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흥에 전래되어 오는 ‘여장군 이소사(召史, 조이)’ 이야기 한류의 성공을 이끌며 전설이 된 드라마 「대장금」을 만든 이병훈 PD가 “될성부른 소재 찾기가 최우선”이라고 한 말처럼 “해묵은 역사책 한 줄, 고전 한 줄”에서 명작 문화콘텐츠는 탄생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탄생한 명작들은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전남의 역사에서도 그런 소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번에는 그런 될성부른 소재로 장흥의 여성 동학 이소사[조이]1)에 얽힌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다. 이소사 이야기는 전남여성생애사 시리즈2) 중 하나로 『갑오의 여인 이소사』(저자 최혁)라는 책으로도 발간되었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쓴 창작물이다. 그밖에도 동학 설화소설로 「백마의 여장군 이소사 이야기」(소설가 채길순)도 있고, 동학농민혁명열사 이소사 상이란 목판화(박홍규 작)로도 그려졌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상상력을 덜어내고 이소사 관련 사료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앞으로 될성부른 소재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소개하고자 한다. 여자 동학 이소사, 뭣이 그리 중한디? 1894년 동학농민혁명, 그 격동의 현장에서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안 알려져 있다. 접주의 아내들이 잡혀 곤욕을 치르는 경우들은 장흥에서도 확인된다. 대흥면(大興面)에 거주하는 이인환(李仁煥)의 처 유소사(劉召史)는 잡혀서 이인환의 행방에 대해 문초를 당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고읍면(古邑面)에서 대군(大軍)이 움직였을 때 이미 죽임을 당해 그 시신이 옥산(玉山)에 있다고 말한 후 겨우 풀려났다. 또 남면(南面)의 접주 김일(金一)의 처 문소사(文召史)도 그 남편을 잡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문초가 끝난 후 풀려났다. 한편 여자 동학 이소사에 대한 기록은 『양호우선봉일기』에 보인다. 농민군에 대한 토벌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을 때 이런 기록이 있다. “민인(民人)들이 잡아다 바친 여자 동학 1명은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이 건네받았는데, 이미 소모관이 문초를 하면서 곤장을 때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숨을 헐떡이는 지경에 이르러 며칠 못살 것 같으나, 명령을 받을 때까지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민병(民兵)을 정하여 본부(本部)로 압송하였습니다.”3) 이른바 ‘거괴(巨魁)’인 경우만 본부가 있는 나주로 호송하였는데 이 여성의 경우는 심한 중태임에도 불구하고 본부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양호도순무우선봉(兩湖都巡撫右先鋒) 이두황이 호송할 일에 대해, “장흥에서 잡은 죄인 여자 동학 1명은 장흥부의 민병으로 하여금 나주로 압송하게 하되, 지나는 각처마다 각별히 호송에 신경을 써서 혹시라도 소홀히 하여 분란이 생기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렇게까지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895년 정월 초1일에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진영 대대로 압송하였다. “뭣이 그리 중한디?” 이렇게까지 대우(?)를 받았을까? 뭐가 그리 중하였을까? 이를 위해 먼저 장흥전투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전투든 크든 작든 의미 없는 것은 없겠지만, 그래로 꼽는다면 장흥전투는 동학농민혁명에서 황토현, 장성, 우금치 등과 함께 4대 전투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전투 현장인 석대들을 중심으로 그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기념탑 등 다수의 기념물들이 들어서서 그날을 기억해 주고 있다. 왜 장흥이었나? 갑오년 봉기 당시 장흥지방의 농민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들로는 남상면 묵촌(墨村)의 이방언(李芳彦), 대흥 접주 이인환(李仁煥), 웅치를 근거로 활약하고 있는 구교철(具敎轍), 용계면 와리의 이사경(李士京, 仕京이라고도 함), 고읍면 성산리의 김학삼(金學三) 등을 꼽는다.4) 장흥은 집강소기에도 “대개 장흥의 장서(長西)와 부평(富平) 등지는 바로 동도의 소굴입니다. 6월 이후에 1,000명이나 10,000명으로 무리를 지어서 능주 경내를 제멋대로 다니며 소와 말 및 재물을 빼앗았는데, 손가락으로 다 셀 수가 없습니다.”라 하듯이 농민군 활동이 활발했다. 이 기록은 정부군의 시각이기 때문에 해석은 반대로 하면 된다. 이하도 마찬가지다. 그해 9월 2차 봉기에 농민군이 북방으로 6〜7백리 밖으로 모두 싸우러 올라갔다. 