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법조
김명수 대법원장의 상고심 개선안...법관들이 “쇼”라고 하는 이유
[논설실의 뉴스 읽기]
상고심 개선안 실현 가능성 거의 ‘0′
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입력 2023.03.24. 03:00업데이트 2023.03.24. 08:22
https://www.chosun.com/national/court_law/2023/03/24/LMYHDM7U2VBBTACGMWZITXRR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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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심 개혁은 사법부의 해묵은 과제다. 대법관 한 명이 지난해 처리한 사건이 4036건이었다. 휴일 없이 매일 11건가량 처리했다는 의미다. 정상이 아니다. 대법원은 최종심으로서 당사자의 권리를 신속하고 충실하게 구제하고, 중요 사건에서 법적 가치 기준을 제시하는 정책 법원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사건 홍수에 떠밀려 두 가지를 다 놓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한두 해 된 문제도 아니다. 대법관 1인당 처리 사건이 3000건을 넘어선 게 2010년이다. 이를 해결하려고 역대 대법원장들이 여러 차례 상고심 개혁을 시도했지만 다 실패했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지난 1월 상고심 개선안을 발표했다. 대법원이 심리가 필요한 사건을 선별하는 ‘상고 심사제’를 도입하고, 사건 처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법관을 4명 증원하자는 것이 골자다. 취임사에서 상고심 개혁을 핵심 과제로 꼽은 지 5년 만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쇼에 불과하다”는 법관이 적지 않다. 어느 부장판사는 “판사들조차 아무 관심이 없다”고 했다. 변호사 업계 반응도 비슷하다. 그간 상고심 개혁안이 나올 때마다 내용을 놓고 논의가 분분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반응이 나온 적은 없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시기 문제다. 사실 이번 상고심 개선안은 새로울 게 없다. 상고 심사제는 대법관들이 상고 사유를 인정하면 본안 사건을 심사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심사 없이 기각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법원은 중요한 법적 쟁점을 담은 사건을 심리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취지다. 과거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고등법원에 ‘상고 심사부’를 둬 상고심 재판이 필요한 사건을 거르겠다는 방식과 큰 틀에서 차이가 없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은 6년 임기 중 9개월을 남겨둔 지난 1월에야 개선안을 발표했다. 상고심 개편은 논란이 많은 사안인데 그의 임기 중 이를 성사시키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상고심 개선은 법을 바꿔야 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이 오는 9월 퇴임하기 때문에 후임 대법원장 인선 절차가 적어도 7월쯤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동력을 살릴 기간이 반 년도 채 안 돼 입법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법조계 인사들은 말한다. 고법부장 출신 변호사는 “상고심 개혁을 위해 국회를 움직이려면 여론도 뒷받침돼야 한다”며 “정말 의지가 있었다면 임기 초부터 강하게 추진해야 했다”고 했다.
추진 방식을 놓고도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은 법률안 제출권이 없기 때문에 그동안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법안은 의원들을 설득해 의원 입법으로 추진하거나 정부 입법으로 해결했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은 ‘입법 의견’을 국회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상고심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에서 개선안을 검토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입법해달라는 것이다. 법원조직법에 그렇게 할 수 있게 돼 있지만 대법원이 이런 식으로 입법을 추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국회가 입법을 안 해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원 내에서도 “사실상 국회에 공을 던진 것인데 국회가 해주겠느냐”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은 상고심 개혁안으로 ‘상고 법원’을 추진했다. 상고심 사건 중 단순 사건은 상고 법원이,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판례를 바꿔야 하는 사건은 대법원이 맡는 내용이다. ‘양승태 사법부’는 의원들을 직접 설득해 여야 의원 168명이 의원 입법으로 이를 발의했지만 그 법안도 청와대 등의 반대에 막혀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해도 성사 여부가 불투명한데 입법 의견이라는 형식으로 국회에 맡겨 버리면 되겠느냐는 것이다.
실제 국회는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한다. 대법원이 입법 의견을 제출한 지 석 달가량 지났지만 여야 간에 이와 관련한 논의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사안을 논의해야 할 법사위 의원들은 입법 의견 서류도 못 봤다고 했다. 법사위 여당 간사인 정점식 의원은 “대법원이 상고심 개편을 관철하고 싶었으면 입법 의견 내기 전에 나와 민주당 간사에게 설명이라도 해야 했는데 그것도 없었고, 입법 의견 낸 이후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대법원이 입법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 대법원장은 왜 상고심 개선안을 던진 것인가.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는 “사법 개혁도 지지부진하고 여러 비난에 휩싸인 김 대법원장이 뭐라도 했다는 걸 남기려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어차피 안 될 줄 알면서 대국민용으로 던진 것”이라는 얘기다.
