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히브리서 11장 1 - 2절(개역개정)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성경을 보는 눈은 2가지입니다. 믿음의 눈과 불신앙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은혜이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반면에 불신앙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고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들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올바른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응답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밧데리 없는 시계는 시계이지만 시계가 아닙니다.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물 없는 오아시스입니다. 보기에는 생명도 구원도 능력도 있을 것 같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주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을 믿음의 주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주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주님이 보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십니다. 히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온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특징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 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히 11장을 통해서 계시된 믿음의 진리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은 기대하는 것이다. 1절에 보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바란다는 말은 헬라어로 ‘엘피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없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기대가 없고 바라는 것이 없고 소망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해야 할까요? 아무거나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한다고 믿음입니까? 어제 어느 분이 제게 자기가 경제적으로 너무 힘이 들어서 복권을 2번 샀다고 말하더군요. 그분은 복권을 사면서 1등 당첨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1등이 되어서 빚을 갚고 넉넉한 생활을 하는 것을 바랬을 것입니다. 그분은 잠시지만 복권을 사고 소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결과는 꽝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분이 복권을 사고서 1등을 기대하고 넉넉한 생활을 소망한 것이 믿음일까요?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분의 형편이나 마음의 상태는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대상이 중요합니다. 대상이 잘못되면 광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주님을 기대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2가지 측면에서 주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첫째, 주님의 임재를 기대해야 합니다. 임재라는 말은 한문으로 임할 臨(임)자에 있을 在(재)를 씁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계시는 것을 임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임재가 지속되는 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분이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울에게 주님이 임재하시니 그가 꺼꾸러지고 변화되어 복은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두 눈이 뽑혀서 비참한 처지에 있던 삼손에게 주님이 임재하시니 괴력을 발휘해서 엄청난 숫자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무능한 노인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그가 힘을 얻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냈습니다. 밤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임재하시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물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주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임재가 있는 것과 임재가 없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가인의 제사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바치는 제물에는 임재가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드리는 제물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불로서 나타났습니다. 임재가 없으면 가짜입니다. 임재가 있어야 진짜입니다. 예배도 임재가 있는 예배가 있고 임재가 없는 예배가 있습니다. 기도도 임재가 있는 기도가 있고 임재가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찬송도 교제도... 모든 종교적인 행위에는 임재가 있는 경우가 있고 임재가 임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임재를 기대하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재림을 기대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주님의 재림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마귀는 끝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믿음의 사람들의 고난도 끝납니다. 마귀는 주님의 재림이 자신의 멸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주님의 재림을 방해합니다. 마귀가 주님의 재림을 막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마 24장은 마태복음 안에 있는 계시록입니다. 마 24장에서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 2가지를 말씀합니다. 그 2가지를 마귀는 집중적으로 방해합니다. 첫째, 마귀는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마 24:14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땅의 모든 종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온 세계에는 24,000종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부터 지난 1989년까지 13,000개의 종족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고, 미전도종족의 수가 11,000개였습니다. 그런데 1989년 제2차 로잔대회 이후 세계교회가 미전도 종족 선교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2001년에 미전도종족의 수가 8,000종족으로 줄었고, 2004년에는 6,000종족이 남았고, 2006년도에는 3,600종족이, 2008년에는3,300종족이, 2012년에 1,500개 종족이 남았다고 합니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대부분의 종족들은 10/40창 지역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주로 이슬람권입니다. 사단은 이슬람이라는 견고한 진을 치고 복음이 서진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최근들에 중보기도의 목록에 이슬람을 위한 기도제목을 추가했습니다. 이슬람지역에 더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치 전쟁 중 후방에서 포사격으로 전방에서 전투하는 부대를 돕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강력한 중보기도로 이슬람의 견고한 진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고 있는 악한 영들의 요새들을 깨트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 마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방해합니다. 마 24:32,33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입니다. 33절에 보니 이스라엘이 독립되면 주님이 문 앞에 이르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독립된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하고 있는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중보기도와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기도여행인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는 중요한 사역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기 때문에 이슬람지역의 영적 부흥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힘써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기대하는 것이다.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은 인본주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본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신본주의로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비전을 받고 그 비전을 기대하고 그 비전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이 위대한 삶입니다. 따라합시다. “위대한 비전이 위대한 인생을 만든다” 저와 여러분은 위대한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대한 비전을 보십시오. 그리고 위대한 비전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위대한 비전에 헌신하십시오.
