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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비경, 카파도키아
[ 장미꽃 피는 로도스 섬 공방전 ]
장미꽃 피는 섬이라는 뜻의 로도스 섬은 터키 반도 바로 밑에 인접해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 영토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이 섬에는 아테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철학의 최고 학술 기관이 있었습니다. 키케로나 카이사르, 부르투스, 그리고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젊은 시절에 공부를 위해 머무르기도 했던 곳입니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이 벌어질 당시에는 요한기사단이 이 섬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로도스섬의 전체 면적은 1,500 제곱킬로미터가 채 안 되고, 세로로 가장 길게 잡아도 80 킬로미터, 너비 역시 가장 길게 잡아 38킬로미터밖에 안 됩니다. 등뼈처럼 산맥이 달리고 있는데 높은 산이라고 해봤자 1,200미터 높이의 산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 로도스 섬의 성문, 영화 <나바론 요새>는 이 섬에서 촬영했습니다. 영화에서 이 성문을 독일탱크
들이 줄줄이...
13세기 말에 십자군 세력이 팔레스티나 근거지를 완전히 잃은 뒤 잠시 동안은 성지 순례의 발길이 끊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지 순례를 목적으로 한 단체 여행을 기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교도 쪽도 기독교도를 지중해로 내몰았으므로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고 순례자들이 뿌리고 다니는 돈에 무관심할 수도 없었습니다. 서유럽과 팔레스티나 사이를 왕복하게 된 순례선이 안심하고 병자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라곤 팔레스티나 근처에서는 로도스 섬밖에 없었습니다.
요한 기사단이 운영하는 로도스 병원은 서유럽인들이 머나먼 타향 길에서 병으로 쓰러졌을 때 가장 안전할 뿐 아니라 수준 높은 치료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시설이었습니다.
치료비는 환자의 빈부를 불문하고 모두 무료였고 개인 병실도 따로 방값을 물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식사도 전원 평등하게 나왔고 무료였는데, 흰 빵과 포도주가 더해진 고기 요리에 삶은 야채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호사스런 식단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로도스 섬의 요한기사단이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인근 해역을 누비면서 마구 해적질을 해대기 시작한데서 비롯됩니다. 이슬람 배를 노략질하는 것은 기독교 측으로서는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대제국을 이룬 오스만 투르크로서는 눈앞의 가시였습니다. 언제든지 이 그리스도의 뱀 소굴을 싹 들어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 로도스 공방전의 서막
* 로도스 섬 위치
* 섬에는 로도스와 린도스 조그만 두개의 도시가 있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오스만 터키의 술탄 메메드 2세는 1480년, 드디어 이 로도스 섬 정복을 위해 10만 대군을 파견했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은 단장 피에르 도뷔송의 지휘를 받아 3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펼치며 끈질기게 버텼습니다. 당시 원정군은 술탄의 친정군이 아니어서 장군들의 전법이 철저하지 못한데다 때마침 역병이 투르크군을 덮쳐서 기사 수만 따지면 600명밖에 안 되었던 방위군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뒤 40년 간 기사단은 방위력 증강에 전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1513년부터 21년까지 기사단장을 지낸 이탈리아인 파브리지오 델 카레토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무기의 주력이 된 대포에 대비해서 성벽을 튼튼한 구축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메메드 2세의 아들인 바예지드 시대는 아버지가 있는 대로 세력을 뻗쳐 정복해놓은 대제국을 정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고, 손자 셀림 시대에는 투르크 민족이 염원해오던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 정복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 일련의 대 정복 사업이 1517년에 일단락되면서 메카까지도 영유하게 된 투르크는 정신적으로는 이슬람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동지중해를 완전히 내해(內海)로 만든 그들이 이제 눈엣가시 같던 로도스 섬을 공격할 때가 온 것입니다.
