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수[irrational number, 無理數]의 발견
"배신자를 물에 처넣어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히파수스도 이들에 맞서 소리를 질렀다.
"히파수스, 너는 피타고라스학파의 맹세를 했었고, 지금 그것을 깨뜨린 것이다." 무리 중의 지도자가 선언하였다.
"나는 분수로는 나타낼 수 없는 수(무리수)가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명하였다. 너희는 이것을 비밀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인가? 너희는 지금 나의 지식과 진리를 억압하는 것이다." 히파수스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수가 아니라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지도자가 응답하였다."
는 수이다. 이것은 측량할 때 사용되는 수가 아닌가? 는 특수한 길이를 나타낸다.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수가 있는가?" 히파수스가 주장하였다.
선상의 피타고라스 학파의 무리는 점점 더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진실이 그들을 흔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갑자기, 그들은 고함을 치면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무도 폭도들의 행위를 중단시킬 수 없었다. "그를 물 속에 처넣어라". 그들은 고함을 치면서 감출 수 없는 사실을 감추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히파수스를 잡아서 바다속으로 던져버렸다.
바다를 항해하는 중에 히파수스는 에 대한 비밀을 폭로하려 하였다는 이유로 배 위의 군중들의 분노를 샀다. 그리고 그들은 "배신자"를 처형하였다.
진실을 은폐하는 일이 워터게이트 사건이나 이란콘트라 사건처럼 20세기에 들어와 자주 발생하는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역사적으로는 많은 다른 예가 있다. 수학에도 이런 은폐된 사실이 존재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왜 이들은 새로운 수의 발견을 감추려고 하였는가 ?
히파수스의 증명이 있기 전까지 모든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정수와 정수의 비로 모든 기하적인 대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비록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나타낼 수 있는 분수를 아무도 찾지는 못하였어도, 그들이 아직 찾지 못한 어떤 정수의 비가 존재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다른 수의 존재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히파수스가 정사각형의 대각선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수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이자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대각선의 길이를 근사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는 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수학은 그들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수학은 그들의 전체적인 믿음체계에 영향을 주는 생활의 철학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만물은 수(All is number)'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는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있는 유리수였다. 그들에게 우주의 근본은 수이며 특히 정수와 이들의 비(분수)로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정수와 분수를 이용하여 사람이나 음악 등을 표현하였다. 모든 정수는 1을 유한 번 더하여 얻어지므로 1은 모든 수의 신성한 창조자이었다. 2는 첫번째 짝수로서 여성(음)을 상징하는 수로 다양한 의미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3은 남성(양)을 상징하는 첫번째 수로 1과 2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조화의 수로 받아들여졌다. 4는 정의를 상징하였으며, 5는 2와 3의 합이므로 혼인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각각의 수는 평화, 완전, 풍부, 자기연민 등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정수를 척도로 사용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다른 종류의 어떤 수라도 정수의 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모든 소리도 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있으며, 태양과 행성간의 거리 등 세상의 모든 것을 정수의 비(즉, 유리수)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수로 이루어진 삶은 잘 정돈된 것이며, 수는 세상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 주었던 것은 '유명한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증명의 도입(Enter the proof of the famous Pythagorean theorem)'이라는 정리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정리 때문에 만물의 척도로서의 수(유리수)의 역할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배 위의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이 히파수스가 비밀의 맹세를 깨뜨리고 정수의 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가 존재함을 선언한 것에 대한 분노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의 발견과 이 수가 무리수라는 사실에 대한 증명에서 느꼈을 그들의 감정을 상상해 보라. 피타고라스 학파의 신념체계를 지배하고 있던 수로는 정확한 표현이 불가능한 특별한 수 를 길이로 갖는 것(정사각형의 대각선)이 존재함을 확인하고 있는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순간에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라.
