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로(魏虜)를 고구려(高句驪)라고 하는 역사인식(歷史認識)은 뭐지? (제1편)
(제1편)
○ 우리나라 학계(學界)에서는, 「백제(百濟) 24대 동성대왕(東城大王)때인 서력(西曆) 484년…488년…490년 등 3 차례에 걸쳐 있었던 북위(北魏 : 위로魏虜)의 백제(百濟) 침공(侵攻) 사건(事件)에 대해, “백제(百濟)가 고구려(高句驪)군(軍)을 격퇴(擊退)” 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인식(認識)을 들어내고 있다.
이런 학계(學界)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대해, 주류(主流) 대부분(大部分)이 인식(認識) 또는 인정(認定)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特別)한 반대(反對)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금수미앙(錦綉未央) 드라마 영상 / 북량(北涼)의 마지막 공주(公主) : 북위(北魏) 탁발준(拓跋濬)【제 5대 황제(재위 452~465) : 묘호는 고종(高宗)이며 시호는 문성제(文成帝)이다.】의 황후(皇后)로 분장한 여배우(女俳優) “당언(唐嫣 : 탕옌)의 모습
…금수미앙(錦綉未央) 드라마 영상 / 북위(北魏) 경성(京城) 최고(最高)의 미녀(美女)로 분장한 여배우(女俳優) 이심애(李心艾 : 리신아이) 모습
-----------------------------------------------------------------------------------
…인터넷에서 “모대(牟大)”를 쳐보면 :〈488년과 490년에 있었던 ‘위로침공’으로 표현된 전쟁은, 백제가 고구려 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가능(可能)한 곳은, 오직 반도(半島)학계(學界)만의 것일 게다. 어떻게〈‘위로(魏虜)’ 곧 ‘위나라 오랑캐’〉가 고구려(高句驪)로 둔갑(遁甲)될 수 있을까? 반도(半島) 학계(學界)에서만 알 수 있는 극비(極祕) 원전(原典)이나 유물유적(遺物遺蹟)을 갖고 있는 걸까?
학계(學界)의 이야기대로라면, 〈당시(當時) 탁발씨(拓拔氏) 위(魏) 왕조(王朝)는 곧 고구려(高句驪)의 다른 이름(異稱)이다.〉라는 말과 같고, 〈탁발씨(拓拔氏) 북위(北魏)는 고구려(高句驪)의 속국(屬國)으로, 고구려(高句驪) 태왕(太王)의 명(命)을 받고,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해설(歷史解說)을 그들은 인정(認定)할까?
〈위로(魏虜)〉라는 말은 :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남조(南朝)에서 지들 스스로 중국(中國)이라 하면서, 북조(北朝)를 “위(魏)오랑캐(虜)”라고 비하(卑下)하였고,
북조(北朝)에서는 지들이 중국(中國)이라고 하면서, 남조(南朝)를 가리켜 “섬나라(島) 오랑캐(夷)”라고 비하(卑下)하였는데, 당시(當時) 남조(南朝)에서 북조(北朝)인 ‘북위(北魏)=후위(後魏)’를 가리켜 “위로(魏虜)”라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 : 위진(魏晉)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이해(理解)할 수도 없고, 이해(理解)될 수도 없는 희한(稀罕)한 이야기다. 이를 기록(記錄)한 남제서(南齊書) 원전(元典)내용(內容)을 보자. 이때 북위(北魏)는 서력(西曆) 484년…488년…490년 등 3번에 걸쳐,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484년 침공(侵攻)때는 백제(百濟)가 패(敗)했다는 해설(解說)도 있다. 이러한 북위(北魏)에 대해 백제(百濟)에서는 “위로(魏虜) 또는 흉리(匈梨), 험윤(獫狁)”등으로 비하(卑下)하였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북위(北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마대(騎馬隊)가 출정(出征)했다가 궤멸(潰滅)되어, 그들의 피(血)로 평원(平原)을 붉게 물들였다.〉는 이 사건(事件)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
1. 남제서(南齊書) 58 열전 30 백제(百濟)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大破之. : 이해에, 위로(魏虜 : 위나라 오랑캐)가 다시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보내어 백제(百濟)를 공격(攻擊),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牟大 : 東城王)가 장수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노군(虜軍)를 습격, 크게 깨뜨렸다.》고 하였다. 이어서,
《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中略.去庚午年,獫狁弗悛,擧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匈梨張惶,崩若海蕩.乘奔追斬,殭屍丹野. : 건무 2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 중략(中略). 지난 경오(庚午)년에,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으나,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逆討), 밤(소宵)에 벼락 치듯이 기습 공격하니(정격霆擊), 흉리(匈梨)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로 쓸어버리는 듯 붕괴하였다. 말을 몰아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죽이니, 그 시체(殭屍)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 》에 대하여,
…위(南齊書)에서 말하는 백제왕(百濟王) 모대(牟大)는 백제(百濟) 24대 동성대왕(東城大王 : 在位 : 479∼501)이다.