1522년 이 섬을 공략하기로 결심한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1세의 10만 군대에 대항하여 나선 이들은 백십자를 수놓은 검정 수도복을 걸친 성 요한 기사단이었습니다. 장미꽃 향기 날리는 이 옛 섬을 지키려는 젊은 기사들이 흘리는 피가 에게 해를 짙은 포도주 빛으로 물들여가려는 순간입니다.
< 전투의 시작 >
* 1522년 여름
투르크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앞바다에 로도스 공략을 위한 투르크 해군의 집결이 완료된 것은 1522년 6월1일. 300척 남짓한 규모였습니다.
함대는 해적 수령 콜토글루의 지휘하에 로도스로 향했습니다. 투르크 민족은 통상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해군의 조직력도 빈약해서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일 요량이면 해적 수령을 지휘관 자리에 앉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콜토글루는 300척의 배에 1만 병력을 실어 마르마라 해를 지나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향했습니다. 평균 승선 인원이 적은 것은 대포 등의 공성용 무기 수송이 함대의 첫째가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 슐레이만 대제
비슷한 시기에 육군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에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병력 10만, 발칸 지방에서 징집된 투르크 지배하의 그리스 정교도로 이뤄진 갱부(坑夫)들의 부대가 눈에 띕니다. 이들은 나중에 굴을 파서 지뢰를 묻는 역할이 주어집니다. 술탄은 육상으로 진격할 이 병사들과 함께 행군하기로 했습니다. 파샤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대신들 전원이 그를 따랐습니다. 투르크 궁정이 빠짐없이 참전한 것입니다.
대제국 투르크에 비하면 좁쌀 한 톨밖에 안 되는 로도스 섬을 치는 데 이 정도의 대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그만큼 스물여덟 살 난 술탄 슐레이만이 이 전투에 거는 기대감과 패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뱀 소굴'은 대제국 투르크의 체면 때문이라도 이 기회에 완전히 일소해야 했습니다. 투르크 함대가 새카맣게 로도스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6월하고도 26일의 일이었습니다.
* 양군의 포진도
한편 로도스 섬의 성채 도시를 지키는 전력은 채 600명이 안 되는 기사와 1,500명 남짓한 용병이 고작이었습니다. 로도스주민 중 참전 가능자가 3천 명 가량 되었습니다. 투르크 전군의 로도스 상륙은 7월28일, 술탄 슐레이만 1세가 상륙함으로써 완료되었습니다. 8년 전, 기사단장 파브리지오 델 카레토가 예측하여 철저히 개조해놓은 바로 그 부분의 성벽이 지금 대군의 공세에 맞서게 된 것입니다.
슐레이만 1세는 공격에 앞서 필리프 드 릴라당 앞으로 자신이 직접 쓴 친서를 보냈습니다. 교양면에서도 뛰어난 슐레이만의 멋들어진 라틴어 문장이었습니다. 편지는 전년도 1521년 중에 달성했던 투르크군의 전승을 열거하면서 여러 아름다운 도시들을 정복했고, 수많은 주민을 죽였으며, 생존자는 남김없이 노에를 만들었다고 한 다음, 로도스 섬도 이런 비극에 처하지 말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귀하에게 즉각 섬을 넘겨줄 것을 명한다. 만약에 이에 순종한다면 귀하 및 귀하의 기사들에게 기사단의 귀중품을 가지고 섬을 떠날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이다.” 덧붙여 요한기사단이 로도스 섬에 계속 머물겠다면 그것도 허락해주리라. 난 술탄의 신하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릴라당 기사단장은 아예 답장을 안 보냈습니다. 이제 양 진영은 피터지는 전투밖에 안 남았습니다.
8월1일 전초전
술탄의 예고대로 로도스 섬 공방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먼저 투르크군은 병사들이 성벽에 달라붙기 전에 대포와 지뢰로 땅 위와 땅 밑 양면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투르크군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략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크기의 대포로 두들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땅굴을 파서 성벽 바로 밑에 이르면 거기에 폭약을 쑤셔 넣어 폭발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물량면에서 압도적인 잇점을 최대한 살리고 병사들의 희생을 아끼려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도스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터널을 파서 지뢰를 탐지하여 철거하는 등 양측은 이렇게 티격티격 하면서 여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투르크측의 지칠줄 모르고 쏘아대는 대포는 점차 로도스 섬의 철벽같던 성벽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병사들의 항전 의지를 꺾고 있었습니다.
