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우씨왕후]한나라군에게 자비없이 칼을 꽂아버리는 고구려태왕의 숨막히는 전쟁씬!
바른 역사 사실을 교과서에 실어서 교육해야 하지만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하여 역사교과서가 바뀌지 않는다. 정부와 국민들이 식민사학 카르텔을 극복하여 역사교과서에 바른 역사 사실이 실리도록 하여 바른 역사교육을 하도록 해야 하겠다.
고구려 당시 요동은 지금의 요서지역을 말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난하의 동쪽을 요동이라고 하였다.
2014년 3월 16일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촌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굴된 고분군에서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韓顯度)의 무덤'이라고 쓰인 벽돌이 나왔다. "원상(元象) 2년(539) 4월 17일 사망한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 명기(元象 二年四月十七日 樂浪郡朝鮮縣人韓顯度銘記)"라는 내용이다. 북한 평양이 아닌 북경에서 낙랑군 조선현 사람의 묘가 나왔다. 313년에 멸망했다는 낙랑군이 539년에도 존속하였다.
세키노 타다시는 북경 유리창에서 낙랑유물들을 적극적으로 구입하여 조선총독부에 보냈다. 그리고는 한반도 북부 곳곳에서 한사군과 낙랑군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보고서에"이런 유물들을 우연히 발견했다"라고 거듭 써놓았다. 북한 평양일대가 낙랑군이라고 주장했던 세키노는 왜 낙랑 유물들을 평양이 아닌 북경에서 사 모았을까? 북경은 하북성 내에서 출토된 고고유물들이 거래되던 시장으로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하북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기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에 의하여 멸망한 것으로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美川王) 관련 기사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과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이 기사를 보면 평양이 고구려 권역임을 알 수 있다.
평양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랑군이 망하기 전이라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는 것도 확실히 알 수 있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서안평이 압록강 변에 있었다고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에 의거하여 주장하고 국내 고대사학계도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동북공정 이전의 중국사료를 학술적으로 연구한 지구인의 <고대사공부방>에 의하면 서안평은 하북성 고비점시 거마하 유역이다.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해 동북공정에 협조한 학설보다 훨씬 제대로 된 역사연구 결과로 이 당시 요동은 지금의 요서지역을 말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난하의 동쪽을 요동이라고 하였다.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뿐이다. 8천 명을 사로잡은 현도군도 멸망하였다고 하지 않는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관으로 고대사를 주도적으로 만든 사람은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고 이병도가 보조역할을 하였다.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대방군을 침공했다는 기사만 있지 멸망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十六年 春二月 攻破玄?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于東北)
2014년 3월 16일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촌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굴된 고분군에서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韓顯度)의 무덤'이라고 쓰인 벽돌이 나왔다. "원상(元象) 2년(539) 4월 17일 사망한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 명기(元象 二年四月十七日 樂浪郡朝鮮縣人韓顯度銘記)"라는 내용이다. 북한 평양이 아닌 북경에서 낙랑군 조선현 사람의 묘가 나왔다. 313년에 멸망했다는 낙랑군이 539년에도 존속하였다.
중국의 <자치통감>에 서기 313년에 "요동 사람 장통이 고구려 미천왕과 싸우다가 패해서 1000여 가구를 데리고 선비족 모용외에게 도주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 설도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면 일어날 수가 없다. 고구려 땅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낙랑군은 중국의 요서지역에 있어야 가능해진다.
중국의 <위서(魏書)> '태무제(太武帝) 본기'에 "연화(延和) 원년(432) 9월 북위의 태무제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주(營丘)·성주(成周)·요동(遼東)·낙랑(樂浪)·대방(帶方)·현도(玄?)의 6군 사람 3만 가(家)를 유주(幽州:북경)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태무제가 요서지역에 있던 낙랑군 등을 서쪽 북경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539년에 낙랑군 조선현 사람들이 북경에 살 수 있다.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 오전에 죽촌(竹村:타케무라)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구입하였다.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하였다." 세키노 타다시의 일기다.
세키노 타다시는 북경 유리창에서 낙랑유물들을 적극적으로 구입하여 조선총독부에 보냈다. 그리고는 한반도 북부 곳곳에서 한사군과 낙랑군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보고서에"이런 유물들을 우연히 발견했다"라고 거듭 써놓았다. 평양일대가 낙랑군이라고 주장했던 세키노는 왜 낙랑 유물들을 평양이 아닌 북경에서 사 모았을까? 북경은 하북성 내에서 출토된 고고유물들이 거래되던 시장으로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하북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여러 역사서에서 서기 313년에 낙랑군이 멸망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314년에 대방군도 멸망하지 않았으며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 당시의 요동은 난하 동쪽인 지금의 요서지방을 지칭하였다.
바른 역사 사실을 교과서에 실어서 교육해야 하지만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하여 역사교과서가 바뀌지 않는다. 정부와 국민들이 식민사학 카르텔을 극복하여 역사교과서에 바른 역사 사실이 실리도록 하여 바른 역사교육을 하도록 해야 하겠다.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3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