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교두보 방어작전의 최대 決戰 多富洞전투에서 「世界戰史上 최후의 師團長 돌격」을 감행했던 파이터. 北進의 돌파구를 뚫은 大勢反轉의 先鋒將. 敵都 평양에 제1번 入城한 機動戰의 猛將. 37度線에서 中共軍에 반격, 서울을 再수복한 名將. 제2戰線의 智異山 게릴라를 소탕한 智將. 現 국토의 최북단인 東部전선을 확보한 군단장. 32세의 나이로 국군 최초의 大將에 오른 「최고의 野戰사령관」. 休戰을 前後하여 두 번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人和의 德將. 그가 白善燁 장군이다
출생과 성장 背景
白善燁(백선엽) 장군은 필자와 舊面(구면)이다. 15년 전, 白장군의 서울 梨泰院洞(이태원동) 자택에서 두 번 면담, 인터뷰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그러나 여태 가슴 한구석에 미련이 남아 있다. 나이 스물아홉에 장군이 되어 이후 온 세계가 감탄하는 그 특유의 리더십을 밝혀 내는 데는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만 82세. 이번에 다시 증언을 듣기 위해 찾아간 필자의 손을 잡고, 뜨거운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놓지를 않았다. 老장군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이것이 半世紀 전의 戰場(전장)에서 부하들의 士氣를 올리던 통솔법 중 하나이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야 어떻든 「白善燁 리더십」의 正體(정체)에 접근하려면 우선 그의 原點(원점), 즉 출생과 성장배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빠른 방법일 것 같다.
白善燁은 1920년 11월23일 平壤(평양)의 서남쪽, 江西郡의 德興里(덕흥리)에서 白潤相(백윤상)-方孝烈(방효열)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仁燁(후일의 육군 중장)은 1923년生, 그 2년 후에 아버지가 별세했다. 그때 善燁의 나이 여섯 살. 그 위로 열한 살의 누나 福燁이 있었다.
『아버지의 행적에 관해서는 어슴푸레한 기억이 있지만, 그건 어머니의 후일담과 뒤섞여 있을 겁니다. 처음엔 우리 집에 물려받은 논밭이 좀 있었지만, 차츰 가산이 기울었다고 합디다. 웬만한 韓國 사람은 잘살기 어려운 日帝 식민지 시절 아니었습니까. 아버지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新학문을 했는데, 日本 東京 유학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곳에서 대학 같은 데 들어가지는 않았으니 講義錄(강의록) 같은 것을 받아서 공부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외지생활도 하시다 귀향했는데, 지병을 얻어 돌아가신 거죠』
일가족 넷의 집단자살 기도
남편을 잃은 어머니 方孝烈은 큰 결심을 했다. 어떻게든 아들 둘에게만은 교육의 기회를 주겠다는 일념이었다. 이듬해, 집과 조금 남은 논밭을 정리한 어머니는 고향 德興里를 등지고 大處인 평양으로 떠났다.
『일가족 넷이 平壤까지 70리를 걸어갔습니다. 平壤 가까이에 가니까 해가 지려 하더군요. 그때 석양에 물든 平壤 들머리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926년 平壤의 인구는 15만 명. 견직물, 의류, 고무신, 소주 「純露(순로)」 제조공장 등이 있고 전차도 다니던 산업 중심지였다. 日本人 자본의 대형 시멘트 공장과 무연탄 공장, 그리고 日本軍의 제조창도 있었다.
平壤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생활비가 바닥났다. 어머니가 선택한 길은 가족 4명의 집단자살이었다.
『뒷날, 어머니와 누나에게 들은 얘기지만, 일가 넷이 大同橋(대동교)에서 투신하려고 집을 나섰어요. 죽으러 가는 길에 누나가 어머니에게 「나무도 3년이 되어야 뿌리를 내리는데, 우리도 3년은 견뎌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대요. 어머니는 열세 살짜리 딸의 하소연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귀가했다고 합디다』
인간의 처절한 결심은 성취의 원동력인 것 같다. 그래서 背水陣이 무서운 것이다.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어머니와 누나는 그로부터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平安고무」에 취업하여 고무신을 만드셨고, 누나는 「山十」이라는 絹絲(견사)회사에 취직했어요.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지요.
우리 형제는 별 어려움 없이 若松(약송)보통 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저축도 늘어나 新里에다 집 한 채를 사서 이사하게 되었죠. 누나는 곧 석탄 판매상을 하던 댁으로 시집을 갔는데, 어머니가 그 사업을 도우면서 경제적 여유도 생겼습니다』
소학교 시절의 善燁 소년은 책읽기를 좋아했다.
『일본인 거리의 서점에 자주 들렀죠. 「少年俱樂部」에 동물을 의인화한 전쟁만화 「노라쿠로」가 연재됐는데, 매달 다음 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읽을거리였어요. 조금 커서는 나츠메 쇼세키, 후다바데이 시메이(二葉亭四米)의 소설, 톨스토이의 日語 번역서 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平壤師範 시절의 수학여행과 군사훈련
소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善燁 소년은 장래의 진로문제와 마주했다. 웬만한 가정의 자제들은 상업학교, 농림학교 또는 사범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치던 시절이었다.
『나는 平壤師範學校(평양사범학교)와 平壤상업학교에 응시하여 두 군데 다 합격했는데, 결국 平壤사범을 택했습니다. 1934년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갔죠. 동급생은 韓國人 90명, 일본인 10명이었어요』
―아직도 생각나는 학창시절 추억이 있겠죠.
『역시 수학여행이지요. 3학년 때 수학여행지는 서울과 慶州였습니다. 4학년 때는 滿洲(만주)의 長春·瀋陽·大連·旅順(여순)을 돌았습니다. 5학년 졸업여행 때는 釜關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京都(교토)·奈良(나라)·東京(도쿄)·日光(닛코)를 둘러보았습니다』
―상당히 호화판 수학여행이었군요.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으로 日本의 最盛期(최성기)였죠. 大阪(오사카) 등지에서는 동포들의 가난한 모습을 목격하고 가슴이 저미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視野(시야)가 좀 넓어졌던 것 같아요』
―日帝는 1931년 滿洲 침략을 개시한 이래 軍國主義를 지탱하는 광범위한 기반을 조성했는데, 平壤師範 재학 중 군사훈련을 받으셨죠.
『平壤師範에는 현역 육군 중좌(중령), 예비역 육군 중위와 준위, 이렇게 세 명의 배속장교가 상주했습니다. 학교에 무기고도 있었는데, 소총은 물론 기관총까지 있었어요. 교련은 1週에 두 시간 정도, 군사학 교과서로는 「敎鍊必携(교련필휴)」를 사용했지. 4학년 때는 1주간, 5학년 때는 2주간 平壤 주둔 보병 제77연대에 입영하여 실탄 사격 등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어요. 소대장 양성을 위한 교육이었지…』
혈관 속에 흐르는 武人의 기질
만 82세. 이번에 다시 증언을 듣기 위해 찾아간 필자의 손을 잡고, 뜨거운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놓지를 않았다. 老장군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이것이 半世紀 전의 戰場(전장)에서 부하들의 士氣를 올리던 통솔법 중 하나이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야 어떻든 「白善燁 리더십」의 正體(정체)에 접근하려면 우선 그의 原點(원점), 즉 출생과 성장배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빠른 방법일 것 같다.
白善燁은 1920년 11월23일 平壤(평양)의 서남쪽, 江西郡의 德興里(덕흥리)에서 白潤相(백윤상)-方孝烈(방효열)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仁燁(후일의 육군 중장)은 1923년生, 그 2년 후에 아버지가 별세했다. 그때 善燁의 나이 여섯 살. 그 위로 열한 살의 누나 福燁이 있었다.
『아버지의 행적에 관해서는 어슴푸레한 기억이 있지만, 그건 어머니의 후일담과 뒤섞여 있을 겁니다. 처음엔 우리 집에 물려받은 논밭이 좀 있었지만, 차츰 가산이 기울었다고 합디다. 웬만한 韓國 사람은 잘살기 어려운 日帝 식민지 시절 아니었습니까. 아버지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新학문을 했는데, 日本 東京 유학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곳에서 대학 같은 데 들어가지는 않았으니 講義錄(강의록) 같은 것을 받아서 공부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외지생활도 하시다 귀향했는데, 지병을 얻어 돌아가신 거죠』
일가족 넷의 집단자살 기도
남편을 잃은 어머니 方孝烈은 큰 결심을 했다. 어떻게든 아들 둘에게만은 교육의 기회를 주겠다는 일념이었다. 이듬해, 집과 조금 남은 논밭을 정리한 어머니는 고향 德興里를 등지고 大處인 평양으로 떠났다.
『일가족 넷이 平壤까지 70리를 걸어갔습니다. 平壤 가까이에 가니까 해가 지려 하더군요. 그때 석양에 물든 平壤 들머리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926년 平壤의 인구는 15만 명. 견직물, 의류, 고무신, 소주 「純露(순로)」 제조공장 등이 있고 전차도 다니던 산업 중심지였다. 日本人 자본의 대형 시멘트 공장과 무연탄 공장, 그리고 日本軍의 제조창도 있었다.
平壤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생활비가 바닥났다. 어머니가 선택한 길은 가족 4명의 집단자살이었다.
『뒷날, 어머니와 누나에게 들은 얘기지만, 일가 넷이 大同橋(대동교)에서 투신하려고 집을 나섰어요. 죽으러 가는 길에 누나가 어머니에게 「나무도 3년이 되어야 뿌리를 내리는데, 우리도 3년은 견뎌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대요. 어머니는 열세 살짜리 딸의 하소연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귀가했다고 합디다』
인간의 처절한 결심은 성취의 원동력인 것 같다. 그래서 背水陣이 무서운 것이다.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어머니와 누나는 그로부터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平安고무」에 취업하여 고무신을 만드셨고, 누나는 「山十」이라는 絹絲(견사)회사에 취직했어요.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지요.