9월24일 총공격 개시
대포와 지뢰로 성벽을 허물기 시작한 투르크군은 드디어 총공격을 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총공격은 먼저 기독교도로 구성된 비정규군단의 공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포성은 멈추어졌고 들려오는 것은 양군의 함성소리와 비명 소리뿐이었습니다. 쉴 틈도 없이 투르크군의 두 번째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이번에는 장비와 복장 모두가 통일된 정규 투르크군이었습니다.
역시 가장 흔들리는 방어벽은 예니체리 군단이 투입된 곳이었습니다. 예니체리 군단은 투르크 지배하의 기독교 국가에서 7, 8세 쯤 된 어린 남자아이를 강제 징집하여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집단생활을 시키며 전사로 단련한 사내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니체리 군단의 용맹함은 그 평판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전투는 여섯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일단락되었습니다. 로도스 성벽은 간신히 방어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도스 측의 피해는 엄청났고 앞으로 이런 수준의 공격이 또 있다면 견뎌낼 수 있을지가 의심이 갈 정도로 남은 전력은 간당간당해졌습니다. 이후에도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벌써 4만 명을 넘었지만 술레이만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 현재의 로도스 섬
* 겨울
11월 29일 또 한 번의 총공격이 행해진 저녁나절, 투르크 군에서 편지를 매단 화살하나가 날아왔습니다. 로도스 주민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술탄의 친서였습니다. 그래도 저항이 멈추지 않는다면 함락 후 전 주민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엄중한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외성이 무너지고 내성에서 버티던 기사단들에게 술레이만은 모든 무기와 군기를 가진 채로 섬을 나가게 해주겠으며 섬에 남게 될 주민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는 점령자 치고는 아주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섬이 삶의 터전인 주민들은 죽을 각오로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복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한 찬반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소수의 기사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주민들의 압박에 밀린 기사단장 릴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며 성문을 열었고 1523 년 1월 1일, 살아남은 기사단과 수천 명의 민간인들은 마지막 행진을 벌이며 술레이만이 제공한 50 척의 배를 타고 명예롭게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200년 동안 그들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던 장미꽃 피는 옛 섬을 이제는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광대한 투르크제국의 정원에 웅크리고 있던 작고 사나운 ‘그리스도의 뱀’은 둥지 채 제거되었습니다. 이 공성전에서 젊은 승리자인 슐레이만 1세는 프랑스 귀족을 능가하는 멋진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 성 요한 기사단의 역사
예루살렘이 아직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있던 9세기 중엽,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중 제일 먼저 지중해 세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아말피의 부유한 상인 마우로는 예루살렘을 찾는 서유럽의 성지 순례자를 위해 병원 겸 숙박 시설을 지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아말피 상인이 시작한 병원 겸 숙박 시설을 십자군 원정을 전후한 시기에 이교도 지배 하에서도 교묘히 유지하고 있었던 사람은 제라르라는 이름 외에 개인적인 배경은 알려지지 않은 한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제라르의 노력은 얼마 안 가 일어난 제1차 십자군이 1099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보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같은 기독교도가 지배하게 된 예루살렘에서 신약성서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성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이 조직은 4년 뒤 교황 파스칼리스 2세는 이 조직을 종교와 군사 및 병자 치료에 봉사하는 종교 단체로 공식 인가했습니다. 이로써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1130년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성 요한 기사단에 군기를 하사했습니다. 백십자가 수놓인 붉은색 군기였습니다. 1190년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요한 기사단 외에 튜튼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
기사들은 속세의 신분을 버리고 수도승과 같은 규칙을 지킬 의무를 떠안았습니다. 청빈, 복종, 순결이 곧 그것이었습니다.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승병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1187년, 예루살렘이 재차 이슬람교도의 손에 떨어지자 팔레스티나의 십자군 세력은 존망을 걸고 몇 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였습니다. 기독교도를 지중해로 밀어 넣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알라 신의 뜻이므로 이를 위한 전투는 모두 성전이라 굳게 믿고 밀려드는 당시 이슬람교도의 광신에 대해, 비슷한 정신 상태로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이들은 종교 기사단의 기사들뿐이었습니다.
