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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1. 주일 큐티
이사야 39:8 ~ 40:11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관찰 :
1) 나만 편하면 된다
- 8절.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 이사야 40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39장의 말미의 말씀을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39장에서 히스기야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정말 맞나 싶다. 히스기야가 중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을 이사야가 죽으리라고 고했지만 하나님께 죽을 각오로 매달려서 15년의 시간을 더 연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놀라운 믿음이라면 놀라운 믿음일 것이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죽음의 병을 극복하게 된 이후의 결과는 참람하다. 그가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을 축하하러온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 바벨론의 신하들에게 자랑질을 하느라 성전의 모든 기물들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로 이 하나님의 성전 기물들에 대한 보고가 바벨론의 왕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한 모든 성전 기물들이 향후 바벨론으로 약탈당하게 된다.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 만들어진 그 성전 기물들은 장차 느부갓네살 이후의 바벨론 왕인 벨사살으로 인해서 금, 은, 동, 철, 나무의 우상들 앞에서 술 마시는 도구와 조롱의 도구가 되기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자신의 후사를 위해 품행이 온전하지 않아서 폐위했던 헵시바를 왕후로 맞아들여 므낫세를 낳게 된다. 히스기야가 수명이 연장된 15년 동안 한 가장 큰 일이 바로 후사를 잇게 되고, 이 아들이 왕이 되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므낫세가 유다 역사상 가장 패역한 왕으로 유다가 망하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게 되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가장 큰 악을 범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후사를 잇게 되었지만, 그 후사를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고, 품행이 좋지 못한 헵시바가 자신의 이방 신에 대한 믿음을 아들 므낫세에게 전하게 됨으로 남왕국 유다는 우상숭배에 유린되게 되는 결과를 낫게 된 것이다.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그의 인생의 보너스를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 사용했다. 자신의 병이 낫게 된 것에 대한 하찮은 자랑질과 또 그로 인해서 태어난 자신의 자녀에 대하여 자녀교육을 똑바로 하지 못한 결과, 유다가 너무나 참혹하게 망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만 것이다. 앞으로 그런 상황이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이 이사야를 통해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가 뭐라고 반응을 하고 있는가?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고 반응을 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자가 자신의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 기물이 다 빼앗기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유다가 망할 것에 대한 예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덤덤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내 생전에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냥 나의 때에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 말이다. 다음 세대에 있을 어떠한 위기와 문제가 이미 다 예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때에 평안하고, 잘 지낼 수 있으면 족하다 하는, 너무나 무책임한 유다 왕의 파렴치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를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만 생각할 때, 너무 악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유다의 왕의 이러한 파렴치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해 주신다.
- 40장 1절.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너희는 위로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런데 누가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인가? 일차적으로는 이사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선지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으로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결국 톱으로 몸이 잘리는 죽음을 당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을 위로하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를 통해 대언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실이다. 말씀을 맡은 자는 자신의 형편과 상황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고 선포해야 한다. 비록 자신의 처지는 위로할 수 없는 처지에 처하여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로 인해 쪽팔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말씀을 맡은 자의 사명이다. 말씀을 맡은 자는 바른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해야 한다. 이 세상의 백성들의 귀에는 사탕발림한 위로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살리게 하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이 필요하다. 이 사명은 목사나 설교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경 말씀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이다.
- 2절.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 하나님은 죄를 대충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루살렘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패역에 대해서 분명히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예루살렘도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에 대해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더욱 치밀한 잣대를 가지고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죄를 다 받고, 그 노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은 자는 이제 위로를 얻게 될 것임을 선포하게 하신다. 그것이 죄가 있음에도 눈감아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은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외치는 자의 소리. A voice of one calling, someone is shouting. 자신의 존재는 없고 소리만 존재하는 듯한 사람. 역사상 이런 사람이 존재했다. 곧 세례 요한이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없고, 주님만 드러내는 존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을 철저히 살았다. 그것이 세례 요한의 존재를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사람 중 가장 큰 자가 되게 하는 원인이었다. 그것이 주님을 증거하는 자의 사명이요, 자세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서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자는 세상의 어떤 성공의 법칙, 심리학의 원리, 상담의 스킬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위로를 얻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위로가 되는 것이다.
-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주님의 위로는 이 세상을 공평하게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것이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으로부터 비롯한 세상의 제국의 역사이고, 인간에 대한 평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사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가능한 일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받아서 이루는 사랑의 제국이다. 그곳은 골짜기마다 솟아올라 돋우어지는 나라이고,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는 겸손의 나라이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케 되고, 험한 곳은 평지가 되는 나라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라든지, 중국의 법가가 꿈꾸던 나라라든지 이런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공동체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그저 꿈에 불과한 나라였다. 사람으로서는 그런 몽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제국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실제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나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는 가장 실제적인 위로가 되는 것이며, 가장 완전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
- 5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 이것은 이사야가 마지막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인류의 역사를 700년, 그리고 또 마지막 까지 넘나들면서 바라보았던 존재이다. 그는 분명히 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현현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육체, 죽은 자나 산자가 모두 이 땅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라고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분명하게 일어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그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권능의 말씀이시기에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3)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 6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 하나님이 백성을 위로하도록 하시기 위해 “말하는 자의 소리”로서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는 이 세상의 본질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로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본질을 증거해야 했던 것과 같다. 그 본질로서 에덴 동산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통치를 이루어야 했던 것과 같다. 모든 육체는 풀,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은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 본질에 대한 속성은 시듦에 있다. 불멸이 아닌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이다.