주력이 이동한 틈을 타 남도 각지에서 수성군들이 발호하여 농민군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장흥에서는 1월에 일찍이 부사 이용태가 고부민란을 진무하기 위해 안핵사로 차출되어 올라갔고, 한동안 부사 자리가 비어있었다. 7월 말이 되어서야 박헌양(朴憲陽)이 장흥부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고, 이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였다. 장흥부사는 강진병사와 모의하여 이때를 기회로 움직였다. 그리하여 장흥 일대에서는 강진 병영을 중심으로 한 수성군측의 공세가 9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농민군의 대본영에서는 금구의 대접주 김방서를 내세워 강진·장흥 등으로 출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날로 김방서는 3천군을 거느리고 바로 남방으로 향하여 내려갔다. 10월 말경 농민군들은 광주·남평·보성·장흥·금구·능주 등을 출발하여 능주목을 치고 11월 7일에는 장흥으로 쳐들어가기에 이르렀다. 한편, 광주·나주 일대의 농민군들은 오래도록 수성군들과 대치하며 밀리는 가운데, 주력부대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대규모 토벌군의 남하를 피하여 장흥 지방으로 퇴각하여 합류하였다. 이들의 합류에 따라 장흥 동학농민군의 군세는 대폭 강화되었다. 벽사역에서 석대들까지 수성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농민군에 대한 공세를 벌이고, 이에 대응하여 농민군도 여기저기서 합류하여 기세를 높여갔다. 양 진영간의 전투는 벽사역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벽사역·장녕성(長寧城)전투 12월 1일 금구·광주·나주·남평·화순·능주·장흥·보성의 농민군들 장흥 사창에 집결 12월 3일 농민군 장흥부와 벽사역 인근 진출 12월 4일 진시(오전 8시)경 농민군 벽사역 점령 12월 5일 새벽 농민군 장흥부 점령, 장흥부사 박헌양, 기실(記室) 박영수(朴永壽) 등 수성장졸 96인 희생
강진현·병영전투 12월 6일 오후 2시경 농민군 장흥·강진 경계 지점인 사인점까지 진출 12월 7일 10시경 농민군 강진현 점령, 현감 이규하는 나주로 도망. 보암면 도통장 김한섭 희생 12월 10일 농민군 강진 병영 점령. 병사 서병무 도망. 우후 정규찬, 전도정 박창현, 군기관 김두흡(극경) 희생. 병영은 일시적으로 무너졌다가 영암에 도착한 경군의 도움으로 회복
한편, 일본군은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南少四郞)가 명령하여 3갈래로 군사를 출동하였는데, 대위 이시구로 고세이(石黑光正)는 그의 부하 1개 소대와 2개 분대, 교도중대 2분대를 거느리고 영암 땅으로 나아가고 제 1중대 1소대와 통위병 30명은 능주(綾州)의 땅으로 나아가고 히라기(白木) 중위는 그의 군사와 교도중대의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장흥 땅으로 나아갔다.
석대들 전투 12월 12일 농민군은 장흥으로 귀환하여 남문밖과 모정 뒷산 등지에 주둔. 토벌군인 경군 선발대 장흥 도착. 12월 12일 밤과 13일 새벽 통위영병과 일병(日兵)등 30명의 토벌군 선발대와 접전 후 퇴각 12월 15일 교도중대장 이진호가 이끄는 경군과 일본군 본대가 장흥 도착. 3만의 농민군은 고읍 방향에서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 일본군의 유인작전과 신식무기에 밀려 수백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
옥산리 항전 12월 17일 농민군 4-5천명 옥산리에 재집결. 최후의 항전을 벌임. 패배 후 남면 고읍 등의 협곡이나 인근 섬으로 도망. 끝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다. 무차별 살상 옥산리 항전을 끝으로 일련의 장흥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 이때부터 민보군 등 수성군과 관군·일본군에 의한 무차별적인 체포와 학살이 자행되면서 농민군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10월 초순 충청도 전라도 농민군을 토벌키 위해 임시 총지휘부인 양호순무영을 설치하고 그 총지휘자인 순무사로 신정희를 임명하였다. 우선봉장은 이두황, 좌선봉장은 이규태가 각각 맡았다. 우선봉은 순천 등 전라도 동남쪽을, 좌선봉은 나주·무안 등 전라도 서쪽 지방으로 내려와 각기 토벌임무를 맡았다. 호남 초토사로 나주목사 민종렬을 임명하였고, 나주에 초토영을 설치하여 나주가 이후 본부가 된다. 패주한 농민군이 남하하자 일본은 나주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미나미 쇼시로를 그 책임자로 임명, 농민군 주요 지도자를 신문하거나 선별해 서울로 압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각 동의 양민이 분연히 팔과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난 자가 많았습니다. 연일 민간에서 진영 앞에 잡아다가 바친 동도의 숫자가 이미 100명이 넘어 조사를 해서 죄의 경중을 가려 조치할 계획입니다.”5)라는 말처럼 수성군측이 토벌에 앞장섰다. 당시 사정을 기록한 글들에서 그 정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6) ○ 그때 도내 각 읍에서는 동학의 목을 베지 않는 날이 없었다.
