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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실버타운서 소설 쓰는 변호사의 ‘묵호일기’ - 내가 만난 엄상익 변호사 8월 중순 오후 동해의 바닷바람은 뜨거웠다. 그는 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변가 카페 2층에 앉아 있었다. 지난 1월 이곳 실버타운에 혼자 내려온 이후 매일 반복되는 일과 중 하나였다.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오전에 쓴 에세이를 다듬고 오후에 쓸 소설 내용을 구상하는 시간이다. 주로 그의 젊은 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인간과 인생, 사건에 얽힌 이야기와 사회에 대한 그의 시각들을 다루고 있다. “나름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과거를 회고하다 보면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들이 더 많이 떠올라요.… 그래서 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제 작은 이야기가 주위 몇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상익(69) 변호사와 나는 30년이 넘는 오랜 인연이 있다. 젊은 기자 시절 우연히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 근무하던 그를 알게 돼 우리는 시국을 논하는 술친구가 됐고, 그를 통해 권부의 중요 정보들을 얻어내기도 했다. 내게 그는 당시 최고 권력기관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시각, 온유한 성품, 겸손한 자세를 갖춘 엘리트 소장 법조인으로 비쳤으며 실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변호사 생활 청산 후 네이버 글쓰기 그러나 그가 일선 변호사 생활을 청산하고 네이버 블로그 ‘엄변호사의 못다한 이야기’에 매일 올리는 글을 보면서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놀랐다. 그가 학창시절 못 말리는 ‘꼴통’이었으며, 군법무관 시절엔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군수비리를 사단장 면전에서 공개 폭로해 사법처리시킨 ‘강골’이었고, 안기부 시절에는 당시 최고 실세 박철언씨의 사생활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이단아’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지금과 같은 민주사회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 연줄도 없는 ‘얌전한’ 젊은이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왕따되기를 자초하고 그런 일들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뒤에는 요즘처럼 운동권, 노조, 시민단체 등의 든든한 후원세력들도 없었다. 이제 인생 2막을 마치고 3막, 남은 여생을 사는 입장에서 소회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사는 동해 묵호 실버타운을 찾아갔다. “아내는 서울 집에 있으면서 가끔 왔다 가고요, 평소에는 나만 혼자 살아요. 오래전부터 법정스님의 혼자 정갈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남은 여생은 그렇게 자신을 찾고 글 쓰고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실천을 하는 거죠.” 그가 사는 실버타운은 동해바다를 끼고 위로는 설악산, 속초, 양양, 아래로는 삼척, 울진까지 대략 차로 1시간 거리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방 2개와 거실, 화장실 2개, 주방이 있는 41평형에 살고 있는데 보증금 2억5000만원에 월 130만원이다. 부대시설로 천연온천탕에 야외수영장, 헬스장, 극장, PC장, 마사지실 등이 구비돼 있다. “식당 음식도 좋고 주변 경관도 좋아 살기가 참 편합니다.” 나는 2박3일간 그의 실버타운에서 함께 머물면서 동해 바닷가를 산책하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또 맛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별로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1967년 당시 최고 명문인 경기중학에 입학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과 고관대작·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귀족학교에서 그는 누구보다 심하게 방황했다. 수시로 친구들과 싸우고 선생님에게 대들었으며 성적은 바닥이었다. 심지어 ‘꼴등 해보기’를 목표로 구체적으로 ‘교과서 안 가져가기’ ‘수업 중 노트 안 하기’ ‘선생님 강의 안 듣기’ 등의 실천계획을 세워 실행하기도 했다. “모난 성격, 열등감, 변두리적 자의식, 오기 등의 발로였죠.” 중학 2년 어느 날 숙직실 후미진 곳에서 담임교사로부터 죽도록 얻어맞았다. 명분상 불량학생 훈육이었지만 진짜 맞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학교에선 교사들이 사전에 시험문제를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일들이 간혹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된 엄상익은 담임을 찾아가 “문제지 유출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엄상익은 학교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 됐다. 어찌 보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 안팎에서 수시로 싸움을 벌였다. 당시 경기중 내에도 돈을 내고 뒷문으로 들어오는 ‘보결’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독불장군’ 엄상익은 그들과도 자주 싸움을 벌였다. 중3 어느 날 대기업 회장 아들이 뒤에서 일방적으로 칼로 공격해 중상을 입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회장 아들이 가해자고 엄상익은 피해자인 사건인데 학교에서 쌍방과실로 인정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정학을 내렸다. 