우리 형제는 별 어려움 없이 若松(약송)보통 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저축도 늘어나 新里에다 집 한 채를 사서 이사하게 되었죠. 누나는 곧 석탄 판매상을 하던 댁으로 시집을 갔는데, 어머니가 그 사업을 도우면서 경제적 여유도 생겼습니다』
소학교 시절의 善燁 소년은 책읽기를 좋아했다.
『일본인 거리의 서점에 자주 들렀죠. 「少年俱樂部」에 동물을 의인화한 전쟁만화 「노라쿠로」가 연재됐는데, 매달 다음 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읽을거리였어요. 조금 커서는 나츠메 쇼세키, 후다바데이 시메이(二葉亭四米)의 소설, 톨스토이의 日語 번역서 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平壤師範 시절의 수학여행과 군사훈련
소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善燁 소년은 장래의 진로문제와 마주했다. 웬만한 가정의 자제들은 상업학교, 농림학교 또는 사범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치던 시절이었다.
『나는 平壤師範學校(평양사범학교)와 平壤상업학교에 응시하여 두 군데 다 합격했는데, 결국 平壤사범을 택했습니다. 1934년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갔죠. 동급생은 韓國人 90명, 일본인 10명이었어요』
―아직도 생각나는 학창시절 추억이 있겠죠.
『역시 수학여행이지요. 3학년 때 수학여행지는 서울과 慶州였습니다. 4학년 때는 滿洲(만주)의 長春·瀋陽·大連·旅順(여순)을 돌았습니다. 5학년 졸업여행 때는 釜關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京都(교토)·奈良(나라)·東京(도쿄)·日光(닛코)를 둘러보았습니다』
―상당히 호화판 수학여행이었군요.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으로 日本의 最盛期(최성기)였죠. 大阪(오사카) 등지에서는 동포들의 가난한 모습을 목격하고 가슴이 저미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視野(시야)가 좀 넓어졌던 것 같아요』
―日帝는 1931년 滿洲 침략을 개시한 이래 軍國主義를 지탱하는 광범위한 기반을 조성했는데, 平壤師範 재학 중 군사훈련을 받으셨죠.
『平壤師範에는 현역 육군 중좌(중령), 예비역 육군 중위와 준위, 이렇게 세 명의 배속장교가 상주했습니다. 학교에 무기고도 있었는데, 소총은 물론 기관총까지 있었어요. 교련은 1週에 두 시간 정도, 군사학 교과서로는 「敎鍊必携(교련필휴)」를 사용했지. 4학년 때는 1주간, 5학년 때는 2주간 平壤 주둔 보병 제77연대에 입영하여 실탄 사격 등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어요. 소대장 양성을 위한 교육이었지…』
혈관 속에 흐르는 武人의 기질
―반발심 같은 건 없었습니까.
『지식의 수준이 진전됨에 따라 식민지 정책의 모순, 韓國人에 대한 차별대우 등에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교련을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었던 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군사훈련에는 강렬한 호기심까지 느꼈습니다. 군사훈련을 익히면 교사가 되어 학동들을 관리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白장군의 말.
『사실, 나에겐 군인의 피가 좀 흐르고 있어요. 외조부가 舊한국군 해산時 參領(참령:소령)으로 平壤監營(평양감영)의 兵站(병참) 책임자였지. 監營 최고위자가 副領(부령:중령)이니, 넘버 투 맨이여. 아버지는 소시적에 전쟁놀이만 벌어졌다 하면 대장짓을 했다는데, 그걸 눈여겨본 외조부께서 일찌감치 사윗감으로 점을 찍으셨다고 합디다. 그런 武人의 기질은 나보다 동생(白仁燁 장군)이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긴 하지만…』
―兵營(병영)에 들어가 훈련을 받아 보니 日本軍 장교의 자질은 어떠합디까.
『日本軍 초급장교는 우수했지만, 연대장쯤 되면 「구름 위의 존재」였습니다. 실제 平壤시장보다 높았어요. 나는 훗날 韓國전쟁 때 美軍의 고급지휘관을 접했을 때 이것이 日本軍의 약점이라고 느꼈습니다』
―美軍 지휘관들은 어떻든가요.
『美軍에서는 제일 바쁜 것은 지휘관, 특히 將軍이었습니다. 항상 여유가 있는 것은 新兵이었어요. 이 점, 日本軍과 정반대예요. 몽골 지역의 노몬한 전투(1939년)에서 日本軍을 압도한 蘇聯軍(소련군)의 주코프 원수도 그의 회상록에서 「日本軍 하급장교는 잘 훈련되어 있으나 고급장교는 훈련미숙」이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日本軍의 고급장교가 現場 제일주의를 망각하고, 일종의 권위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움에 대한 욕망 때문에 軍官學校 입학
―平壤師範을 졸업(1939년)하고도 굳이 滿洲軍官學校(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는 유별나게 배움을 좋아했습니다. 사범학교 5년을 졸업한 뒤에도 면학을 계속하고 싶었던 겁니다. 마침 滿洲군관학교에서 생도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까지 韓國人에 대한 징병은 없었지만, 日帝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언젠가는 韓國 청년들도 전장에 동원될 것으로 예상되던 무렵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앞으로 2년 더 배울 수 있으니 군인의 길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日帝의 괴뢰인 滿洲國은 1932년 3월에 건국되었다. 創軍도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간부의 육성을 위해 2년제 奉天軍官學校가 설립되었다.
『나는 1940년에 입교, 41년 제9기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 무렵, 新京(지금의 長春)에 4년제 新京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 朴正熙 前 대통령은 이곳의 2기생 출신이다.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교사근무 의무가 있었을 터인데요.
『1939년 말 奉天(봉천:지금의 瀋陽)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했지만, 2년간의 교사근무 의무 때문에 처음엔 입교가 허락되지 않았어요. 마침 奉天군관학교 군의관이 韓國人이라는 소문을 알고 찾아갔더니 세브란스醫專 출신인 元容德(故人·후일의 육군중장·헌병사령관 역임)씨였어요. 그가 군관학교 幹事(간사)에게 부탁하여 입교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그때는 군인의 말발이 셀 때였죠. 나중에 平壤사범학교 재학 중에 면제받은 학비·기숙사비만 반제하라는 연락이 왔습디다』
滿洲軍 시절 八路軍 토벌부대에서 복무
―군관학교 졸업 후 어디에서 복무했습니까.
『1941년 12월에 졸업했는데, 바로 그때 太平洋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나는 見習士官(견습사관)으로 東滿洲에 주둔하고 있던 滿軍 보병 제28단(연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어 소위로 올라 1943년에는 함경북도와 접하는 間島省(간도성), 즉 현재의 延邊朝鮮族自治州(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던 間島特設隊(간도특설대)로 전임됐어요. 주둔지는 延吉縣 明月臺(연길현 명월대)였소』
그는 여기서 많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부대는 대대 규모로서 부대장과 간부 일부가 日本人이고, 대부분의 군관은 韓國人이었습니다. 이 부대에서는 후일의 國軍 장성을 다수 배출했습니다. 韓國전쟁 중 제1군단장으로 용전했던 金白一(1군단장 재임 중이던 195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전사) 장군은 이곳 중대장이었어요. 韓國 해병대의 「아버지」 申鉉俊 장군과 金錫範 장군, 그리고 육군대장으로 累進(누진)한 任忠植 장군도 이곳 출신이고요. 韓國전쟁 중 연대장급으로 활약한 분들 중에는 間島特設隊 출신이 많아요』
이어지는 白장군의 말.
『당시 滿洲에서 韓國人 부대는 여기뿐이어서, 80만 명을 넘던 韓國系 주민 중에서 매년 300명 정도를 선발했기 때문에 사병들의 자질이 발군이었죠. 장비는 성능이 뛰어난 체코製가 주종이었는데, 특히 기관총은 日本軍이 부러워할 만큼 高性能이었어요』
―間島特設隊의 主임무는 무엇이었습니까.
『間島省 일대는 게릴라의 활동이 빈번했습니다. 시종, 치안작전에 바빴습니다만, 본래의 임무는 잠입·파괴공작이었습니다. 滿洲軍 중에서 총검술·검도·사격이 가장 우수한 최정예 부대였죠』
1944년 봄, 中國 대륙의 日本軍은 제1호 작전, 소위 「大陸打通 작전」을 개시했다. 京漢線(경한선) 철도 등 中國 본토의 大동맥을 장악하는 大작전이었다.
『中國人의 對日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특히 八路軍(中共軍의 前身)이 활동하고 있던 北支에서는 2개 중대 이하의 행동이 금지될 정도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間島特設隊가 北支특별경비대의 지휘下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우리 부대는 1944년 늦가을에 熱河省(열하성)의 承德(승덕)에 집결한 다음, 萬里長城을 넘어 冀東(기동) 지구에 주둔하여 사방을 포위한 八路軍에 대해 토벌전을 감행했습니다』
―戰果는 좋았습니까.
『八路軍의 「붉은 바다」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1개 대대 병력으로는 상황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다만 선무공작의 효과가 나타나 주민들의 협조를 얻었죠. 마을 長老를 軍使로 활용하여 八路軍과 교섭하여 포위를 풀게 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 間島特設隊에서 전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지. 기적의 生還(생환)이라고들 하더군요』
南下하는 蘇聯軍 관찰, 후일 戰場에서 큰 도움 줘
―광복 당일, 白장군께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1945년 봄, 나는 冀東지구에 주둔하던 間島特設隊로부터 전출되어 延吉에서 국경경비의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新京 滿洲軍사령부로 출장갔다가 귀로에 吉林驛(길림역)에서 蘇聯軍(소련군)과 조우했어요. 그날이 8월15일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白장군의 증언.
