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놈 앞잡이들 O호텔의 아담하게 꾸며진 객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넓은 방안은 산뜻하게 꾸며져 있었고 방안의 온도는 쾌적할 만큼 따스했다. 슬아가 앞장 서는 대로 따라 다니기만 했다. 어차피 그들의 계획에 철저하게 말려들 결심이었다. "샤워해." 신혼여행 온 여인처럼 슬아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같이 하자."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대답하기 전에 벌써 내 손이 그녀의 보드라운 속살 거머쥐고 있었다. "살살 다뤄 줘. 아프단 말야." "그땐 그때고." "들어가." 그녀를 벗겼다. 아무리 보아도 빼어난 몸매였다. 내가 나신을 본 것 가운데 이처럼 빼어난 여자는 없었다. 슬아는 옷을 하나씩 벗겨 주었다. 슬아가 먼저 욕실로 들어가길 바랐지만 그녀는 철저한 감시자의 역활을 하는 것 같았다. 숨기고 다니던 표창을 한 개쯤 손쉬은 머리맡이나 발치에 감추어 두고 싶었다. "문 잠갔어?" 나는 슬아가 벗기는 대로 내버려 둔 채 부끄러움을 삭이듯 이렇게 물었다. "별 걱정 다 해. 호텔 첨야?" "난 순진하니까." "쑥맥인가 봐. 다혜가 그렇게밖에 대접해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다혜는 한 번도 나를 남자로 받아들여 준 적이 없었다. 두사람은 모두 나신을 드러냈다. "멋져." 감상하듯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그녀를 번쩍 안았다. 욕실의 따스한 물은 두 사람의 욕정만큼 철철 넘치고 있었다. 아늑한 욕망의 방이라고 해야 옳을 그런 욕실이었다. 그녀는 비누칠한 몸으로 자꾸 장난을 걸었다. 나도 짖궂게 굴었지만 긴장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렇게 발가벗은 채 욕실에 들어있다가 공격을 받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슬아는 대담한 여자였다. 남자를 다룰 줄 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신비를 깊숙하게 터득한 여자 같기도 했다. "넌 보통이 넘어." "피이, 자기는." "나야 순진 빼면 고슴도치지." "난 고슴도치가 좋아." "여러 사내 잡았겠구나." "내가 점 찍어서 못 먹어본 사내는 없어." "지금 나도 식사중이냐?" "내가 먹히는 중이잖아." 간드러질 줄도 아는 여자였다. 그리고 남자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여자이기도 했다. 이런 탐욕의 현장을 넘나들었지만 이만큼 세련되고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여자는 처음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이만하면 우리 나라에서 눈뜬 여자들이 눈독 들일 만하겠는데?" 슬아는 서슴치 않고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술 부리듯 나를 다루었다. 나도 사정 없이 그녀를 다루었다. 그녀는 동물처럼 교성을 질렀다. 하나님. 뭘 보슈? 빤히 알면서. 우리는 수건 한 장도 걸치고 나오지 않았다. 그녀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율동했다. 슬아의 육체가 흐느적거렸다. 감미로운 음률처럼 율동했다. 그녀의 육체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담배를 꺼내는 척하며 재빨리 허리띠를 만져보았다. 표창은 감쪽같이 없어져 버렸다. 웃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비상용 표창도 없어졌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무슨 담배야?" 그녀는 칭얼거렸다. 그래도 밉지 않았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좀 식혀야지." "남자가 뭐 그래?" "널 기절시키려면 준비 좀 해야지." "불을 끌까?" "난 끄는 게 싫은데." "부끄럽잖아." "몸뚱어리야 다 마찬가진데 머." 그녀는 여전히 투정을 부렸다. 우리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나신을 드러낸 채 담배를 그녀는 담뱃갑 사이에 감추어 놓은 두 자루의 표창과 라이터, 볼펜과 옷에 붙어있는 단추가 비상용으로 사용하는 무기라는 걸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슬아는 담배를 피우면서도 계속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법사의 손가락 같았다. 손가락만 가지고도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여자였다. 머리맡에 손길이 쉽게 닿도록 담뱃갑을 올려 놓고 불을 껐다. "불을 끄고 무슨 재미야? 난 자기 걸 다 보고 싶은데." 슬아가 한 말이었다. 불을 끄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들의 작전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끝낸 나는 슬아를 덮쳐 눌렀다. 대번에 숨이 가빠지는 여자였다. 수 있는 몸놀림을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육체는 금방이라도 문풍지처럼 울 것 같았고, 내 아랫도리는 활화산처럼 치솟아오를 것 같았다. 우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숨가쁘게 달렸다. 언덕을 기어오를 땐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숨가쁜 경주였다. 그러나 결승점은 길었다. 나는 슬아에세 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무너지지 않으면 나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를 몇 번이고 거꾸러 쓰러뜨릴 때까지 나는 침몰당하지 않으려고 자꾸 다른 생각을 했다. 그녀에게만이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육체를 가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일본 애들이 뛰어 올것 같다는 생각만 하며 치닫던 열정의 꽃이 나는 결코 질 수 없었다. 슬아는 비명을 질렀다. 견딜 수 없는 침몰의 순간에 그녀는 나를 쥐어뜯었다. 짐승의 소리였다. 그녀는 축 늘어졌다. 그러나 난 멈추지 않았다. 