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시작에 전태일이 있었다면, 그 시대의 끝에 김경숙이 있었다.
1979년 8월 11일. 당시 제 1야당 신민당사 안에는 YH무역의 폐업공고에 반대하며 농성 중인 180여명의 어린 여공들이 있었다.
부도덕한 경영진과 노동자의 생존이 위협받는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를 방관하는 정부의 태도에 항의하기 위한 농성이었다.
이러한 여공들의 항의에 정부는 폭력으로 대응한다.
‘101호 작전’으로 불리우는 이 작전에서 2천여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YH여공들뿐 아니라, 신민당 당원, 야당 국회위원들과 신문기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난폭하게 공격한다.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40여시간 계속되었던 목숨을 건 여공들의 농성은 23분만에 마무리 지어졌다.
이 날 새벽 22살의 여성노동자 김경숙은 차디찬 시체로 발견된다.
김경숙의 죽음으로 끝난 YH사건은 김영삼의 제명,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유신체제 몰락의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YH농성을 이끌었던 노조위원장 최순영 의원과 노조 사무장 박태연 씨,
사건현장에서 폭행당했던 당시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씨 등의 증언을 통해 YH사건의 진상을 들어본다.
김경숙은 과연 자살했는가 -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
김경숙 사인에 대한 경찰의 첫 번째 발표는 ‘경찰 진입 후 떨어지는 것을 경찰이 받아서 살았다 였다.’
그러나 이 발표를 번복 ‘동맥 절단 후 투신자살을 기도,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으로 발표했다가 최종 발표에서는 ‘경찰 진입 30분 전 추락, 사망’으로 결론지었다.
두 번이나 사인을 번복한 끝에 나온 경찰의 최종발표에도 현장에 있던 증언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당시 신민당은 사인규명 조사단을 조직, 발표에 의혹을 제기했지만 뒤이은 김영삼 총재의 제명, 부마사태 라는 회오리 속에 김경숙의 사인은 역사에 묻혀버렸다.
김경숙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의혹들을 살펴본다.
‘한강의 기적’ 은 우리 누이들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졌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너무도 열악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정상근무시간 이외에 잔업을 위해 각성제까지 복용하며 밤을 새워 일했으며 휴일에까지 연장근무를 강요받았다. 장시간의 고된 일, 잦은 밤샘작업과 휴일조차 쉬지 못하는 공장생활은 ‘인간다운 삶’의 포기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러한 살인적인 노동강도 속에서 그들이 받는 돈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부의 성장위주의 정책, 이익에 눈이 먼 경영자들의 비인간적 노동착취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러한 환경을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가족’이었다. 남동생과 오빠의 교육을 위해, 부모님의 생계를 위해 그들은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청춘을 기꺼이 희생했다.
여성노동자, 민주노조를 결성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여성노동자들은 자주적으로 결성된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당시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정부와 사용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어용노조 였던것이다.
도시산업선교회와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의 교회조직은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결성을 지원한다.
노동자들의 인식변화와 이러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바탕이 되어1970년 청계피복노조를 시작으로 1972년 동일방직, 원풍모방, 1974년 반도상사, 1975년 YH무역 등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된다.
이 과정은 자신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인간적 권리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기본적 권리마저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부와 자본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그들은 놀라운 저항정신과 생명력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당시 민주노조결성을 주도했던 이들의 증언으로 결성과정의 어려움을 들어보고, 동일방직 여공들의 반나체 시위, 인분 투척 사건 등을 통해 당시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