『길림역 플랫폼에서 延吉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항복을 고하는 쇼와(昭和) 천황의 이른바 「玉音放送(옥음방송)」을 듣고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蘇聯軍 선발대가 들어오더군요. 그땐, 나처럼 군복을 입은 사람도 포로로 잡지 않습디다. 먼저 朝鮮系 통역이 접근하여 「기타 세이이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고 물어요. 기타 세이이치(喜多誠一) 대장은 日本軍 제1방면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중위인 내가 알 리가 있느냐」고 대답했더니 「그건 그렇다」고 납득하더군요. 그러더니 그가 내 손목시계를 탐을 내며 「달라」고 해서 순순히 벗어 주었어요. 권총은 뺏기지 않았죠. 이번에는 내가 「이제 日本이 졌는데, 韓國은 어떻게 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는 「朝鮮은 독립한다. 어떻든 빨리 귀국해라. 蘇聯軍이 朝鮮系까지 연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기서 어물어물하다간 시베리아로 유형을 갈 수도 있다」고 충고해 주더군요』
당시 白善燁 중위는 한 해 전 平壤에서 결혼한 신부 盧仁淑씨와 延吉에서 살림을 차려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미리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어머니와 부인은 8월15일 마지막 철수 열차를 타고 平壤으로 귀향했다. 홀몸의 그는 이제 단출해졌다.
『부대 해산 후 나는 蘇聯軍이 들어오기 전에 탈출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철도 운행을 기다리지 않고 平壤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민간인 복장에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얼마간의 현금과 일용품을 륙색에 넣은 가벼운 차림으로 明月臺를 출발한 겁니다. 철로를 따라 龍井(용정)을 거쳐 南坪(남평)에서 두만강을 건너 茂山(무산)에 들어왔어요』
이어지는 회고.
『城津(성진)에서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남하하는 蘇聯軍의 大縱隊(대종대)를 만났습니다. 직업 탓인지 蘇聯軍 부대 가까이로 다가가 관찰했어요. 제25軍 대열이었는데, 탱크는 T34가 많고, 野砲(야포)는 76mm 砲, 122mm 砲, SU76 自走砲, 박격포는 대형 120mm였는데, 이때의 관찰이 후일 6·25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 무기들을 고스란히 北韓軍에게 넘겨 南侵하도록 한 것입니다. 개인 화기는 「만도린」이라고 불리던 短기관총이 많더군요』
―軍紀(군기)는 어떻든가요.
『밤이 되니까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났어요. 전투개시인가 하여 긴장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술 취한 蘇聯軍 병사들이 공중을 향해 마구 쏘고 있는 겁니다. 중앙아시아에선 무슨 축제가 있으면 그런다지만, 射擊軍紀(사격군기)가 영 엉망이더군요』
다시 白장군의 회상.
『延邊의 明月鎭으로부터 平壤까지 800km. 平壤과 元山을 잇는 平元線의 중간지역인 陽德(양덕)의 친척 집에서 하루를 묵고, 거기서부터는 기차를 탔습니다. 野宿(야숙) 1개월의 여행이었지. 한여름이라 가능했던 거요』
민족지도자 曺晩植의 비서로 일하면서 金日成 등 빨치산 출신들과 자주 對面
그의 어머니와 부인은 한 달 전 이미 平壤에 무사히 돌아와 있었다. 그의 동생 仁燁도 日本 유학 중 學兵으로 입대했으나 중부 일본 기후(岐阜)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9월 초순 일찌감치 귀가했다. 蘇聯軍 선발대는 벌써 8월24일 平壤에 진주, 軍政을 시행하고 있었다.
『나도 뭔가 생업을 찾아야 했어요. 다행히 외가 쪽 친척인 宋昊經(송호경)씨가 민족지도자 曺晩植(조만식) 선생님의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해 平壤 일대의 치안유지에 힘쓰면서 장차의 독립에 대비하고 있었지…. 그 무렵만 해도 蘇聯軍은 曺晩植 선생을 이용하고 있었거든. 宋昊經씨의 소개로 나도 曺晩植 선생의 사무소에서 일하게 됐어요. 宋昊經씨는 내가 나중에 1사단을 이끌고 平壤에 육박할 때 퇴각하던 북한군에 의해 총살되었어요』
―그 무렵 白장군께서 金日成을 만나셨다면서요.
『당시 나는 사무소 입구에 책상 하나를 놓고 接受係(접수계) 역할을 했는데, 金日成은 사무실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때 본 金日成은 호리호리하고 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30代 청년으로서 양복 차림이었죠. 曺晩植 선생은 그를 「金日成 장군」이라고 깍듯하게 불렀지만, 나는 너무 젊은 그와 1910年代부터 명성이 높았던 「抗日의 老영웅 金日成 장군」을 연결해서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복무하던 間島特設隊에 쫓겨 소련으로 도피했던 中國 東北抗日聯軍(동북항일연군)의 朝鮮系 부대의 金日成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와 행동을 함께했던 崔賢(최현: 후일의 人民軍 대장), 崔庸健(최용건: 후일의 人民武力相), 金策(김책:남침時 戰線사령관) 등도 우리 사무실에 들락거렸는데, 이름이 귀에 익어 백두산 일대에서 게릴라戰을 전개하던 사람들이라고 확신은 했습니다』
―장래 敵將(적장)들과의 숙명적 만남이군요.
『연락이 편리한 사무소여서 많은 옛 戰友와 知人이 찾아왔습니다. 丁一權(정일권: 滿洲軍 대위 출신, 후일 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 역임, 故人)씨도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丁一權씨와 얘기하고 있는 중에 그 옆으로 金日成이 지나갔는데,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金白一(김백일: 滿洲軍 대위 출신, 육군 제1군단장 역임, 故人) 선배도 나의 소개로 金日成과 서로 인사 정도의 얘기를 했습니다』
10월14일, 平壤제1中學 교정에서 蘇聯軍 환영의 명목으로 시민대회가 열렸다(일부에서는 개최 장소를 「平壤 공설운동장」이라고 하지만, 白장군은 平壤제1중학 교정이라고 증언). 여기서 金日成은 군중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항일의 영웅」으로 소개된다. 사전에 짜인 각본에 따라 대회는 「金日成 장군 귀환 환영대회」로 돌변했다.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은 南으로 가야 한다』
平壤에서 민족주의자의 중심은 曺晩植 선생이 좌정했던 평안남도인민위원회의 사무소였다. 그러나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11월 하순, 金日成의 친위대인 赤衛隊(적위대)가 사무실을 덮쳐 그의 동생 白仁燁씨가 隊長이던 경호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丁一權씨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찾아와 「함께 南下하자」고 제의했어요. 「우선, 赤衛隊가 벼르고 있는 내 동생(白仁燁)을 데리고 월남해 주시오」라고 부탁했어요』
12월에 들어 조선공산당 北朝鮮分局이 조선공산당으로 승격되고, 그 책임비서를 金日成이 맡았다. 절대권력으로의 제일보였다. 정세는 8월의 광복 직후보다 더욱 험악해졌다.
『나는 曺晩植 선생께 「선생님의 이상을 실현하시려면 南下하는 길밖에 없습니다」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는 북쪽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들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다」면서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은 南으로 가야 한다」고 나의 南下를 재촉하십디다』
당시 曺晩植의 나이 64세. 白善燁과 동향인 江西郡 출신이었다. 曺晩植은 일찍이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하고 朝鮮日報 사장을 역임했으며, 「코리아의 간디」라고 불린 「독립운동의 기둥」이었다.
『나는 우선 金白一씨와 상의했어요. 金白一씨의 생각은 명쾌하더군요.
「공산게릴라가 두려워하던 間島特設隊 출신인 우리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서울로 가자. 최남근(육군 중령으로 연대장 역임, 1948년 麗順叛亂事件 직후의 숙군작업 때 반란군과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처형당함)에게도 권유하면 어떨까」
그 후 권유를 받은 최남근씨도 「공비를 쫓던 우리들은 北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서울行에 동의하더군요. 그래서 셋이 남하를 결행했습니다. 가족은 서울에서 생활기반을 잡는 대로 불러오기로 작정했죠. 그때만 해도 38선의 경비가 허술하여 월남하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요』
英語 공부시켜 준다고 해서 入隊, 약속과 달리 5聯隊 창설을 떠맡겨
3人은 12월29일 서울에 도착했다. 민족진영에선 유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이고, 좌익은 贊託(찬탁)운동으로 맞서 양측 데모대가 충돌하던 무렵이었다. 정당도 100여 개가 난립해 있었다.
『그러한 때 나중에 국방경비대가 되는 조직이 대원을 모집하고 있었어요. 특히 장교 경험을 지닌 자는 軍事英語學校(군사영어학교)라는 곳에서 英語를 가르쳐 준다고 해서 솔깃했어요. 나는 원래 배움을 좋아하잖아요. 서울 泰陵(태릉)에 있던 제1연대 창설준비실(현재 陸士 자리)로 찾아갔습니다. 蔡秉德(채병덕) 소령이 연대 편성업무를 추진하고 있었어요』
후일의 韓國전쟁 발발時, 蔡秉德 소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서 初戰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채 종군하다가 경남 河東전투에서 전사했다(中將으로 추서). 그는 平壤 출신으로 日本육사 49기 출신이었다. 병과는 重砲兵, 기술계통의 보직에 오래 근무, 광복 직전 仁川육군조병창의 공장장이었다.
『蔡소령이 매우 반가워하더군요. 「오, 잘 왔어. 자네 셋 모두 입대하면 어떨까. 여기 아는 사람도 많을 거야. 丁一權, 姜文奉(강문봉: 육군중장·2군사령관·국회의원 역임, 故人)이도 와 있어. 白군, 자네 동생도 입대하여 소대장을 하고 있어. 불러 줄게」 하더군요』
의식주가 해결되고 영어학교에서 공부까지 시켜 준다는 바람에 셋 모두 입대서류를 제출했다. 서류전형이 끝나고 선서를 하니 역시 셋 모두가 중위로 임관되었다. 정식서류상으로는 1946년 2월26일자였다. 곧 美 군정청의 고문으로 근무하고 있던 李應俊(이응준)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李應俊 선배님은 대뜸 「셋 모두 잘 왔어. 현재 부대를 만들고 있다. 즉시 현지로 날아가서 도와야 해. 군대 경험자가 없으니 진척이 되질 않아. 부탁한다. 임지는 골라서 가도 좋아」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들었던 얘기와는 사뭇 다르잖아요. 그래서 내가 「英語공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고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하라면 해」라고 호통쳤어요. 셋 모두 「알겠습니다」라고 크게 복창했지…』
李應俊씨는 舊 日本육사 26기생, 광복 당시 日本육군 대좌(대령)로서 白善燁보다 무려 21세 연상의 大선배였다. 관록에 눌릴 수밖에 없었다.
