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넣을까 고민 많이 한 브금인데, 억압받던 약소민족이 독립하는 이번 편에 넣기로 했습니다. 정작 제목은 싸볘츠키 련방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바이코누르라는 게 함정.
보헤미아 해방전쟁 당시 헝가리 편으로 러시아가 참전할 것에 대비해서 민족해방 떡밥을 잠깐 던져봤다가 러시아가 전쟁을 회피, 흐지부지된 적이 있었죠. 독일 정부가 발표하는 1900년 1월 1일 신년 사설은 강화되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과거 한자동맹 시절 독일 상인들이 쥐고 있던 발트해의 패권을 되찾자는 공격적인 내용으로 출발합니다.
정작 러시아의 상황은 심상찮습니다. 차르의 전제권력이 지속되던 억압정권 치하에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노조 구성원들과 노동자들이 붉은 기를 들고 노동절 행진에 나서는군요. 킁킁, 어딘가에서 소비에트의 냄새가 난다... 근데 신문은 5월을 한참 남긴 1월 5일자라는 것이 함정
시칠리아에서 지진과 해일이 몰려와 7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재난이 일어났습니다.
찾아보니까 1900년에는 그런 사건이 없었고 1908년 12월 28일에 메시나 지진이 일어났네요. 30~40초 간 지진이 있었고 메시나의 건물 중 91%가 파괴되었습니다. 메시나에서만 7만 명 이상이 죽었고 총 12만 3천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군대와 군함을 총동원해서 수습에 나섰고, 약탈자들은 총살당했습니다. 국왕 부부도 방문했고요. 적십자는 물론이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해군도 파견되어 구조작업을 도왔습니다.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해 이탈리아 각지로 흩어졌고 상당수는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쾨페니크의 대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포크트(Friedrich Wilhelm Voigt)는 1849년 동프로이센 틸지트의 구두장이 아들로 태어났으며 절도 4범에 문서위조 2범을 저지른 상습범이었습니다. 1890년에는 포젠의 어느 법원에서 도둑질을 하려다가 실패, 15년 형을 선고받았죠. 1906년 2월 12일에 출소하여 신발 가게에 취직하였으나, 8월 24일 베를린 당국은 그의 상습적인 범죄를 이유로 들어 베를린 추방령을 내립니다. 직장을 잃은 포크트는 낡은 군복, 휘장, 군도 등을 구입하여 10월 16일 정오 무렵에 베를린의 어느 막사로 찾아가 스스로를 프로이센 육군 제1 근위 보병 연대 소속 장교라 칭하고 10명이 약간 넘는 병사들을 징발(?), "적당한 차를 빌릴 수가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기차를 타고 베를린 교외의 쾨페니크로 향했습니다. 부대를 이끌고 쾨페니크 시청에 도착하자 포크트는 건물을 봉쇄,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쾨페니크 시장과 회계를 체포한 뒤 장부를 제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도시 예산 중 4002 마르크와 37 페닝을 압수하죠. 영수증에는 자기가 갇혀있었던 형무소의 소장 이름을 적었습니다. 포크트는 인솔해 온 병사들로 하여금 체포한 범인(??)들을 베를린의 노이에 바헤로 연행하여 심문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혼자서 기차역으로 향했으며, 곧 옷을 갈아입고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완전범죄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포크트는 이미 감옥에서 자신의 계획을 떠벌린 바가 있었기 때문에 덜미가 잡혔죠. 10월 26일 체포된 그는 베를린 제2지방법원으로부터 4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이 포크트 편이었기 때문에(???) 황제 특사로 1908년 8월 16일 출감합니다. 포크트의 뻔뻔하고 대담한 사기 행각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던 거죠. 그의 명성은 외국에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포크트에게 속아버린 멍청한 제국 군인에 대한 조롱도 뒤를 이었습니다. 또한 누구라도 군복만 입으면 무적의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독일 특유의 군국주의 문화가 빚어낸 코미디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918년 독일 혁명 시점까지 군대가 가진 과도한 정치 권력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제를 포함한 보수적 정치인들은 이러한 보수적 군국주의(konservativen Militarismus)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한편 감옥을 나온 포크트는 자신의 명성을 바탕으로 독일과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스스로 쾨페니크의 대위 연기를 하면서 사인과 사진을 판매했고, 190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자서전도 출간합니다. 1910년에는 룩셈부르크로 이주하였고 1922년 사망할 때까지 룩셈부르크에서 살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포크트(Friedrich Wilhelm Voigt)는 1849년 동프로이센 틸지트의 구두장이 아들로 태어났으며 절도 4범에 문서위조 2범을 저지른 상습범이었습니다. 1890년에는 포젠의 어느 법원에서 도둑질을 하려다가 실패, 15년 형을 선고받았죠. 1906년 2월 12일에 출소하여 신발 가게에 취직하였으나, 8월 24일 베를린 당국은 그의 상습적인 범죄를 이유로 들어 베를린 추방령을 내립니다. 직장을 잃은 포크트는 낡은 군복, 휘장, 군도 등을 구입하여 10월 16일 정오 무렵에 베를린의 어느 막사로 찾아가 스스로를 프로이센 육군 제1 근위 보병 연대 소속 장교라 칭하고 10명이 약간 넘는 병사들을 징발(?), "적당한 차를 빌릴 수가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기차를 타고 베를린 교외의 쾨페니크로 향했습니다.
