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복음을 보면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에 발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다." 복음은 유다의 말과 생각이 다르다고 전합니다. 유다는 따로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지만 나는 곧 떠난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잊힐지라도 이 여인의 행위는 기억될 것이다." 저는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 것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시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도, 아니 나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깨트려야 할 '옥합'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합니다. 그 옥합 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까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을 과감하게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면 그 시대와 사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계속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늘 개혁이라는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그득권이라는 옥합입니다. 기득권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득권은 교회를 내부로부터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정작 실천하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그득권이라는 옥합을 깨뜨린 사건입니다.
요즘은 신앙을 생각합니다. 요즘의 가정을 생각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성당에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대학에 가면 성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에 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야단치지만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아도 말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 되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지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연못에 물고기가 살았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물이 썩으니 살았던 물고기도 죽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연못이 상하면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도 죽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악을 일삼는 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진리와 정의가 눈앞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였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올마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