슬아를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남자를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하게 만들고 싶었다. "살려 줘, 제발." 숨 넘어가듯 그녀가 애원했다. "내가 기절시킨다고 했지?" "알아. 내가 졌어. 기절할게." "안돼. 넌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죽어가고 있는 거야." "제발 살려 줘. 정말 죽겠어."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탁탁 끊었다. 이 여자를 이렇게 다룰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내 오기일지 모른다. 내 육체의 노예를 만들어 버리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나를 계속 충돌질하고 있었다. "살려 줘, 제발. 제발...... 아아...... ." 땀으로 범벅이 되어 그녀는 늘어져 버렸다. 나는 그때서야 내 욕망, 사내다운 욕망을 한순간에 쏟아버렸다. "아아...... 아아...... ." 그녀는 말할 힘조차 없었는지 길고 여린 비명으로 숨을 끊었다. 온통 수분이었다. 땀과 수액과 욕망의 분비물뿐이었다. 슬아는 아예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져 뒹굴었다. 나는 승리자처럼 이제 빼어 물었다. 담배가 달디달았다. 쾌락의 꼭지점을 점령한 내 육체도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승리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다혜에게 풀지 못한 욕정의 한을 슬아에게 풀어 버렸는지 모른다. 아니, 다혜와 슬아를 한꺼번에 정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참만에 슬아는 흐느끼듯이 말했다. "정말 날 죽일 셈였어?" "그래" "지독한 남자." "세상엔 이런 남자도 있다는 걸 알아둬." "난 죽는 줄 알았어." "죽이려다 봐 준 거다." "...... ."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엉금엉금 일어나 "날 데려다 줘." 슬아는 욕실을 가리켰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그녀를 침대로 던졌다. "또?" "널 기절시키겠어." "조금만 봐 줘. 정말 좀...... ." 슬아가 애원하듯 말했다. 나는 사실 그녀가 두려웠다. 그녀의 기를 꺾어놓고 싶었다. "봐 주래?" "응 제발...... ." 나는 그녀를 안아다 욕실에 넣고 샤워기를 틀었다. 그녀가 벌렁 누었다. 나는 거품을 마구 일으켜 닦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몸을 감싼 대형 수건의 감촉이 싫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방 안의 분위기를 훑어보았다. 문고리를 눈여겨 봐도 이상이 들었다. 벗어놓은 옷가지도 그대로 있었고 흐트러진 침대도 그대로 였다. 만약 사람이 몰래 들어와 숨을 만한 곳이라면 침대 밑 뿐이었다. 일본 애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정신 없이 슬아와 뒹굴 때 공격하는 게 최선이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순간에 공격하지 않았다. 함부로 덤벼들지 않으려는 조심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까 들어왔을 때 눈치 채지 않게 침대 밑에 발을 넣어보고 유리창의 커튼을 점검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쾌락의 늪을 헤매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침대 밑을 일찌감치 손댈 생각도 들었고 끝까지 두고 지켜볼 배짱도 생겼다. 담배 한 대를 빼어 불을 붙이고 침대를 그러나 침대 밑이 자꾸 불길해 보였다. "개운하지?" 슬아가 물었다. 수건 한 장으로 사람이 훨씬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기가 남아 있는 그녀의 몸은 내게 또 욕망의 사슬을 던졌다. 욕망이란 주체할 수 없는 일에 열중하고 나면 작은 후회의 덩어리가 쌓이는 것인데 슬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묘한 흡인력을 지닌 여자였다. "여러 남자 잡았겠다." 나는 정말 그녀의 몸을 칭찬하고 싶었다. "여러 여자 녹였겠는데 멀." 슬아도 지지않고 말했다.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널 갖겠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말야." "그래." "다혜는?" "헤어졌잖아," "정말 헤어진 거야." "네가 필요해." 나는 그녀의 입술을 힘주어 빨아들였다. 슬아도 꿈틀거리며 받아들였다. 나는 지금의 내 기분이 거짓말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육체를 그녀에게 팽개쳤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가 원하던 처녀를 팽개쳐 버렸다는 것과 육체의 유희를 터득했다는 사실, 내 육체를 통해서가 아니라다른 사내들에게서 터득했다는 일종의 질투심이 남아 있었다. "이미 헤어졌어." "왜 날 선택하지?" "내가 좋아하니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내 기분이니까." 나는 반쯤은 의도적이지만 나머지 반은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오싹해졌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장난일 순 없지만 내가 슬아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묘한 내 이중성이었다. 슬아를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해치기 위해 나를 선택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슬아를 완벽하게 잡아끄는 방법도 일본 애들과 교묘한 싸움에서 기선을 잡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혜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여자에겐 완전한 결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 다음에 어떤 낯으로 다혜를 쳐다볼 수 있을까?" 