-----------------------------------------------------------------------------------
2. 모대(牟大) / 출처(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百濟) 24대 동성왕(東城王) : 모대(牟大), 마제(麻帝), 여대(餘大)
재위(在位) : 백제 제24대 국왕(재위: 479∼501)
이름은 모대(牟大) 또는 마제(麻帝)·여대(餘大)라고도 한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쏘는 솜씨가 빼어났다. 동성왕(東城王)은 삼근왕(三斤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하고 실권을 장악한 진로(眞老) 등의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다. 진씨(眞氏) 세력은 동성왕이 유년의 나이로 왜에 체류하고 있어 국내의 정치적 기반이 없는 것을 고려해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보인다.
삼근왕을 이어 즉위한 동성왕은 웅진천도(熊津遷都)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며, 한성(漢城)에서 온 남래귀족(南來貴族)과의 세력균형을 꾀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웅진시대 초기에는 한성시대 이래 왕비족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해씨(解氏)와 진씨, 그리고 목협만치(木劦滿致)를 중심으로 하는 목씨(木氏) 등이 여전히 정권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정권을 장악하고자 서로 치열한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왕권조차도 이들의 정치적 향방에 좌우됨으로써 혼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오랫동안 왜에서 체류하여 국내정세에 정통하지 못했고 정치적 기반도 미약하였다. 또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음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국정을 장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해구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또한 동성왕의 즉위에 절대적 역할을 한 덕솔(德率) 진로가 동성왕 4년 ‘병관좌평겸지내외병마사(兵官佐平兼知內外兵馬事)’로 임명되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동성왕 즉위 초반까지 남래귀족들과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대 전기는 웅진시대 초기의 관행인 실세귀족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기는 했지만 후기에는 남래귀족의 활동이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신진세력들이 중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동성왕은 정치의 중심지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겨진 이상 금강유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유력세력들을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등용시켜 실세인 남래귀족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여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또한 유력세력들 역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현실적 욕구가 팽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신진세력으로는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 등을 들 수 있다. 신진세력들은 점차 세력기반을 확대해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진씨 등 남래귀족을 대신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지배세력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중앙정계에 등용하면서 기반세력의 대소와 충성도에 따라 적절하게 관직을 부여했다. 특히 유력한 토착세력에게는 좌평제도(佐平制度)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좌평직은 백제 최고의 관직으로 중앙 정계에 확고한 기반이 없었던 이들을 등용한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동성왕대 이전까지 좌평직에 오르는 인물들은 모두 왕족과 해씨 진씨 등 외척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재위 6년에 사약사(沙若思)를 내법좌평(內法佐平), 8년에 백가(苩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 19년에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등용하였다. 이것은 진씨와 해씨 등 남래귀족들의 전횡을 방지하고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동성왕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사씨는 백제 왕실의 웅진천도를 계기로 새롭게 중앙귀족으로 진출하였다. 동성왕 6년에 내법좌평 사약사가 남제(南齊)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으며, 17년에는 사법명(沙法名)이 남제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북위(北魏)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우고 남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있다. 사씨는 동성왕대에 대외교섭이 활발히 전개되자 이를 이용하여 대외적 측면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웅진천도 이후 미약해진 왕권은 동성왕대에 크게 회복되었다.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이유를 남래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신진세력의 흡수라는 대내적인 정국 운영의 개편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 외에도 동성왕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들 수 있다. 대외정책의 성공여부는 내정의 안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웅진천도 이후 백제는 고구려 수군에 의해 서해의 해상교통로를 차단당했다. 동성왕은 집권 초기부터 남제와의 외교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동성왕 2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 대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문주왕 2년 고구려의 저지로 대송외교(對宋外交)에 실패한 이후 약 5년 만에 재개되는 중국에 대한 외교였다. 이는 남제와의 관계를 통해 적대세력인 고구려와 북위를 견제함은 물론 신라와의 외교관계에서의 주도권 장악과 가야·왜에 대한 정치 외교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동성왕대 남제와의 교섭은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 확립에 커다란 뒷받침이 되었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신라가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했고, 고구려에게 치양성(雉壤城)을 공격받았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동전선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백제와 신라 동맹군의 승리는 양국으로 하려금 고구려의 공세에 대응하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사이의 신뢰는 매우 돈독해졌다.