- 7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 모든 인생은 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 9:27)이다. 그 누구도 피할 자 없다. 그것은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 것과 같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이유는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듯 하나님 앞에서는 풀과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 백성이 그러하다면 모든 민족 모든 백성 역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 이것이 이사야서의 주제로 여겨지는 본문이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무엇으로 그 백성을 위로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불변하는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는 것을 통해서 그 백성을 위로하라는 것이다. 왕이지만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보는 왕의 통치에 슬퍼 고통스러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은 왕을 갈아치우고, 정치적인 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백성을 위로하시는 본질이 되시는 분이 되시는 것이다. 이사야는 위대하고 놀라운 메시지를 통해서 이사야의 후반부를 열고 있다.
4)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선포한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을 볼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에게 향한 선포라는 것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데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는 제5복음서로서의 역할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
- 10절.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 이사야는 다시 “보라” 명령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을 보라는 것이다. 그 팔로 다스리시는 손길을 보라는 것이다. 상급과 심판이 그분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 11절.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들을 목자와 같이 인도하실 것과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실 것에 대한 중첩되는 예언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이러한 자신의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셨다.
가르침 :
1) 누가 우리의 진정한 지도자, 통치자인가? 이사야의 때에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였다. 그가 나름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에 속하는 자였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왕이었지만 진정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도 자질도 없었던 사람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간절히 간구한 것은 고작 자신의 평생에 평안과 강건함이 있기를 바랐던 것일 뿐이었다. 그가 백성을 위로하거나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있는 일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존재였을 뿐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도,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자랑질로 다 빼앗길 준비를 하는 우스운 존재에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임금도, 지도자도 사실은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 히스기야를 생각하며 이 시대의 어그러진 리더들, 특별히 한국 교회의 리더들의 모습이 연상이 되게 된다. 부흥의 시기에 모든 단물을 빼먹고, 이제 다음 세대에 망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 분명하게까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때에는, 자신들이 은퇴하기까지는 평안하고 강건하니 되었다 생각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그런 리더들의 모습이다. 이들을 통해서는 소망이 없다. 결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로하신다. 하나님의 위로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무너지는 다음 세대의 소망이다. 그렇기에 더욱 분명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복음, A voice of one calling이 되는 이들이 일어나야 한다. 자신은 소리에 불과하고, 오직 다시 오실 주님만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존재들의 필요가 그렇게 중요하게 요구된다.
3)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로하시되 근본적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 모든 구조적인 죄악들을 다 파하시고 온 세상을 공평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따라 서로 사랑하는 나라를 이루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임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이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시다. 우리는 다른 위로로 우리가 받아야 할 위로를 대체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주님의 위로를 기대하자.
4)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죄악에 대한 심판이 선행한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행한 죄악에 대해서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 은 여호와가 아니시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일지라도 그들의 행한 바 행위에 대하여 분명하게 징계하셨다. 다윗이라 할지라도 그가 우리야에게 행한 죄악에 대해서 다윗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거두시고, 또 다윗의 자식으로 인해서 처절하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도 사랑하시기에 심판이 갑절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잘못된 길로 간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갑절의 심판을 하실 것이다. 그것을 모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의 징책을 받는 것이 능사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역의 때가 끝나 그 죄악이 사함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진짜 위로가 임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징책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의 진짜 위로는 그 징책 뒤에 오기 때문이다.
5)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주일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쉽지 않고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각자의 처소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궁극적으로 위로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예배를 어디에 있던지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백성을 위로하는 외침은 바로 영원불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나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시드는 법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 바른 말씀의 선포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도록 이끄는 것이 된다.
6)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하나님을 노래한다.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히스기야가 자랑한 모든 성전 기물들이 다 빼앗기겠지만, 그리고 유다가 완전히 망하게 되어 포로로 끌려가게 되겠지만,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귀환 백성들의 존재를 예언하고 있다. 170여년 뒤에 있을 일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차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위로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것만이 참되고 진실된 위로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적용 :
1) 소리. 위로자로서의, 외치는 자로서의, 말하는 자로서의 소리. 누가 이런 자격을 가질까? 어떤 그리스도인도 이럴 수 있는 자격은 스스로 가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이 시대에 뜨는 이찬수 목사님이나 유기성 목사님 같은 분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그런 자격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 이 길을 가라고 하시고, 외치라고 하신다. 그러나 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자신이 없어진다. 힘이 빠진다. 나를 지적하는 소리에 무너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내가 별것 아닌데, 뭐라고 누구를 위로하고, 무슨 일을 하고자 한단말인가라는 소리가 주님의 지적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공격입니까? 이대로 무너진다면 사탄의 공격이 되는 것이고, 여기서 새롭게 힘을 얻고 경성하여 일어선다면 주님의 지적이 될 것이다. 소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마음을 담대하게 먹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어지는 하루를 승리해야 한다.
2) 앞으로의 싸움은 진리의 싸움, 세계관의 싸움이 될 것이다. 바른 진리를 온전함으로 캐내어 가르치지 않으면, 진리를 찾아내고 뽑아내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그 싸움의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밝히드러내는 일에 내가 드려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A voice of one calling”이 되어야 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살고자 하는 자의 사명인 것이다. 이겨야 한다. 생명을 걸어야 한다. 쉬지 않는 그런 열심을 드림이 있어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않고는 온전해 질 수 없다. 보호자와 통치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것을 이사야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믿음의 눈을 들어 보호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바라보자. 흔들리는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고, 주님께 내어 맡기는 삶의 가치를 다시금 소망하자.
4)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비자 여행을 방콕으로 오게 되었다. 원래 다음 주에 비자가 끝이 나서 미얀마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으로 인해서 한 주 당겨서 나오게 되었다. 이 시기는 언제인가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 예상된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바란다. 3.1.절을 의도하지 않게 방콕에서 좀 우울하게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