「부대를 골라서 가도 좋다」고 해서 金白一 중위는 裡里(지금의 익산) 제3聯隊(연대), 최남근 중위는 大邱 제6연대, 白善燁 중위는 釜山 제5연대를 선택했다. 군사영어학교엔 學籍(학적)만 걸어둔 것이다.
국방경비대의 당초 목표는 각 道에 1개 연대씩 합계 8개 연대, 병력 2만5000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46년 8월 제주도가 道로 승격되어 연대 창설목표는 9개로 늘어났다.
제5연대는 韓國 최대의 항만 釜山을 경비하는 부대였던 만큼 서울의 제1연대와 거의 같은 시기인 1946년 1월19일에 창설되었다. 우선 1개 중대가 편성되어 있었는데, 중대장은 朴炳權(박병권:후일 육사교장 역임, 중장) 소위였다. 주둔지는 釜山 서부 감천동의 해안. 생활기반이 잡히자 그는 平壤에 있던 어머니와 부인을 불러 월남하게 했다.
白善燁은 승진의 「급행열차」를 탔다. 1946년 2월 보병 제5연대 A중대장, 그해 9월 제5연대 제1대대장, 1947년 1월1일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제5연대장이 되었다.
―聯隊 조직을 어떻게 만들었죠.
『1개 중대를 3개 中隊로 확충해서 大隊를 편성하고, 그것을 또 3개 大隊로 확충해서 聯隊를 만들었죠. 급료와 양식비를 위한 예산은 부대의 美 군사고문관이 道廳(도청)에서 현금을 수령하여 관리했습니다. 고문관의 사인이 없으면 휘발유 한 통, 탄약 한 발도 입수할 수 없었어요. 그들이 보급청구권을 전담했으니까요』
釜山에서 창설된 제5연대의 人脈
―美 고문관과의 마찰은 없었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美國시민의 세금에 의해 조달되었던 만큼 美 군정 당국에서 체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나는 美 고문관과 깊이 사귀어 뒤늦게 英語를 배우는 데 재미를 붙였어요』
―釜山 근무에 만족하셨군요.
『釜山 근무 2년간, 내가 지휘한 제5연대는 많은 人材를 배출했습니다. 나보다 먼저 왔던 朴炳權, 吳德俊, 李致業 장군 등이 좋은 환경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5연대 출신자는 후일에 장군이 된 앞의 세 분 이외에 大將까지 지낸 盧載鉉 장군, 맹장으로 알려진 宋堯讚 장군, 중장으로 누진한 金益烈 장군, 후일에 중앙정보부장이 된 李厚洛 장군, 朴正熙 대통령의 경호실장이 된 朴鐘圭씨, 서울시장이 된 朴英秀씨 등의 軍歷(군력)도 모두 5연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釜山에서 충원한 사병들의 자질도 대단히 높았습니다』
白善燁 중령은 1947년 12월 釜山 주둔 제3旅團(여단장 李應俊 장군)의 참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48년 4월11일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으로 上京했다.
시대는 숨가쁘게 흘러갔다. 그의 육군본부 정보국장 재임 불과 8일 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5·10 선거에 반대하는 濟州道 4·3 폭동이 발발했고, 정보국장 재임 4개월 후인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2개월 만인 10월19일, 14연대의 麗順叛亂事件(여순반란사건)이 발생했다. 陸本 정보국장 白善燁 대령(11월에 진급)은 肅軍(숙군)작업을 지휘하면서 훗날 韓國史의 흐름을 바꾼 朴正熙 소령을 만나게 된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폭동과 제9연대장 암살사건에 이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麗水港(여수항)에 집결해 있던 제14연대가 출항 직전, 국군조직에 잠입했던 좌익 프락치의 선동으로 총부리를 거꾸로 들고 반란을 일으키자 肅軍작업은 불가피해졌다. 정부와 국회는 麗順叛亂事件 계기로 12월1일 국가보안법을 공포했다.
『軍의 불순분자와 극좌분자의 제거는 본래 헌병사령부 및 특설의 군법회의가 담당해야 했으나 사상 및 北과의 관계를 조사하고, 경찰과의 업무협조도 필요했기 때문에 정보국에서 맡았습니다. 金安一(현재 기독교 목사) 소령이 과장으로 있던 방첩과가 主務부서가 되고 내가 지휘했습니다』
―肅軍작업에 걸려든 朴正熙 소령과의 인간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수사 초기 단계에서 朴正熙 소령이 검거되어 크게 놀랐습니다. 그는 당시 작전교육국 과장이었지만, 경비사관학교(陸士의 前身)의 교관·중대장 시절의 활동이 상당히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찍 걸려든 겁니다. 朴正熙 소령은 나보다 세 살 연상이에요. 나와 비슷한 경력이지만, 大邱사범 졸업 후 보통학교 교사로 의무근무연수를 채우고 나서 滿洲로 건너와 新京軍官學校에 입교했기 때문에 내가 오히려 先任이 된 거죠. 국군 입대도 나보다 늦어 경비사관학교 2기생이 되었어요. 同門이긴 했지만, 滿洲에서도 韓國軍에서도 그때까지 함께 근무한 일이 없고, 인사 정도나 나누던 관계였어요. 麗順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함께 현지에서 幕僚(막료)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소문난 대로 대단히 우수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朴正熙를 살린 것은 사람이 아까워서』
―朴正熙 소령은 남로당 軍事責(군사책)이었던 만큼 重罪(중죄)에 해당합니다. 肅軍작업 때 왜, 오직 그 한 사람만 救命(구명)해 주셨습니까.
『刑이 확정되기 전 어느 날, 방첩과장 金安一 소령이 「朴正熙 소령이 국장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시죠」라고 말해요. 검거된 후 朴소령은 처음부터 조직의 전모를 밝히고 轉向(전향)을 서약했대요. 나는 그걸 무시할 수 없어 수락했습니다』
이어지는 白장군의 증언.
『우리들은 서울 明洞에 있던 증권거래소內 정보국장실에서 만났습니다. 방 안에 들어온 朴소령은 빳빳한 자세로 선 채 잠시 입을 열지 않았어요. 내가 먼저 말했지요.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데, 내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습니까」
「나를 한번 도와 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에 후줄근했지만, 그는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했습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순간 사람이 아깝다는 생각, 참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나도 모르게 그 말부터 나왔어요. 하지만 나 혼자 힘으로 救命할 수는 없는 거죠. 나는 순서를 밟아 참모총장에게까지 이렇게 상신했습니다.
「朴正熙 소령은 처음부터 사실을 공술하여 전모 파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朴소령은 刑집행정지로 석방되었어요. 물론 除隊(제대) 처분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軍에서 쫓겨나면 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형편을 알고, 나는 정보국의 金點坤(소장 예편, 경희大 교수 역임, 현재 평화연구원장) 소령, 柳陽洙(소장 예편) 대위와 상의하여 朴소령을 文官으로서 전투정보과에 근무하게 했습니다』
―한번 도와 준다면 화끈하게 봐 주시는군요.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입니다. 朴正熙 대령의 준장 진급 때, 그리고 朴준장의 소장 진급 때 내가 뒷보증을 섰습니다. 한번 도와 줬으면 끝끝내 도와 줘야지…. 난 본래 그런 사람이오. 朴正熙 장군의 쿠데타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지만, 대통령이 된 후 「보릿고개」의 나라를 이만큼이나 발전시키는 데 큰 리더십을 발휘한 점에 대해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漢江 북방에 남은 최후의 사단으로 善戰
1949년 7월30일 白善燁 대령은 光州 주둔 제5사단장이 되었고, 1950년 4월23일에는 서부전선 최일선을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전임 2개월 후인 6·25 발발 당시에는 경기도 始興(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일요일인 아침 7시경 1사단 작전참모 金德俊 소령으로부터 숨가쁜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받은 6·25 전쟁의 제1보였습니다. 新堂洞 자택을 뛰어나와 마침 지나가던 군용 지프를 세워 타고 龍山 삼각지 소재 육군본부로 달렸어요. 蔡秉德 참모총장에게 「사단으로 복귀, 지휘해도 좋으냐」고 묻자 「무슨 그 따위 소리를 하는가. 빨리 사단으로 가라」고 소리쳐요. 1사단의 美軍 수석고문 로크웰 중령의 南大門 관사로 찾아가 그가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水色에 있던 사단사령부로 직행했습니다. 오전 9시경이었어요』
그는 그로부터 약 1000일 동안 최전선에서 武勇(무용)을 떨치며 「韓國軍 최고의 야전사령관」이란 명성을 얻게 된다. 開戰 이후 1953년 휴전 때까지 그의 행적은 그의 회고록 「軍과 나」(대륙연구소 출판부, 1990) 「부산에서 판문점까지」(英語版, 1992),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25일」(지구촌:1999), 「젊은 장군의 朝鮮戰爭」(日語版, 2000)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탱크를 앞세운 北韓軍의 기습은 速度戰(속도전)이었다. 開戰 3일 만에 의정부-미아리로 진격한 北韓軍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었다. 開城-임진강 정면을 방어하던 제1사단은 서울이 떨어진 다음날인 9월28일 오전까지 서부전선에서 善戰했다. 敵의 포위에 빠진 1사단은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渡河(도하), 부대를 再편성하고 후퇴 중에도 遲延戰(지연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1개월도 안 된 7월20일에는 大田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7월25일, 白善燁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했다. 漢江 이북에서 남은 최후의 사단으로서 善戰하고 建制(건제)를 유지한 채 渡河한 戰功(전공)이 장군 진급의 사유였다.
北韓軍은 곧 「8월 攻勢(공세)」를 걸어 國軍과 美軍을 「釜山橋頭堡(부산교두보)」로 밀어넣고 있었다. 당시 白장군의 제1사단은 大邱 북방 多富洞(다부동)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8월 중순, 제1사단의 정면에는 北韓軍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가 攻勢를 취하고 있었다.