…한편,『남제서』백제전에는 동성왕(東城王)이 사법명·찬수류(贊首流) 등의 장군을 중국 요서(遼西)지역에 파견해 북위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의 근거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여기에 보이는 왕·후·태수·장군 등의 관명은 백제의 해외경영 문제와 관련해 주목되는 자료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 본토와 만주 상황으로 보아, 요서지역이나 산동지방에 백제의 군현(郡縣)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설사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군사력만 가지고, 북위의 침공을 막아내고 대승을 거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 488년과 490년에 있었던 ‘위로침공’으로 표현된 전쟁은, 백제가 고구려 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해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우두성(牛頭城)·사현성(沙峴城)·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해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정성(沙井城)·가림성(加林城) 등을 쌓고 중앙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 밖에 탐라(耽羅)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무진주(武珍州)까지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진귀한 짐승을 길렀으며, 이것을 비판하는 신하의 간언을 물리치는 전제군주적인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해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에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해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이 점차 증대해 왕권에 압력요소로 작용하게 되자 동성왕은 신진세력에 대한 견제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한 조처 중의 하나로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강제로 내보낸 것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 같은 견제는 백가를 위시한 신진세력의 불만을 초래했고, 마침내 백가세력은 동성왕이 사비서원(泗沘西原)에서 사냥하는 틈을 타서 왕을 암살하였다.
동성왕의 죽음에 대해『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왕이 도(道)가 없고 포학하므로 국인(國人)이 제거했다고 하였다. 이때의 국인은 백가를 비롯한 반왕파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가세력에 의한 동성왕의 암살은 전제적 왕권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성왕대에 추구된 일련의 정책은 한성함락 이후 축소된 백제 왕실의 지배기반을 확대시켜 주었고, 나아가 무령왕(武寧王)·성왕(聖王)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의 토대를 놓아주게 되었다. 출처(出處) / [Daum백과] 동성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끝).
-----------------------------------------------------------------------------------
3. 북위(北魏)의 세(3) 차례에 걸친 백제(百濟) 침공(侵攻)
(1) 건강실록(建康實錄) :《永明二年,魏盧征之,大破百濟王弁都. : 영명(永明) 2년 (西曆 484년) 위로(魏虜)가 백제(百濟)를 정벌(征伐)하여, 백제왕 모(변)도(弁都)를 크게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건강실록(建康實錄) : 건강(建康)의 역사(歷史)와 지리(地理)를 기록(記錄)한 사료(史料)집으로, 당(唐)의 ‘허 숭’이 편찬(編纂)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위의 ‘영명(永明)2년’은 서력(西曆) 484년이다.
