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아! 나는 네가 안 보이는데 너는 내가 보이는지? 널 부르는 누나 목소리 듣고 있는지 너무 보고싶어 널 그리워 하는 눈물은 마를 줄을 모르는구나
우리 9남매 중 맨 끝으로 태어난 너는 2살 나는 아홉 살에 터진 6.25! 7살 먼저 태어난 나와 넌 무슨 운명이었을까? 평생을 곰곰이 생각해 봐도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월만 흘러보냈구나. 또다시 6월25일이 왔다. 무서운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모진 생명은 너 없는 세상에 나만 이렇게 살고 있구나.
아버지께서 큰 오빠만 데리고 금수산 넘어 하루만 피난하고 돌아오신다고 우리 식구들 그대로 남겨 두고 가신 후 소식이 없었다. 물밀 듯이 쳐들어 온 괴뢰군들은 상상할 수 없는 횡포로 우리 식구들을 겁박했다. 식량도 몰수하고 장독대 까지 딱지를 붙여 놓고 건들지 못하게 했다. 행랑 식구들 까지 열 댓 명을 큰 마당이나 안마당이나 수시로 일 열로 세워 놓고 따발총으로 그냥 쏠 기세를 하고 아버지 찾아내라고 호통을 쳤다. 요즘 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았다.
자기들 기준으로 지방에서 판사면 그냥 아무나 툭하면 죽이고 무기도 소지하고 양민들 괴롭히는 줄 알고 공회당에 사람들 모여 놓고 우리 집 식구들에게 핍박 받은 자들 신고하면 상을 준다고 하며 별 짓을 다했다.
만석 군의 할아버지께서 추수하시면 트럭으로 몇 대씩 보내주시는 식량부터 밤 잣 호두까지 동네에 모두 풀어 놓고 잔치를 벌였었다. 우리 집엔 아버지께서 근검절약의 선구자여서 흔한 광도 헛간도 없애고 집을 지어 행랑식구들 삼대를 살리셨다.
그러니 아무리 찾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해도 우리를 죽일 명분이 없었다. 집이 크니까 기와지붕위에 흰 천으로 적십자를 쳐 놓고 폭격을 면했으니 밀려든 북한군의 부상자들 때문에 우리 온 식구가 쫓겨났다. 위에 오빠 언니들은 백운 할아버지 댁으로 가고 우리 아래 4남매와 어머니만 30리쯤 떨어진 동막 초등학교 교장 댁으로 피난을 가서 작은 방 한 칸에 살았다. 막내 동생은 늘 내 차례였다. 나도 11월생이라 9살이지만 유난히 작아서 애기가 애기를 본다고 사람들이 놀렸다.
우린 틈틈이 괴뢰군 몰래 지방 좌파들이 감자며 보리쌀을 갖다 줘서 살았다. 그날도 아침을 먹고 두 남매는 등걸이 하나에 팬티 하나만 입고 논둑을 걸어 도랑을 건너면 동막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어 철봉에 가서 놀려고 부지런히 동생을 업고 가던 중 논 둑에 내 키 보다 더 큰 뱀이 둑을 가로질러 걸터 있는 것이다.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악! 소리를 지르면서 그만 업고 있던 아기를 놓쳐버렸다.
동생은 쿵! 하며 한 칸 아래 논으로 주르르 밀려가더니 머리를 논에 푹 박아 버렸다. 일시에 논에는 올챙이들이 쫙 퍼지며 벼가 무릎에 올 즈음 애기는 다리만 보였다. 내 동생이 죽는구나.. 나도 불시에 논으로 미끄러져 빠지니 내 넓적다리까지 논이 깊었다. 논 밖으로 나온 동생 다리를 잡아 올리니 반쯤 나오다가 손이 미끄러지면서 다시 뿌걱하고 들어갔다. 더 겁에 질려 죽을힘을 다해 허리를 잠아 당겼더니 퍽하며 애기는 나오고 반대로 내가 논에 자빠져 주저앉으니 간밤에 비가 와서 논물이 내 목까지 깊었다.
다급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기를 보니 온통 펄로 뒤범벅이 되고 눈만 빠끔 했다. 무슨 정신에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와 학교 가는 도랑으로 가서 애기를 발가벗겨서 씻겼다. 9살짜리가 비누도 수건도 없이 맨 손으로 얼마나 씻겼을까? 감기 들까 걱정되어 양지쪽에서 말리면 뽀얀 펄이 다시 나오고 또 씻기면 또 구멍마다 나온다. 한여름 긴긴해에 그러기를 수십 차례하다보니 해가 저물었다. 밥도 쫄쫄 굶었어도 배고픈 줄은 몰랐으나 애기가 얼마나 젖이 먹고 싶었을까. 선선해서 있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애기를 업고 그 논둑을 지나 집으로 갔다.
어머니를 본 아기는 정신없이 어머니 앞가슴을 파고 들어 허겁지겁 젖을 먹는데 비지땀을 흘리는 아기를 보신 어머닌 어두워도 이상하셨나보다. 눈에서도 자꾸 펄이 나오고 귀에서도 나오고 머릿속에서도 자꾸 나오는 것이다 새까만 손톱을 보시더니 드디어 나를 부르신다.
애기가 왜? 이러는가? 하셔서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말씀 드렸다. 지려 겁을 먹고 걱정을 듣고는 다시 쫓겨나서 갈 곳이 없어 평소엔 무서워 혼자 못 가는 집 뒤 반공 호에서 저녁도 굶고 잤으나 아기의 낮에 일을 생각하면 무서움도 뭣도 없이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이제 세월이 70년이 지났는데 어제 일만 같다. 우리 9남매 중에 그 동생만 피부가 검다. 늘 누나가 논에 나를 빠트려 나만 검다고 농담하지만 나는 오금이 절여온다. '아무리 어릴 적 이야기지만 병헌아! 너무 미안하고 내가 잘 못했다. 죽는 날까지 용서를 빌고 싶다. 하마터면 너를 잃을 뻔 했잖아.' 늘상 내가 하는 말이다.
아버지의 평상시 나눔의 헌신적인 정신이나 근검절약의 선구자가 아니셨으면 우리 식구들의 운명 또한 어찌 되었을까? 후퇴할 때 저들은 동네 순경 식구들까지 모두 죽이고 갔다. 우리 식구들 사살하는 날도 정해졌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방 좌파들이 빨찌산 요원들 다리를 붙잡고 저분들은 법 없이도 사시는 법관이라고 매달렸다. 실탄이 아까워 논밭에 세워놓고 찌르고 쳐서 죽이는 것을 우린 다 보았다. 훗날 아버지께서 부산까지 밀려 가셨다 오셔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모두 불러서 고맙다고 동네 잔치를 열었고 그들을 자수 시키고 전향시키셨다.
6.25는 전 국민의 비극이지만 9살 어린 나에게는 그 어떤 폭격보다도 옆에서 죽는 사람을 본 것 보다 내동생의 일처럼 무섭고 끔찍한 일은 기억에 없다.
"지금은 모두 가버리고 없는데 그날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벼를 심고 얼마쯤 되었을 때 논에는 올챙이가 가득했다. 철푸덕 논에 네가 빠졌을 때 다시 올챙이들이 확 물러나며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논에는 파문이 일었었다." 20년 전 6,25일 나의 일기장에 쓰여진 글 한토막!
첫댓글 가슴 아픕니다ㅠ
병헌이는 그 때 살았었는데 그 후로 죽었는가 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