○ 경내가 힘을 합하여 매일 잡는 (농민군)수가 수십 명이 되는데 총살한다.
○ 당초 날뛰던 무리의 수효와 그 간에 잡아 죽인 실제 수효와 비교하니 문득 소에서 터럭 하나를 뽑은 것과 같이 미미하여서 만약 지금 다 토벌하지 않으면 풀을 베고 뿌리를 남기는 근심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각별히 방법을 동원하여 체포할 계획입니다.
○ 3∼4시간 동안을 차고 때린 뒤에 주장(周杖)으로 때려 진영의 토굴(土窟)에 넣으니 사람이 마치 삼묶음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어깨와 갈비뼈가 부러진 자가 허다하여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으나…
○ 민인(民人)들이 잡아다 바친 여자 동학 1명은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이 건네받았는데, 이미 소모관이 문초를 하면서 곤장을 때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숨을 헐떡이는 지경에 이르러 며칠 못살 것 같으나…
○ 약간씩 숨어 있던 석굴과 숲속은 다 민병(民兵)들이 태워버려 (적도들이) 동사하였습니다. 이런 잔혹한 살상은 1월 27일 부로 순무영 철폐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후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무차별적 살상의 장면에서 여자 동학이 드러난다. 위 열거한 사례 중 “민인들이 잡아다 바친 여자 동학 1명”이 바로 이소사였다. 그녀는 혹독한 문초를 당해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숨을 헐떡이는 지경에 이르러 며칠 못살 것 같”은 지경이었다. 그런데 뭐가 중했는지 그녀를 나주로 각별히 압송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혹하게 문초하여 중태에 빠뜨린 소모관 백낙중도 1월 2일에 영암에서 붙잡아 급히 포박하여 나주 본진으로 잡아갔다. 그것도 일본 육군 소좌 미나미 쇼시로가 직접 명령하였다. 그리고 중태에 빠진 ‘여자 동학 이소사(李召史)의 남편을 급히 나주 감옥으로 보내어 그 아내의 병을 살피게 하’도록 하였다.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1월 7일 남편 김량문(金良文)은 찾아 보냈다. 군무아문에서도 1월 29일에 “여자 동학의 이름은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니 책자로 만들어 바치라”라고 하여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왜 이처럼 여자 동학 이소사에 대하여 일본 진영에서 각별히 주목했는지 또 조선 정부에서도 책자까지 만들어 보고하라 할 정도였는지 분명치는 않다. 몇 가지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은 있다. 먼저 우선봉장의 첩보(牒報)에 따르면, “장흥의 민인(民人) 등이 잡아 바친 여자 동학은 그들이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일컫는데, 요사스런 말을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한 일대 요물”7)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국민신문(國民新聞)」(1895년 3월 5일자)에서는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여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神女)가 되었다. 그러나 장흥전투의 패배로 관군에 체포돼 지금은 장흥의 철창 안에 있다고 한다.”8) 라 하여 이소사를 ‘여장부’로 소개하고 있다.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했고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라고 하였으니 일본군이나 조선정부군 모두 주목할만한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또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1895년 4월 7일자)에는 아래와 같은 이소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장흥 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 명의 여자가 있는데 추대받아 우두머리[首領]가 됐다. 