(2) 자치통감(資治通鑑) 136 제기(齊紀) 世祖武皇帝上之下永明六年(戊辰,公元四八八年):《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陳壽曰:三韓凡七十八國,百濟其一也.據李延壽史,其先以百家濟海,後浸強盛以立國,故曰百濟.晉世句麗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 위(魏)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백제(百濟)를 쳤으나, 백제(百濟)에게 패하였다. 진수(陳壽)가 이르기를 : 삼한(三韓)은 무릇 78개국이 있었는데, 백제(百濟)는 그 중의 하나이다. 이연수(李延壽)의 기록에 의거하면 : 그 선조(先祖)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다. 뒤에 점점 강성해지니 나라를 세웠는데, 백제(百濟)이다. 진(晉)나라 때에 구려(句麗 :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을 다스릴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의 땅을 점거하였다.》고 하였다.
(3) 남제서(南齊書) 열전(列傳) 본문(本文) :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大破之. : 이해에, 위노(魏奴 : 위나라 오랑캐)가 다시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보내어 백제(百濟)를 공격(攻擊),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牟大 : 東城王)가 장수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노군虜軍)를 습격, 크게 깨뜨렸다.》고 하였다.
(4)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百濟)본기(本紀) 동성왕(東城王)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 10년, 위(魏)나라 군대가 와 침공하였으나, 우리(百濟)가 그들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동성왕(東城王) 10년 : 서력(西曆) 488년이다.
(5)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172 百濟國 :《後魏孝文帝遣衆征破之. : 후위(後魏) 효문제(孝文帝)가 보낸 무리들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북위 효문제(孝文帝)는 재위(在位) : 471년 9월 ~ 499년 4월’이다.
(6) 남제서(南齊書) 백제(百濟) : 《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中略.去庚午年,獫狁弗悛,擧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匈梨張惶,崩若海蕩.乘奔追斬,殭屍丹野. : 건무 2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 중략(中略). 지난 경오(庚午)년에,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왔으나,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逆討), 밤(소宵)에 벼락 치듯이 기습 공격하니(정격霆擊), 흉리(匈梨)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로 쓸어버리는 듯 붕괴하였다. 말을 몰아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죽이니, 그 시체(殭屍)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 》고 하였다.
● 사료(史料)속에 나타난 〈북위(北魏)=위로(魏虜)=험윤(獫狁)=흉리(匈梨)〉의 〈백제(百濟)침공(侵攻)〉은, 3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 차 : 영명(永明) 2년(二年) : 갑자(甲子)년 서력(西曆) 484년 : 동성왕 6년
2 차 : 영명(永明) 6년(六年) : 무진(戊辰)년 서력(西曆) 488년 : 동성왕 10년
3 차 : 영명(永明) 8년(八年) : 경오(庚午)년 서력(西曆) 490년 : 동성왕 12년
---------------------------------------------------------------------------------
○ 어떠한 연유(緣由)로 인하여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려 했는지 또는 침공(侵攻)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記錄)이나 설명(說明)이 없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當時) 북위(北魏)는,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을 발(發)하여,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려, 백제(百濟) 영토(領土)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북위(北魏) 또는 후위(後魏)라 불리는 ‘탁발씨(拓拔氏) 왕조(王朝)’는 서력(西曆) 386년∼534년까지 겨우 「148년간 존속(存續)」했던 왕조(王朝)다. 북위(北魏)는 대대적(大大的)으로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하고, 실패(失敗)하면서, 쇠약(衰弱)해지고, 내부(內部)의 분열(分裂)로 인하여 멸망(滅亡)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➊「수십만(數十萬)」이란 과연(果然), 얼마 정도의 숫자(數字)를 말하는 걸까? 사전적(辭典的)의미(意味)는 「십만(十萬)의 두서너 배(倍)」를 말한다고 하니, 「2십만(十萬)∼3십만(十萬) 정도(程度)」를 말한다고 보아지는데,
사전적(辭典的)의미(意味)와 습속(習俗)에서의 계량(計量)으로 살펴보면 : 최소(最小) 〈2십만(十萬)∼5십만(十萬)〉정도(程度)의 수(數)를 말한다고 보아진다.
21세기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을 합동(合同)편성(編成)한 “보기(步騎) 수십만(數十萬) 출병(出兵)”등의 말은, 원전(原典) 여러 곳에서 발견(發見)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병(騎兵)만이 편성(編成)된 「기(騎)수십만(數十萬)」이라는 구절(句節)은 흔하지 않은, 거대(巨大) 군(軍)편제(編制)라고 할 수 있다.
