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되살려낸 0240 존 로스, 이 큰 이름 앞에 머리 숙인다
1. 존 로스 목사의 생애 초기
존.로스(John Ross, 중국명 :나약한(羅約翰)은 휴.로스(Hugh Ross)와 캐더린 서더런드(Catherine Sutherland)의 맏아들로서 1842년 8월 9일에 태어났다. 0240코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일을 해냈는지 모른 채 세상을 떠나셨다.
0240은 어포넨트로서 매우 강력한 창의력, 추진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로스 가족은 크로마티 하구(Cromarty Firth)의 어귀에 있는 인버네스(Inverness)의 북쪽 닉(Migg) 마을에서 살았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이 지역에서는 대부분 갈릭어(Gaelic Lnanuage)를 썼다.
존.로스는 어려서부터 갈릭어를 쓰면서 자라고, 편(Fearn) 교구의 힐턴(Hilton) 마을에 있는 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영어를 처음 배웠다. 말할 나위 없이 두 언어(영어,갈릭어)를 배운 경험으로 그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다 쓸 수 있었다.
로스 목사의 어릴 때 성장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요소는 교회다.
해외에서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커다란 하나의 조직으로 생각했으나,18세기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는 여러 파로 갈라졌다. 이들 중에 하나가 '부속노회(Associate Synod)'다.
이 단체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나 지방노회와는 관련이 없다.
결과적으로 1847년에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가 되었다. 닉 마을에 이런 연합 장로교회가 있고, 거기에 로스목사 가족이 속하게 되었다. 연합 장로교회를 창설한 신앙 전통은 로스 목사의 신학사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로스 목사는 여덟 아이들 중에 맏아들이었다. 그의 형제는 도널드(Donald), 휴(Hugh), 윌리암(William), 알렉산더(Alexander), 캐더린(Catherine), 엘리자(Eliza)와 메리(Mary)다.
이 가운데 캐더린은 1873 말에 만주에 있는 오빠 존 로스에게 가서 그 후에 그의 동료인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결혼했다.
1860년대 중반 존.로스는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의 신학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 인버네스에 있는 조오지 브라운(George Brown) 목사의 전도사로서 봉사했다.
1868년 가을부터 선교활동을 목표로 두고 해외 선교부 총무인 윌리암 맥길(William McGill) 박사를 찾아갔다. 맥길 박사는 로스 목사의 뜻을 알고난 뒤 인도나 중국으로 선교를 하러 가는 것은 어떤지 물었다.
1872년 2월 27일에 해외 선교부는 그를 중국선교사로 선택하고, 3월 20일에 엘진(Elgin)과 인버네스의 노회는 그에게 안수하고, 3월 25일에 엠.에이.스튜아트(M.A.Stewart)와 결혼했다.
30세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거대한 모험이 시작되었다.
2. 존 로스 목사의 선교 방법
존 로스 목사는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해 공자, 사서삼경 따위를 공부하고 많은 문장을 암기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앞장서서 가르쳤다.
1877년의 선교 보고에서 재미있는 그의 활동방법이 나온다.
로스목사는 두 가지 특성을 가졌는데, 비판하는 사람을 다룰 때 이용된 그의 풍부한 관용과 중국문화와 풍습에 대한 지식이었다.
1876-1877년 중국의 젊은 학자들 몇이 그를 추방하려고 애를 썼다. 원망을 많이 들었으나 참았으므로 나중에 이 학자들은 그의 설교를 잘 수긍했다.
1873년 말 로스 목사는 잉커우(營口 ; 랴오닝성 남부 도시) 지방을 순회 전도 했는데, 이때 그의 선교방법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 나라의 가치관이나 신앙을 버릴 필요가 없고, 그보다는 그 문화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하도록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비기독교 지역에 있는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활동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전도활동을 통해서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선교사가 필요 없고 몇 명만 몇 군데 나누어 있으면 그 지방 신자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로스 목사는 사서삼경을 열심히 익히고, 전도할 때 이런 지식을 많이 이용했다.