사단장 생포하려고 사령부에 敵 특공대 야간기습
多富洞 전투는 「釜山교두보 전투」의 클라이맥스였고, 8월15일은 위기의 절정이었다. 제1사단의 모든 정면은 白兵戰(백병전)의 양상이 되었다.
北韓의 전쟁지도부는 8월15일까지 釜山을 함락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수정, 8월15일을 「大邱 해방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를 걸었던 것이다. 치열한 방어전으로 韓國軍의 피로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敵은 火力이 우세한 美軍 방어지역을 회피, 제1사단 정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彼我(피아)가 너무 가까이서 대치해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사단 정면 20km 全 전선에서 밤낮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운 겁니다. 드디어 한계상황에 이르렀어요. 나는 8월15일 즉시, 大邱의 美 8軍사령부와 2軍團사령부(군단장 劉載興 준장)에 증원부대를 요청했습니다. 곧 「美 25사단 27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될 테니 그때까지 戰線을 지탱하라」는 회신이 날아왔습니다』
美 27연대는 8월17일 저녁 무렵 증원 제1진으로 제1사단 지휘소에 도착했다. 연대장은 존 마이켈리스 중령. 그는 多富洞전투 중에 대령으로 승진했고, 후일 육군대장으로 累進하여 駐韓美軍사령관을 역임한다.
마이켈리스 중령은 보병 3개 대대와 105mm 포병대대(18門), 전차 1개 중대, 155mm 1개 중대(6門)를 이끌고 있었다. 美 27연대는 8월18일 아침 11연대 방어선의 중간지점 도로에 투입되었다.
『1사단은 山上에서 싸우고 美 27연대는 도로上에서 전차 對 전차로 싸우는 대등한 결전의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敵은 18일부터 斷末魔的(단말마적)인 攻勢로 나왔어요. 다시 전선에서 육박전이 전개돼 수류탄과 총검으로 싸우며 一進一退(일진일퇴)를 거듭했죠. 敵의 포로와 부상병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습니다』
日本 방위대학의 다나카 츠네오(田中恒夫) 교수는 그의 저서 「朝鮮전쟁」(學習硏究社) 중에서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 北韓軍도 필사적이었다. (中略) 상급부대의 요구는 가혹해서 督戰隊(독전대)가 후방에서 위협사격을 가한다든지, 술을 마시게 하여 돌격하게 한다든지, 또는 기관총 射手(사수)를 족쇄로 묶어 도망을 방지한다든지 했다>
北韓軍 병사들로서는 「나아가도 죽음, 물러서도 죽음」이었다. 8월19일 낮, 美 23연대도 증파되어 1사단의 뒤를 받쳤다. 연대장 폴 프리먼은 나중에 지평리전투에서 戰功을 세웠고, 후일 大將으로 승진, 유럽 주둔 美軍 총사령관을 역임한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 국군사단에 美軍이 두 겹으로 투입된 것은 多富洞전투가 유일한 경우였다. 바로 그날 밤, 중대 규모의 적이 방어선을 뚫고 東明국민(초등)학교에 있던 1사단 사령부를 기습했다.
『평소 사단사령부에는 경비병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때마침 운동장에는 8사단 10연대의 1개 대대가 金淳基 소령의 지휘로 지원을 나왔어요. 오후 5시경 도착한 지원부대를 보니 8월의 무더위 속에 永川에서 이곳까지 행군해 와 피곤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여기서 잘 먹여 재운 후 새벽에 陣地(진지)에 투입하라」라고 지시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죠. 통신병 등이 전사해 사령부는 혼란에 빠졌는데, 金소령이 재빨리 大隊를 돌격시켜 敵을 격퇴했습니다. 敵은 나를 생포하기 위해 돌격대를 투입했던 겁니다. 위기 모면… 이건 정말 「전쟁의 運」이었어요』
「世界戰史上 최후의 사단장 돌격」
이어 8월20일 美 27연대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대대장 金在命 소령, 후에 육군제2훈련소장 역임, 중장으로 예편)가 고지를 탈취당하고 多富洞 쪽으로 후퇴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美 8軍사령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韓國軍은 도대체 싸울 의지가 있느냐」는 질책이었습니다. 美 27연대의 측면이 뚫리자 마이켈리스 중령은 「나도 후퇴하겠다」고 통고하더군요. 먼저, 8軍사령부에 「退路(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철수하겠다」고 보고했다는 겁니다』
多富洞이 뚫리면 50리 남쪽 大邱는 곧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大邱가 함락되면 美軍은 울산-밀양-진해를 연결하는 데이비드슨線 아래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데이비드슨線은 美軍 철수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 공간 확보용이었다.
『나는 마이켈리스 연대장에게 「기다려 달라. 내가 직접 가 보겠다」고 말하고 지프를 몰아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과연 제2대대는 뿔뿔이 후퇴하고 있었어요. 金在命 대대장을 불러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장병들이 계속된 주야격전으로 지친데다 고립된 고지에 급식이 끊겨 이틀째 물 한 모금 못 마셨다」는 겁니다』
―日本의 軍事 저널리스트 이노우에 와히코(井上和彦)씨는 거기서 白장군께서 「세계 戰史上 최후의 將軍 돌격을 감행했다」고 평가했던데요.
『그게 실은 이런 겁니다. 나는 후퇴해 오는 병사들 앞에 버티고 서서 우선 땅바닥에 앉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에게는 이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여기가 격파되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들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멸망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은 모두 같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地球(지구) 저쪽에서 온 美軍이 저 아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버리고 우리만 살겠다고 하는 것은 대한의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나는 돌격명령을 내리고 선두에 섰습니다. 곧 병사들의 함성이 골짜기를 진동했어요. 金在命 소령이 삽시간에 488고지를 재탈환했습니다. 敵은 증원부대가 공격하는 줄 알았을 겁니다』
「韓國軍은 神兵」이라던 美 27연대의 奮戰
―땅바닥에 앉히는 방법이 효과가 있었군요.
『우리 민족은 온돌방에서 앉아서 생활하는 관계로 앉히면 마음이 진정되게 마련입니다. 패닉상태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죠』
―마이켈리스 중령은 뭐라고 합디까.
『미안했던지 「사단장이 직접 돌격에 나서는 것을 보니 韓國軍은 神兵」이라고 치켜세웁디다. 그때부터 마이켈리스 연대장과는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韓美 연합작전에서 작전의 성패가 상호신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山上에서 격퇴되면 美軍은 골짜기에서 고립되고, 美軍이 돌파되면 우리는 山中에 고립되는 겁니다』
―多富洞전투의 고비는 언제였습니까.
『8월21일이 절정이었습니다. 기습에는 기습, 돌격에는 돌격으로 맞서 고지와 능선마다 시체가 쌓여 갔습니다. 우리 韓國軍이 투지를 보였던 바로 그날 밤, 이번에는 美軍이 우리의 눈 밑의 계곡에서 격투를 벌였습니다』
이어지는 증언.
『敵은 일몰 직후부터 공격 준비 사격을 개시하더니만 T34/85형 탱크 14대를 앞세우고 美 27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해 왔어요. 피아軍 모두 모든 重화기를 최대 발사속도로 발사했습니다. 多富洞 골짜기는 발사음과 작열음의 지옥이었습니다. 탄약 무제한의 싸움이었죠. 교전은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되었어요. 敵은 맹렬한 彈幕에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어요.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전지 앞에 敵 전차 7대를 비롯, 중장비, 차량 등이 다수 버려져 있습디다. 美軍 추산으로는 敵 전사자가 1300명이었어요』
8월22일 마침내 전세는 아군 쪽으로 기울었다. 팽팽한 접전이 균형의 고비를 넘긴 것이다.
『大夜戰의 다음날인 8월22일, 좌익의 제15연대 정면에서 극적인 전과를 거두었어요. 낙동강 제방까지 확보한 겁니다. 중앙의 제12연대도 遊鶴山(유학산)의 敵을 야습, 다음날 새벽 2시경 고지를 확보했습니다』
학명동 砲진지를 기습하려고 架山(가산)능선을 따라 침투한 적은 美 23연대가 격전 끝에 격퇴했다. 8월23일 도착한 증원 10연대(연대장 高根弘 중령)의 主力은 架山능선을 공격해 다음날 架山山城(가산산성)의 敵을 완전 소탕했다.
『8월24일 우리는 당초 최후 저지선으로 잡았던 Y선(지도 참조)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고지와 主능선을 확보하고 북쪽 경사를 내려다보며 적을 소탕할 수 있었습니다』
北進 돌파구 뚫은 예하 12연대장 金點坤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8월25일, 8일간의 격전을 마치고 그의 聯隊를 이끌고 馬山 쪽으로 이동했다.
『이것이 워커 美 8軍사령관의 소위 「消防(소방)전법」입니다. 위급한 전선마다 마이켈리스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순회 지원시켜 전선을 유지시키며 反轉(반전)의 시기를 노리는 겁니다』
8월 말 1사단은 多富洞 지역을 美 1기병사단에 이양하고 八公山 북쪽으로 이동했다. 1사단은 多富洞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적군은 2배 이상인 5690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의 희생 앞에 빛을 잃습니다.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심경 정도의 인원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방의 청년·학생들은 전선을 자원하여 그 틈을 메워 주었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지게를 메고 나와 포화를 무릅쓰고 전방고지에 탄약, 식량, 물과 보급품을 져 올렸습니다. 이 전투는 나의 1사단뿐만 아니라 국군 1개 연대, 美軍 2개 연대 등 3개 연대가 증원부대로 가담했습니다. 국군, 우방, 국민의 승리였습니다』
그 무렵, 美軍의 우세한 火力에 의해 洛東江線에 대한 공격이 저지되자 敵은 主攻을 국군이 담당하는 동쪽으로 돌려 攻勢를 강화했다. 이에 따라 慶州의 국군 1군단(군단장 金白一 준장)과 河陽의 2군단(군단장 劉載興 준장) 등 국군 2개 군단의 담당 정면을 좁히고 대신 美軍 담당 정면을 넓히게 되었다. 1사단의 담당 지역은 6사단이 맡던 가산에서 하양-의성까지, 즉 八公山 북쪽 산악지역 12km였다.