부대를 이끌고 쾨페니크 시청에 도착하자 포크트는 건물을 봉쇄,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쾨페니크 시장과 회계를 체포한 뒤 장부를 제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도시 예산 중 4002 마르크와 37 페닝을 압수하죠. 영수증에는 자기가 갇혀있었던 형무소의 소장 이름을 적었습니다. 포크트는 인솔해 온 병사들로 하여금 체포한 범인(??)들을 베를린의 노이에 바헤로 연행하여 심문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혼자서 기차역으로 향했으며, 곧 옷을 갈아입고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완전범죄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포크트는 이미 감옥에서 자신의 계획을 떠벌린 바가 있었기 때문에 덜미가 잡혔죠. 10월 26일 체포된 그는 베를린 제2지방법원으로부터 4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이 포크트 편이었기 때문에(???) 황제 특사로 1908년 8월 16일 출감합니다. 포크트의 뻔뻔하고 대담한 사기 행각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던 거죠. 그의 명성은 외국에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포크트에게 속아버린 멍청한 제국 군인에 대한 조롱도 뒤를 이었습니다. 또한 누구라도 군복만 입으면 무적의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독일 특유의 군국주의 문화가 빚어낸 코미디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918년 독일 혁명 시점까지 군대가 가진 과도한 정치 권력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제를 포함한 보수적 정치인들은 이러한 보수적 군국주의(konservativen Militarismus)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한편 감옥을 나온 포크트는 자신의 명성을 바탕으로 독일과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스스로 쾨페니크의 대위 연기를 하면서 사인과 사진을 판매했고, 190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자서전도 출간합니다. 1910년에는 룩셈부르크로 이주하였고 1922년 사망할 때까지 룩셈부르크에서 살았습니다.
3월 1일, 독일 정부가 보이고 있는 호전적 태도가 러시아 정부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납니다.
비행기 시세가 폭등하고 있네요. 이건 먼저 만드는 놈이 떼돈을 법니다.
마르티니크 섬의 플레 화산이 분화, 근처의 항구 도시 생피에르가 파괴되고 3만 명 이상이 사망합니다.
1902년 4월 23일 플레 화산에서 분화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위험성을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가끔 분화가 있었지만 큰 피해로 이어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죠. 이후로도 분화는 서서히 거세어졌고 5월 2일 오후 11시 30분 경 큰 폭발과 함께 섬의 북쪽 절반이 화산재로 뒤덮였습니다. 5월 3일 토요일에는 일부 시민들의 피난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 4일 마르티니크 총독 루이 기욤 무테(Louis Guillaume Mouttet)는 대피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지질학 수준은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을 뿐더러,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섬 밖으로 대피시키고 도시를 싹 비워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죠. 더구나 당시는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더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5월 7일 총독 부부는 배를 타고 생피에르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열린 위원회는 몇 시간 동안의 토의 끝에 플레 화산의 위협이 무시 가능한 수준이라고 결정했으나, 바로 그 다음날 아침 8시 2분에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연기는 12km 상공으로 솟아올랐고, 섭씨 370도의 화쇄난류가 시속 200km의 속도로 생피에르를 덮쳤습니다. 그 순간 도시의 모든 구조물은 붕괴했으며, 3만 명이 불타거나 질식해 사망했습니다. 무테 총독은 다른 마을의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위원회와 함께 배를 타고 해안으로 나가려던 순간 휩쓸렸으며, 익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같은 시각 총독 부인은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죠.