1291년까지는 종교 기사단의 황금 시대였습니다. 이슬람이 그렇게도 고대한 '팔레스티나의 기독교도 일소'는 기사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1291년 훨씬 이전에 실현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난 이들 세 기사단의 운명은 각각 달랐습니다. 튜튼 기사단은 서유럽으로 돌아가 이후 프로이센을 식민지화하는 데 전념하게 됩니다. 가장 비참한 운명을 맞은 것은 템플 기사단이었습니다.
이 기사단이 프랑스에 갖고 있던 엄청난 재산과 광대한 영유지가 왕권 강화에 열심이던 프랑스 왕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수중에 넣으리라 결심한 프랑스 왕은 성전 기사단 파괴 공작에 착수했습니다. 이단. 비밀결사 결성 등의 죄목이 제기되었습니다. 기사들이 차례로 고문대에 누웠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마침내 1314년, 기사단장이 처형됨으로써 템플 기사단은 완전히 괴멸했습니다.
요한 기사단은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나서 베네치아 치하의 키프로스 섬으로 와서 눈칫밥 먹은 지 15년, 마침내 셋방살이를 벗어날 수 있는 호기가 우연처럼 찾아왔습니다. 제노바의 해적 비뇰리라는 사내가 키프로스 섬에 와서 성 요한 기사단에게 인근의 로도스 섬으로 이전해서 같이 해적질을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속삭거린 것입니다. 조건은 로도스 섬에서 나오는 매년 수입의 3분의 1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단장 풀크 드 빌라레는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이 키프로스의 셋방살이를 벗어나 '자택'이 된 로도스의 이전을 완료한 것은 1310년이 되어서였습니다. 이리하여 기사단의 제2의 시대가 개막됩니다. 기사단은 이제부터 로도스 기사단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쯤 되자 비잔틴 황제도 기사단의 섬 영유를 기정 사실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템플 기사단 기사들의 육체가 불 속에서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 로도스 공방전 이후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로도스 섬으로 이전해서 200년 동안 잘 먹고 잘 살다가 슐레이만 대제에게 쫓겨난 요한 기사단은 크레타 섬에서 또 다시 셋방살이를 합니다. 그러던 중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배려로 1530년 몰타 섬을 할양받아 이곳에 정착하게 됩니다.
카를 5세는 기사단에게 형식적인 조공으로 단지 1년에 한 번씩 몰타산 매를 바칠 것을 요구 했습니다. 몰타는 이전 거점인 로도스에 비해서 여러모로 열악했는데, 섬의 크기도 작았고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토양 또한 척박하여 자급자족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배운게 도적질이라고 여기에서도 이슬람 배들을 상대로 또 해적질을 시작합니다.
로도스 섬에서 온전히 살려서 배까지 태워서 보냈는데 또다시 노략질을 시작한 요한 기사단에게 화가 단단히 난 투르크군이 몰타를 토벌하려고 다시 새카맣게 몰려왔지만 실패하고 물러났습니다.
이는 몰타 섬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상륙 지점도 마땅치 않은데다 땅이 워낙 좁아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한정 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공격자가 숫적 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투르크군을 물리친 요한기사단은 이후 그럭저럭 노략질을 하면서 250년간을 지냅니다.