敵의 「9월 攻勢」는 9월2일부터 개시되었다. 1사단은 八公山전투에서 선전했고, 예하 11연대(연대장 金東斌 대령)는 永川을 돌파해 남하하던 敵을 저지했다. 그러나 美 제1기병사단은 1사단이 인계한 고지를 모두 잃고 10km를 후퇴했다. 그러나 敵의 9월 공세도 초순을 넘길 무렵부터 한계에 이르렀다.
그 무렵부터 국군 최강의 제1사단은 美 1기병사단, 美 24사단과 함께 프랭크 밀번 少將이 지휘하는 美 1군단에 편입되었다.
『밀번 군단장은 약속대로 美 10고사포群團(군단)을 1사단에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師團火力이 일거에 美軍 수준에 이르게 되었어요』
9월15일, 仁川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 낙동강戰線에도 전해졌다. 밀번 군단장으로부터 1사단에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사단은 팔공산에서 가산을 공격, 당면의 敵 1사단을 격파하라. 그리고 美 제1사단과 호응하여 낙동강을 渡河한 다음 尙州를 향한 공격을 준비하라』
9월18일, 1사단의 主攻 12연대(연대장 金點坤 중령)는 敵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多富洞 북쪽 12km 지점까지 진출했다. 北進을 위한 최초의 돌파구를 열었던 것이다.
「平壤入城 제1호」 기록과 雲山의 퇴각
1사단은 승승장구했다. 1950년 10월 韓美 양군은 38선을 돌파, 드디어 平壤공략에 나섰다. 美 1기병사단과 1사단이 「平壤 제1번 入城」을 사단의 자존심, 나아가 나라의 명예를 걸고 경쟁했다. 白장군은 선두 전차부대의 1번 탱크에 탑승, 진격을 독려했다.
「平壤 入城 제1번」은 우세한 기동력을 지닌 美 1기병사단을 제치고 1사단이 차지했다. 大同江에서 멱을 감으며 자란 白장군은 평양 接近路(접근로)를 꿰고 있었는 데다, 1894년 淸日戰爭(청일전쟁)의 戰史와 戰訓(전훈)을 이미 좔좔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강 高浪浦에서 9일간 밤낮으로 강행군, 평양에 入城하셨는데, 體力이 감당해 줍디까.
『이길 때는 잠 안 자도 끄떡없어. 속으로는 매일 기쁜 거라. 승리의 女神이 붙을 때는 자꾸 이쪽으로만 오는 거지. 나라가 잘 될 때는 좋은 사람이 자꾸 모여. 이게 안 될 때는 자꾸 안 되고…』
이후 1사단은 淸川江을 넘어 평안북도 雲山(운산)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中共軍의 대거 개입으로 全전선이 무너졌다. 中共軍의 長技(장기)는 매복-迂廻(우회)-포위, 그리고 人海戰術(인해전술)과 山岳戰(산악전)이었다. 敵의 大부대에 포위된 1사단은 다행히 美軍의 엄호를 받아 이번에도 부대의 建制를 유지하며 후퇴했다.
19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또다시 敵에게 내주고 말았다. 中共軍의 「正月攻勢」(제3차)로 1사단은 경기도 安城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再정비했다. 中共軍의 攻勢는 補給線(보급선)이 길어지자 약화되었다.
新任 리지웨이 美 8軍사령관은 반격에 나섰다. 3월15일, 서울을 再탈환했다. 그 영예도 漢江 도하작전을 감행한 1사단이 차지했다.
그로부터 꼭 한 달 후인 4월15일, 그는 少將으로 진급,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국군 제1군단장이 되었다. 그때 北進을 선도한 것은 白군단장의 1군단이었다. 오늘의 휴전선이 38선을 넘어 江原道 북부 해안 고성까지 치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1군단의 戰功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7월10일,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휴전회담 韓國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中國語를 잘 했다. 11월16일에는 그를 사령관으로 하는 「白야전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다. 洛東江 전선에서 퇴각한 北韓軍 패잔병들과 좌익 부역자들이 智異山에 집결, 제2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가 토벌의 책임을 맡은 것이다. 智異山 일대의 빨치산은 부대 규모의 활동이 불가능할 만큼 타격을 입었다.
1군단에 복귀한 1952년 1월12일, 그는 中將으로 진급했다. 4월5일에는 새로 창설된 제2군단장이 되어 中部전선을 담당했다. 이어 7월23일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고, 1953년 1월31일 國軍 최초의 大將으로 진급했다.
『내 손으로 이력서를 맘대로 써서 가도 그렇게는 못 됐을 것』이라고 白장군은 말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1000일의 砲火가 멎었다.
韓國 전쟁지도부에 대한 美國의 인물평가
필자는 최근 KMAG(駐韓 美 군사고문단)이 1951년 말에 작성하여 美 정부에 보고하고, 1992년에 비밀해제 된 「문건」을 입수했다. 여기엔 李承晩 대통령에서부터 일선 주요 사단장까지 韓國의 전쟁지도부 28명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 …美國에서 교육받음. 親美的이지만 본질적으로 정치인. 조금 노쇠. 그의 부인에 의해 크게 영향받음. 그의 美國人 어드바이서는 무초(駐韓美國대사 이하 괄호 안은 필자 注)씨와 콜터 장군임>
이어지는 주요 관료에 대한 평가.
< ▲국무총리 張勉=55세. 美國에서 교육받음. 크리스찬. 中道노선의 인사로서 국무총리에 선택됨. 강력하지는 않으나 존경받음.
▲국방장관 李起鵬=56세. 美國에서 교육받음. 前 서울시장. 그의 입에서 두 갈래의 말이 나오는 경향 있음. 국방장관으로서의 특권을 소중하게 지킴. 이익이 되는 한 美國과 일을 잘 해 나갈 것임. 李承晩처럼 그의 부인이 강력하게 영향력 행사함>
다음은 韓國 장성들에 대한 평가(일부 장군 생략함).
< ▲육군참모총장 李鍾贊=少將, 36세. 日本육사 (졸업). 日本육군 소령, 엔지니어. 1949년 韓國육군에서 대령으로 임명됨. 국방장관(李起鵬)의 친척으로 강한 정치적 배경 가짐. 직업적으로 건실. 自主的. 英語 회화 잘 못함. 민족주의적.
▲육군참모차장 劉載興=소장. 34세. 日本육사. 日本軍 보병 대위. 성공적인 사단장이었으나 군단장으로서는 두 번 실패함. 좋은 조정자. 좋은 英語 말함.
▲육본GI(인사참모) 金鍾五=준장. 32세. 日本 滿洲군관학교. 사단장 역임. 경험 부족. (중략) GI로서는 협조적. 좋은 영어 (구사).
▲육본G3(작전참모) 李翰林=준장. 32세. 日本 滿洲군관학교. 2차 세계대전 때 日本육군 중위. 韓國 귀족가문 후손으로 매우 자존심 강하고 민감함. 1948년 베닝(美 육군보병학교) TIS(고등군사반) 졸업. 非협동적.
▲5군단장 李亨根=소장. 32세. 日本육사. 2차 세계대전 때 日本육군 보병 대위. 통위부 초대 사령관. 1948년 美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다님.
▲수도사단장 宋堯讚=준장 35세. 日本육사. 2차 세계대전 때 日本육군 대위. 韓國육군의 경리감 재직時 청렴했음. 1950년 8월 사단장에 임명됨. 고집이 세고, 아주 명석하지는 않음. 美軍의 조언에 귀기울이고, 업무를 잘함. 親美的. 꽤 좋은(fair) 英語 (구사).
▲6사단장 張都瑛=준장. 29세. 日本軍 士官. 2차 세계대전 때 전투경험 없음. 1945~1946년 美 AMGIK(군사학교). 1950~1951년 11월 육본 G2(정보국장)로 근무 잘 했음. 사단장으로서 탁월, 소장 진급 대기 중. 탁월한 將官의 하나로 사료됨. 親美的. 좋은 英語를 말하고 읽고 씀.
▲훈련소장 白仁燁=준장. 28세. 日本軍 士官. 2차 세계대전 때 전투경험 없음. 白善燁의 동생. 연대장으로 탁월했음. 그러나 사단장과 육본 G2로서는 실패했음. 좋은 敎官. 훈련소장으로 잘 배치되었음. 李承晩의 총애받음. 좋은 英語 말함. 밀착 관찰되어야 할 것임>
韓國군 장성들 중 최고의 평가를 받은 인물은 당시의 1군단장 白善燁 장군이었다. 그에 대한 짧은 평가 중엔 최상급이 세 번이나 포함되어 있다.
< ▲소장. 33세(실제 만 31세, 너무 젊었던 그는 당시 對外的으로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리고 있었다). 日本 滿洲군관학교. 2차 세계대전 때 日本육군 중위. 韓國육군에서 최상(best)의 야전지휘관으로 평가됨. 참모와 지휘관 양쪽 모두 탁월한(exllent) 기록 보유. 親美的. 英語, 中國語, 日本語를 말하고 읽고 씀. 韓國육군에서 가장 걸출한(most outstanding) 장교임>
워커 장군의 호령, 「stand or die」
―白장군께서 그런 평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어요. 그런 비밀문건이 있었던가요. 韓國전쟁에 참전한 美軍 고급장교들이 모두 탁월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美軍 고급장교들은 거의 3분의 2가 전역을 했어요. 복무기록이 우수한 군인들만 현역에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분들이 연령적으로는 우리들의 아버지뻘이었고, 이미 혁혁한 무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 매일 매일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그들과 좋은 관계를 가졌고, 그런 배움이 實戰에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開戰 당초 韓國軍의 작전지휘관을 행사한 것은 美 8軍사령관이었습니다. 처음 8군사령관으로 着任한 워커 장군은 어떻습디까.