“騎 數 十 萬”이란 구절(句節)에서, “騎”란 “기병(騎兵)”을 뜻하고, 또 “말(馬) 탄 군사”를 뜻하는 말이며, 기마대(騎馬隊)를 뜻한다. 따라서 ‘북위(北魏)=위로(魏虜)’는 백제(百濟)를 정벌(征伐)하기 위해 최소한(最小限) “이십(二十)만 ∼ 오십(五十)만” 정도(程度)의 ‘말 탄 군사(騎兵)’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➋ 역사통설(歷史通說)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모대(牟大) / 출처(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
《… …하지만 당시 중국 본토와 만주 상황으로 보아, 요서지역이나 산동지방에 백제의 군현(郡縣)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설사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군사력만 가지고, 북위의 침공을 막아내고 대승을 거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488년과 490년에 있었던 ‘위로침공’으로 표현된 전쟁은, 백제가 고구려 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역사해설을 하고 있다. 기막힌 우리나라 사학계(史學界)의 해설(解說)이요, 오늘날 우리 사회(社會)의 현실(現實)이다.
➌ 위 남제서(南齊書) 원문(原文)에 : “又”자(字)를 썼다. “우(又)” 자(字)는, 「또, 다시」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로 미뤄보면, 위(魏)나라가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大大的)인 공격(攻擊)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전(古典)에서 찾아보면, 3 차례에 걸쳐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려 군대(軍隊)를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萬若), 우리나라 사학계(史學界)의 해설(解說)대로, ‘위(魏)나라의 공격(攻擊)’을 ‘고구려(高句驪)의 공격(攻擊)’으로 인식(認識)한다면 : 〈당시(當時) 위(魏)는 고구려(高句驪)라는 뜻과 같다. 곧 탁발(拓拔)씨의 「북위(北魏)는 곧 고구려(高句驪)이다.」라는 뜻이다. 또는 고구려(高句驪)의 속국(屬國)으로 북위(北魏)기마(騎馬)를 동원(動員)한 것이 된다.〉
➍ 기병(騎兵)은 곧 기마병(騎馬兵)이다. 이들은 말(馬)과 함께 기동(起動)하는 당시(當時)로써는 최신(最新)의 기동부대(機動部隊)로 막강(莫强)한 힘을 가졌다. 이때 철기(鐵騎)가 몇이냐에 따라 나라의 국력(國力)을 가늠할 정도였다. 오늘날의 탱크부대 보다도 더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이들 기마(騎馬)가 바다를 건넌다거나, 큰 호수(湖水)를 건널 수는 없다. 바다를 우회(迂回)한다거나 호수(湖水)를 우회(迂回)해야 한다. 반도(半島)백제(百濟)였다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當時)의 형편(形便)으로, 수십만(數十萬) 기병부대(騎兵部隊)를 운송(運送)할 수 있는 함선(艦船)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마부대(騎馬部隊) 수십만(數十萬)이라고 하면 그 후속부대(後續部隊) 또한 수십만(數十萬)이 필요(必要)하다.
그러나 백제(百濟)와 위(魏)나라가 뭍(地)으로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었다면, 수십만(數十萬) 기마대(騎馬隊)를 보내어 기습(奇襲), 공격(攻擊)하여, 백제(百濟) 땅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제(百濟)의 동성대왕(東城大王)과 그 휘하(麾下) 장수(將帥)들은, 북위(北魏)의 침공(侵攻) 정보(情報)를 사전(事前)에 탐지(探知), 길목 요소(要素)에 기습부대(奇襲部隊)를 매복(埋伏)시켜, 일거에 북위(北魏) 기마대(騎馬隊)를 습격(襲擊), 궤멸(潰滅)시켰다.」는 것이 원전(原典)에 기록(記錄)된 이야기라고 본다.
