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거란 오랑캐... 아니 요나라, 내가 할 말이 있어.
???
압록강이 느그들과 우리 고려의 경계야. 맞지?
그렇... 지...?
근데 압록강 인근에 성곽 쌓고 다리 만드는 건 무슨 의도에서야?
너희들 지금 장난쳐??? 당장 그만 못 둬?
그쪽 인근에 떠도는 우리 유민들 수용 목적이야...
아니, 그리고 니들도 천리장성 쌓았잖아?
?!?!?? 건방지게 지금 나한테 말대꾸한 거?!!?? ㅋㅋㅋㅋㅋㅋㅋ
정 그리 원하신다면 송과 국교 재개하니 알아서 하시고? ㅋㅋ
.......
저 고려님...
????????
국교 재개해줘서 고마워요. 고마운데...
저한테 보낸 사신들 있잖아요?...
사신들이 뭐 어때서요?
그 사람들이 저한테 * 갑자(甲子)를 썼... 더라고요... ㅠㅠ
그래도 외교문서인 만큼 연호를 써 주었다면 좋을텐데...
*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소)동파(東坡)는 이를 물리치며,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고려)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녕(熙寧 송(宋) 신종대의 연호)' 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동란섭필(銅蘭涉筆)
그리고 님 수도 개경에서 우리 사신 * 강제수색 당했다고...
아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ㅠㅠ...
*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 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동란섭필(銅蘭涉筆)
뭐 대충 잘 해결됐구만???
이걸 계속 왜 문제삼아요?
자꾸 찡찡거리면 거란이 님들 공격할 때
그냥 보고만 있을거임ㅇㅇ ㅋㅋㅋㅋㅋ
.......
고려님...
?????????
아니, 관청 창고도 맘대로 둘러보는 건 선 제대로 넘었다고 생각 안해요...?
우리나라가 (소)동파에게는 가장 잘못 보였던 모양이다. (중략) 그가 항주(杭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동란섭필(銅蘭涉筆)
답례품도 그 쪽이 바친 거에 비해 수배 이상이나 많이 받아가면서
우리나라 지형도랑 최신 역사서적까지 다 털어가는 건 뭐임???
[원우(元祐)] 5년(A.D. 1090, 高麗 宣宗 7)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 은기(銀器) 5천 벌을 하사하였다. [원우(元祐)] 7년(A.D. 1092, 高麗 宣宗 9)에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 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책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 소식(蘇軾, 소동파-蘇東坡)이, "고려(高麗)가 들어와 조공(朝貢)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아뢰니, 조칙(詔勅)을 내려 금박(金箔)만을 수매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끝내 『책부원귀(册府元龜)』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송사(宋史)』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 1) 굉장히 막대한 고려사신 접대 비용에 비해 그들이 바치는 물품은 하등 쓸모없다. 2) 그들 맞이하는 데 쓰는 공관 수리비용, 물자와 가축들을 감당할 백성들의 소요가 많다. 3) 고려가 송에서 받아간 물품들을 거란에게 다시 제공해주고 있다. 4) 고려는 겉으로는 '송을 받든다.' 하면서 정작 실리만 챙길 뿐, 심지어 송나라의 지형을 그려 가고 허실을 조사하고 있다. 5) 거란이 자기들과의 협력관계에 있는 고려와의 친교도 '트집잡을' 위험이 있다.
출처 : 『소동파집(蘇東坡集)』
ㅋㅋㅋ.......
그래서 우리 도움없이 거란이랑 다이다이?? ㅇㅋ ㅎㅎ
생각해보니까 너희 거란말고 '서하' 도 있구나? ㅋㅋㅋ
처신 잘하라고
.......
[요나라에 파견 온 고려 사신]
거란 안녕? 나 오랜만이징? ㅎㅎ
[요나라에 파견 온 송 사신]
어???!? 야, 너 우리랑 국교 맺었잖아?
상식적으로 우리 땅에서 이러는 것도... 외교적 결례 아니냐?...
뭐 ㅅㅂ
까놓고 내가 여기서 "중국이 거란보다 좋다." 말해도
현실적으로 니들이 뭐 어쩔건데? ㅇㅇ
[고려(高麗)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고려(契丹)의]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契丹)에서는] 항상, "고려(高麗)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송-宋)는 무엇 때문에 고려(高麗)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 (하지만 실체는) [고려(高麗)의] 사신이 거란(契丹)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高麗)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송사(宋史)』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옛날에 추밀원(樞密院)예방(禮房)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던 것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 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동란섭필(銅蘭涉筆)
(ㅂㄷㅂㄷㅂㄷㅂㄷㅂㄷ...)
크흠흠...;;;;;
마지막으로 고려가 이 노빠꾸 외교기조를
실현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
1019
'귀주대첩'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강의 군사강국인 요 왕조의 중심전력에 전멸적인 타격을 입힌 이후
고려의 국제위상 신장에서부터 비롯된, 120여년 간 이어지는 국가 전성기의 포문을 연 전투
이후로 고려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각 국가간의 외교 균형을 조정하는 저울추의 역할을 담당
즉 한국사만이 아닌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도 그 비중이 막대했다고 볼 수 있는 전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
* 성종 치세의 요 왕조는 심지어 국가 최전성기였다.
첫댓글 힘이 있어야...
송나라는 과도하게 무관을 내려치기도 했고
ㄷㄷㄷㄷㄷㄷ
한타싸움을 압도한 자의 여유
어이 ㅆㅂ 꼬우면 한타싸움 함더하시던지..꼽냐??어??
역시 힘이 있어야... 어이, 처신 잘하라고
말 그대로 짱먹었네요.
이런글 올라올때마다
우리나라가 진짜로 실력을 보여줫기에 가능햇다는건 빼놓고 그냥 두국가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만으로 그럴수있었다는 식으로 써있는거 아쉬웟는데 요글은 제대로 그부분도 체크해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