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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탈의 행위는 그녀자신도 분명히 밝혔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틀에 따라 자기 자신의 외모와 행동, 목소리를 바꾸도록 강요당했던 모두를 위한 항변이었다. 즉 이 ‘연행’은 ‘짧은 반바지’를 입는 것이 논문발표장에 적절한 것이냐 마느냐를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적절한 옷차림이라는 규정의 본질, 그리고 본질에 깔려있는 권력과 억압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였다.」
서양 중세 미술과 종교, 패션의 관계를 탐색해보겠다는 이 주제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갈라쇼에 등장한 연예인들이 가톨릭의 대표적인 상징들 – 십자가, 예수의 가시 면류관, 성모 마리아 도상, 최후의 심판, 사제와 주교의 옷 등을 자유롭게 변형시킨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은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종교의 상업화라며 눈살을 찌푸렸고, 또 어떤 이들은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생각하며 갈라쇼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전시회에 40여벌의 의상을 빌려준 바티칸을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있었고, 이미 현대의 아이돌(idol)인 이들에게 종교적 아우라까지 씌워줘야겠냐고 빈정거리는 이도 있었다.
이러한 비난의 목소리들 대부분이 종교는 신성한 무엇, 물질과 세속을 초월한 무엇이어야 하며, 그러기에 세속적인 것 중에서도 가장 세속적이고 허영과 욕망의 덩어리인 패션과 연예인들이 종교와 뒤섞인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종교를 세속과 떨어진 고귀한 무엇으로 규정해놓고, 패션 –특히 여성들의 패션과 파티는 그 정반대 편에 있는 무엇으로 놓는 이분법에 기반한 것이기에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실상 대부분의 종교는 세속의 일들에 관여하며, 권력자들의 파티에도, 여성들의 옷차림에도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이분법은 결국 무엇이 누구에게 적절한 것인가를 규정하는 힘의 경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 실제 종교의 모습과는 별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멧 갈라”에 등장한 몇몇 여자 연예인들의 옷차림 특히 그들의 머리 장식은 흥미로웠다. 가수 리한나의 빛나는 주교관과, 가수 마돈나의 십자가 관, 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의 예수 탄생 마굿간 장면이 장식된 높고 화려한 관, 가수 솔란지 놀스의 검은 머릿수건 듀렛 위에 올려진 황금빛 후광 등. 성모 마리아의 왕관 이외에는 가톨릭 전통의 여성용 종교 의복에서 이렇게 화려한 관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또 주교관이 여성의 머리 위에 씌워진 것을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 여성들의 당당한 머리장식에는 무엇인가 전복적인 느낌이 있었다.
2. 그런데 이렇게 까지 화려한 것은 아니더라도 가톨릭 수녀들도 관을 쓴 적이 있다. 스웨덴의 비르지타(Bridget of Sweden, 1303-1373)는 흰 린넨의 둥근 테 위에 두 개의 밴드가 교차하며 그 위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붉은 점이 박힌 관을 썼다. 지금도 그녀가 창시한 수도회의 수녀들은 비슷한 형태의 머리장식을 쓴다. 또한 중세 북부 독일의 수녀원에서도 붉은 십자가가 수놓인 비슷한 형태의 관을 썼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은 그들이 종신 서원을 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의례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일부 수녀회에서는 종신 서원시 화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에 화려한 장식을 부착한다던지 금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of Bingen, 1098-1179)는 축일에 수녀들에게 십자가와 어린양이 장식된 금관을 쓰게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으며, 15세기에 황금으로 장식된 관을 썼던 수녀원장들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사학자 캐롤라인 W. 바이넘(Carolien W. Bynum)은 15세기 독일 빈하우젠(Wienhausen) 수도원 수녀들이 머리에 썼던 관 및 성모상에 관을 씌우는 관습에 대해 이야기하며, 관 쓰기/관 씌우기에서 이 여성들의 행위주체성을 엿보기도 했다. 중세 수녀들의 의복은 여성의 행위주체성보다는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 및 억압, 그리고 이를 순응하는 종교적 공모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그 와중에도 어떤 이들은 스스로의 머리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의 상징을 올리며 이 억압의 틀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3. 얼마전 미국 코넬 대학교의 <공공장소에서의 연행(Acting in Public)>이라는 수업에서 논문 발표 예행 연습 중 담당교수로부터 ‘너무 짧은 반바지’가 논문 발표라는 장소의 성격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라는 지적을 받은 여학생이 이에 항의하는 행위로서 겉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발표를 했던 일이 있었다. 그녀는 이 일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리고 실제 논문 발표날에도 똑같이 옷을 벗고 속옷차림으로 발표했으며, 발표를 듣던 학생들 일부도 그녀의 취지에 동감하며 이 탈의 행위에 동참했다. 문제가 된 수업이 ‘공공장소에서의 연행’, 즉 나의 어떤 페르소나를 어떤 행위로 어떻게 사회 속에서 구현하는가와 관련된 수업이라는 것은, 이 사건을 단순히 옷차림에 대해 지적받은 학생의 감정적 대응이라고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녀의 탈의 행위는 그녀자신도 분명히 밝혔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틀에 따라 자기 자신의 외모와 행동, 목소리를 바꾸도록 강요당했던 모두를 위한 항변이었다. 즉 이 ‘연행’은 ‘짧은 반바지’를 입는 것이 논문발표장에 적절한 것이냐 마느냐를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적절한 옷차림이라는 규정의 본질, 그리고 본질에 깔려있는 권력과 억압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였다.
옷은 내가 편한 대로 내 맘대로 입기 마련이라고도 하지만, 옷입기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었던 적은 거의 없다. 옷입기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각각의 종교가/사회가 만들어 놓은 특정한 이미지의 틀에 나를 맞추거나 혹은 그 틀에 저항하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그러기에 매일의 옷입기는 일상 속에서 이러한 공모와 저항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줄타기의 저항마저도 어떤 사회적/종교적 맥락에서는 목숨을 걸고 행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화선_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522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은 한국종교문화연구소(http://kirc.or.kr)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