➎ 당시(當時) 백제(百濟)는 많은 제후(諸侯)들을 거느린 대국(大國)이었다. 이는 위 남제서(南齊書)에서 말하기를 :「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아착왕(阿錯王)·매노왕(邁盧王)·매라왕(邁羅王)·벽중왕(辟中王)·불사후(弗斯侯)·불중후(弗中侯)·팔중후(八中侯)·면중후·(面中侯)」등이 있고,「광양태수(廣陽太守)·조선태수(朝鮮太守)·대방태수(帶方太守)·광릉태수(廣陵太守)·청하태수(清河太守)·낙랑태수(樂浪太守)·성양태수(城陽太守)」등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지명(地名), 관직(官職)이름, 제후(諸侯)들의 이름 등을 보면, 우리들이 그동안 접(接)했던 말들과는 너무 낯 설은 글자들이다. 태수(太守)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한 봉건왕조(封建王朝)시절의 지방관(地方官)으로 녹봉(祿俸)이 2,000석이다. 그래서 2,000석 관리(官吏)라고도 했는데, 중앙조정(中央朝庭)으로부터 임명(任命)되었으며, 군사(軍事) ·재정(財政) ·사법(司法)의 권한(權限)을 위임(委任)받은 막강(莫强)한 자리였다.
제후(諸侯)란,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에게서 일정한 영토(領土)를 받고, 또 그에 비례(比例)하는 일정(一定)한 의무(義務)를 지고, 그 영내(領內)의 주민(柱民)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졌던 자(者)를 말하며, 제후(諸侯)가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로부터 위임(委任)을 받아서 통치(統治)하는 한 개의 나라를 제후국(諸侯國)이라고 한다.
위 원문(原文)에서 보면 : 당시(當時) 백제(百濟)는 10개의 제후국(諸侯國)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아착왕(阿錯王)·매노왕(邁盧王)·매라왕(邁羅王)·벽중왕(辟中王)·불사후(弗斯侯)·불중후(弗中侯)·팔중후(八中侯)·면중후·(面中侯)】또 이어지는 것들은, 반도백제(半島百濟)에 있을 수 없는「광양태수(廣陽太守)·조선태수(朝鮮太守)·대방태수(帶方太守)·광릉태수(廣陵太守)·청하태수(清河太守)·낙랑태수(樂浪太守)·성양태수(城陽太守)」등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륙(大陸)을 최초(最初)로 통일(統一)했다는 진시황(秦始皇)은 전(全) 영토(領土)를 36군으로 나눠 군현제(郡縣制)로 통치(統治)했다고 전한다. 위의 백제(百濟)의 제후(諸侯)와 태수(太守)를 보라. 당시(當時)의 백제(百濟)의 강역(疆域)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은, 평양(平壤) 주변(周邊)에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백제(百濟)가 고구려(高句驪)의 평양(平壤)주변(周邊)을 빼앗고, 점거(占據)하여, 그곳에 백제(百濟)의 군(郡)을 설치(設置)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전무(全無)하다. 그렇다면 별도(別途)의 낙랑(樂浪) 또는 대방(帶方)이 있었다는 뜻이다.
반도백제(半島百濟)속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➏ 당시(當時), 백제(百濟) 국력(國力)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조그만 반도(半島) 땅의 백제(百濟)와는 차원(次元)을 달리하는, 막강(莫强)한 국력(國力)을 가졌었다는 것을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一連)의 사건(事件)을 보는데 참고(參考)할만한 것은 : 삼국사기(三國史記) 46권 열전(列傳) 6 최치원(崔致遠)전(傳) :《中略.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 중략(中略).고려(高麗)와 백제(百濟)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百萬)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두蠹)가 되었으며, 수(隋) 황제가 말 부리는 것을 잃어버린 것도, 요동정벌(征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구절(句節)이 있다.
최치원 전(崔致遠 傳)에서 말하는, 「남(南)쪽으로 ‘오월(吳越)’을 침노하고, 북(北)으로 ‘유(幽)연(燕)제(齊)노(魯)’를 침공하여 어지럽혔다」면, 『오(吳)·월(越)과 유(幽)·연(燕)·제(齊)·노(魯)사이에,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가능(可能)한 일이다.
이는 곧 〈황하(黃河)로부터 장강(長江)사이에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말과 통한다.
