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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난 名문장] 애도의 기록
“집에서 나오려면 그 수밖에 없었어요.”
―제프리 유제니디스(Jeffrey Eugenides) ‘버진 수어사이드(Virgin Suicides)’ 중
*<버진 수어사이드(Virgin Suicides)>는 1999년 <처녀 자살 소동>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버진(Virgin)은 처녀(處女)를 뜻하고, 수어사이드(Suicides)는 자살(自殺)을 뜻한다.
그날 아침은 영국 북아일랜드에 있는 행정구와 도시 리즈번가(Lisburn 家)에 남은 마지막 딸이 자살할 차례였다. 이번엔 메리였고, 터리즈처럼 수면제를 삼켰다. 처음은 막내 서실리아였다. 하지만 서실리아가 왜 자살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작품은 리즈번가의 다섯 딸이 모두 자살한다는 결말을 먼저 밝힌 후, 이제는 중년이 된 동네 소년들이 그녀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기 위해 다시 뭉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우리’로 지칭되는 화자는 그녀들이 남긴 물품과 추억을 회상하고, 당시 이웃을 만나 자매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한다.
마을 사람들은 딸들의 죽음이 부모 책임이라고 했다. 언론은 가족의 심기는 개의치 않고 부모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흑마술, 악마주의, 자살 모방설도 유포했다. 서실리아가 떠난 후 리즈번 가족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해 갔다. 엄마는 딸들에게 금욕적이고 억압된 일상을 강요했고, 무기력한 아빠는 그 상황을 그저 방치했다. 부모는 자매들을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시켰고 주변의 편견과 배타적 시선은 가족을 점점 더 고립시켰다.
나팔바지, 장발, 마리화나, 트랜스앰 스포츠카 등이 유행하던 1970년대. 반전 운동과 히피, 흑인 인권과 성 해방, 로큰롤 등으로 저항하던 청년 세대의 저항은 10대의 치기 어린 자살 소동으로 치부된 리즈번가의 딸들처럼 인종폭동, 오일쇼크, 불황의 파도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하지만 이들 세대는 어른이 돼서도 그 시절을 애도하고 기록한다. 럭스의 말처럼 리즈번가의 다섯 자매는 살기 위해 죽었다. 어른의 억압, 주변의 배타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소녀들을 구하지 못했던 소년들은 말한다. 우리는 그녀들을 사랑했고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퍼즐을 완성할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는 그곳에서 얼른 나오라고!
“오늘날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 유제니디스의 대표작 『버진 수어사이드』
그날 아침은 리즈번가(家)에 남은
마지막 딸이 자살할 차례였다.
이번엔 메리였고,
터리즈처럼 수면제를 삼켰다.
이십여 년 전, 평범한 마을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
“오늘날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뉴요커》)라는 평을 받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첫 장편 소설 『버진 수어사이드』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리즈번가의 십 대 소녀들이 한창 아름다울 나이에, 그것도 다섯 자매가 모두 자살해 버리고 마는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의 소설을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사건 당시인 이십여 년 전과 현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능수능란한 솜씨로 펼쳐 나간다. 유제니디스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70년대의 문화, 즉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를 작품에 생생하게 되살렸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던 기성 세대와의 갈등을 조용히 지적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 『데미안』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문제적인 성장 소설을 탄생시켰다. 『버진 수어사이드』는 1993년 출간되자마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도서관 협회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에게 아가 칸 상, 화이팅 작가 상, 해럴드 D. 버셀 기념상 등 문학계의 여러 상들을 거머쥐게 해 주었다. 1999년에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 커스틴 던스틴 주연인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해 큰 화제를 불러왔다.
한 가정에서 일어난 자살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이 이렇게 화제가 된 이유는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바꾸는 타고난 재능”(《뉴욕 타임스 북 리뷰》)이라고 평가받는 유제니디스만의 독특한 이야기 솜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제니디스는 이 작품에서 사건 당시인 이십여 년 전과 현재 사이를 교차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야기를 할 때 화자의 어조는 마치 사건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십 대 청소년의 미성숙함과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낸다. 화자로 기용한 십 대 소년들은 관찰자이기 때문에 제한적인 정보만을 습득할 수밖에 없고, 또 어린 나이와 리즈번 자매들에 대한 감정으로 인한 객관성 결여 때문에 관찰자로서의 신뢰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미숙함은 리즈번 자매들에 대해 이런저런 속단을 내려 버리는 ‘어른들’과 대조되면서, 오히려 반대로 진정성을 획득하고 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동네 어른들의 증언을 인용할 때에도, 작가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기성 세대의 어조를 소년들의 어조와 똑같은 설득력을 가지도록 생생하게 표현해 낸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작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는 얻을 수 없는 효과를 성취해 내고 있다.