회장 사모님의 금품공세 로비 덕분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엄상익은 이 사실을 당시 로비를 받은 교사 2명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일종의 ‘양심고백’이었다. “상익아. 내가 교육자로서 해야 될 일이 아닌데 그렇게 했다.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그 사건 이후 교내에서 엄상익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에도 전혀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자퇴의사를 밝혔으나 선생님들이 만류했다. 그러던 즈음 ‘천사’ 같은 친구들이 나타났다. 모두 명문 대갓집 자제들인데 그들은 엄상익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맛있는 음식과 식사를 ‘대접’하고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신현확 전 총리를 아버지로 둔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 차장), MIT를 나와 서울대 수학과 교수를 역임한 윤재륜 성보문화재단 이사장, 리더십이 탁월했고 고려대에서 운동권으로 활동하다 그만둔 조성환(사업가) 등이 주인공이었다. “훗날 그 친구들에게 ‘왜 그때 나에게 잘해주었냐’고 물었더니 잘사는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더군요.” ‘요주의 인물’로 조직과 충돌 이런 친구들 덕분에 엄상익은 무난히 중·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온전히 다닐 수 있게 됐다. 군법무관으로 근무하던 1981년 대위 시절, 그는 사단장 주재 회의에서 한 연대장이 휘발유, 쌀, 닭고기 등 군용물을 횡령한 사실을 차트로 만들어 폭로하고 처벌을 주장했다. 난감한 사단장은 휴가를 가버렸고, 주변에선 한 번 봐달라고 사정들을 했으나 엄 대위는 직권으로 사법처리했다. 해당 연대장은 전출당했고 그 밑에 소령, 하사관들은 구속되고 헌병대 수사책임자는 보직해임 당했다. 일개 대위의 이런 행동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이후 그는 사단 내 ‘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감시 대상이 됐고 마침내 사병 폭행사건 관련,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 위기에 처해졌다. 그러나 선배 법무관인 김대권 대위(작고·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의 형)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무고 사실이 밝혀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잘못됐으면 육군교도소에 수감되고 평생 전과자란 오명을 쓰고 막장인생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옳은 일을 옳게 했을 뿐이니까요.” 이런 와중에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무관 생활을 마쳤다. 변호사 생활을 하던 중 1988년 안기부에 지원, 정책연구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안기부장을 보좌하는 자리에 있던 그는 노태우 정권 당시 최고의 실세였던 박철언 정무장관의 복잡한 사생활을 담은 정보보고서를 만들어 직접 본인에게 보내주었다. 이로 인해 청와대와 안기부가 발칵 뒤집혀지고 엄 변호사의 사표를 받으라는 엄명이 떨어졌지만 그는 직속 상관인 손진곤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전 부장판사)에 의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출세하는 사람들은 두 유형이 있더군요. 한 유형은 업무처리도 뛰어나면서 주변 사람에게 덕을 많이 쌓아 자기 편을 만드는 사람들로 손진곤 특보나 김영수 1차장 (문체부 장관 역임) 같은 분들입니다. 다른 유형은 업무능력은 뛰어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들이죠.”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직전 안기부를 나와 일반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대도(大盜) 조세형’ ‘무기수 탈주범 신창원’ ‘조폭 두목 김태촌’ 사건 등의 변호를 잇달아 맡으면서 매스컴의 유명 변호사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감추어진 실상을 보고 실망하면서 그들과 절연하게 된다. 이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기업 회장 부인의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을 변호인이 아니라 오히려 수사관처럼 파고들어 진실을 밝혀내 그녀가 무기징역형을 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형로펌을 앞세운 회장 부인 측의 공격으로 엄 변호사는 소송을 5건이나 당했다. 그리고 서서히 검찰·법원 주변에서 엄 변호사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늘어났다. 가난한 형사 피고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변호하다 보면 사법기관이나 교도소에서 행해지는 비리나 불법적 행태를 파헤칠 수밖에 없는데 기관들은 이를 싫어했던 것이다. 결국 엄 변호사를 상대로 하는 고소·고발사건도 늘어나고 검찰과 법원에 당사자로 불려다니는 경우도 많아졌다. 실제 소송에서 져 거액의 배상금을 물기도 했다. 그는 만나본 수많은 범죄자 유형을 4부류로 나눴다. 첫째는 자신의 행동이 죄가 되는지조차 모르는 판단미약자, 즉 ‘바보’들이다. 둘째는 ‘위악(僞惡)형’.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충동적이고 나쁘지만 사실 내면은 착한 사람들이다. 셋째는 위선(僞善)형. 겉으로는 착한 척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악마인 사람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명한 강력사건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은 사이코패스형. 아예 주파수가 다른 사람들이다. 평소에는 교회도 다니고 봉사활동도 하며 성실히 사는 척하지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인을 마구 저지르는 인간들이 있다. “강간살인범이 재판이 끝난 다음 자신이 저지른 미제 살인사건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털어놓더군요. 