그는 유교를 한 번도 비판하지 않고 사회의 훌륭한 가치관으로 칭찬하였다. 설교 때에는 이 윤리적 가치관을 중국인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한 번도 길가에서 설교하지 않고, 일부러 돈을 들여 마련한 교회당에서만 강연했다. 그는 먼저 모월 모일에 어떤 교회당에서 기독교에 대해 토의한다고 미리 알리곤 했는데, 먼저 간단한 강연을 하고 난 다음 어떤 사람이 질문하면 자세히 설명하는 방식으로 했다. 이 방법은 순회전도라기보다 중국 토착문화와 더 밀접하게 다가가는 방식이었다. 3세기부터 중국의 청담 (淸談 ; 중국 지식인들이 서로 예의를 지켜가며 맑고 아름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토론법)이라는 방법이 있었고, 그것을 광범위한 철학 문제들을 논하던 것이었다. 이런 청담식 전도 방법은 중국인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더 잘 전파되었다.
1874년 여름 아일랜드 선교사와 만주 지역을 나누어 선교하기로 합의했다. 아일랜드 선교사는 서쪽을, 스코틀랜드 선교사는 북쪽과 동쪽을 맡았다. 이 계약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로스목사는 두 교단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모든 교단의 갈등을 없애도록 하고 싶고, 특히 헌터 박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둘재 로스목사는 일찍이 스코틀랜드 설교의 중심지는 잉커우(營口) 시는 안되고, 만주의 수도이고 청나라의 둘째 큰 소시인 봉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로스목사는 그때 한국선교를 위해 많은 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동만주에서 선교할 수 있고 조선 국경선에 전도자를 보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3. 존로스 목사의 성경 번역사역에 나오는 중요한 한국교회사의 인물들
이응찬- 존로스와 맥킨타이어 목사의 한글선생이었으며 예수성교전서 번역에 공헌한 분
1874년 봄, 존 로스목사는 고려문에 두 번째 방문을 하게 되는 데 이때에 자신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름은 이응찬이었다. 로스는 한글선생을 고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확실한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로스는 1877년 이응찬과 함께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한 기초 한글교재(Corean Primer)를 간행하였고, 1878년 봄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당시 로스는 안식년(1879-1881)에 본국에 귀국하였다.
그가 하던 번역 사업은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매킨타이어는 이응찬을 한글교사로 삼고, 성경을 계속 번역하도록 했다. 이때 번역한 것이 로마서와 히브리서였다.
이응찬은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기를 원했기에 1876년 이성하, 김진기, 백홍준과 같이 세례를 받앗다.
1881년 로스는 안식년을 끝내고 다시 만주로 돌아온 후 이응찬은 로스와 더불어 성경번역 작업에 나섰다.
그 후 긴 세월을 통해서 로스와 이응찬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성서인 ‘예수셩교젼서’가 완간되었다.
그러나, 이응찬은 이 최초 한글성서의 반절 이상을 번역하였지만 그는 이 성경번역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83년 9월 이국 땅 봉천에서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번역한 성경은 후에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이응찬 부분 추가 /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자 이응찬
1876년 봄,로스는 한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름은 이응찬이었다. 로스는 한글선생을 고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불확실한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로스는 1877년 이응찬과 함께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한 기초 한글교재(Corean Primer)를 간행하였고,1878년 봄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당시 서양인을 돕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응찬이 로스를 도와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안 어떤 한국 사람이 이응찬을 고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인 1879년 봄,이응찬은 다시 만주로 왔다. 당시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귀국하였다. 그가 하던 번역사업은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매킨타이어는 이응찬을 한글교사로 삼고,성경을 계속 번역하도록 했다. 이때 번역한 것이 로마서와 히브리서였다.
이응찬은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편쟁이로 의심받았고,식사 때에는 중국 화주(火酒)를 곁들이는 습관이 있어서 그가 출석하던 중국교회신자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하였다. 이응찬의 세례는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응찬은 짬을 내어서 고향을 방문하였고,매킨타이어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응찬은 고향에 가서 성경을 깊이 연구한 다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1879년 여름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인으로서는 세 번째 세례였다.
1881년 로스는 안식년을 끝내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이응찬은 로스와 더불어서 성경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후 긴 세월을 통해서 로스와 이응찬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성서인 ‘예수셩교젼서’가 완간되었다. 이응찬은 이 최초 한글성서의 반절 이상을 번역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성경번역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1883년 9월 이국 땅 봉천에서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번역한 성경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2005.5.6. 국민일보/박명수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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