1902년 4월 23일 플레 화산에서 분화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위험성을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가끔 분화가 있었지만 큰 피해로 이어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죠. 이후로도 분화는 서서히 거세어졌고 5월 2일 오후 11시 30분 경 큰 폭발과 함께 섬의 북쪽 절반이 화산재로 뒤덮였습니다. 5월 3일 토요일에는 일부 시민들의 피난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 4일 마르티니크 총독 루이 기욤 무테(Louis Guillaume Mouttet)는 대피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지질학 수준은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을 뿐더러,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섬 밖으로 대피시키고 도시를 싹 비워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죠. 더구나 당시는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더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5월 7일 총독 부부는 배를 타고 생피에르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열린 위원회는 몇 시간 동안의 토의 끝에 플레 화산의 위협이 무시 가능한 수준이라고 결정했으나, 바로 그 다음날 아침 8시 2분에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연기는 12km 상공으로 솟아올랐고, 섭씨 370도의 화쇄난류가 시속 200km의 속도로 생피에르를 덮쳤습니다. 그 순간 도시의 모든 구조물은 붕괴했으며, 3만 명이 불타거나 질식해 사망했습니다. 무테 총독은 다른 마을의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위원회와 함께 배를 타고 해안으로 나가려던 순간 휩쓸렸으며, 익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같은 시각 총독 부인은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죠.
텍사스 주 갤버스턴에 허리케인이 닥쳐와 8천 명 가량의 시민들이 사망했습니다.
뉴올리언스와 경쟁 관계에 있던 갤버스턴은 멕시코 만 무역의 중심이 되는 항구도시였으며, 인구는 약 36000명에 달했습니다. 인근에 위치한 인디애놀라 항이 1875년 허리케인 피해를 입고 대부분 파괴되어 몰락(지금도 유령도시입니다)한 것을 계기로 일부 갤버스턴 시민들이 방파제를 짓고자 하기도 했으나, 상당수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1900년 8월 27일 대서양에서 형성된 열대 폭풍은 대앤틸리스 제도를 거의 완전히 관통하였으며, 9월 4일 쿠바 아바나 부근에서 북상하여 플로리다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폭풍은 북서쪽으로 진로를 바꾸었으며, 따뜻한 멕시코 만을 지나면서 많은 수분을 받아 허리케인 수준으로 커졌습니다. 일부 시민들은 경고를 받고 내륙으로 대피하였으나 아직 많은 시민들은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허리케인이 상륙한 9월 8일, 당시 갤버스턴 섬의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2.7m였는데 허리케인은 4.6m에 이르는 폭풍 해일을 동반하였습니다. 높은 파도가 섬 전체를 덮쳤으며 3600채 이상의 가정집이 파괴되었습니다. 기록된 최대 풍속은 오후 6시경 측정된 시간당 160km였으나, 그 직후 갤버스턴 기상청 건물도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이후의 기록은 없습니다. 오후 8시경에는 풍속이 최대 190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저 기압은 964.4 헥토파스칼로 측정되었으나 오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오늘날에는 935.7 헥토파스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갤버스턴과 본토를 잇는 교량과 전신은 진작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도시의 상황은 본토로 전달될 수 없었습니다. 9월 9일 오전 11시, 폭풍에서 살아남은 한 척의 배가 간신히 텍사스 시티에 도달하였고, 다음날 오전 3시에 휴스턴 전신 사무실에 도착해서 갤버스턴의 위기를 텍사스 주지사와 대통령에게 간단하게나마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 인구의 20%에 달하는 8천여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폭풍 당시엔 살아남았으나 구조대원들이 닿을 수 없는 잔해 밑에 며칠 동안 깔려있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많은 시체를 모두 매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바지선에 가득 실어서 바다에 던져버려야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해류가 그 시체들을 다시 해변으로 밀어냈기 때문에 결국 해변에 화장용 장작더미가 설치되었습니다. 뜬금없이징집되어 시체를 모으고 태우는 끔찍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의 정신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당국은 위스키를 무료로 나누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이 허리케인은 1900년부터 2010년까지의 미국 허리케인 중 재산 피해 3위, 인명 피해 1위(2005년 카트리나가 1836명 사망으로 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인명 피해로는 2위부터 7위까지의 모든 허리케인 피해를 다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중서부를 관통하며 서서히 힘을 잃은 폭풍은 오대호를 지나 9월 12일 뉴욕을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갤버스턴에는 높이 5m, 길이 5km에 달하는 방파제가 세워졌으며, 모래를 퍼부어 갤버스턴 지대 전체를 기존보다 5.2m 높이고 2100채의 건물들이 재건되었습니다. 