그녀들은 왜 자살한 것일까?- ‘소년들’의 눈을 통해 하나하나 모이는 소문들
이 작품의 화자는 단순히 “우리”라고만 지칭되는 불특정 다수의 동네 소년들이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성적 호기심이 풍부한 이 소년들은 저마다 리즈번 자매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 어른이 된 이들이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 이유를 밝혀 내기 위해 조사에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어느 한 사람도 정확한 사실이라 할 수 없는,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찾아볼 수밖에 없게 된다. 유제니디스는 ‘이렇다’ 할 원인은 알려 주지 않은 채 ‘부모님’으로 대표되는 기성 세대와 대중 매체, 그리고 소년들의 관점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주면서 독자가 나름대로 이유를 밝혀 내도록 이끌고 있다. 기성 세대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듣는 음악이나 무신론 아니면 우리가 아직 해 보지도 못한 섹스와 관련된 도덕적 해이를 그 원인으로 생각했다.” 리즈번 가족을 비롯한 이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톨릭교도아다. 그런데 유독 리즈번 부인만은 거의 모르몬교에 가까울 정도로 청교도적인 생활 방식을 딸들에게 강요한다. 리즈번 자매들은 어머니가 《TV 가이드》에서 미리 내용을 읽어 보고 봐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프로그램만을 시청할 수 있었으며, 안전성이 입증된 책만을 읽을 수 있었고, 가슴이 파인 옷도 입을 수 없었으며, 남자애들과 어울리거나 함께 자동차를 타고 외출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집에서 나오려면 그 수밖에 없었어요.”라는 럭스의 말처럼, 이들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중 매체의 관점은 지역 신문사의 수습기자인 린다 펄에 의해 전개된다. 펄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서실리아의 죽음을 선정적인 어조로 묘사한 기사를 연재한다. 처음에는 서실리아의 죽음을 “십 대들의 자살”로 뭉뚱그려 일반화하고, 리즈번 자매들이 흑 마술이나 악마주의에 빠진 것처럼 오도하더니, 리즈번 자매들이 모두 자살하고 난 뒤에는 언니들이 서실리아를 따라 자살했다는 ‘모방 자살설’을 퍼뜨리는 데 이른다. 그리고 그녀의 기사 때문에 리즈번 자매들의 죽음은 텔레비전 방송국의 주목까지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언론의 관심을 작가는 지극히 냉소적인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리포터들은 점차 리즈번 자매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기 시작했고, 의학 전문가들과 인터뷰를 하는 대신 동네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고 다녔다. (……) 리포터들은 리즈번 자매들이 왜 자살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대신 그 애들의 취미나 우등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리포터들은 매일 밤 방송에서 새로운 일화나 사진을 소개했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들은 우리가 아는 진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고, 나중에는 리즈번 자매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본문에서
물론 한 생명도 아닌 다섯 생명의 자살에 단순히 몇 가지의 원인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퍼즐 조각을 모았지만 맞추지는 못한’ 소년들은 다음과 같은 씁쓸한 술회와 함께 자신들의 조사를 마무리한다.
「중요한 건 오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과거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렁거리는 뱃살을 하고, 그들이 영원히 혼자 있기 위해 간 방, 홀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살을 한 곳,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본문에서
1970년대 베이비 붐 세대의 아련한 추억들과 기성 세대와의 갈등
1960년생인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전후에 태어난 소위 ‘베이비붐’ 세대로, 리즈번 자매들이나 마을 소년들처럼 19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래서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이비붐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팔바지, 장발, 코르크 굽 구두, 마리화나, 트랜스암 스포츠카, 핑크 플로이드, 예스, 애비에이터 선글라스, 부츠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뿐 아니라 반전운동, 히피, 흑인 인권 운동, 여권 신장 운동, 자유, 저항 정신, 성 해방, 로큰롤, 마약 등 당시의 기성 세대들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요소들 또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사실상 소설 속 소년, 소녀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실천에 옮기기엔 아직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는데도 기성 세대들은 자신들의 편견을 그들에게 투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이 가장 극단으로 치달은 것이 바로 리즈번 자매들의 어머니인 리즈번 부인이었다. 하지만 유제니디스는 이에 대해 작품 속에서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는다. 단지 담담한 자세로 다섯 소녀의 자살을 간접적으로 애도할 뿐이다.