한 달에 한 번씩 하늘에서 와르르 별이 쏟아지는 금속성 소리를 들으면 미칠 것 같아 바깥으로 나가 닥치는 대로 살인과 강도, 강간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혀 감정도, 죄의식도 없지요.” - 그런 흉악범들을 상대하면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죠.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운명 같아요. 두려움이 들면 난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하나님께 큰소리로 기도한답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그러면 신기하게도 흉악범들이 맥을 못 추어요. 제 기도발이 먹히는 거죠.” - 지금 이렇게 호젓하게 지내며 돌아보는 인생은 어떤가요. 다시 되돌아간다면 다른 식으로 살고 싶지 않으세요. “제가 그렇게 살아온 이유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제 DNA, 기질, 운명 탓이죠.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옳은 것이면 해야 한다, 설령 좋은 일 하다가 벌을 받아도 좋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희 직계조상이 조선시대 때 단종 임금이 죽었을 때 묻어주었다는 걸로 역적으로 몰려 산속으로 도망갔지요. 그때 쓰셨다는 ‘좋은 일 하다 벌 받는다면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는 글이 제 마음속에도 있답니다.” 그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거실에 나와 동해 일출 광경을 바라본다. 오전에 성경을 봉독하고 필사(筆寫)를 한다. 마음 수양이다. 그리고 매일 블로그에 올리는 에세이를 한 편 쓴다. 식당에 내려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바닷가로 나가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산책한다. 돌아와 소설을 쓴다. “세상에는 영혼이 없는 인간, 즉 좀비 같은 사람이 많죠. 우리는 영혼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마음 공부를 해 내 영혼을 한 단계 높이고 싶습니다. 사후세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생을 위해서도 지금처럼 마음을 닦고 글을 쓰고 주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의 노년의 소망은 바닷가 마을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글을 쓰는 거였다. 그러나 밥이 문제였다. 인스턴트식품이나 밖에서 늘 사먹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공동식당에서 담백한 나물과 따뜻한 밥과 국을 내놓는 바닷가 실버타운을 선택한 것이다. “밥만 식당에 가서 먹을 뿐 개인주의가 보장된 삶이죠. 그리고 이곳에서 여러 인생의 황혼을 생생하게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노년은 오래된 기계가 녹이 슬고 부서지는 과정과 흡사하다. 시력이 나빠져 희미해진 세상을 더듬거리면서 걷고 혼자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청기를 해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 상대방의 입술을 보고 눈치로 때려잡고 산다는 영감도 있다. 무릎이 아파 밀차를 타고 일상생활을 하는 할머니들도 있다. 죽기 이틀 전 어머니가 남긴 말 노년은 머리 회전도 둔해진다. 더러 바보 취급을 한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는 노인들도 있다. 그러나 노년의 본질적인 고통은 외로움인 것 같았다. 말없이 밥을 먹으면서 노인들은 고독하다. 엄 변호사는 투석을 하면서 오랫동안 입원하고 있는 고교동창한테서 카톡으로 이런 글이 왔다고 했다. ‘내가 암 수술로 스무 차례나 입원하는데 아들놈 둘은 병문안도 연락도 없었다. 나는 그놈들이 괘씸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키운 것 같아. 다 내 탓이고 내 잘못이지.’ 엄 변호사는 그 친구가 예전에 “치매인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는데 찾아가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엄 변호사는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망막에 있던 어머니의 영상은 아파트 창 앞에 정물같이 앉아 한없이 거리를 내려다보는 적막한 뒷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죽음을 이틀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살아보니까 외로움이라는 게 정말 견디기 힘들더구나. 하지만 어떻게 하겠니. 다들 거쳐야 하는 과정인데. 아들, 잘 견디고 오기 바란다.” 그는 어머니가 온 몸으로 깨달은 진실을 선물받았다고 했다. 해결이란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실버타운의 노인들을 보면서 미리미리 늙는 것과 죽음에 대해 친숙해지려고 한다. 그게 현명하게 나이 먹어가는 길이 아닐까. 엄 변호사 부부는 그동안 모았던 물건들을 열심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또 과거 소원해졌던 사람들과의 화해를 위해 바닷가 마을의 예쁜 사진을 찍고 그걸 수채화나 연필화로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적어 보낸다고 했다. “노년의 마지막 숙제는 어머니 말씀처럼 외로움을 견디는 인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찾아올 친구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낯선 해변가를 산책할 수 있는, 고독에 강한 인간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자식들에게 ‘사람은 이렇게 죽는 것이란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 그렇게 의연하게 죽고 싶어요.” |
출처: 무진장 - 행운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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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_()()()_
성불 하소서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