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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_새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햇순이(이사 11,1)
새싹을 떠올리면 미뉴에트 곡이 머릿속에 피어오르면서 심장이 간질간질해진다. 바흐든 보케리니든 모차르트든. 소프라노로 굴러다니며 나풀거리는 멜로디에 기분이 말랑해진다. 우아하고 뽀얗고 귀엽고, 그것을 둘러싼 밝은 기운과 따스함도 함께 느껴진다. 이런 걸 제대로 표현하려면 노래나 시를 창작해야 할 텐데 그런 재능은 바닥이다. 하는 수 없이 맨송맨송한 글을 써볼 수밖에.
히브리 성경에서 ‘새싹’, ‘새순’, ‘햇순’ 등으로 번역 가능한 단어는 세 개 정도 된다. 또는 ‘어린 묘목’, ‘작은 나뭇가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단어들은 출현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생명의 시작, 새로운 가능성,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상징성을 지니고 그 문맥 안에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아가서에서 새싹은 우거진 식물들과 과실나무들과 어울려 남녀가 사랑을 완성할 때 거기서 흘러넘칠 풍요로운 생명력을 묘사하며(아가 4,13), 미래에 꽃피울 사랑에 대한 희망을 가리키기도 한다(아가 6,11).
그런데 새싹이 성경 안에서 어떤 대상을 표상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보편적 상징성에 더해 특별한 성경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식, 후손’을 표상할 때와 하느님의 ‘메시아’를 가리킬 때다.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시편 128,3)와 “너의 후손(직역: “씨앗”)들에게 나의 영을,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부어 주리라”(이사 44,3)에서 “새싹(햇순)”은 후손을 의미한다. 시편 본문의 문맥에서 “햇순들 같은 자식들”은 하느님이 축복을 내리신 결과다. 후손 번성 축복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성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 12,1-3)과 직접 관련이 있다. 시인이 행복하다고 감탄 중인 그 주인공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시인은 그 사람의 현재 아들들뿐 아니라 그 후손들도 번성하기를 기원한다(시편 128,6).
한편, 자식 복 터진 이 주인공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보장받은 축복의 개별적 실현이다. 그렇다면 이 햇순들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예루살렘의 번영과 함께 거기 대대로 이어질 후손들을 모두 배태한, 영속하는 이스라엘의 표상이 된다. 곧 하느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는 표지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후손들은 하느님 약속의 수혜자로, 그분의 축복과 돌보심이 모든 민족에게도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주는 새싹이 된다(이사 60,21; 61,11; 창세 12,3ㄴ 참조).
새싹이 메시아(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로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구원자의 도래를 표상하는 경우는 이사야와 즈카르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주님의 뜻에 따라 대속의 사명을 짊어진 종의 등장을 메마른 땅의 뿌리에서 새순처럼 솟아났다고 묘사한다(이사 53,2). 다른 곳에서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를 기대하며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고 예언한다. 즈카르야가 예언하는 주님의 ‘새싹’(즈카 3,8; 6,12)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두 구절에서는 그 새싹이 돋는 위치인 ‘메마른 땅’과 ‘그루터기’를 함께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메마른 땅은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 새싹이 솟는다면 이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곳, 절망이 모든 재생의 가능성을 말려버린 상황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아주 작은 새싹일 뿐이지만 그 상황 전체가 뒤바뀔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루터기는 나무에서 큰 줄기가 부러지거나 통째로 잘려나가고 남은 부분이다. 베인 상처 정도가 아닌, 완전히 절단되어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사야의 이 예언이 본격적으로 편집된 때는 다윗 왕조의 남유다 왕국이 바빌론에 패망하고 백성들이 그 정복자의 땅으로 끌려간 유배 시대다. 사실상 다윗 혈통이 다스리는 왕정의 종말, 예배의 중심인 성전의 파괴, 약속의 땅(영토)의 상실로 인해 하느님 백성이라던 무리는 완전히 결딴났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이사이는 다윗의 아버지로, 이 예언이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부여했을 희망을 정확히 알려준다. 곧 단절된 다윗 왕조의 후손이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이인 왕으로 돌아와 하느님 백성의 영화로운 왕국과 그 주권을 회복한 것이다. 이 회복은 이스라엘에게 성조 때부터 약속되었던 후손의 번성과 직접 연결된다. 다윗의 후손이 새싹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면 하느님의 약속을 다시 상기한 이스라엘 후손들도 주권 회복의 희망을 새싹처럼 틔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싹’ 예언은 단순히 현실 속에 이루어질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그 도래의 양상만을 그리지 않는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언젠가는 하느님이 약속하셨던 것들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상징이다. 