더더구나 전회(前回)에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 西域(서역) 寧遠國(영원국)’을 설명(說明)하는 글에서 〈탁발씨(拓拔氏)들의 근거지(根據地)는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의 파락나(破落那)로부터 예맥(穢貊)까지다.(代王什翼犍之地,東自穢貊,西及破落那.)〉라고 하였다.
◇ 사견(私見)이 아닌 전한서(前漢書) 및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기록(記錄)으로 본 것이다. 대륙(大陸)의 북방지대(北方地帶)인 하서회랑(河西回廊)과 중원(中原)의 북방지대(北方地帶)는, 이미 기원전(紀元前) 수천(數千)년 전(前)부터 〈맥(貊)=맥(貉)〉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선비(鮮卑) 탁발씨(拓拔氏)가 비집고 들어 올 수 있는 땅이 없었다.
… 소위(所謂) 중원(中原) 북방(北方) 땅에 탁발씨(拓拔氏)들이 있었다는 얘기는 사기(詐欺)다. 이곳은 당시(當時)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요충지(要衝地)였다. 탁발씨(拓拔氏)들은 알타이산맥(山脈) 서(西)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➐ 남제서(南齊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 삼국사기(三國史記)등을 보면 : 분명하게 “魏(위)”나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484년, 488년, 490년에 있었던 ‘위로침공’으로 표현된 전쟁은, 백제(百濟)가 고구려(高句驪) 군을 격퇴(擊退)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우리나라 학계(學界)의 설명(說明)은 기막힌 일이며, 이런 역사인식(歷史認識)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패배의식(敗北意識)”에 사로잡힌 광기(狂氣)를 가진 자(者)들이라고 해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니라고 본다.
===================================================================================
○ 우리 모두 각성(覺醒)해야 되지 않을까? 시건방을 떠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추종(追從)하는 일부 학자(學者)들은, 더더욱 반성(反省)과 자숙(自肅)이 필요(必要)한 때라고 본다.
2017년 11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북위의 백제침공 사건에 대해서는, 인터넷상에서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기록의 오류등으로 보는 경우도 많고, 백제가 대륙의 동해안 연안지방을 점령, 통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모두는 반도에 백제가 있었다는 인식아래 설명되어진 것들이다.
백제는 반도에 존재할 수 없는 봉건왕조다.
반도 땅에 백제의 흔적은 없다. 말로만 떠들어대는 백제만이 존재할 뿐.....무엇하나 증거된다거나 고증될 수 있는 문헌적 기록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 뿐이다.
아쉽지만 백제와 관련된 기록은 단편적인 것 뿐이다. 우리 카페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논의된 바있는 주제지만 알 수 있는 것은 확실하게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논의된 바있는 사건을 주제로, 정리를 해본 것입니다.선비족 탁발씨는 중원 북방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그곳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맥이라고 부르는 부족들이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던 탓입니다.
맥은 곧 고구려 일부가 되죠.
이러한 땅에 선비족 탁발씨가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태왕의 승인아래 제후가 되었다면 모르되 황제국을 세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봅니다.
더 많은 자료를 모아 더 좋은 논거를 올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백제가 반도에 없었다는 것은, 당서만 살펴보더라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반도에 근거를 두고 우리 역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무슨 근거로 역사의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
당서에 이르기를, 백제가 망하고 당군이 백제땅에 주둔하고 있을때, 산속에 있던 여러 종족이 당군을 급습하여, 당군이 위기에 빠졋다고 버젓이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백제의 당시에, 반도의 땅에 수 십만의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
중국이라는 나라들은 몇 십년만에 망하고도, 천년을 누린 삼국의 왕조들에 대하여, 황제 행세를 하면서 작위를 주고 조공을 바쳤다고 하면서, 속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웃기는 괴이한 기록들 입니다.