3) 천국을 기대하는 것이다. 함께 합시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하늘의 성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13,14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 소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들이 사모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기억나시죠? 예전에는 많이 불렀는데 요즘은 거의 부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이라면 반드시 통일을 소원해야 합니다. 반드시 평화통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북통일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의 소망으로 살아야 민족이 살고 나라가 삽니다. ‘통일’이라는 단어에 ‘천국’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불러봅시다. “우리의 소원은 천국/ 꿈에도 소원은 천국/ 이 정성 다해서 천국/ 천국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천국/ 이 나라 살리는 천국/ 천국이여 어서 오라/ 천국이여 오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못살고 있습니다. 천국보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너지니 이 나라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2. 믿음이 질을 결정한다.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육일까요? 돈일까요? 인간적인 관계일까요? 이런 것들이 부분적인 답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는 아닙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것들이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이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결정해주는 인생의 질을 3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현세의 질을 결정한다. 믿음은 죽음 후의 세계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현세의 질을 결정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에는 응답하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에는 응답해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의 질을 판단하실 때 보셨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4절에 보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그들이 드린 제사의 질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형제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 후에 하나님은 저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저는 과거에 길을 가다가 시동이 걸려있는 오토바이를 그냥 타고 간 일이 있습니다. 남의 오토바이를 가지고 가면서도 양심이 찔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게 믿음이 생긴 후에는 나쁜 행동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나쁜 생각만 해도 양심에 찔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이 형제의 인생의 질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제가 요즘 ‘왕의 재정학교’라는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재정생활입니다. 홍성건 목사님께서 이론을 말씀해주시고 김미진 간사님이 성경적인 재정생활의 실제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김미진 간사의 남편은 의사였는데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의사생활을 할 때 매달 현금으로 2천만 원씩을 벌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매달 2천만 원씩의 수입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땅의 것을 위하여 살던 사람이 하늘의 것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김미진 간사의 남편의 삶의 질이 땅에서 하늘로 변화된 것입니다. 김미진 간사는 사업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도가 나서 100억의 빚을 지고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홍성건 목사님의 재정 강의를 통해서 변화되고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기 시작했는데, 4년 반 만에 100억의 빚을 갚고 통장에 1억 6천만 원의 잔고가 남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김미진 간사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사는 거룩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삶의 질이 변한 것처럼 김미진 간사의 삶의 질도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질이라고 하면 경제적인 척도를 생각하는데 그것은 세상적인 척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강문호 목사님께서 지난 주에 안동에서 집회를 마치고 귀경 하시던 중에 전화 한통을 받으셨답니다. 전화를 거신 분은 집회에 참석하신 분인데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답니다. 이분이 작은 아파트에 사니 불편해서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고 열심히 돈을 모았답니다. 그런데 집회를 참석하고 은혜를 받고나니 지금은 마지막 때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하지 않고 그동안 이사하려고 모은 돈을 영혼 구원을 위하여 쓰기로 했답니다. 이분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가치를 두고 더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새롭게 하고난 후에 하늘의 소망과 영혼구원을 위하여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믿음은 현세의 삶의 질을 바꿔놓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시한부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가치 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과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교회생활을 하지만 다 같은 교회생활이 아닙니다. 부부가 한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지만 어떤 부부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부부는 서로에게 별 관심 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부부는 원수나 다름없이 살아갑니다.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에게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길 축원합니다. 히 11:6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이 나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렘 29:11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열어가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셔서 힘들게 하시나’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도 ‘하나님은 이 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좋은 일을 일으키실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3) 내세의 질을 결정한다. 여러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인정 받기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사람들은 내세에서 인정받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마 6장에 보면 구제하거나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 주의 할 점을 말씀합니다. 마 6:2에서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6:5에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16절에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하늘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제와 금식과 기도에 관한 그 말씀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을 하든지 이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늘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마 6:19-21을 보면 재물, 돈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사람들이 있고,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다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땅에 쌓아두는 것은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합니다. 반면에 하늘에 쌓아두면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쉽게 설명을 합시다. 2개의 은행이 있습니다. A은행은 재정적으로 너무 부실해서 곧 부도가 날 은행입니다. 그 은행은 예금자를 보호할 아무런 조치도 해놓지 않고 있는 은행입니다. 반면에 B은행은 재정적으로 아주 튼튼해서 부도날 우려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부도가 나면 예금자를 100%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은행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은행에 투자하겠습니까? 부실한 A은행에 투자하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튼튼한 B은행에 투자할 것입니다. 땅에서 잘되는 것만 바라보고 땅에 투자하는 사람은 부실한 은행에 투자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내세를 준비하는 사람은 튼튼한 은행에 투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어디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혹시 부실은행과 같은 이 세상에 투자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는 천국에 투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믿음의 역사는 순종할 때 일어난다. ‘믿음의 역사’라고 할 때 ‘역사’는 헬라어로 ‘에르곤’이라는 말로 ‘일,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은 믿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역사는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7절에는 노아의 순종을 말씀합니다. 노아는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것에 대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예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노아는 믿음의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순종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17절에서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해서 믿음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에 순종하여 믿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담력이 필요하고 또 자기 포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때로는 터무니없는 요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보면 황당한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놓기 힘든 것, 내가 마지막 붙들고 있는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이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며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께 인색하면 안 됩니다. 손해가 되어도 순종하십시오. 길게 보면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몇 배 아니 몇 십 배, 몇 백 배, 아니 그 이상 유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며칠 전에 김도완 목사의 딸 시은이가 떡을 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장난으로 “시은아, 떡 먹니? 떡 맛있겠다. 아, 나도 떡 먹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시은이도 제 말을 ‘시은아. 그 떡 혼자 먹지 말고 나 좀 줘’라고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은이 대답이 기막혔습니다. “사드세요” 제가 시은이에게 떡 이야기 했다가 떡 됐습니다. 자, 만약 그때 시은이가 먹던 떡을 제게 떼어서 주면서 “드세요”라고 했다면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당장 지갑을 열지 않았겠습니까. 최소한 만 원짜리 한 장은 나갔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훌륭한 어머니가 훌륭한 자녀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인 어머니와 이방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유대인으로 받아드리고, 이방인 어머니와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녀들을 한 결 같이 훌륭한 자녀로 키웠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자녀교육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수산나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머리가 크기 전에, 좀 더 정확히는 다섯 살이 넘기 전에 그들의 의지를 꺾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순종이 축복입니다. 순종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순종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합시다. 믿음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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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