패망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분의 계명을 저버리고 그분과 맺은 계약 파기를 초래했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계약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계약의 상대자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체급이 엇비슷해야 그나마 이쪽 능력으로 내밀어 볼 수 있는 카드가 있을 텐데 그런 건 없다. 대신 이스라엘은 계약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돌이켜본다. 하느님은 계약을 맺기 훨씬 이전부터 일방적으로 그들의 조상을 축복하며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다. 그들의 현존재가 온통 하느님께 의존해 있었다. 예언자들은 이제 이 하느님이 자의로 당신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고자 하신다고 선포한다. 하느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셔서 이를 이루시리라 설파한다. 새싹-메시아의 표상은 결국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믿으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기서 드러나는 더 깊은 차원이 있다. 앞서 완전한 파괴와 단절에 대해 말했지만, 사실 새싹은 완전한 영점에서 돋아나오는 것이 아니다. 메마른 땅 밑에는 더 깊은 곳에서 수분을 머금고 때를 기다리는 씨앗이 있었고, 잘려나간 그루터기에는 땅속 어둠과 물기를 움켜쥔 뿌리와 말라버린 껍질 속 싹눈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회복 불능의 상태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럼 저 씨앗은 뿌리는, 싹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분 자신이시다. 인간의 패악질이 모든 것을 망쳐놓아 가망 없이 보일 정도로 인간의 파괴적인 반항은 강고하고 하느님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 같지만, 하느님은 당신 신실하심을 거두지 않으신다. 또한 세상을 만드실 때 시간도 지어내신 하느님은 새싹이 돋아날 어느 시점도 배치해 두셨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잿더미 속을 구르며 그제야 하느님께 구해 달라 외친다.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응답하셔야 할 때인데, 곧 죽을 것만 같은 지금이 하느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셔야 할 때인데.” 대답 없는 하느님 앞에 지쳐간다
하느님의 응답은 이스라엘이 가늠하는 적당한 시기나 그 외침의 크기에 전적으로 달려있지는 않다. 엄동설한에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봄바람이 불기 전에는 새싹이 올라오지 않는다. 수분이 모두 타버린 돌투성이에는 우기가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싹트지 않는다. 메시아의 도래 역시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하느님이 정하시는 때에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성취된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왕국 패망 후 유배의 땅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이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분이시고 그분의 길과 인간이 예상하는 길은 다르다는 것, 인간은 하느님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깨달음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자유 의지로 인간에게 가없이 신실하시며, 당신 백성에게 하신 약속에 스스로를 속박하신 채 그들을 위한 구원을 계획하시고, 당신이 생각해 두신 때에 인간사에 개입하신다는 것이 두 번째 깨달음이다.
새싹에 대해 뭘 쓸까 고민하며 구약성경을 뒤적여 보았다. 맨 앞에서 떠올렸던 새싹의 첫인상을 이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겉보기엔 어린 고양이 앞발처럼 그저 보드랍고 앙증맞지만, 사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깨달음을 미칠 듯한 심정으로 외치는 생명의 승전보다. 하느님의 계획과 때가 정해져 있어도, 새싹 쪽에서는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내며 죽음의 위기를 견뎌야 했다. 절망과 치른 전투에서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며 더 이상 못 해먹겠다 싶을 즈음,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때가 닥쳐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지에 승전기를 세운다. 이 나부끼는 생명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미뉴에트는 그만 안녕이다. 적어도 베토벤의 「합창」이나 말러의 「부활」 종결 악장만한 대관현악 합창곡이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넘는 대하 서사시 정도는 써줘야 한다. 그 정도 분량은 되어야 연둣빛 피철갑을 한 개선장군의 키득거림 한 조각이 간신히 그려질까 말까 하다.
수녀원 정원의 나무들에 새싹이 올라오면, 나도 이글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가 게네들을 보려고 한다. 엄청난 승리의 때가 닥쳐왔음을 묵상하면서 그 작은 것들이 내 눈앞에 올라오게 하도록 온 우주가 하느님의 의지로 지금 여기 몰려들었다. 게네들이 생명을 걸고 하느님과 함께 써낸 서사시는 생각 못 하고 그 외양에 속아 귀엽게만 여기고 있었다. 반성한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71) 마태오 복음서
‘교리교사의 복음서’ ‘교회의 복음서’ 마태오 복음
마태오와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공통된 원천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 복음(συνοψιs ευαγγελιον-쉬놉시스 에우안겔리온)’이라 부릅니다. 헬라어 ‘συνοψιs’는 우리말로 “함께 보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한자로 ‘共觀(공관)’이라 표기한 것이지요.
