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은 그렇게 만나다.
어느 시상식 자리 뒤풀이 아니면 총회 뒷자리였을 것이다. 찻집 겸 호프집이었는데 우리는 입구에서 보아서 오른쪽 다섯 테이블 가량을 붙여 놓고 앉았다.
나는 입구 가까운 쪽 의자에 앉아 있었고 마흔 이쪽 저쪽 이었을 강정규 선생님은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서너 자리 건너의 내 오른쪽에 앉아 계셨다. 숙인은 강정규 선생님과는 대각선으로, 떨어져 있긴 해도 나와는 거의 마주 보게 앉았다.
어두운 벽을 배경으로 숙인은 앉아 있었는데, 나로서는 숙인과의 첫 번 만나는 자리였다. 하얀 얼굴에 가늘지 않은 검은 뿔테 안경에 어깨까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었다. 옷은 약간 어두운 빛깔의 정장 차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구는 차, 누구는 맥주 또는 호프를 마시는 등, 열 명 안팎이 모인 꽤 편안한 자리였는데, 나는 어렵사리 낯도 익히기 전의 숙인에게 나이를 물었다.
“아마 스물일곱일 걸.”
숙인 대신 강정규 선생님께서 당신과 열두살 차이로 같은 뱀띠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이미 한 아이의 엄마로 숙인이 나보다 퍽 어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네 살이 아래였다.
그러그러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짐짓 친하게 지낼 것을 지레 약속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내 친정 큰집이 있는 가평에도 함께 다녀왔고 돌아가신 내 친정어머니의 칠순잔치에 와준 유일한 동료이자 후배였다.
좀 더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숙인의 결혼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신부측 우인 대표로 청첩장에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전에 담장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쳐 목발을 짚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큰 키에 목발이라니! 게다가 혼례식을 치루게 된 장소는 서울이 아닌 정약용 생가 근처 남한강 기슭의 잔디밭이었다. 신부측 우인 대표가 목발 좀 짚었기로 불참할 수는 없었다. 신랑은 건장한 체격의 호남이었다. 숙인보다 여섯 살이 위였다. 부부는 서로 끔찍히 이끼며 사랑했는데, 특히 남편인 김원조 선생님의 숙인의 글쓰기에 보내는 애정과 찬사는 비교할 데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이 무지몽매한, 외곬수의 남편이 자기 사람인 아내에게 보내는 편견으로 무장된 찬사였다면 우스운 일일 것이나, 김원조 선생님의 숙인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빈 이야기가 아니었다.
말하지면 누구에게도 독서량이 뒤지지 않을 숙인이 인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숙인을 보면서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몰아서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좋은 책 읽기’ 임을 깨닫게 된 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다.
어느 때인가 교보 음악 씨디 코너에 함께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음악에 대한 조예 또한 깊어서 새삼 놀라웠다. ‘지속적인 질 높은 책읽기와 고전음악을 귀에 젖도록 들어 인격을 고양시킬 것.’ (속으로 놀란 눈을 뜨며 내가 내게 다짐해 놓은 일이다)
2. 나도 숙인이도 나무다.
나는 천성적으로 나부대고 나서는 편에 속한다. 겉모습을 보자면 성질이 느긋할 듯 보이는데 그렇지 못하다. 양은 냄비다. 양은 냄비라서 어디 한 곳 느긋하게 붙어있지 못하고 잘도 돌아다녀 처음 숙인의 새 살림집에 열흘에 한번 꼴로 들러 참견을 늘어놓았다.
남편인 김원조 선생님이 담근 양파 물김치에 국수를 말아 주어 얻어먹었고, 매운 고춧가루를 풀고 청양고추를 섬뻑섬뻑 썰어넣은 조깃국을 얻어 먹은 것은 물론, 개울물가로 놀러가 라면을 함께 끓여먹기도 했다.
숙인이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얘기다. 나는 이사하기 전날 이삿짐 싸는 것을 도와주러 가마고 했다. 이튿날 처음으로 숙인의 이사를 돌봐주려 오신 숙인의 친정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어머님은 나를 보시자 말씀하셨다.
“뭐, 우리 숙인이와 별 다를 게 없네.”
어머니는 이삿짐 거들어 주러 오기로 한 숙인의 선배인 내가 힘깨나 쓸만한 사람으로 지레 생각하셨던 것 같았다.
“호오, 그래도 어떤 일이든지 다 잘하는 걸요.”
어머님이 내가 숙인과 별 다름 없음을 말씀해 주셔서 내심 기뻤다. 그다지 책도 많이 읽지 않은 나를, 글을 써 보아야 매양 비문에 오문 투성이인 나를 겉모습으로지만 숙인과 다를 것 없다고 말씀해 주시다니.
