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마누라 생일이라고 아들, 며느리와 세 살짜리 손녀가 온다고 했다.
며느리 보는데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밖에 나가니 비가 억수로 쏟아졋다.
어쩌다가 한번씩 찾아가는 큰길 가에 있는 꽃집을 찾아가니 11시가 넘었는 데도 비가 와서 그런지 문을 열지 않았다.
출입문에 붙여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어쩐다? 고마 그냥 갈까? 하다가 혹시나 하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에 가 봤지만 꽃가게는 없었다.
나와서 생각하니 잘 안 다니는 뒷골목에 '꽃' 간판을 본 기억이 났다.
뒷골목 꽃집을 찾아가니 가게 문을 열어놓았다.
비가 창대같이 쏟아지는데 늙수구레한 영감탱이가 바지가랭이를 흠뻑 적시며 들어오니
40대로 보이는 주인 부부가 반갑게 맞았다.
감으로 '꼭 뭘 살 사람이다!' 싶었던 것이다.
뒷골목 꽃집이라 가게도 좁고 종류도 별로 많지 않았다.
"뭘 찾으십니까?"
"마누라 생일인데, 그냥 있자니 밥 못얻어먹을까 겁이 나서...화분이라도 하나 살까 해서..."
"그러면 이게 어떻습니까?" 하고 만들어 놓은 작은 꽃바구니를 권했다.
그건 빨리 팔지 않으면 시들고 사 간다고 해도 며칠 못 갈 것이엇다.
기왕 사는 김에 '내가 산 선물"이라고 두고두고 은근히 '공토시'할 화분을 사고 싶었다.
밤송이만한 선인장 화분을 권하는데 그건 (말은 안 해도속으로도) 마누라가 좋아할 것같지 않았다.
옆에 있는 짙은 초록 잎사귀에 샛빨간 꽃(꽃이 아니었지만)이 핀 화분을 권했다.
쑥색 도자기 화분이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는 제법 고급스럽게 보였다.
"이름이 뭡니까?" 했더니 "안스륨"이라고 했다.
"안스러룸? 그거 우리 말은 아니겠지요?" 했더니 그냥 웃었다.
가격은 2만 5천 원이라고 했다. 골목 꽃집에서 붙여봐야 얼마나 붙였겠나 싶어 두 말 않고 지불했다.
2만 5천 원이면 '푸집한 집 기본 안주에 맥주 1병 소주 2병' 값이었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안스륨'을 찾아봤다.
꽃 이름 : 안스리움, Anthurium, 일명 홍학 꽃, (Flamingo Flower)
꽃말, 번뇌 (진초록 잎에 새빨간 꽃이 사랑에 불타는 번민을 나타낸다고 그런 꽃말이 붙었다고 함)
원산지는 멕시코, 컬럼비아 등지의 열대 아프리카. 그렇지만 화분은 너무 뜨거운 직사광선은 피할 것.
'공기정화식물'로 사무실, 거실 등 실내에서도 잘 자라며 끈질기게 꽃이 핌.
가격을 찾아보니 플라스틱 화분에 심은 것은 1만 5천 원 내외, 고급 도자기 화분은 6만 원~7만 원.
내가 산 숙색 도자기 화분도 물받침까지 있어 제법 고급스럽게 보였다.
며느리 오면 보라고 거실 탁자 위에다 모셔 놓았다.
둘만 있을 때는 마누라가 날 초등학생 나무라는 '아줌마 선생님' 같이 조지는데
며느리가 오면 그렇게 상냥할 수가 없다.
쑥색 도자기 화분에 진초록 "안스리움"이 그리 싫지는 않은지 맘에 안 든다고 '태방'은 주지 않았다.
꽃 배달 이야기
어렸을 때 우리집과 한 동네에 친가와 외가가 같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동생은 일제시대부터 우리 면 (지금 성산구인 상남면) 면장을 했는데 찝차를 타고 다녔다.
어느학교인지는 몰라도 일본에서 농업계통의 학교를 나온 모양이었다.
일제시대부터 마을 뒷산에는 '차밭'을 일구었고 1960년대부터 마을 앞에 있는 물길 좋은 논에다
(돈 안 되는?) 다마네기, 가배추, 커네이션, 글라디올러스 등 특용작물을 재배했다.
나는 그때 '가배추'가 우리말인줄 알았다. 동네 아지매들은 가배추를 요리할 줄도 몰랐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통학을 하자 글라디올러스 만개 철(초여름부터)이 되면
아침마다 한 아름이나 되는 글라디올러스를 마산까지 배달을 시켰다.
마산역에 도착하면 꽃집에서 사람이 나와 있다가 받아갔다.
우리 동네에서 통학하는 학생이 많앗지만 아무도 꽃배달을 하지 않으려했다.
나도 싫었지만 어머니의 외삼촌인 면장(남면 중학교 설립자로 재단 이사장 이었다)이 시키니
어머니도 거절하지 못하고 나를 달랬다.
아침마다 책가방도 무거운데 새각시 베개만한 꽃 다발을 안고 비좁은 통학열차에서
꽃이 상하지 않도록 배달하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쏟아지는 여고생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저 머스마 저거는 조깬한 기 아침마다 무슨 꽃다발을 안고 댕기노?"
그래서 진해선 통학 열차에서 내 얼굴이 많이 팔렸다.
그 배뿔뚝이 면장 할배는 (김정규 동남 은행장의 백부였다) 뒤늦게 정치판에 뛰어들어
국회의원에 출마해 두 번이나 낙선하는 바람에 폭삭 집안이 망했다.
선거 막판에 자금이 딸맇 때 소나무에 매어 놓은 외갓집 소도 말도 없이 장에 몰고가서 팔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