1915년에는 1900년 허리케인과 비슷한 수준의 허리케인이 4m 높이의 폭풍 해일을 몰고 또 갤버스턴에 닥쳐왔으나(이 허리케인도 미국 역사상 재산 피해가 4위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녀석이었습니다) 1900년의 경험 덕분에 갤버스턴의 인명 피해는 53명에 그쳤습니다. 1875년부터 1900년까지의 갤버스턴 황금시대는 1900년 허리케인으로 인해 종결되었고 지역경제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투자자들은 갤버스턴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여겨 떠나는 것이 당연했으니까요. 그러나 금주법이 미국 전역을 강타한 1920년부터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리조트 타운으로 변신했고, 도박과 밀주와 매춘이 갤버스턴역사상 최대 호황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의 갤버스턴을 갤버스턴 자유주(Free State of Galveston), 갤버스턴 공화국(Republic of Galveston Island) 등으로 부르며, 이러한 호황은 1950년대부터 단속이 강화되면서 1957년에 끝을 맺게 됩니다.
뉴올리언스와 경쟁 관계에 있던 갤버스턴은 멕시코 만 무역의 중심이 되는 항구도시였으며, 인구는 약 36000명에 달했습니다. 인근에 위치한 인디애놀라 항이 1875년 허리케인 피해를 입고 대부분 파괴되어 몰락(지금도 유령도시입니다)한 것을 계기로 일부 갤버스턴 시민들이 방파제를 짓고자 하기도 했으나, 상당수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1900년 8월 27일 대서양에서 형성된 열대 폭풍은 대앤틸리스 제도를 거의 완전히 관통하였으며, 9월 4일 쿠바 아바나 부근에서 북상하여 플로리다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폭풍은 북서쪽으로 진로를 바꾸었으며, 따뜻한 멕시코 만을 지나면서 많은 수분을 받아 허리케인 수준으로 커졌습니다. 일부 시민들은 경고를 받고 내륙으로 대피하였으나 아직 많은 시민들은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허리케인이 상륙한 9월 8일, 당시 갤버스턴 섬의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2.7m였는데 허리케인은 4.6m에 이르는 폭풍 해일을 동반하였습니다. 높은 파도가 섬 전체를 덮쳤으며 3600채 이상의 가정집이 파괴되었습니다. 기록된 최대 풍속은 오후 6시경 측정된 시간당 160km였으나, 그 직후 갤버스턴 기상청 건물도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이후의 기록은 없습니다. 오후 8시경에는 풍속이 최대 190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저 기압은 964.4 헥토파스칼로 측정되었으나 오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오늘날에는 935.7 헥토파스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갤버스턴과 본토를 잇는 교량과 전신은 진작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도시의 상황은 본토로 전달될 수 없었습니다. 9월 9일 오전 11시, 폭풍에서 살아남은 한 척의 배가 간신히 텍사스 시티에 도달하였고, 다음날 오전 3시에 휴스턴 전신 사무실에 도착해서 갤버스턴의 위기를 텍사스 주지사와 대통령에게 간단하게나마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 인구의 20%에 달하는 8천여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폭풍 당시엔 살아남았으나 구조대원들이 닿을 수 없는 잔해 밑에 며칠 동안 깔려있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많은 시체를 모두 매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바지선에 가득 실어서 바다에 던져버려야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해류가 그 시체들을 다시 해변으로 밀어냈기 때문에 결국 해변에 화장용 장작더미가 설치되었습니다. 뜬금없이징집되어 시체를 모으고 태우는 끔찍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의 정신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당국은 위스키를 무료로 나누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이 허리케인은 1900년부터 2010년까지의 미국 허리케인 중 재산 피해 3위, 인명 피해 1위(2005년 카트리나가 1836명 사망으로 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인명 피해로는 2위부터 7위까지의 모든 허리케인 피해를 다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중서부를 관통하며 서서히 힘을 잃은 폭풍은 오대호를 지나 9월 12일 뉴욕을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갤버스턴에는 높이 5m, 길이 5km에 달하는 방파제가 세워졌으며, 모래를 퍼부어 갤버스턴 지대 전체를 기존보다 5.2m 높이고 2100채의 건물들이 재건되었습니다. 1915년에는 1900년 허리케인과 비슷한 수준의 허리케인이 4m 높이의 폭풍 해일을 몰고 또 갤버스턴에 닥쳐왔으나(이 허리케인도 미국 역사상 재산 피해가 4위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녀석이었습니다) 1900년의 경험 덕분에 갤버스턴의 인명 피해는 53명에 그쳤습니다.