그날 나는 두꺼운 흰 면직물 스커트에 붉은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 아래로 드러내진 종아리, 걷어부친 블라우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여간 앙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건드리면 툭 쓰러질 판이었을 것이다.
양은 냄비 나는 늘 잔 근심이 많곤 했는데, 숙인은 말할 것도 없고 남들거의 대부분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근심거리란 근심거리는 모두 내게 몰려와 있는 듯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나는 숙인에게 근심 같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남들이 다 아는 일을 모르는 경우가 잦다. 꼭 물어서 대답을 듣고서야 깨닫는 경우다) 숙인은 먼저 하하, 웃기부터 했다.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사람들 보면 모두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이는데?”
“그건 겉으로 표시를 안 할 뿐이어서야.”
“뭐, 숙인씨만 해도 뭐든 걱정하는 말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하하, 나도 걱정거리 많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숙인의 설명을 듣고 나서 부터 나는 마음에 근심 한 가지를 덜어냈다. 무언가 하면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근심과 걱정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못 견딜 만큼 힘들어 하지는 않게 되었다.
사람들이 ‘내 발바닥에 점 있어.’ 라고 짐짓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 것처럼 마음에 가득한 근심이나 걱정을 이루 말로 다 표현해내지는 않는다는 것. 나이는 네 살이 아래여도 ‘썩 훌륭하게 보이는 숙인’ 또한 바람이 거칠게 불면 크게 흔들리고 가벼이 살랑이면 나뭇잎을 가볍게 팔랑이는 다를 것 없이 같은 나무인 점!
3. 너는 거기, 나는 여기
숙인도 나도 이제는 나이가 좀 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이 오십이넘으면서 우리는 둘 다 말은 좀 하고 살기로 작정한 양(물론 나는 좀 더 일렀다)한 달에 두어번 꼴로 만나 주섬주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떠드는 편, 숙인은 잠잠히 듣고 있거나 이따금 내 싱거운 너스레에 홍소를 터뜨린다.
한 달에 두어 번 만나 둘이 하는 일은 영화를 보는 일인데, 볼만한 영화를 선별하는 일은 숙인의 몫이다. 숙인과 함께 보는 영화는 대개 내 수준에 맞추어져 있어 고마운 한편 미안하기도 하다. 내가 본 영화 대부분이 숙인과 함께 본 것으로 영화를 본 뒤 먹었던 점심 또는 저녁 메뉴까지 함께 연관되어 기억되기 일쑤이다.
식사 뒤, 한가하게 차 한 잔을 함께 마시는 여유라니. 그다지 나누는 말이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나 올려다보다가 여울여울 구비치는 강물(강변역 씨지브이에서 영화 관람 경우)이나 내려다 보다 이제 그만 각자의 소굴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일어서곤 한다.
“우리 팔십 넘도록 살아 있자. 그때도 지금처럼 만나, 이미 늙은 나이여서 고개를 옆으로 벌벌 흔들면서 영화도 보고 밥도 같이 먹고 차도 마시자꾸나.”
광화문 근처 시네큐브애서 영화를 보고 돌아 나오는 어스름 저녁, 타야 할 차를 기다리는 동안, 눈 앞으로 지팡이를 짚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덜 큰, 안경잡이 두 백발이 떠올리면서 오오, 기쁨 백배!
그때면 이제껏 털어놓지 못한 비애 같은 것, 눈물 같은 것, 한숨 같은 것들을 서로 조금 더 소상히 털어놓을 수도 있겠다.
늘 좋은 글을 쓰는 나의 훌륭한 후배 숙인!
내 원래 말이 많아 쓸 말이 별로 없어 보이되, 위의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님을. 줄무늬건 꽃무늬건 무늬가 색색 그려져 있는 옷보다 단색의 은은한 부라우스 또는 남방이 더 잘 어울리는 숙인. 흰 이를 드러낸 웃음이 고요한 숙인.
숙인 얘기를 쓰기로 한 바이면서 의도 밖으로 나와 숙인과의 친교에 대해 더 많이 늘어놓은 듯 해서 미안하고도 어색하며 쑥스럽다. 마무리를 짓자면 다른 모습이 아닌, 한결같은 지금의 모습으로 숙인은 거기, 나는 여기 지금처럼 그렇게 있고 싶다.
오늘 당장 오후 한 시에 함께 영화를 보기로 해 놓고 ‘오늘 여엉 영화 볼 기분이 아니야. 다음에 보는 게 좋겠어.’ 약속을 깨기로 해도 기분 언짢을 일 없는 편안함이라니.
첫댓글 계간지 <시와 동화> 이번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