[대법원 재판의 불편한 진실]
사실상 대법관 단독 재판, 사건당 1분 30초 합의… 최근엔 서면 합의까지
상고심 사건 수 너무 많기 때문… 법조계 “방치할 상황 아냐”
상고심 개혁은 ‘김명수 사법부’에서도 사실상 물 건너갔지만 그대로 방치할 상황은 아니라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파행에 가까운 지경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황을 알려면 대법원 구조부터 파악해야 한다. 우리 대법관은 대법원장 포함 14명이다. 그런데 대법원장은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 합의체(전합) 재판에만 들어가고 법원 사무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대법관 12명이 4명씩 소부를 3개 만들어 거의 모든 사건을 심리한다. 전합은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주요 판례를 바꿀 때만 열린다. 보통 한 해 평균 20건을 넘지 못한다. 나머지 99.9%의 사건이 소부에서 처리된다.
그런데 사실상 소부의 사건 처리는 대법원에 올라온 새 사건을 검토하는 ‘신건조(新件組) 재판연구관’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법관의 판단을 돕는 역할을 하는 재판연구관은 보통 법관 경력 14~20년 차 판사다. 이들이 기록을 검토해 사건 처리 방향을 담은 보고서를 주심 대법관에게 올리는데 그들의 의견과 동일하게 처리되는 비율이 90%를 넘는다고 한다. 사실상 대법관 대신 재판연구관들의 재판처럼 이뤄지는 것이다.
물론 대법관들이 ‘합의’ 과정을 거치긴 한다. 같은 소부에 속한 대법관 4명이 2주에 한 번 모여 각자 100건, 총 400건 남짓 되는 사건의 결론을 논의한다. 하지만 각자 자기 사건만 들고 합의에 들어가다 보니 다른 대법관 사건은 당일 목록 형태로 보는 게 전부다. 돌아가며 쟁점과 결론을 간단히 말하고 이의 제기가 없으면 합의로 간주하는데 “1건 합의에 허용되는 시간은 1분 30초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박시환 전 대법관이 퇴임 후 쓴 논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 짧은 시간에 주심 대법관이 미처 보지 못한 법적 쟁점을 다른 대법관이 잡아내지 못하면 결론은 거기서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법원 재판이 “대법관 한 명의 단독 재판” “재판연구관들의 재판”이란 말이 나온다. 당사자들은 여러 대법관이 자기 사건 기록 다 읽고 판단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판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이를 “대법원 재판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했다.
별도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 불속행(심불) 사건은 더하다. 주심 대법관이 “심불로 처리하겠다”고 하면 다른 대법관들이 의견을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내용도 잘 모르는 상태로 합의에 들어가 짧은 시간 안에 이의을 제기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더 심각한 것은 몇 년 전부터 대법관들이 소부 합의 때 중요하지 않은 사건은 아예 설명하지 않고 서면으로 합의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이전엔 대법관마다 100건 남짓 되는 사건을 간단히 설명이라도 했는데 시간을 줄이기 위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사건은 서면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소부에 속한 네 대법관이 합의 전 이렇게 돌리는 서면이 각자 30건가량 된다고 한다. 결국 합의 전에 보고서 총 120건가량이 이런 식으로 회람되는데 이를 제대로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면으로 돌리는 사건은 주심 대법관이 심불로 처리하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대법관들은 안 보고 질문도 안 한다는 것이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는 “이런 상황은 기본적으로 사건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며 “이를 해결하려면 대법원이 권리 구제와 정책 법원 기능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심리불속행
형사 사건을 제외한 상고 사건 중 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건은 별도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 상고 이유에 관한 주장이 헌법이나 법률 또는 중대한 법령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대상이 된다. 대법원이 상고 여부를 결정하는 상고허가제가 1990년 폐지된 뒤 1994년에 도입됐다. 하지만 심리불속행 기각의 경우 이유가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당사자나 변호사들의 불만이 큰 상태다. 지난해 대법원에 올라온 민사 본안 사건의 69.4%가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처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