연행록에서 말하기를, 선왕의 예는 씻은듯이 없어지고, 오랑케의 비린내만이 진동 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말들은 현지에서 모두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또 이르기를 상례에 풍악을 사용 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말도 모두 사실 입니다. 지금도 당시의 풍속을 지키고 있는 후손되는 사람들은, 상례에 풍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제 땅에 있던 탐라에는, 고려시대에 원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주를 했다고 하는데, 그 후손들은 지금도 상례에 풍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도땅의 탐라에서 군마를 키웠다는 것은, 지나가는 00도 웃다가 넘어질 일입니다. 오늘날도 대륙의 서쪽 지역에는 수 많은 여러 종족들이 수 천년의 대를 이어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토인들이 대륙의 동쪽을 신라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오직 추악한 반도사관에 빠져 있는 자들만이 모르고 있을 뿐 입니다.
말씀 하시는 백제와 북위와의 기록들은, 당연한 역사의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
불국의 신라 불국사, 이 불국사에 대하여 현지의 사람들이 고증하고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반도의 경주에 있는 불국사. 이곳이 신라의 불국이었다고 한다면, 역사를 알고 있는 대륙 사람들의 조소와 비웃음을 살 뿐입니다.
백제와 신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니, 천년의 대륙 역사임은, 역사서가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사서를 보지않고 식민잔재의 거짓 역사만을 자랑하고 있으니,
그들이 이땅을 물러가면서 심어놓은 식민의 굴레는 오늘도 이 땅의 주구들에 의하여 충실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문무 선생님께 다시금 깊은 경의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혹시 淸河는 압록수를 지칭하는것이 아닐까요? 청하태수라면 바로 압록강부근의 지명일텐데 牟大이후로 勾麗가 남진하여 한성지역을 장악해서 南平讓이라했었던것 같은데 또 이후로 遼西지역도 구려한테 빼앗기고.... 北魏가 망하고 바로 그곳에서 수, 당 이 건국되는것이 아닐까요?
고전에 의하면 '압록강은 일명 청하'라고 했습니다.
청하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대륙조선사에 의하면 압록강의 북쪽과 서북쪽에 북위가 있죠. 고전에 의하면 북위의 선조인 대왕(代王)때의 봉지는 중앙아세아와 맥(貊)사이의 땅입니다. 그곳은 알타이산맥 서쪽으로 보아집니다. 수와 당은 북위의 서남부 땅에서 건국하게 됩니다. 북위는 백제를 공격하는 무모한 정복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지고 내부분열로 곧바로 망합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그리고 <대부여>님!
어제 날씨는 겨울철 날씨치곤 무척 변덕스러운 날씨였습니다. 감기 환자가 많다고 하니, 신경을 써야 될 것 같군요.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 고생하시는 여러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요, 급료를 받고 하는 일도 아니니, 스스로 우러나는 마음에서 많은 고생을 감내하고 있으니, 요즘 세대들에게는 "고리타분"한 경제적 관념이 없는 무능한 사람들로 인식될까 두렵기도 합니다.
반도조선왕조란 허황된 이야기로 점철된 것은 일제 군국주의자들과 조선을 해체한 서구열강들로부터 출발하며, 여기에 기생한 신진엘리트들이 가담하게 되면서 만들어 졌다고 봅니다.
현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주요 파벌들은 서남인과 그들의 후인들로 체워졌고, 일제는 군국주의자들의 후예들로 채워져 있으며, 서구열강 역시 옛 시대를 결코 반성하지 않는 현체제를 유지하려는 전략자들이 지배한다고 봅니다. 반도는 출발 초기부터 서구열강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구요. 지금도 이것은 계속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한국사의 현 체제를 비판하고 대륙의 조선사 이야기를 하는 부류둘을 사이비로 몹니다. 대륙조선 이야만 나오면 거품을 무는 무리들이 아주 많습니다. 언론도 마찬가집니다.
이러한 것들은 해방이후 만들어진 공교육의 탓이죠. 반도조선을 세뇌목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요.
재야사학이라고 사이비라고 비난하는 무리들은, 일부 재야사학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일때도 있습니다. 소위 하북성일부지방의 조선왕조를 주장하는 일부 재야사학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대륙조선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입니다.
"반도조선왕조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과 상통하는 말입니다. 언제 쯤 우리들은 우리들의 역사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조선사를 사랑하고, 조선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여러분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위구려 아닐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