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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와의 악연>
- 바실리 3세의 초상 -
1505년 11월. 이반 3세가 죽고 그의 아들 바실리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다. 그는 대공위를 얻기 위해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아버지와 투쟁을 벌이면서, 겨우겨우 후계자의 자리를 보장받았었다. 즉 어찌 보면 리투아니아에게 신세를 좀 진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대공이 되자 리투아니아는 경쟁자였고, 쫓아내어야 할 대상이었다. 바실리는 리투아니아와 전쟁을 치루기로 결정했다.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막 즉위했던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 지그문트 1세는 리투아니아의 유력한 귀족이었던 미하일 글린스키(1)의 작위 등을 박탈하는 등 그를 견제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미하일 글린스키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반란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미하일 글린스키는 모스크바 공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507년 모스크바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의 거센 반격에 전쟁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양측은 이듬해 무조건적인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글린스키는 모스크바로 도주했다.
- "스몰렌스크는 이제 이교도들에게서 해방될 것이다!" -
하지만 1512년, 모스크바는 다시 한 번 리투아니아와 전쟁을 벌였다. 글린스키는 안내역으로 같이 종군했다. 신성로마제국 역시 폴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모스크바와 동맹을 맺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주 목표는 스몰렌스크였다. 모스크바군은 1513년의 공격에서는 리투아니아의 원수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2)의 반격으로 후퇴했지만 이듬해인 1514년 8월, 몇 주 간의 공성전 끝에 모스크바는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3)
- "어서와. 후사르 제대로 상대하는 건 처음이지?" -
승기를 잡았다 싶었던 모스크가 군대는 바로 벨로루시 지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러자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가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막기 위해 진격했다. 9월 8일, 양측은 오르샤에서 충돌했다. 전투 초반, 리투아니아 기병대(4)가 러시아측 전열을 공격하다 말고 후퇴하자, 당시 모스크바 군을 지휘하던 이반 첼랴드닌은 모든 기병 전력을 투입하여 이들을 추격했다. 하지만 추격하던 기병들은 곧 리투아니아군의 대포들이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과 후퇴하던 리투아니아 후사르들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속임수였다! 결국 이반 첼랴드닌은 후퇴를 명령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에게 추격당했고, 결국 총사령관 이반 첼랴드닌을 비롯, 상당수가 포로로 잡혔으며, 또 다수가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훗날 이 전투는 오르샤 전투로 불리게 된다.
바실리 3세는 충격에 빠져 붙잡힌 포로들을 석방시킬 필요도 없다며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반대로 리투아니아는 완벽하게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데보르사 전투에서의 대패를 완벽하게 설욕한 리투아니아는 반격을 개시해 몇몇 도시들을 탈환했다. 하지만 곧 겨울이 찾아왔고, 스몰렌스크 탈환에는 실패하였다. 다만 이 전투를 보고 신성로마제국은 전의를 잃고 폴란드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4년 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시 한 번 공세에 나섰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폴로츠크에서 리투아니아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전쟁은 간간히 약탈만이 벌어지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1521년 경 리투아니아가 크림칸국, 카잔 칸국과 동맹을 맺고 대대적인 공세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양 측은 1522년에 스몰렌스크를 모스크바에 할양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러시아의 통일>
이반 3세는 리투아니아와 전쟁을 벌이는 한편, 러시아를 통일시키는 작업에도 집중했다. 이반 3세가 대부분의 공국들을 합병하기는 했지만 아직 프스코프 공화국, 라쟌 공국 등 일부 공국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위대한 러시아는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
먼저 이반 3세는 군사적 압력을 가해 프스코프를 1510년에 합병했다. 이후 1513년에는 볼로콜라므스크를 합병했다. 그리고 1520년에는 라쟌 공 이반 이뱌노비치를 모스크바로 초대한 후 크림 칸국과의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워 체포했다. 그러다 이듬해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 공국을 습격하는 틈에 라쟌 공 이반이 리투아니아로 도주하자, 라쟌 공국도 합병해버렸다. 이반은 리투아니아로 도주한 후 리투아니아 군대의 힘을 빌려 라쟌을 탈환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노보고로드-세레스크마처 1522년에 합병되면서 러시아계 국가는 이제 모스크바 대공국만 남아있게 되었다. 러시아가 통일된 것이었다.