1875년부터 1900년까지의 갤버스턴 황금시대는 1900년 허리케인으로 인해 종결되었고 지역경제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투자자들은 갤버스턴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여겨 떠나는 것이 당연했으니까요. 그러나 금주법이 미국 전역을 강타한 1920년부터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리조트 타운으로 변신했고, 도박과 밀주와 매춘이 갤버스턴역사상 최대 호황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의 갤버스턴을 갤버스턴 자유주(Free State of Galveston), 갤버스턴 공화국(Republic of Galveston Island) 등으로 부르며, 이러한 호황은 1950년대부터 단속이 강화되면서 1957년에 끝을 맺게 됩니다.
으아아아 지겨운 재해 사건 번역은 제발 이제 그만 좀
북극점으로 향한 2번째 탐사대도 실종되었습니다. 아이고 제발.
내부 마우레타니아가 말리 총독령이 됩니다.
음? 프랑스군에게 이화원이 방화당했네요? 제2차 아편전쟁에 영불연합군에게 한 번 불타버렸고, 서태후가 쓰라는 해군에게는 안 쓰고 돈을 퍼부어다가 재건해놓은 걸 의화단 전쟁 때 다시 훼손되었죠. 근데 왜 이게 이제야 떴지?
빅토르 위고를 포함한 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이화원 방화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었나보네요.
아... 마카오 전쟁...(깨달음)
아... 베이징이 시베리아를 돌파해온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
아무튼 이화원은 청불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고, 우리는 슐레지엔 민족주의 반군을 처단해야 합니다.
고작 3천 명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읭? 뭐시라? 북극점에 독일인이? 햣하!
왜 이리 풍악 소리가 작은 게냐! 오늘은 즐거운 날이 아니더냐! 근심 걱정 다 떨치고 마시고 취하는 날이란 말이다! 풍악, 풍악, 풍악!!! 풍악을 더 크게 울려라! 풍악, 풍악! 풍악!
하지만 이 독일인 탐험가 로베르트 페아리(Robert Peary)는 사실 북위 89도 57분에 도달한 것이었으며, 그마저도 이누이트 안내인이 먼저 그 지점을 밟았기 때문에 최초로 도착한 것조차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공산당과 아나키스트가 득세를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베이징까지 잡아먹었으면서 고작 화이트피스라니... 아무튼 이런 식이면 제아무리 문명중국이래봐야 러시아보다 더 쉽겠네요. 러시아는 그나마 기술이라도 있지...
이제 전쟁 준비를 갖출 시간입니다.
그에 앞서 공산주의 반군을 무력화할 조치를 취해야겠군요.
전 인구의 12.42%가 지지하는 실업수당 제도 개선을 실행해봅시다.
쨘! 40연대에 달하던 공산당 반군이 깔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리보니아 땅에 뤼베크와 브레멘 출신 상인들이 처음 발을 디딘 11세기 중반부터 라트비아는 독일인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습니다. 1200년 봄 북방 십자군을 일으켜 23척의 배와 1500명의 무장 십자군을 이끌고 리보니아로 향했으며, 한자동맹의 일원인 고틀란드의 도움을 받아 1201년 리가를 건설하고 1215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을 창설한 리가 주교 알베르트도 브레멘의 북소에베데 출신이었죠.