「〈버진 수어사이드〉는 유머러스한 표면 깊숙이 자살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족의 자살이 가정 내의 또 다른 자살을 불러온다는 설정은 때로 현실적일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섬찟하기도 하다. 이 작품이 서실리아의 자살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서실리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치더라도 나머지 자매들의 자살을 미리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가상의 소설이지만 두고두고 숙제처럼 마음에 남는 질문이다.」 「작품 해설」 중에서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페이소스이자 애도
〈버진 수어사이드(Virgin Suicides)〉의 배경인 디트로이트는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1920년대부터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번성한 디트로이트는 195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그러나 흑인과 유럽 이민자, 중동인들의 유입도 많아서 1967년에는 대규모 인종 폭동으로 큰 고역을 치렀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 오일 쇼크가 터지자 미국 자동차는 일본과 독일 자동차에 밀리게 되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업계는 큰 타격을 입는다. 불황을 맞아 공장이 문을 닫고 회사들이 도산을 하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장면들이 소설 속에 자세히 그려지고 있다. 작품에는 서실리아의 자살이 처음에 주목받지 못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자동차 공장들의 대대적인 감원 때문에, 불경기의 파도 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절망한 영혼들의 소식이 거의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차고 안에서 시동이 켜진 차와 함께 발견된 사람들도 있었고 (……) 동반 자살 사건만이 신문에 실릴 수 있었고, 그것도 삼 면이나 사 면이 고작이었다.」 본문에서
지역 경제가 침체하자 많은 백인들이 빠져나갔고 이와 함께 세수와 시장도 크게 축소되었다. 과거 번영을 누렸던 디트로이트는 2010년 미국에서 열여덟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조사되었고, 어떤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한다. 한때는 대중 음악의 원천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안타깝게도 사회 양극화가 심해 범죄율이 높은 도시로 악명이 높다. 리즈번 자매들이 죽은 시기는 공교롭게도 디트로이트의 경기가 급속도로 나빠지던 때와 일치한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소녀들이 죽으면서 동네도 따라 죽어 버린 것처럼 느낀다. 돌아갈 수 없는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리즈번 자매들과 겹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 다섯 자매에 대한 안타까운 애상이며, 동시에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페이소스이자 애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 제프리 유제니디스(Jeffrey Eugenides)
1960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계 이민 2세인 아버지와 영국-아일랜드계 어머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83년에 브라운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1986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문예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권위 있는 문예 계간지 《파리 리뷰》에 『버진 수어사이드』의 일부를 발표해, 그해 그 잡지에 실렸던 단편 소설 중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는 아가 칸 상을 받았다. 첫 장편 소설 『버진 수어사이드』는 1993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도서관 협회(ALA)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까지 2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 작품으로 유제니디스는 1993년 화이팅 작가 상, 1995년 해럴드 D. 버셀 기념상을 수상하였으며, 구겐하임 재단과 전미 예술 재단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1999년에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소피아 코폴라 감독, 커스틴 던스트 주연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2002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 소설 『미들섹스』로 200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되었다. 2007년부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문예 창작 강의를 시작했고, 2011년에는 『결혼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으며, 2017년에는 삼십여 년간 써온 단편들을 모아 『불평꾼들』을 출간했다. 2018년에는 뉴욕 대학교 창작 글쓰기 프로그램의 종신 교수가 되었으며, 미국 예술문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 옮긴이 : 이화연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SBS, KBS 등에서 방송 작가, 번역 작가 및 리포터로 일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작품으로 『다크니스』, 『미들섹스』(공역), 『버진 수어사이드』 등이 있다.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내가 만난 名문장, ‘애도의 기록’(이정화 민음사 해외문학팀 팀장), (동아일보, 2025년 03월 24일(월))〉, 《Daum, Naver(인터넷 교보문고)》/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