한편 그는 카잔 칸국 문제에도 신경을 썼다. 원래 카잔 칸국은 모스크바의 속국이었지만 무하마드 아민이 이반 3세가 죽고 바실리 3세가 즉위하는 틈을 타 모스크바 군대를 무찌르고 독립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무하마드 아민은 1518년에 죽었고, 다시 카잔 칸국이 계승 분쟁에 휘말리자, 이반 3세가 개입하였던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의 괴뢰국이던 카시모프 칸국의 칸 샤 알리를 카잔 칸국의 칸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우호관계였던 크림 칸국과 대립, 전쟁을 벌이게 되기는 했지만 어찌 됬든 그는 샤 알리를 카잔 칸국의 칸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 "우리가 속국이라니! 우리가 속국이라니!" -
그러나 곧 크림 칸국이 카잔을 침공해 샤 알리를 몰아내고 칸의 동생인 사힘 기레이를 카잔 칸국의 칸으로 앉혀놓았다. 카잔 칸국과 크림 칸국의 군대는 곧 모스크바 대공국을 휩쓸었다. 다행히 크림 칸국의 칸이 노가이족에게 피살되자, 사힘 기레이는 크림 칸국으로 가야했고, 이반 3세는 샤 알리의 동생 잔 알리를 다시 카잔 칸국의 칸에 앉힐 수 있었다. 이렇게 카잔 칸국은 이반 3세의 나머지 치세동안 다시 모스크바의 속국이 되었다.
<바실리 3세의 말년>
바실리 3세는 내부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보야르들과 충돌이 벌여졌는데 그는 교회와 제휴하여 보야르들의 위협을 막아냈다. 교회와 바실리의 밀착관계는 1521년에 벌어진 한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는데 당시 러시아 총대주교는 이반 3세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모든 귀족들을 파문해버리는 짓을 저질러버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몇몇 보야르들이 이반 3세에게 반항했고, 바실리 3세는 그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토지를 몰수했다.
그런데 보야르들은 뜻밖의 사안에서 바실리 3세의 편이 되었다. 바로 이혼 문제였다. 사실 바실리 3세는 1505년 솔로모니아라는 여성과 결혼했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다. 솔로모니아는 아이를 가지려고 성지 순례도 다녀보고 마법에도 의존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1525년에 46세가 된 바실리 3세는 조바심이 났다. 그에게 동생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동생들에게 후사를 맡길 생각이 없었기에 얼른 아이를 봐야 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는 슬슬 이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니가 헨리 8세냐! 애 못 낳는다고 이혼 시키다니!" -
귀족들, 즉 보야르들은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반대하였다. 다행히 총대주교는 바실리 3세를 지지했고, 원칙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특별히 이혼을 허가해주었다. 솔로모니아는 수녀원에 유폐되었다.(5)
- "남편이 너무 늙었네... 그래도 뭐 한 나라 군주의 아내면 괜찮지. 흐흐흐" -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바실리 3세는 미하일 글린스키의 조카딸이며 아직 10대인 엘레나 글린스키와 결혼하고자 했던 것이다.(6) 귀족들은 그녀가 카톨릭교도라며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혼식은 강행되었고 둘은 결혼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도 아들이 생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보야르들은 바로 이를 두고 신께서 결혼을 반대하신 거라고 수근댔다. 그러나 1530년에 아들인 이반이 태어났고, 3년 후에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기는 했지만 둘째인 유리도 낳았다.
그러나 자식이 생긴 기쁨을 바실리는 오랫동안 만끽할 수 없었다. 1533년 말엽, 이반 3세는 사냥을 하다가 오른쪽 엉덩이에 난 종기가 도졌고, 병세가 위중해지고 말았다. 그는 11월 경 발람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수도사가 되었지만 한달 만에 죽었다. 아직 어린 3살의 이반이 대공이 된 것이다. 이반의 편에는 그나마 노회한 정치인인 어머니의 삼촌 미하일 글린스키와, 아직 청춘이고 어린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키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공국에는 바실리 3세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찬 보야르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제3의 로마>
이 쯤에서 잠시 당시 러시아의 사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반 3세 편에서 다룰 것들 중 일부가 빠져버리기도 했기 때문에 안 다룰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먼저 교회 문제였다. 이반 3세 당시 교회는 꽤 혼란스러웠다. 교단의 권위에 도전하는 종파들이 속속 생겨난 것이었다. 그 중 유대교파와 비소유파가 골칫거리였다. 그나마 유대교파는 쉽게 정리할 수 있었지만, 비소유파는 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 "수도자가 땅 같은 걸 소유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비소유파는 척박하고, 정교회가 막 선교되기 시작한 모스크바공국 동북부 지방의 수도원들에서 비롯되었다. 닐 소로스키란 인물이 중심이 된 이 종파는 볼가강 동쪽에서 온 자들로 지칭되었다. 이들은 신비주의적이었으며, 수도원과 교회가 토지를 소유해서는 안 되며 국가 권력과 교회가 분리되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소유파는 수도원의 토지 소유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국가 권력과 교회의 융합을 주장했다. 이 두 파벌은 엄청나게 대립하였다. 이반 3세의 경우 수도원의 토지를 탐내어 비소유파를 지지했었지만, 그의 아들 바실리는 국가 권력이 교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유파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비소유파의 주장에도 나름 일리가 있었고 그들의 지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비소유파가 이단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비소유파의 정신적 지주 닐 소로스키는 시성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농노 문제였다. 16세기 무렵 서양의 일반적 농노제는 일종의 쇠퇴 현상을 겪고 있었고, 적어도 농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정 반대였다. 원래 러시아 자체가 땅이 워낙 넓었기에 러시아 농민들은 농토의 지력이 쇠하면 다른 땅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농사를 짓는 방식을 주로 썼는데 이는 지주들에게 불만거리가 되었다.
