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걸’이란 단어는 언제나 아프다. 그때는 ‘동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래서 때론 고맙고 행복하다 여겼던 순간들이, 사실은 구걸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과 부끄러움, 슬픔과 무너짐을 알기 때문이다.
동경하던 무리가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 나를 감추고 구겨 넣어 그 무리와 하나 되고 싶었다. 그들의 일부이고 싶었다. 한 사건을 만났을 때 알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구나, 무너져버렸다.
성전의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날 때부터 구걸하는 존재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매일 그를 들어다 미문 앞에 데려다 놓았다. 구걸해, 너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야.
목숨같이 여겨지는 것들을 구걸하며 누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기는 인생이다. 되려 그것이 지혜이자 처세술로 여겨진다. 그게 알아서 서는 방법이란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박차고 일어서는 개인 혹은 집단에게는 잠잠하라 외치며 돌을 던진다.
뭐든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오랜 시간 몸에 배어버린 습관은 구걸하겠다고 다짐한 적도 없는데 자꾸만 새어 나온다. 무엇이든 열심히, 잘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구걸했는데, 그게 나에게 은과 금 같은 것이었는데, 내가 원하는 인정이나 사랑의 모양이 아닌 예수의 이름을 주는 무리가 있다. 어떤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무리, 교회다.
교회는 생명을 이렇게 세우는 곳이라 하셨다. 스스로 두 다리로 곧게 서서 어깨 펴고 나답게 살게 하는 관계, 불안과 두려움 없애고자 엄한 곳에 인정과 사랑을 구걸하지 않고 생명답게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가 교회다. 나를 넘어서는 힘은 내게 없지만, 그리스도로 세례받고 참된 가족으로 관계 맺는 무리와 하나 될 때 더 이상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내가 먼저 바로 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때, 누군가에게 힘있게 전할 수 있겠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사랑했던 선생을 배신했고, 부인했고, 도망쳤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패배와 몰락의 역사가 서린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만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전존재가 변화되었다. 그러니 각자 어떤 절망과 실패의 흉터를 가지고 있든 지금 이곳에서 7주간 함께 공부한 우리가, 말씀 듣고 배운 우리가 먼저 그렇게 살자. 증인으로 살자. 엄한 데다 구걸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 전하며 살자.
다음주 마지막 시간, 서로배움 자리에서 어렵고 막막한 것 진솔하게 나누어요. 서로 묻고 들으면서, 지혜를 찾고 구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대안 찾아가는 시간되길 기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