『내가 워커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釜山교두보 전투가 시작된 직후였습니다. 당시 60세였죠. 美國인 치고는 키가 작고 좀 비만형, 실례지만 별명 「불독」 그대로 무서운 얼굴이었는데, 온몸에 왕성한 戰意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악수하기 위해 내민 그의 손은 세무(섀미·Chamois) 가죽처럼 부드러웠어요』
―그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헌병의 호위도 없이 지프로 전선을 돌아다녔습니다. 지프 뒤에 30구경 기관총을 장착하고, 지프 밑바닥엔 강판으로 보강하고, 지프 바닥 위에는 흙 마대를 깔아 지뢰에 대처하더군요. 무선기는 副官의 지프에 탑재합디다. 敵과 조우한다면 손수 기관총으로 응사할 배짱이었어요. 전형적인 鬪士였습니다. 전선시찰을 와서 사단사령부 일동에게 훈시 같은 건 하지도 않더군요. 지도를 놓고 사단 전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면 묵묵히 듣기만 해요. 가끔 「여긴 바이패스(迂廻)가 필요해. 어느 정도의 우회인가, 그걸 결정하는 것은 사단장 당신의 일이야」라는 짧은 조언뿐이었어요. 전황의 설명이 끝나면 배웅도 받지 않고 바람같이 가버렸지.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나는 워커 장군에게서 「현장을 보러 다니는 습관」을 배웠습니다』
―워커 장군 得意의 구호 「stand or die」는 무슨 의미입니까.
『그렇게 워커 장군의 말은 짧고 명확했어요. 「固守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라는 의미지요. 韓國軍에게는 부드러웠지만, 美軍 사단장, 연대장에게는 매우 엄격하게 지도했어요. 釜山圓陣(부산원진)의 키(열쇠)가 된 大邱의 위기가 박두하자 워커 장군은 「던케르트(제2차 세계대전 초기 연합군의 철수 장소)는 없다. 釜山으로 밀리면 大살육이 일어난다. 여기서 버티자, 아니면 모두 죽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훈시했어요. 이런 훈시를 매스컴이 그렇게 보도한 겁니다. 워커 장군은 자신의 말을 실천했습니다. 大邱 위기 때 우리 육군본부는 釜山으로 내려갔지만, 그는 美 8군사령부를 후퇴시키지 않았거든요』
리지웨이 장군의 냉엄한 위기관리
―워커 장군은 지프로 議政府(의정부)전선을 시찰하던 중 국군 6사단 소속 트럭과 충돌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후임 리지웨이 장군은 어떻든가요.
『내가 처음 리지웨이 장군을 만난 것은 1950년 12월30일 임진강 남방 法院里에서였죠. 간단한 훈시를 했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차양에 중장 계급장과 낙하산 마크를 붙인 작업모, 코트 좌완엔 龍을 모티브로 한 제18空挺軍團의 배지(badge), 그 좌완에는 美 제8軍 배지, 오른쪽 가슴 X벨트에는 수류탄, 왼쪽 가슴에는 包帶(포대)를 붙이고, 허리의 탄띠에는 38구경의 권총을 찼습디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찌를 듯 가리키며 얘기하는데, 열이 오르면 한 발 한 발 다가와 상대와 맞닿을 정도입니다. 그의 가슴에 달려 있는 수류탄에 신경이 쓰였지만, 견뎌야지 별 도리가 없었어요』
리지웨이 장군은 또 다른 유형의 파이터였습니다. 前任 워커 장군보다 훨씬 강한 태도로 부대를 지도했어요. 사단사령부를 방문, 작전지도에 기입한 敵의 숫자를 보면 사단 정보참모에게 「확인했는가. 병력 算定(산정)의 근거는 뭔가」라고 질문해요. 「노, 써. 근거는…」이라고 답하면 「즉시 斥候(척후)를 보내. 아니, 貴官이 가서 확인해. 두 발 둬서 뭣해」라고 호통을 칩니다. 戰意가 부족한 지휘관은 대번에 「貴官은 戰線에선 필요없다」며 바꿔 버리더군요. 당시는 中共軍의 攻勢에 의한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주고 37도 선까지 밀릴 때였습니다. 그가 위기를 수습, 중공군 主力을 한 방 먹이고 38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맥아더 원수가 해임(1951년 4월12일)된 데 이어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 「적을 懲罰하라」
―다음 美 8軍사령관이 밴플리트 장군이었죠.
『밴플리트 장군이 着任했을 때 나는 동해안의 제1군단장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동해안까지 연락기로 자주 찾아왔어요. 그때마다 치즈, 과일을 잔뜩 가져와 함께 나눠 먹었죠. 그는 大화력을 중심에 배치하는 작전지도에 능숙했습니다. 그의 구호는 「적을 징벌(punishment)하라」였어요. 中共軍은 人海戰術로 나오는데, 병력이 부족한 유엔군이 징벌하려면 大화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 결과, 방대한 탄약소비 때문에 「밴플리트 탄약량」에 대한 비판이 나돌아 결국 美 의회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죠.
―그때 韓國軍 제3군단이 中部전선 현리전투에서 中共軍에 궤멸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밴플리트 장군의 언동에 기가 막히는 것은 1951년 5월 말, 韓國 육군본부의 간접지휘권을 회수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밴플리트 장군이 동해안의 江陵(강릉)비행장에 丁一權 참모총장, 명령을 중계하는 육본 전진지휘소장 李俊植 준장, 제1군단장인 나를 불러 간단하게 통고했습니다.
「韓國軍 제3군단은 폐지한다. 韓國軍 제1군단은 美 8軍의 직접통제에 들어간다. 육군본부 전진지휘소는 필요없게 되었다. 제너럴 丁은 大邱로 돌아가시오. 제너럴 丁, 이제부터 貴官의 업무는 인사·보급·교육훈련이오」
그러고 나서 그는 연락기를 타고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국가의 위신이 걸린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비행장에 선 채로 전달하는 데 아연했을 따름입니다』
開戰 당초 韓國軍의 작전지휘권은 美 8軍에 이양되고 있었지만, 명령의 흐름은 美 8軍사령부→韓國육군본부→韓國군단→韓國사단의 간접통제였다. 이것이 제3군단의 궤멸 직후 「직접통제」로 변경된 것이었다. 野戰에서 커온 밴플리트의 리더십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밴플리트 장군은 동시에 매우 치밀한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小부대의 데먼스트레이션(시범훈련)을 중시했죠. 예컨대 어느 고지를 탈취할 필요가 있을 경우 사전에 비슷한 지형에서 실탄연습을 하여, 이를 실시부대가 견학하도록 했습니다. 각급 지휘관도 참관하도록 하고, 그 자신도 직접 참석하여 지도했어요. 노르망디 상륙작전 제1파를 지휘한 연대장이었던 그의 조언이었던 만큼 젊은 위관급 장교들이 감격했죠』
테일러 장군, 「指揮官은 놀라선 안 된다」
―다음 美 8軍사령관은 테일러 장군이었죠.
『그는 휴전회담의 향방이 이목을 모으고 있던 1953년 2월에 부임했어요. 단정한 얼굴, 스마트한 체형, 7개國語 구사, 그리고 다채로운 경력을 듣고 학자풍의 온후한 신사를 예상했는데, 실제는 엄하고 강한 군인이었습니다. 부임 당시, 나의 계급은 대장, 그는 중장이었기 때문에 나에겐 시종 선임자로 경의를 표하긴 했지만, 그 엄격성은 대단했죠. 전투에서 진 부대를 방문해서는 내가 권했는데도 출영한 지휘관과 참모들에겐 악수조차 거부했어요』
―그의 리더십은 무엇입디까.
『곧 휴전(1953년 7월27일)이 되어 그 특유의 전장통솔, 리더십을 배울 기회는 적었지만, 그는 입버릇처럼 「코맨더 네버 서프라이즈(Commander never surprise)」라고 강조했습니다. 직역하면 「지휘관은 놀라지 말라」인데, 그 의미는 「리더는 先見之明을 가지고서 항상 미리 대비, 예측 못 한 사태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휴전 체결 후 陸軍을 개편, 155마일 全전선을 책임지는(현재는 西部전선을 제3軍이 담당) 「제1野戰軍」을 만든 것도 그의 공로였어요』
―白장군이 제1사단장으로서 美 1군단 예하에 계실 때 군단장이었던 프랭크 밀번 장군의 리더십은 어떻든가요.
『나는 밀번 장군에게 군단장의 리더십 중 하나인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방식을 배웠습니다. 일선 사단을 최대한 지원하고 사단의 건투를 침착하게 기다리는 그의 통솔법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1952년의 일입니다만, 韓國軍 군단이 군단포병을 가진 것도 그의 노하우를 배운 결과였습니다』
배움을 좋아하는 武將
白대장의 말을 들으면 「누구 누구에게서 무엇 무엇을 배웠다」는 대목이 대단히 많이 나온다. 그것은 마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告白錄」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로마제국의 5賢帝 중에서도 가장 知性的이었던 아우렐리우스 皇帝는 「告白錄」의 첫 구절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누구에게서 …을 배웠다」고 썼다.
아우렐리우스가 好學의 君主라면 白장군은 참으로 「배움」을 좋아하는 武將이다. 필자는 이렇게 느끼는 순간, 전율했다. 「배움」을 중시한 옛 光州 육군보병학교의 校歌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軍歌에선 「배움」으로 美德을 닦아 「祖國의 방패」가 되자고 했다.
< 無等山 靑雲(청운) 높이 뭉친 健兒(건아)들! 배움에 한결같이 美德(미덕)을 닦아, 祖國은 나의 사랑, 나의 임이오. 乙支文德, 그 정신 길이 받들어 祖國의 방패되자, 우리 후보생. (중략) 우리들 있으므로 祖國은 번영하리. 영광 있으라>
―맥아더 원수의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그는 20세기가 낳은 不世出의 군인이었습니다. 더욱이 東洋人의 의식구조를 잘 이해했습니다. 서울이 남침 사흘 만에 떨어진 뒤 6월29일 水原비행장으로 가장 먼저 날아온 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美軍 참전이 그렇게 빨리 이뤄질 수 없었던 상황이었지요. 그날 맥아더 원수는 호위병도 없이 지프를 타고 敵의 포탄이 떨어지던 漢江 남안에 우뚝 서서 망원경으로 敵陣(적진)을 관찰했습니다. 그것은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無言의 데먼스트레이션이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의 전쟁지도력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李대통령과 우리들은 연령적으로 할아버지와 손자 정도였습니다. 儒學的(유학적) 교양과 西洋의 合理主義的 철학을 한몸에 體化한 偉人(위인)이죠. 그의 큰 리더십이 없었다면 그때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
리더십의 原點은 率先垂範
―장군께서는 「좋은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지휘관,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휘관이 있는가, 없는가―이것이 문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리더십의 요체를 듣고 싶습니다.
