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 목장의 봄
김 선 구
봄이 오는 한라산은 눈이 덮여도
당신하고 나 사이에는 봄이 한창이라오.
제주 출신 가수 혜은이가 부른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다. 봄이라는 이미지는 산정에 쌓인 눈도 녹일 만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한겨울 옴츠렸던 미물들이 땅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헐벗은 대지에 초목이 싹터 오르면 가슴을 넓게 펴고 봄을 노래하게 된다.
제주의 봄소식은 어느 지역보다 빠르다. 푸른색 바다와 노란색 유채꽃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봄기운이 유채 밭에서 활개를 펼 때 목장의 봄은 목초지에서 기지개를 켠다.
내가 농촌진흥청 제주시험장에서 근무할 때였다. 이른 봄 연구실의 유리창을 통하여 내다보이는 한라산 정경은 아직도 겨울잠을 덜 깬 것처럼 침묵에 휩싸였다. 한라 영봉을 기대어 펼쳐진 드넓은 들판에도 빛바랜 잡초들이 아직은 봄이 아니라고 투정했다. 그래도 산기슭 한구석에 푸르름으로 생동하며 봄의 실체를 알려오는 곳이 있었다. 해발 600m 고지대에 조성된 우리 목장의 목초지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소들이 마음껏 풀을 뜯으며 송아지를 낳아 키워내는 요람이었다.
초봄 한라산에는 때아니게 눈이 내려 풀들의 생육을 시샘해도 목초는 초록빛 자태를 뽐내었다. 한파가 기승을 부려도 한라산의 봄소식은 우리 목장에 제일 먼저 찾아왔다. 그 소식은 곧 소들에게도 전해졌다. 겨울 동안 축사에 가두어져 지내던 소들이 바람결을 타고 풍겨오는 풀내음에 설렜을 것 같다. 봄을 찬미하고 기다리는 마음은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짐승에게 더 절실했다. 그때쯤이면 소들은 원래의 고향 풀밭으로 나갈 꿈을 꾸기 시작했다.
풀밭은 소들의 활동무대이다. 그 옛날 인간에게 순화되기 전부터 소들은 초원을 삶의 터전으로 여겼다.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마음껏 질주하기도 하고, 목이 마르면 계곡에서 목을 축였다. 비가 오면 나무 밑에서, 바람이 불면 언덕을 등지고 비바람을 피했다. 해가 지면 밤이슬을 맞으며 밤을 지새웠고, 날이 새면 부스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열심히 풀을 뜯고, 배가 부르면 되새김하며 휴식을 취한다. 초원은 소들의 고향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원초적인 영감이 그들의 유전자 속에 잠재하고 있다.
봄철이 되어 소들을 목초지로 내보내려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먼저 목초에 비료를 주고 목책을 보수하고, 이어서 소들에게는 뿔 자르기와 낙인烙印을 새기는 작업을 해야 했다.
봄철에 소들이 방목지에 나서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여 옆 동료들과 시비가 벌어진다. 머리로 치받고 서로 밀치고 하다보면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임신한 소들은 유산을 하기도 했다. 더욱이 우리가 시험용으로 키우던 소들은 미국 텍사스 초원을 누비던 소의 후손들이었다. 한우처럼 순하지 않고 들소처럼 날렵했다. 이러한 이유로 뿔 자르기는 방목을 내보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소들을 강제로 붙들어 매고 뿔 자르는 기구를 이용하여 뿔을 싹둑 잘라버린다. 이어서 뿔 잘린 자리에서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피를 지혈시키고, 불에 달군 인두로 그 자리를 지져댄 후 바셀린을 발라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소들에게는 안됐지만 관리상 불가피한 조치였다.
다음은 낙인 작업이었다. 소의 엉덩이에 번호를 새기는 일이다. 그래야 시험연구를 위하여 개체들을 파악하여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진 인두를 불에 달구어 엉덩이를 지져 번호를 낙인했다. 그러다 보면 때아니게 쇠고기 굽는 냄새가 봄바람 타고 후각을 자극했다.
이슬람교도 어린이들이 할례를 받아야 어른이 되듯이, 우리 목장 소들은 고통의 수난을 겪어서야 방목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래도 방목지에 풀어놓으면 소들은 마치 천국에나 온 것처럼 좋아했다. 속박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대하는 풀맛에 제정신이 아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봄을 즐겼다.
그때쯤이면 제주도 전역에 유채꽃이 만발했다. 언제부터인가 제주에 유채꽃을 보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유채 밭에서 봄을 즐기는 동안, 소들은 풀밭에서 봄을 탐닉했다. 제주의 봄은 관광객의 것이고, 목장의 봄은 소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봄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소들과 씨름하다 보면 봄은 언제 왔었는지도 모르게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저 신기루처럼 잠깐 비치고 가는 변화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이제 와서 회고해 보니 계절에 대한 감각도 없이 지내온 날들이 추억 속에 점철된다. 목장 사람들은 봄을 잊고 살았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지금쯤 제주에는 춘색을 드러내고 소들은 초원으로 나갈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한라산에 눈이 내려도 소들은 초원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나도 관광객이 되어 제주의 봄을 맞으러 가보려 한다. 그리고 소들이 뛰노는 초원으로 가서 목장의 봄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
제주의 봄
첫댓글 지난번에 썼던 글입니다. 축산동호인 모임에서 과거의 경험담을 써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내용을 추가하여 산문 형식으로 작성했습니다. 어쩌면 산문이 더 솔직하고 자유스러운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의 봄과 소들의 봄 맞이 그리고 우리나라 축산의 발전을 알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일반인들은 소고기나 맛있게 먹을 줄 알지 어떻게 소를 키우는지 그런 과정을 잘 모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