* 지금의 몰타섬
* 몰타에서의 추방
1798년 6월, 몰타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은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나폴레옹에 의해 몰타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어마어마한 프랑스 함대의 위세에 눌려 기사단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순순히 항복했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가는 길이라서 잠깐 쉬었다 가겠다고 속여서 아무 저항 없이 프랑스 군대가 상륙하게 놔둔 후 뒷통수를 얻어맞아 정복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사단의 중심인 프랑스 출신 기사들이 나폴레옹을 환영하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6월 26일, 나폴레옹이 수도 발레타에 입성했습니다. 너무나 멋들어진 성채 도시를 보고 천하의 나폴레옹도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기사단을 잃은 몰타 섬은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영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립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쫓겨난 성 요한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부터 헤아려 키프로스, 크레타에 이어 세 번째 ‘난민’시대를 겪어야 했습니다. 몰타를 떠난 뒤에는 잠시 모스크바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황제가 몰타 상실 이전부터 여러 면에서 기사단의 보호자를 자임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사단은 시칠리아, 페라라 등 이탈리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834년 로마에 정착했습니다. 기사단의 일원이 로마 중심가에 소유하고 있던 건물을 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부터 구호기사단은 군사적인 면은 완전히 탈피하여 본분인 구호활동에 노력하는 일종의 NGO로 거듭났습니다. 로마에 콘도티 거리에 있는 구호소에서는 우표를 판매합니다.
오늘날 로마에서 가장 멋진 거리로 정평이 난 유명 상점가가 늘어선 콘도티 거리에는 지금도 성 요한 기사단의 본부가 있습니다. 바티칸과 더불어 이탈리아 안에 있는 독립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의 기사들은 대부분 결혼한 몸이며 청빈, 복종, 순결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2008년 79대 기사단장 매튜 페스팅(영국인, 59세)이 취임했습니다.
* 로마의 요한 기사단
[ 터키의 비경(秘景), 카파도키아 ]
그 어떤 거대한 손이 있어 어느 한가로운 오후, 심심풀이로 진흙을 이겨 빚어놓았을까요. 신이 펼쳐 놓은 캔버스 위에 인간의 손길로 마무리된 곳, 영화 스타워즈와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의 무대가 된 요정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 모든 말과 감탄사조차 사라지는 곳,
그토록 무수한 소문을 듣고, 그토록 많은 사진을 보았다 해도 그 앞에 서면 생생한 충격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곳, 자연이 만든 풍경 앞에서 인간의 언어 따위는 무기력하고 진부하기만 해 그 모든 말과 감탄사조차 사라지는 곳, 터키 중부의 카파도키아가 그런 곳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앞에 서면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여럿이 함께 보다는 혼자 와야 하는 곳이고, 한낮의 태양보다는 늦은 오후의 사위어가는 햇살 속에 찾아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카파도키아는 막막하리만치 너른 벌판에 솟아오른 기기묘묘한 기암괴석들이 사람들의 혼을 사로잡는 곳입니다.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길고 긴 시간 동안 자연이 공들여 만든 작품입니다. 수백만 년 전 에르시예스 산에서 격렬한 화산 폭발이 있은 후, 두꺼운 화산재가 쌓여 굳어갔습니다.
그 후 수십만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래와 용암이 쌓인 지층이 몇 차례의 지각변동을 거치며 비와 바람에 쓸려 풍화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응회암은 인간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굴을 팔 수 있을 만큼 부드럽습니다. 날카로운 돌만으로도 절벽을 뚫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훌륭한 요충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이 바위촌의 첫 입주민들은 로마에서 박해를 피해 건너온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암벽과 바위 계곡 사이를 파고 깎고 다듬어 교회와 마구간이 딸린 집들과 납골소와 성채를 만들고, 지하도시까지 건설했습니다. 결국 카파도키아는 자연과 인간이 공들여 함께 만든 걸작품으로 남았습니다.