- 유리의 날에 길을 떠나는 농민 -
거기에다가 안 그래도 평민층보다는 대공의 권력이 강했던 북동부 지역의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점차 농민들, 특히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서 경작하는 농민들-사실상 농노-들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1497년. 즉 이반 3세 시절에 편찬된 수베드니크란 법전에서는 성 유리의 날(7)을 전후한 2주 정도만 농민들이 지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이동권을 제한하였다. 이는 훗날 점차적으로 강화되어나갔다.
- 러시아의 문장. 쌍두독수리 문양은 보통 황제의 문장으로 여겨졌다. -
그리고 이반 3세~바실리 3세의 통치기에 이르는 동안 러시아의 정체성은 강화되어갔다. 주목할만한 건 이 무렵 들어와 러시아 내에서는 소위 '제3의 로마'라는 주장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잔틴 제국이 망하고, 모스크바 공국을 제외한 주요 정교회 권역이 오스만 제국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에게 합병되거나 속국이 되고, 제대로 된 정교회 국가가 모스크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반 3세가 비잔틴 제국의 공주 조에와 결혼하자, 류리크 가문이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이며, 따라서 모스크바(=러시아)가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라는 논리는 확고해졌다. 거기에 두 사람 사이의 자식인 바실리 3세가 모스크바의 군주가 되었으니 이 논리는 더더욱 잘 먹히게 되었다.
이 논리는 1510년 프스코프의 수도원장이 바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주 잘 드러나는데 수도원장은 편지에서 '초대 로마 교회는 이단자(카톨릭 교회)에게 망했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교도에게 망했으며, 세번째 로마가 새로이 서 있다. 4번째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것도 바실리 3세의 기독교 제국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 제3의 로마 이론에 선전된 모노마흐의 모자. 그런데 정작 모노마흐는 이 모자를 쓰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거기에다가 이 무렵에 생겨난 또 다른 전설이 이 논리를 뒷받침하기 시작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초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기 동생 프루스를 비스툴라 강 유역의 지배자로 보냈고, 그 동생의 후손이 류리크이며, 류리크의 후손인 모노마흐가 외할아버지인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서 러시아의 왕관이 될 모노마흐의 모자라는 것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실제 모노마흐의 왕관은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후 이반 1세에게 킵차크 칸국에서 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모스크바가 비잔틴 제국의 인정을 받은 후계국가라는 논리를 증명해줄 도구로 사용된 것이었다. 이렇게 이반 3세~바실리 3세의 통치기간 적립된 논리들은 이반이 성인이 된 후 차르를 칭하게 될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1) 그는 칸 옹립자 마마이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마마이가 살해당할 때 그의 아들 중 한명이 리투아니아로 도망친 후 카톨릭으로 개종해 비타우타스를 섬겼는데 그 후손이 글린스키 가문이었다고 한다.
(2) 놀랍게도 그는 정교회 신자였지만, 순수히 능력만으로 리투아니아 공국의 원수(헤트만)자리에 올랐었다. 이반 3세 때의 전쟁 때 포로로 잡혔었지만 자력으로 탈옥한 전력도 있었다.
(3) 다만 이 과정에서 글린스키와 불화가 생겼고, 글린스키는 바실리 3세를 배신하려다가 투옥되었다.
(4) 이들은 후사르였다. 다만 훗날의 윙드 후사르들은 아니고, 아직 개량되기 이전의 후사르들이었다.
(5) 러시아의 전설에 따르면 수녀원에 유폐된 지 얼마 후 솔로모니아는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코사크족 사이에 섞여 살면서 로빈후드와 비슷한 의적으로 살아갔다고 한다.
(6) 덕분에 미하일 글린스키는 12년 만에 석방된다.
(7) 러시아 달력으로 11월 26일경.
첫댓글 중간에 바실리3세와 이반3세가 약간 혼동이 되어있는것 같은데 아닌가요???
켁.... 수정하겠습니다.
글린스키, 슈이스키... 성이 어째 폴란드 사람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군요.
이제 드디어 그분인가요..
보야르들이 어린 뇌제에게 막장짓을 한게, 어리다고 얕보아서 그럿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유도 있었군요
한2~3편 후면 최전성기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도 볼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