지금까지도 이스틀란트(에스토니아), 리플란트(리보니아), 쿠를란트, 외젤 각지에는 발트 독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1867년 리가 시민의 42.9%가 독일인이었고, 1881년에는 에스토니아 인구의 5.3%에 달하는 46700명이 독일인이었습니다. 1897년 있었던 역사상 유일한 러시아 제국 인구조사에서도 라트비아 인구의 6.2%에 해당하는 120191명이 독일인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게다가 독일 제국 성립 이전까지는 문화적, 언어적 이유를 들어 동부 프로이센의 독일인들을 발트 독일인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891년까지 리가의 공식 언어는 다름아닌 독일어였습니다. 그리고 리가는 러시아 제국 전체에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뒤를 잇는 3번째 대도시라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그 대도시를 누가 건설했고 누가 성장시켰습니까? 아니, 애초에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부터가 왜 독일식이겠습니까? 표트르 대제를 포함한 많은 러시아 황제들은 독일을 통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발트 해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명실상부한 독일인들의 바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 이래로 시작된 러시아 동화정책은 이러한 발트 독일인들의 문화적 자치권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리가의 공식 언어가 러시아어로 전환된 것도 이것 때문이죠. 러시아 동화정책은 독일인에게만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독일인들과 무려 700년 동안이나 함께 어울려 살아온 라트비아인들도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러시아 동화정책 때문에 큰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제 라트비아 땅에서 제정 러시아의 압제는 종결될 것이고, 라트비아인들의 주권이 확립될 것입니다.
최신예 전함들이 포함된 독일 해군이 시대에 뒤처진 러시아 발트 함대를 상대로 승기를 잡고 있습니다.
1월 27일에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괴뢰국으로 만들기 위한 전쟁을 선포한 상태였네요.
체펠린 백작이 자비를 털어 만든 최초의 비행선 LZ1이 보덴 호(콘스탄츠 호, 게임 화면에서 독일-스위스 국경에 위치한 큰 호수)를 날았군요. 원래는 7월 2일에 날았어야 하니 약간 빠른 편입니다만, LZ1은 결국 호숫가에 추락했었다지요. 체펠린 백작은 이 비행선을 만드느라 거의 모든 재산을 쏟아넣었기 때문에 결국 해체하고 다 팔아버려야 했고, 5년 뒤에야 개량형 LZ2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그라프 체펠린의 모습
리가 만 해전에서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러시아 발트 함대 33척을 전부 격침시키는 위엄찬 전과를 세웁니다. 워스코어가 단숨에 8.5 올라버립니다.
그리고 영러 연합과의 전쟁으로 바쁜 마당에 이탈리아가 남부 티롤을 내놓으라고 하는군요. Aㅏ...
그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독일군 최종오의 총동원령을 선포하는 수밖에 없지! 480개 연대가 독일 각지에서 쏟아져나온다구!
일단 급한대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군단을 남쪽으로 파견해서 놈들을 잡아봅시다. 이탈리아군은 역시 무능무능하군요. 거의 헝가리군이나 다름없는 듯.
아이고 이런
빌어먹을 영국 놈들이 전쟁에서 안될 것 같으니까 대전쟁이나 구상하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쓸모없는 헬골란트나 위협하는 영국 수송선단을 잡아다가 용궁으로 주소지 이전을 해주었습니다.
대전쟁이 하필이면 독일-러시아 간 발트 전쟁 도중에 발견되었다는 것이 영 불안하기만 합니다.
러시아는 뭐 별 것도 아니군요.
이제 모든 병력이 이탈리아를 향해 몰아닥칠 시간입니다. 발트 해는 실컷 구경했으니 지중해 관광이나 떠나봅시다.
러시아 제국은 라트비아를 상실하면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국경과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안보상의 이유로 '첫 왕좌(Первопрестольная)', '제3의 로마' 모스크바로 천도했습니다.
라트비아가 독일에게 동맹을 요청해옵니다. 러시아 제국의 압박을 받고 있으니 당연히 받아들여줘야죠.
이제 에스토니아를 독립시켜서 스피어 안에 넣기만 하면 발트 연합공국을 만들 수 있게 되는군요.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니 그 많던 반란 조직들도 싹 사라졌군요. 공산 혁명분자들도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전쟁 중인데 올림픽은 열렸던 건가요?