"그럴 리가 없어"
"우리는 이것을 세상에 알려서는 안돼"
하며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으리라. 이것을 감추려는 그들의 비밀 맹세가 지켜지겠는가? 이 은폐가 얼마나 오랫동안 가능하였겠는가? 그렇게 중요한 발견이 어떻게 감추어질 수 있었겠는가? 아마 수세기가 흐르는 동안 전 세계의 여러 분야에서 피타고라스 정리라 불리는 지식을 피타고라스 학파가 아닌 사람이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리수는 비상식적인 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시대에 이것은 또는 고 불렸는데 각각의 뜻은 표현할 수 없는, 비율로 나타낼 수 없는 수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수를 다루는 데에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수의 정의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무리수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기하적인 용어로서 크기나 길이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를 작도하는 방법으로 무리수의 존재성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소수를 이용하여 근사적으로 무리수를 나타내려고 노력하였으며, 소수로는 정확하게 무리수를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는 못하였다.
위의 이야기에는 많은 엇갈린 주장들이 있다. 메타폰툼의 히파수스가 기원전 5세기경에 무리수의 존재성을 증명하였으며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에는 그가 바다에 던져져 죽었다고 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기록에는 집단에서 추방되었으며 죽음을 가장하기 위하여 가묘와 비석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밀 서약은 히파수스의 제명의 정확한 의미와 이유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본다.
그가 추방된 이유는 ―
◦ 무리수 의 발견을 발표함으로써 비밀과 개인주의의 맹세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 피타고라스 학파의 보수적인 비밀 보존의 관습을 깨뜨리려는 시도를하였기 때문이다.
◦ 어떠한 기하적 도형(오각형 또는/그리고 십이면체)의 발견을 외부에 누설하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비밀집단의 규약을 어기는 사소한 여러 행위와 함께 를 외부에 알렸기 때문이다.
한동안 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일한 무리수였는데 플라톤은 키레네학파의 테오도로스(Theodorus,기원전 425년경)가
이 역시 무리수임을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무리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작은 수 부터 순서를 매긴 유리수 전체를 위, 아래 두 부분로 나누어 직선 상에 나타낸다고 해보자. 이와같이 나누었을 때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위 부분에 최소의 수가 있을 때,
둘째, 아래 부분에 최대의 수가 있을 때,
셋째, 위 부분에도 최소의 수가 없고, 아래 부분에도 최대의 수가 없을 때,
등이다. 이 때, 넷째 경우로 위 부분에 최소의 수가 있고 아래 부분에 최대의 수가 있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으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대의 수와 최소의 수 사이에는 또 다른 유리수가 있게 되고 이것은 위, 아래 두 부분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유리수 전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는 처음의 규정에 어긋난다.
이렇게 유리수 전체를 나누는 것을 '절단'이라고 부른다. 아주 날카로운 칼로 유리수 전체를 절단하여 위, 아래 두 부분으로 갈라 놓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칼에는 무엇이 닿을까?
첫째 경우에는 최소의 수가 닿게 된다. 둘째 경우에는 최대의 수가 닿게 된다. 그러면 셋째 경우를 보자. 이 때에는 위와 아래 부분을 갈라 놓는 경계에 유리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닿을까? 이것이 바로 무리수이다. 즉, 어떤 유리수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절단으로 무리수를 정의할 수 있다.
'데데킨트의 절단'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독일이 낳은 가장 독창적인 수학자라는 데데킨트(Dedekind, 1831-1916)의 가장 주요한 업적이다. 그의 업적 중 무리수론에 대한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한 세대에 걸쳐 수학을 배우는 모든 학생들에게 친숙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85세의 나이에 죽은 그는 그 당시로는 너무나 장수했기 때문에 그는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버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벌써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데데킨트가 죽기 12년 전 튜브너의 「수학자를 위한 책력」에는 데데킨트가 1899년 9월4일에 사망했다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면 유리수와 무리수 중에 어느 것이 더 많을까? 두 무한집합의 크기를 비교하여 유리수의 틈을 메우는 수에 불과한 무리수가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칸토어이다. 모두들 칸토어를 미쳤다고 비난할 때, 데데킨트만이 칸토어의 이론을 믿어준 것은 우연은 아닌 것이다.
유제1> 그리스 시대의 피타고라스학파는 “세상의 모든 것은 수”라고 하며 소리나 우주 등 모든 것을 수(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리의 한계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여라.
유제2> 왜 무리수가 유리수보다 더 많을까?
유제3> 유리수의 유리수제곱은 유리수라고 할 수 있을까?
유제4> 유리수의 무리수제곱은 무리수라고 할 수 있을까?
유제5> 무리수의 무리수제곱은 무리수라고 할 수 있을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