공관 복음서는 내용 흐름과 형식이 서로 참 많이 닮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80%가 마태오 복음서에, 55%가 루카 복음서에 옮겨졌습니다. 내용도 요한 세례자가 등장하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받으신 후 갈릴래아로 가서 가르치고 치유 활동을 펼치시다 예루살렘으로 가시어 수난을 겪고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후 부활하셨다는 주님의 공생활을 1년이라는 시간 안에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3년을 설명하는 요한 복음서와는 참 다릅니다. 공관 복음서는 시간이라는 물리적 흐름보다 신학적 흐름에 초점을 맞춰 예수님의 생애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승은 마태오 복음서 저자를 로마 제국에 고용돼 갈릴래아 주민에게 세금을 거둬들이던 “레위”(마르 2,14; 루카 5,27)라고도 불리던 세리 “마태오”(마태 9,9)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의 열두 제자인 ‘사도’로 뽑힌 인물이지요. 마태오 사도가 복음서를 썼다고 처음 주장한 이는 2세기 초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주교입니다. 파피아스를 그대로 따른 프랑스 리옹의 이레네우스 주교는 「이단반박」에서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있을 때 마태오는 히브리인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의 고유한 언어로 복음서를 펴냈다”고 했습니다. 이들 주교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오랫동안 마태오 사도가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성경학자들은 마태오 사도가 아니라 히브리말과 아람어뿐 아니라 헬라어에 능통한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마태오 복음서를 저술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유다교 율법뿐 아니라 자선과 기도, 단식을 중시하는 유다인 관습을 잘 아는 율법학자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로 마태오 복음서에 ‘임마누엘’(1,23), ‘골고타’(27,33),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27,46)라는 아람어가 나오고,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13,52)는 유다계 그리스도인 율법학자의 소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통해 율법이 완성됐고, 구약 성경의 주제인 하느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마태오 복음서 곳곳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해 예수님은 참으로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밝힙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10여 년 전까지 성전세를 바쳤고(17,24-27), 초기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권위를 인정했으며(23,2-3), 십일조도 바치고(23,23), 안식일도 지켰다(12,11-12; 24,20)고 합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됐고, 이 무렵 마르코 복음서가 쓰였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를 인용한 열두 사도의 가르침 「디다케」가 서기 100년께 저술됐지요. 아울러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Ναζωραιοs-나조라이오스, 2,23; 26,71)이라 부릅니다. 이 칭호는 시리아 안티오키아 지역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ουs-크리스티아노스)이라 부른 것과 함께 사용한 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80~90년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저술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50년께 엮은 「예수님 어록」의 원천(Quelle) 사료인 ‘Q문헌’과 마르코 복음서를 참조해 헬라어로 저술됐습니다. 아울러 교회가 간직해온 예수님 전승들이 포함됐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유년 이야기’(1─2장)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다섯 개의 예수님 설교(5─7장 산상 설교; 10장 파견 설교; 13장 비유 설교; 18장 교회 설교; 24─25장 종말 설교)를 뼈대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형을 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세상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라는 주님의 현존을 선포하면서 끝맺습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신약 성경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주일 미사에서 가장 많이 봉독되는 복음이거니와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서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로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태오 복음서는 ‘교리교사의 복음서’라 불립니다. 일정한 순서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들려주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비춰주고 있어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 교육용으로 널리 읽혀 왔습니다. 또 ‘교회의 복음서’라 불립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기적과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께 사도들의 수위권을 받는 것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다”(16,18)라는 표현도 유일하게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교회가 할 일, 교회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일과 관련된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9) 믿음과 용기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칼렙
1950년, 갑작스러운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에서 아군은 순식간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 참전으로 유엔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처음으로 승리하면서 자신감과 사기를 되찾는다. 작은 지역의 전투였지만 전쟁 후반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다.
양평면 지평리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였다. 미군 23연대 전투단이 지평리를 사수했다. 사흘 동안 7000명이 안 되는 병사들이 중공군 10만여 명을 상대로 포위된 채 3일 동안 그야말로 사투(死鬪)를 벌였다. 이 전투에는 프랑스대대의 몽클레르 중령 휘하에 한국군 180여 명도 참여했다.