1901년 4월 1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발트 전쟁은 독일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8월 31일의 전황. 외스터라이히 남부를 점령한 이탈리아 때문에 3%입니다.
9월 18일의 전황. 이탈리아군이 독일군의 맹공을 이기지 못하고 -1%로 역전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라도 독립시켜줄까 고민하면서 워골 설정만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9월 29일의 전황. 이탈리아군이 거의 붕괴하면서 -4%로 떨어집니다.
11월 4일, 완전히 붕괴된 이탈리아군을 짓밟고 북이탈리아로 쏟아져 내려가는 독일군. 하지만 징고이즘은 아직 높지 않네요.
크로아티아 독립해서 무엇에 쓰겠나. 간지판도 만드는 것밖에 이익될 것 없으니 쿨하게 화이트피스로 넘어갑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고도 슬슬 비는 것이 느껴집니다. 징집된 인원을 빨리 일터로 복귀시킵니다.
이탈리아가 힘을 잃으니 또 헝가리가 슬라보니아를 내놓으라고 전쟁을 선포하는군요. 끈질긴 녀석들입니다.
독일 스피어의 파라과이에서 대통령 독재를 견디지 못하고 공화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래도 버텨내지 못할 것 같군요.
아, 찍어놓지는 않았는데 소말릴랜드를 독립시켜서 악명이 줄었습니다.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제는 레알 삼국협상이군요. 대독 포위망이 갖춰졌으니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와 손을 잡아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파라과이의 민주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독일 스피어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약간의 악명을 감수하고 전쟁명분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신생 정권을 인정하고 외교적으로 다시 스피어에 넣어버리는 것이 더 좋겠죠.
첫댓글 대독일을 만들면 프랑스 이태리 영국 코어를 죄다 가지고 있다보니까 다굴을 자주 당하더군요... 물론 그래도 거의 이기긴 하지만요
영국 코어 어디요? 헬골란트에는 영국 코어 없을 텐데...? 이탈리아는 뭐 대독일과 겹치는 곳은 베네치아-이스트리아-달마티아 정도가 있긴 한데 지금 독일에게 그런 땅은 없고(오히려 이탈리아가 크로아티아까지 전부 차지했으니 다굴을 맞으면 맞지), 남부 티롤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으니 별 문제 없이 동맹도 맺어줍니다. 유일한 문제는 프랑스죠.
@인생의별빛 헬골리안트에 코어 있지 않나요? 없던가?
관대한 대독일
오오 대독일을 물리칠 국가는 없는 것인가 ㅜㅜ
역설신은 있습니다(...) 사실 저 전쟁 도중에 역설신이 강림해서 세계를 말소해버리셨기 때문에 한 번 멘붕을 했죠(......)
자유 발트 만세!
리가 만세! 라트비아 만세! 자유 발트 만세! 독일계 발트인 만세! 그리고 대독일 만세!
이거 무슨모드인가요? 지도색이 좀 다른거같은데..
첫댓글 대독일을 만들면 프랑스 이태리 영국 코어를 죄다 가지고 있다보니까 다굴을 자주 당하더군요... 물론 그래도 거의 이기긴 하지만요
영국 코어 어디요? 헬골란트에는 영국 코어 없을 텐데...?
이탈리아는 뭐 대독일과 겹치는 곳은 베네치아-이스트리아-달마티아 정도가 있긴 한데 지금 독일에게 그런 땅은 없고(오히려 이탈리아가 크로아티아까지 전부 차지했으니 다굴을 맞으면 맞지), 남부 티롤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으니 별 문제 없이 동맹도 맺어줍니다. 유일한 문제는 프랑스죠.
@인생의별빛 헬골리안트에 코어 있지 않나요? 없던가?
관대한 대독일
오오 대독일을 물리칠 국가는 없는 것인가 ㅜㅜ
역설신은 있습니다(...) 사실 저 전쟁 도중에 역설신이 강림해서 세계를 말소해버리셨기 때문에 한 번 멘붕을 했죠(......)
자유 발트 만세!
리가 만세! 라트비아 만세! 자유 발트 만세! 독일계 발트인 만세! 그리고 대독일 만세!
이거 무슨모드인가요? 지도색이 좀 다른거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