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두 사람의 공자묘정의 배향을 줄기차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로써는 최후의 승리를 의미한 쾌거였다. 인물성 논변에 관한 시로는 38세 때 지은 '甲申三月感懷'에서 '大明義理'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우암의 '小中華理念'을 떠받쳤다.
또 '근차장석성이기동이운(謹次丈席性理氣同異韻)'과 '夢見尤庵寒水齋久庵三先生眞影有感'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전자는 성(性)․심(心)․이(理)․기(氣)에 대한 이해가 궁행(躬行)의 깊이와 관련된 것임을 말한 것이다. 후자는 꿈의 내용을 빌어서 우암 송시열-한수재 권상하-병계 윤봉구로 이어지는 도통(道統) 정맥(正脉)을 확증(確證)하는 신앙적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송준길-권상하(權尙夏․1641~1721)-윤봉구의 학맥을 자신이 이었다는 자부심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의 시를 통해보면 존재공의 당색은 분명 노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입장은 병계를 사문으로 정하면서 1년도 되지 않아 이루어진다. 왜 그렇게 빨리 당색을 분명하게 천명했을까. 성급하고 의아스럽기도 하다. 우암의 생애를 보면 세종치세의 조말생(趙末生)이나 최만리(崔萬理)가 연상될 정도로 군왕 위에 군림하려 했던 부류들이다. 거기다 대사를 지나치게 당리당략으로만 접근했던 인물들이다. 그런 그를 동방의 주자로 여긴 유생들의 생각과 궤를 같이한 대목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장흥 위씨 종보 제15호 2009년 4월)
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를 잘보고 갑니다.
조선시대 존재공을 통한 문중의 정치색을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노론의 색채입니다.
이환동생참대단하셔
공부도많이하셧고
그중에도
문중에관한공부는언져이렇게다하셧을까
존경스럽네
우리문중에보배네
고마워
저는 원산 위정철 씨족문화연구소장님의 비망록을 연재 중입니다.
참고로 제 글은 제목 앞에다가 ◆를 찍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산소장님으루구신지
야운동생대단하시네솔직히말해어느정도는이해가되나너무길어서어렵구만
그당시출입게나하신분들이사색당파에가담않을리없없겠지시대의흐름에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