『그것은 원래 라이먼 렘니처 장군의 名言이오. 통솔의 원점은 率先垂範(솔선수범)입니다. 즉 「나를 따르라」는 정신이죠. 계급이 오르고 지휘하는 부대가 커질수록 부대의 선두에 서서 적진에 돌입해야 하는 기회는 적어지지만, 그래도 「나를 따르라」는 마음을 잃으면 부하들의 투지를 불태울 수 없습니다. 사단장이라면 사단에서 넘버 원의 소총수이며, 가장 경험이 많은 파이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노력을 하는 자세를 몸에 붙여야 비로소 부하가 따라옵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부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나는 강조합니다』
―戰場은 처절한 適者生存(적자생존)의 현장입니다. 공포심은 없었습니까.
『공포심을 극복하는 것은 책임감과 의지입니다. 전투는 彼我 지휘관이 벌이는 意志의 충돌인데, 누가 책임감이 강하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납니다』
―白장군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사단장, 군단장을 지내셨는데, 동년배나 연상의 예하 부대장들이 잘 복종합디까.
『나는 좋은 부하를 거느린 탓인지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곤경에 처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戰場에서는 「나만 좋으면 좋다」, 「내 부대만 좋으면 좋다」는 에고이즘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타이거 宋」을 복종시킨 秘話
―그런 실례를 하나 들어 주시죠.
『지휘관으로서 끄집어내기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1951년 5월 소위 中共軍의 5월 공세로 中東部 전선에 있던 국군 제3군단이 붕괴되어 그 정면 30km가 구멍이 났습니다. 동해안을 따라 전개했던 나의 1군단에 대해 동쪽에서 반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어요. 나는 좌익의 수도사단에 대해 1개 연대를 뽑아 大關嶺(대관령)을 점령하라고 수도사단장 宋堯讚(송요찬) 준장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수도사단이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이어지는 회고.
『군단사령부의 초조감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大關嶺이 敵에게 돌파되면 군단의 요충 江陵비행장을 빼앗기게 되고 1군단은 동해안에 고립되고 말거든요. 군단 참모들은 「또 宋사단장의 나쁜 버릇이 나왔다」고 분개했어요. 나는 1군단장 着任 직후였는데, 이전에도 수도사단과 그런 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나는 명령의 즉시 실행을 주저하는 宋사단장의 입장을 이해하기는 했습니다』
―무엇인데요.
『당시 國軍 사단은 중장비도 없는 輕보병사단으로 그것을 움직이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습니다. 더욱이 군단에서 아무 지원도 없이 「이래라 저래라」고 명령만 했으니 반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宋堯讚 장군은 白장군보다 두 살 위. 8·15 광복 당시 日本軍 대위로서 白善燁 중위의 先任이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白장군과 같은 사단장의 반열에 올라 「타이거 宋」으로 이름난 猛將(맹장)이었다. 이어지는 白장군의 말.
『1군단 작전참모였던 孔國鎭 대령은 씩씩거리며 「군단장, 수도사단장을 불러 올려요. 갈 필요 없습니다」라고 고함쳤어요. 나는 그런 건의를 뒤로 한 채 지프를 타고 江陵 교외 수도사단사령부로 갔습니다. 사단장의 천막에 들어서니 宋준장은 뭔가 말을 걸었지만, 그것을 저지하고 「명령을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불복한다면 군단장으로서 생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宋준장은 대번에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전화기를 붙잡았습니다』
―白장군께서는 6·25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잃은 것은 「장교와 하사관, 특히 고급장교의 훈련 부족이 초래한 비극」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요즘 우리 국군에서는 敵과 대치하는 DMZ 일선 근무자를 진급 등에서 우선시합니다. 이유는 있겠죠. 그러나 평시의 戰場은 교육·훈련의 場인 만큼 육군대학 등 각급 학교에 최우수 인재를 투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敎官을 오래하면 승진기회가 적다는 말이 나와선 안 됩니다. 지휘관, 참모, 敎官 삼위일체로 대우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람을 키워야 조직이 정예화되는 것입니다』
국가위기 관리의 「리베로」
白善燁 장군은 韓國육군 최고의 「리베로」였다 1954년 2월14일 155마일 전선을 전담하는 제1야전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그는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그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가장 좋은 야전사령관의 「솜씨」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3년9개월 동안 야전군을 키우고 1957년 육군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을 약 2년간 역임한 그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전임, 1년 남짓 근무하다가 4·19가 일어났던 1960년 5월31일 군복을 벗었다. 군인 白善燁의 업적에 대해선 국내보다 우방국에서 더 존경을 받았다.
아이젠하워, 「아버지」 부시, 「아들」 부시 등 美國의 역대 대통령은 白장군을 「백악관의 귀빈」으로 맞았고, 日本의 자위대 고급장교들과 군사연구가들은 「實戰에서 배우기」 위해 계속 그와의 면담을 요청하고 있다. 다음은 오카사키(岡崎)연구소의 주임연구원 오가와 아키라(小川彰)의 말.
『白장군에게 韓國이 구원받은 것은 1950년 8월21일 多富洞전투다. 만약 이 전투에서 多富洞이 뚫렸다면 그 후 釜山까지의 함락은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만약 開戰 2개월인 이 시점에서 北朝鮮軍이 釜山을 점령했다면 美軍의 본격적인 來援(내원)은 시기를 놓쳐 오늘날 朝鮮半島는 전부 北朝鮮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이어지는 그의 말.
『日本에는 自衛隊(1954년 7월 설립)는 고사하고, 그 前身인 국내 치안 유지를 맡은 輕무장 경찰예비대(1950년 8월 설립)도 없었다. 그것은 조선반도에 출동했던 在日 美 점령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서, 기습을 받아 總붕괴된 韓國軍 이하의 존재였다. 거기에 韓國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심파(동조자)가 많았기 때문에 蘇聯에 의한 日本 赤化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東京에 대한민국 망명정부가 수립되고, 日本은 자위대라는 애매한 형태의 군대가 아니고 국민들이 일어나 國軍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蘇聯의 사상적 침투에 의해 日本에서 내전이 일어나 京都와 東京를 수도로 하는 분단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39세 大將의 퇴역 이후 15년간 韓國 중화학공업 지휘
군복을 벗었을 당시 예비역 대장 白善燁의 나이는 만 39세. 아직도 한창 때였다. 그를 위해 許政(허정) 과도정부 수반은 駐중화민국(臺灣) 대사 자리를 마련했다. 이어 그는 駐프랑스 대사, 駐캐나다 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출국 10년 만에 朴正熙 대통령에 의해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교통부 장관 재임 1년3개월 기간 중, 그는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1970년 日本 민항기 요도호가 赤軍派(적군파)에 공중납치되어 金浦공항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白장관의 제안에 의해 인질의 인명피해 없이 해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訪韓했던 하시모토 도미로(橋本登三郞) 운수대신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뭔가 도와줄 것이 있다면 말씀하시라』고 먼저 제의했다. 白장관은 시급한 지하철 공사에 대한 기술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日本 수상은 하시모토 大臣의 건의에 따라 白장관을 초청하고 日本의 鐵建工團(철건공단) 기술진을 韓國에 파견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1974년 8월15일 개통되었다. 그러나 그날 日本여권을 지닌 재일교포 文世光의 저격에 의해 陸英修 여사가 피살됨으로써 韓日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국내 최초의 지하철 건설의 뒷얘기는 파묻혀 버렸다.
지하철 개통에 앞서 白장군은 장관직에서 물러나 1971년 충주비료 사장이 되었다. 이어 호남비료 사장을 겸임하고 1973년에는 국책기업인 韓國종합화학 사장에 취임,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을 선두에서 15년간 지휘했다.
韓國 석유콤비나트의 건설도 당시 미키(三木) 내각의 협조 아래 日本의 기술이전으로 이뤄졌다. 사복으로 바꿔입은 4星장군이 日本 통상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여 실무자들을 만나는 至誠(지성)에 日本 관료들이 감동한 결과였다. 2002년 6월24일 日本國은 白장군에게 「勳1등 瑞寶章」을 수여했다.
一兵에게 러시아語 배우는 好學
그가 조국에서 받은 훈장은 태국무공훈장 2회에서 금탑산업훈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6회를 기록했다. 이 밖에 美國의 각급 훈장 7회를 비롯, 우방 11개국에서 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공헌도에 있어 대한민국 사상 제일류였음을 나타낸 바로미터다.
그를 보좌하는 柳乙圭 중령(공군 현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군께서는 아직도 배우고 계십니다. 2001년엔 독일에서 살다가 입대한 이곳 파견근무병에게 獨逸語를 배우시더니 6개월 전부터는 러시아학과 재학 중 입대한 一兵에게서 러시아語를 배우십니다. 누가 인터뷰하자고 하면 그냥 응해도 될 터인데 밤새 자료를 챙기고 메모도 하십니다』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장남은 사업, 차남은 在美 변호사, 장녀는 在美, 차녀는 在美 변호사다. 모두 결혼하여 손자·손녀 합쳐 여덟 명이다. 부인 盧仁淑 여사는 건강하다. 동생 白仁燁 장군과의 우애도 유별나다고 한다.
「好學과 至誠의 장군」은 1998년부터 6·25 기념사업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직도 국내외 초청 강연, 저술, 전적지 답사, 6·25 증언 등으로 매우 바쁘다. 이 기사 작성을 위해 필자는 서울 삼각지 전쟁기념관 사무실 429호실로 다섯 번 방문, 5회에 걸쳐 짧게 면담해야 했을 만큼 老將의 일정은 꽉 짜여 있었다. 老장군에게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後學들을 바로잡아 주십시오』라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첫댓글 필자 정순태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ROTC 6기생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