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청춘이기에 아프다 고들 말합니다. 아니지요... 인간이기에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모양의 아픔이든 아픔과 부족함은 기도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있음보다 없음이 풍족함 보다 부족함이 유익이 될 때가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살아보니 사람은 어쩔 수 없더라. 뭔가 풍족하면 자고 하여 하나님 되려 하고 뭔가 부족해야 하나님을 찾고 찾습니다. 주안에서는 무언가 막히고 안되고 어렵고 아프고 춥고 배고파야 그게 소스가 되어 하나님께로 나아와 그 품에 안길 수 있으니 그게 복이더랍니다.
성경에도 보면 불임으로 인하여 오히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복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충만합니다.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리는 수고를 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눅5:5). 그러나 그날 밤은 베드로에게 인생의 최고의 날 즉 불임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만일에 고기를 한가득 잡았다면 베드로가 과연 주님을 찾았을까요? 주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했을까요? 그러므로 때때로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는 일을 만나는 일은 힘든 일이나 영적으로 보면 대단히 영광스런 경험입니다. 베드로가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는 불임을 경험했기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고 결국은 최고의 어부 전문가가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주님의 수제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위대한 종 바울 선생은 약함(가시+공격)이 많았습니다(고후12:6~9). 그러나 그로 인해 바울에게는 은혜가 떠나질 않는즉 은혜를 유지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평생을 변화는 하되 변함은 없는 주의 종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한나는 무자하였습니다.(삼상1:2). 그로 인해 브닌나는 한나를 수시로 격동시켰습니다(삼상1:6) 그렇습니다. 세상 논리로는 무자하면, 저주나 형벌 l받은 것으로 치부됩니다. 한나는 좋은 것도 웃을 일도 한나는 좋은 것도 웃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 첫째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자녀 잉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한 브닌나의 격동함 때문이었습니다.
행여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한나와 같은 격동을 겪어 본 적이 있을까요? 왜 너는 남들이 다 낳는 자식도 못 낳냐? 왜 너는 남들이 다 하는 결혼도 못 하냐? 왜 너는 남들이 다 하는 취업도 못 하냐? 왜 너는 매일 기도한다며 너의 하나님이 안도와 주느냐?
이런 송곳 같은 비아냥과 조롱을 믿는 자들로 부터 받을 때마다 우리는 무너지고 짓밟힙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향하여 그렇게 격동 시키는 대상을 향하여 분노를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한나는 브닌나의 격동을 오히려 성소를 찾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나의 차원 높고 수준이 범상치 않은 영성을 보며 강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한나가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태 치 못하게 하셨기 때문(삼상1:5)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나가 아무리 노력한들 어찌하겠는가? 이것은 한나의 잘못도 한나의 운명도 한나의 죄 때문도 아니니 어찌하랴! 하나님이 닫아 놓으신 것을 어찌 한나의 힘으로 열 수 있었읅까요? 그래서 더욱 답답했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이와같은 일을 이따금씩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일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막아 두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푸른 나무가 갑자기 고목나무가 된다든가 고목나무에서 하루 아침에 새순이 돋는다든가 이런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마다 징계하신다(히12:6) 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소힘줄 같이 질기고 질겨 꽃길만 걷고 만사가 형통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험지나 사람은 소힘 줄같이 질기고 질겨 꽃길만 걷고 만사가 형통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험지나 험로가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도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가 잘나서 그럴 줄만 알고 오만과 거들먹 거림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습적으로 불임을 허락하시죠... 그러나 불임을 주심은 불임을 끌어안고 고생하라는 뜻이 아니라 불임이라는 소스를 통해 성소로 나아와 나와 좀 만나자'라는 신호이죠... 많은 사람들은 고난이 축복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뭐가 축복인가?' 죽을 만큼의 고난을 겪어 보고 그런 말을 할까요? 고난이 축복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은혜가 축복이라는 의미입니다. 조개가 귀한 것이 아니라 조개 속에 들어 있는 진주가 귀한 것 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주의에 빠지면 위험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끝없이 하나님을 갈구해야 하고 그로 인해 주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불임이 주는 축복입니다.
당연히 실제적인 불임(태의 문이 닫힘) 또한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초자연적인 역사로 태의 문도 열립니다. 왜 그런가? 태의 문을 닫게 하신 분만이 열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마치 노아 방주의 문을 닫으신 하나님만이 노아의 문을 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과 육의 불임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며 불임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이 왜 우리의 불임을 허락하셨는지?를 영의 눈을 떠서 깨닫고 불임을 통해서 주시는 메세지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엔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차도 없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저런 불임이 있다 하더라도 한나의 영성으로 브닌나의 격동의 한계를 뛰어넘고 매일 성소로 나아가 주의 얼굴을 구하며 통곡의 영성으로 매달릴 수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성공이고 승리이며 응답이고 축복입니다.
한나가 불임이 고난과 브닌나라는 가시로 인하여 오히려 성소에 올라 하나님과 통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나의 얼굴에 수색이 사라진다(삼상1:18). 이것이 기도의 비밀입니다. 기도 후엔 얼굴 표정이 달라져야 합니다. 기도하고도 안색 이 안 좋으면 그 기도는 혼 적인 기도일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 연민도 소원성취도 단순히 기적과 해결만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기도는 기복주의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과 통 ( 삼상 1:15)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나는 통곡의 기도와 서원으로 인하여 1년후에 사무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무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께 구하여 얻었다 함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기도로 얻은) 사무엘은 얼마나 될까요? 좋은 집 좋은 배우자 훌륭한 자녀 성공 스펙 건강 좋은 차 좋은 직장 등등 아니면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수고하여 얻은 땀의 결과물인가요?
아프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다면~ 궁핍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찌르는 가시 때문에 기도할 수 있다면~ 앞 길이 막히고 안되기 때문에 성소로 나아갈 수 있다면~ 뭔가 열리지 않는 불임 때문에 주의 얼굴을 구하며 해산하는 여인처럼 부르짖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축복이니 더욱 더 주님을 바라보고 마르지 않는 눈물로 기도를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우리에게도 사무엘을 얻는 간증의 주인공이 될 뿐 아니라 반전의 기회도 돌연 찾아 올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까닭 없이 주님을 섬기고 신뢰하는 것 그것이 고차원적이고 성숙한 믿음이 아닐까요?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고난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저 사람을 안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저 사람을 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는 기도입니다.
첫댓글 꽤 긴~글을
감동깊게 읽었어요
숨쉬는동안 베푸신
주님은혜 생각하며 감사하겠습니다~
행복한 주맣 지내세요.^^
9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기뻐합니다
편안한 9월 지내세요.
첫주일을 맞아
한달내내 모든일을
주님께 맡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