특히 환갑에 가까웠던 몽클레르 중령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전장을 오가며 지휘했다. 꽹과리, 북을 치며 공격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은 칠흑 같은 밤중에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려 상대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한 한국군 병사가 온몸을 떨고 있었는데 프랑스 병사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손을 얹어 안심시켰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마치 큰 형님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라는 신호 같았다. 전투 중에도 자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사기를 북돋웠다 한다. (이정환 저 「지평리를 사수하라」에서 발췌)
어느 날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할 사람들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모세는 공정하게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뽑아 가나안땅을 수색하게 했다.(민수기 13장 참조) 수색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사실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다. 12명의 수색대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40일 만에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탐한 사실을 알리는데 대원들의 의견이 서로 갈렸다. 일부는 강한 부족이 자리 잡고 있어 전쟁을 치르면 크게 패배할 것이라 미리 패배를 예상했다.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사람들을 패배감에 젖게 만든 것이다.
그때 유다 지파를 대표해 뽑혔던 칼렙이 나서며 이스라엘이 꼭 승리할 것이라 장담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론이 갈라지면서 갈팡질팡했다. 심지어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여론이 팽배해졌다. 그때 옷을 찢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가나안 정복을 호소했던 이들이 여호수아와 칼렙이었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이 선조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 승리할 수 있다고 두 사람은 확신했다.
지도자는 늘 고독하게 결단해야 하고 결과와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 칼렙과 여호수아의 가나안 진격은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평화 때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지도자의 역량이 잘 나타난다. 칼렙의 승리를 확신했던 근거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칼렙은 노령에도 계속 전의를 불태우는 역전의 용사였다. 여호수아에겐 칼렙과 같은 충직하고 용기 있는 전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 능력 있는 지도자는 솔선수범하고 올바른 판단으로 부하들의 사기와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스바니야서
스바니야는 ‘주님께서 숨겨주신다. 피신시켜 주신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바니야서는 역사적으로 아시리아 멸망 이후 바빌론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남유다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유다 임금 요시아 때에 스바니야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이라는 대목에서도 스바니야서의 역사적 배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시아 임금은 BC622년에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 열왕기 하권 23상에서 자세히 나와 있는 것처럼 요시아 임금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제들을 내쫓고 가나안의 토착신앙인 바알과 아세라에게 분향하던 자들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신의 신상과 제단을 모아서 키드론 골짜기에서 불태우는 등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향한 굳은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서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1장 1절-2장 3절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준 하느님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토착 신앙도 받아들여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적인 신앙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곳곳에는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바치는 신전이 있었고 이에 봉사하는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바알신 등 우상숭배에 빠져서 그들에게 제사를 봉헌하거나 천체 숭배를 하는 메소포타미아 종교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스바니야는 “그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난의 날 파멸과 파괴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다. 견고한 성읍과 드높은 망대를 향하여 뿔 나팔 소리와 전쟁의 함성이 터지는 날이다.”(1,15-16)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날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날은 아모스나 나훔, 요엘 예언자가 언급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날이며 파멸의 날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처럼 주님의 날을 선포한 다음 뒤이어 회개하라고 사람들에게 선언합니다. 주님의 분노가 들이닥치기 전에 주님을 찾고 의로움과 겸손함을 찾으라고 말함으로써 죄와 잘못에서 돌아서 한 분이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뒤이어 2장 4-15절은 필리스티아, 모압, 암몬, 에티오피아, 아시리아 등 이방 국가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신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필리스티아는 이스라엘의 서쪽,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동쪽, 에티오피아와 아시리아는 각각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둘러싼 모든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신탁을 전함으로써 하느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모든 민족에게 미치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우신 분으로 드러나실 것이다. 정녕 그분께서는 세상의 신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실 것이다. 모든 섬나라 민족들이 저마다 제고장에서 그분을 경배할 것이다.”(2.11)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장 1-8절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느님의 단죄와 이방 국가들에 대한 고발이 이어집니다. 먼저 예루살렘의 지도자, 대신들, 판관들, 예언자들, 사제들에 대한 단죄가 선언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였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예언과 이방 종교와의 혼합주의로 인해 율법을 어겼고, 거룩한 하느님의 성소를 모독하였습니다. 공정을 펴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수치를 모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방 민족들과 그들의 나라에도 하느님의 심판을 드리우심으로써 온 세상이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스바니야 예언자는 3장 9-20절에서 민족들의 회개와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언하고 예루살렘의 재건을 예언합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들은 주님의 이름 아래에 피신하고,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위한 희망의 불씨가 됩니다. 이를 통해서 스바니야 예언서는 남은 자들의 삶, 즉 하느님만을 섬기고 율법을 지키며 악을 멀리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을 전해줍니다. 이때 구원의 씨앗이 되는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3,12)라는 구절의 ‘남은 자들’은 훗날 남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바빌론 유배를 겪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커다란 희망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