우리[일본] 병사가 잡아서 심문을 했는데 완전히 미친 여자로, 동학도가 귀신을 이야기하고 신을 말하는 것을 이용하여 천사 혹은 천녀(天女)라 칭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했다.”9) 이 기사는 우선봉장의 첩보에서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일컫는데, 요사스런 말을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한 일대 요물”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긴 했지만, 농민군에게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문초 후 몇일 못 살 것 같다고는 했지만, 남편을 찾아 병을 돌보게까지 한 것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확인되지 않는다. 소년 장수, 소년 뱃사공 이야기도 있다. 장흥에는 이외에도 그럴듯한 이야깃거리가 많다.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는 이방언, 이인환, 이사경, 구교철, 문남택 등 대접주를 비롯해 ‘경국지색 여장군 이소사’뿐만 아니라 ‘13세 소년 장수 최동린(崔東麟)’, ‘소년 뱃사공 윤성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소년 장수 최동린은 장흥의 대흥면(대덕읍 연지리) 출신으로 13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말을 타고 석대들 전투에 나가 농민군을 지휘하는 등 용맹을 떨쳤다. 동학농민군을 지휘하다 석대들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 12월 28일에 처형되었다. 장흥에는 최동린 이외에도 15세로 참여한 대흥면 연지리의 김유선(金有善)과 약산면 해동리의 박백환(朴白煥)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장흥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 유명한 인물로 소년 뱃사공 윤성도가 있다. 석대들과 옥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 소탕을 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펼쳤는데 당시 이를 피해 장흥의 회진면 덕도(德島)에 약 500명의 동학농민군이 피신해 있었다. 수색이 덕도까지 좁혀오자 윤성도는 한밤중을 이용해 덕도의 동학농민군을 금당도와 생일도, 약산도 등 다른 섬으로 피신시켰다. 목숨을 걸고 위기의 순간에 동학농민군을 구했다. 이처럼 민중들은 너나 가리지 않고 나서서 서로 돕고 싸웠던 것이다. 일본을 끌어들여 애꿎은 민초들을 죽음으로 몬 당시 위정자들이 문제였을 뿐이다. 한편, 수성군으로 농민군과 대항했던 이들이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아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면, 농민군의 길이 바른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이들이 갑오년에 힘을 합쳐 일제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유명 무명의 민초들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이들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하는 일, 그것이 우리들에게 여전히 남은 과제이다. 1) 소사는 양민의 아내 혹은 과부를 일컫는 말로 흔히 성(姓) 밑에 붙여 부른다. 이는 이두로서 조이라고도 부른다. 2) ‘전남여성생애사’는 전남여성플라자(현 전남여성가족재단)에서 각 분야에서 활동한 전남여성의 삶을 재해석하여 책자를 발간함으로써 전남지역 여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도전의식을 함양시키고자 시작한 사업으로 2011년부터 지금까지 15책을 발간하였다. 3) 『兩湖右先鋒日記』 을미(1895) 정월 초1일 4) 『長興東學農民革命史』(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 1992), 119쪽. 이 글을 작성하는데 이 책을 주로 참고하였다. 5) 『兩湖右先鋒日記』 갑오(1894) 12월 24일 6) 관련 기록들은 『全羅道 長興地域 東學農民革命 史料集』(전라남도·장흥군·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에서 발췌하였다. 7) 『兩湖右先鋒日記』 을미(1895) 1월 3일 8) 「國民新聞」(明治 28年 3月 5日) “東黨に女丈夫あり 東徒中に一美人あり芳紀二十二容色城を傾くの美色ありと云ふ名を李召史と云ふ久しく東徒の間に在りて奔走し馬上に跨り長興府を燒きたるときの如きは彼れ馬上にて指揮し居れりと云ふ彼れ曾て夢に天神現はれ古錠を興へたりと東徒皆な尊むで神女となせり然るに長興の一敗韓兵に捕はれ今や同地の鐵窓中に在りと云ふ” 9) 「大阪朝日新聞」(明治 28年 4月 7日) 東學黨剿討後記 “女東學, 黃東學 長興附近の東徒に一女子あり推されて首領となる我兵之を縛して尋問せしに全く一狂女なり東徒其鬼を談じ神を語るを利用し天使或は天女と稱し以て愚民を煽動するなり”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