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오후 1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천안함 유족들이 '북한 김영철 방한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자국의 함정(艦艇)을 잃고 무슨 대승적 이해인가? 어떻게 국군 장병 죽인 김영철을 한국 땅에..."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꼽히는 북한 김영철의 방남 소식에 천안함 유족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유족들은 '대승적 차원의 이해'를 주장한 정부를 향해 "우리야말로 국가를 위해 대승적으로 8년을 참아왔는데 뭘 더 참으라는 거냐"고 울분을 토해냈다.
24일 오후 1시 천안함46용사 유족회, 천안함 예비역전우회, 천안함 재단은 서울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영철 방한에 대한 천안함 46용사 유가족과 생존 장병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날 유족들은 입장문에서 "김영철을 천안함 폭침 주범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정부의 발표는 부모, 형제, 자식을 잃고 살아가는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것"이라며 "(정부가) 대승적 차원에서 이해해달라는 말은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묻고 싶다"고 성토했다.
이어 "우리 천안함 46용사의 희생을 묻어둔 채 아무일 없었다는 듯 김영철이 방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대승적 차원 이해를 구하기 전에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선행돼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유족들은 "국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장병들의 명예를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 김영철을 두둔하고 대한민국 땅을 밟게 할 수 있나?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서도 "폭침은 국제조사단에 의해 명백히 북한 소행이라는 게 밝혀졌는데 일부 정치인들과 시민들의 삐뚤어진 시각에서 비롯돼 이념적 갈등으로 번졌다"며 "대통령이 직접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확실한 입장 표명을 밝혀 남남갈등 소재를 없애달라"고 촉구했다.
최근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김영철은 박근혜 정권 시절인 2014년 10월 15일 남북 군사회담에 북측 수석대표로 참가한 적 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서는 "판문점을 밟는 것과 한국 땅을 밟는 것은 그 무게감이 다르다. 도대체 얼마나 국민들을 우습게 아는 것인가"라고 질타했다.
▲ 24일 천안함 유족들이 '북한 김영철 방한에 대한 천안함 46용사 유가족과 생존 장병의 입장'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 앞 광장을 찾은 모습.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유족들은 바닥에 앉아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럴 수 있나"고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뉴데일리 임혜진
▶ 청와대 항의 서한 전달 과정..."우리를 얼마나 하찮게 보면 이러나, 비참하다" 울분 토한 유족들
광화문 기자회견을 마친 유족들은 '북한 김영철 방한 철회 촉구' 서한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 분수대로 행진했다.
천안함 유족들의 행진을 지켜보던 일부 시민들은 기자들을 향해 "이 나라는 (북한과 정부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언론들 때문에 망할거다. 언론들이 제발 기사를 똑바로 써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초 유족 측은 청와대에 공식 항의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었다. 일반 당직근무자인 청와대 국정상황실 행정관이 나와 항의 서한을 전달받으려 하자 유족들은 "책임자가 나와 서한을 받아달라"고 했다.
청와대 측은 유족회를 상대로 "일부 유가족만 청와대 안으로 들어와 비서실장을 접견하시라"고 했고, 유족 측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소 국장급의 책임자가 나와 기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서한을 받아달라"고 요구했다.
▲ 24일 천안함 유족회가 북한 김영철 방한 철회를 촉구하기 위해 청와대를 찾았다.ⓒ뉴데일리 임혜진
1시간가량 이어진 기다림 끝에 국장급인 청와대 통일정책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 현장에 나와 "유족들이 뜻을 잘 전달하도록 하겠다"며 항의서한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유족들은 "문재인 정부는 천안함 유가족을 발바닥의 때 만큼도 안 여긴다"며 "달랑 행정관 한 명 내보내서 항의 서한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충남 부여에 사는 어머니 윤씨(76)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민씨(48)는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나는 군대를 1번 더 가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김영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국방의 의무를 다 한 것이 창피할 정도"라고 통탄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천안함 폭침으로 동생 고(故) 민평기 상사를 잃었다.
또 다른 유족은 "여기 대부분 각자 지방에서 올라온 유족들이다. 우리같은 시골 사람들도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만 모를 수가 있나"고 되물었다.
▲ 이성우 천안함 유족회 회장.ⓒ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장병들 명예에 누가 될까, 8년 간 어떤 요구도 안했건만..."
이성우 유족회 회장은 "우리가 지난 8년 동안 새끼를 가슴에 묻고 정부에 무엇을 요구했나. 단순히 명예만 지켜달라는게 다다"며 "물론 지난 정권에서도 딱히 유가족을 특별 대우해 준 것은 없었지만 이번 정부는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회장은 "문재인 정부가 우리한테 어떻게 했나. 현충일 행사 때 천안함 유족들에게 자리 하나 마련 안해주고, 국군의날에도 5.18을 운운하며 천안함 언급 한 마디 없었던 정부"라며 "우리 장병들을 죽인 김영철이가 방한한다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연락 한번 취하지 않을 수가 있나"고 비판을 쏟아냈다.
앞서 22일 북한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고위급 대표단을 25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표면적 방한 목적은 평창올림픽 폐막식 참가다.
북한 김영철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2010년 3월 천안함, 같은 해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당시 북한 정찰총국의 수장이었다. 사실상 각종 대남(對南) 테러를 직접 주도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안보 관계자들의 전반적 분석이다.
그러나 최근 통일부, 국방부, 국정원 등은 "천안함 폭침을 사주한 인물이 꼭 김영철이라고 특정짓기는 힘들다"며 과거 정부 차원의 발표를 돌연 뒤집었다.
이를 두고 이성우 천안함 유족회 회장은 "과거 기사 기록도 그대로 남아있고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심경을 전했다.
유족들은 정부가 김영철 방남 허용 입장을 고수할 시에는 판문점이나 파주 일대 등에서 항의 집회를 열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평창올림픽 폐막식장에서의 항의 시위는 계획하지 않고 있다.
이성우 회장은 "평창올림픽이 개회 중인데 물리적으로 행동하고 싶지는 않다"며 "어쨌든 나라의 큰 행사인데 굳이 폐막식장 앞에까지 몰려가 시위를 하는 것은 우리 천안함 장병들의 명예에 누가되는 모습"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편, 천안함은 2010년 3월 26일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됐다. 104명의 해군 장병 중 46명이 숨졌고 이후 구조과정에서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측은 줄곧 북한의 천안함 폭침을 부정해왔다. 김영철의 방남 소식 이후 일부 친문(親文) 네티즌은 인터넷 포털에서 천안함 폭침을 부정하고 북한을 두둔하는 댓글을 생산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