* 카파도키아 위치, 앙카라에서 동남쪽에 있습니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예부터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였습니다. 하나의 제국이 일어설 때마다 카파도키아는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기원전 18세기에 히타이트인들이 정착한 이후, 페르시아, 로마, 비잔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차례로 이곳을 점령했습니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망명지가 되었던 이곳은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기독교가 번성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암굴교회와 수도원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 괴레메, 이름만큼이나 낭만적인 풍경들
괴레메 주변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가득합니다. 흰 계곡, 장미의 계곡, 비둘기 계곡, 긴 계곡, 칼의 계곡, 붉은 계곡, 사랑의 계곡 등등. 그 이름만큼이나 낭만적인 풍경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햇살 따스한 봄날 이곳에 들러 이 계곡에서 저 계곡으로 유랑을 즐기다보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너무 일찍 보아버린 사람들에게는 길고 독한 그리움만이 남겨질 뿐이라는 것을...
카파도키아를 걷는 일은 장엄하고 위대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동시에 누리는 일입니다. 카파도키아의 걷기의 베이스캠프는 괴레메는 카파도키아의 초현실적인 풍경의 중심지로 물결치듯 늘어선 바위 계곡들과 암굴 교회들, 환상적인 전망대와 최고의 트레일을 갖춘 마을입니다. 괴레메의 중심지에서 1km 남짓 떨어진 야외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노천의 모든 것들이 박물관이 되어버린 곳입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비잔틴 양식의 교회와 수도원 중 약 30여 개의 교회가 야외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통풍과 채광을 위한 구멍, 입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장식이 없어 외부에서 볼 때는 인간의 거주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내부로 들어서면 깎고 다듬은 공간 안에 프레스코 벽화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암굴 교회라는 특징 덕분에 프레스코화들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의 교회들은 저마다 독특한 애칭으로 불리웁니다.
* 우치사르
'어두운 교회', '사과 교회', '뱀 교회', '샌들 교회', '버클 교회' 등 그 이름에 얽힌 유래를 찾아가며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무덤과 교회들을 둘러보며 걷다 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갑니다. 다시 마을의 중심지로 돌아와 북서쪽으로 난 아드난 멘데레스 거리를 따라가자. 한 시간 남짓 도로를 따라 걸으면 나오는 곳이 우치사르입니다.
멀리 우뚝 솟은 바위성이 이정표가 되어주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살구꽃 향내를 맡으며 걸어가는 길, 노새를 끌고 밭을 가는 농부들이 보입니다. 바위 성채로 유명한 우치사르는 성채의 꼭대기에서 360도 파노라마의 장관을 선사합니다. 성채에 딸린 카페에서 차 한 잔을 시켜놓고 푸른 기운이 짙어가는 봄날의 들판을 바라보며 앉아있으면 그런 파라다이스가 없습니다.
* 동굴 속에 만든 우치사르 호텔
* 로즈벨리(장미 계곡)
카파도키아 트레킹의 백미는 로즈밸리 입니다. 로즈밸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가이드와 함께 하는 트레킹도 나쁘지 않습니다. 숙소의 여행자들과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걷는 길, 배꽃과 살구꽃, 아몬드 꽃이 다투듯 내뿜는 향기 속에 조붓한 흙길 너머로는 들꽃들이 노랗게 피어있습니다. 동굴 교회나 가옥을 둘러보기도 하고, 전망 좋은 바위의 작은 찻집에서 뜨거운 애플티 한 잔을 마시며 쉬기도 하며 느리게 걷는 길. 장미의 계곡을 붉게 피워내며 스러지는 저녁 노을은 카파도키아가 선물하는 최고의 비경입니다.
* 장미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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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카파토키아 화산재로 이루어진 신의 걸작품! 불라디 글을 읽고보니 너무 흥미진진
다시 한번 가고 싶은 욕구가 불끈 솟아난다
요한기사단 몰타 로마내 독립국 등 아주 재미잇게 잘 읽고 행복했읍니다
이 글을 쓰면서 1993년 여름 휴가때 식구들과 로도스섬에 갔다 온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다시한번 기회가 되면 한달쯤 그곳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이...카이사르
가 젊은날 빈둥거렸다는 장미꽃 향기가 날리는 로도스 섬,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이 갑
옷을 입고 철거덕 거리면서 성내를 거닐던 모습과 영화 <나바론>의 장면들이 교차하
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