하나님.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다시 불 붙는 육체를 끄고 싶었다. 악착같이 육체를 지킨 다혜에 대한 가증한 복수심이기도 했지만 슬아를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육체에 있어선 어느 경우도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슬아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남겨 주고 싶었다. 이게 사내들의 갖는 못된 자만심인지도 모른다. 달랐다. 침대 밑에 숨어 있을 낯선 사내를 자극하고 싶었고 그런 사내를 숨겨놓고도 육체의 잔치를 재촉하는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슬아는 가쁜 숨을 끊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겠지." "미워." "노래하는 거야?" "몰라." 코 먹은 소리였다. 그렇다고 내 격정이 멈추진 않았다. 슬아를 실험동물처럼 다루고 있었다. 슬아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다루기만 했다. 발치 끝으로 금세 칼날이 삐져 나올 것 같았지만 없었다. 이건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행위였다. 그저 승부욕뿐이었다. 슬아의 숨을 멈추었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숨소리 끝엔 그녀의 처절한 신음이 묻어나왔다. 슬아는 흐트러졌다. 결승점에 도착한 장거리 선수가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졌다. 목이 타는지 물병을 가리켰다. 나는 누워 있는 그녀에게 물병을 쏟았다. 침대가 흠뻑 젖도록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물을 마셨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우리는 영원히 말하지 않을 것처럼 누워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나를 탈진시켜 그들 계획대로 처치할 생각을 할 것이고 침대밑과 밖에서 기다리는 녀석들은 내가 잠들기를 기다릴지 모른다. 한참만에 슬아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내 가슴 속엔 준비된 대답이 있었다. "아직 이걸 사랑이라고 얘기할 순 없잖니. 좋아한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럼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어." "살아있는 동안이라면." "금방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왜 이래?"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 너 같은 여자와 즐기다가 죽는 게 소원였지만." "그러니까 만났잖아." "하나님은 참 묘하단 말야. 어떻게 남자와 여잘 요렇게 정교하게 만들어 놨는지 몰라. 딱딱 들어맞게 만든 걸 보면 장난꾸러기 아니면 잔인한 마술사 같애." "샤워할까?" 슬아가 땀투성이인 내 가슴을 입술바람으로 불며 물었다. "샤워할 힘도 없어." "짖궂더라." "자고싶어." "끈끈해서 어떻게 자려고.내가 닦아 줄게." 나는 마지못해 따라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침대 밑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떤 녀석인지 침대 밑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참느라고 애를 썼을 것 같았다. 물의 온도를 맞춘 슬아가 내 귀를 잡아 당겼다. "날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 "책임져야지." "맹세할 수 있지?" "맹세한다." 슬아는 내 눈을 응시했다. 나도 지지않고 "일본애들이 뒤쫓는 거 알아?" "침대 밑에 한 놈 들어 있을 거야." "뭐?" "날 속이지 마." "어떻게 알았어." "네가 날 유혹할 때부터 알았지. 그 뒤를 우리 애들이 또 쫓고 있으니까." "미안해. 난 돈이 필요했었어." 슬아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감추거나 비굴하게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필요해서 이런 짓을 맡았니?" "그건 묻지 마." "좋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되는거냐?" "나도 잘 몰라. 걔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어떻게든 힘 빼서 재우기만 하랬으니까." "민감해서 안 될 거라고 하던데. 약은 없었어." "빨리 씻는 체해." 우리는 대충 몸을 씻었다. "미안해. 이럴 생각은 아녔는데. 내가 일본 애들 앞잡이가 된다고 생각하니 한심한 생각도 들었어. 그러나 난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어. 날 이해할 수 있지?" "좋아.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라. 나를 해치우고 나며 반드시 증거를 없애기 위해 너를 해치우는 건 그런 세계의 원칙이라는 걸." "무서워 죽겠어." "내 말대로 해. 너도 살아나고 싶으면 내가 잠든 체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신호를 해서 걔들이 맘 놓고 나타나게 해야 돼." 슬아는 나약한 여자였다.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아직 알 순 없지만 그런 조건에 나를 유혹해 놓고 후회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녀가 후회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나는 쓸데없는 육체의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우린 밖으로 나왔다. 나를 감시하고 있는 일본 애는 한 명 뿐이고 나머지는 그들의 하수조직에서 제법 악명을 떨치는 애들이란 것만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슬아는 눈짓으로 옷을 입으라고 했다. 나는 재빨리 옷을 입었다. "왜? 가려고 그래?" "가야지. 누나가 기다려." "왜 이래? 그런 난 어떻게 하라는 거야." 슬아가 매달려 떼를 쓰는 시늉을 했다. "집에 가야 돼. 어서 옷 입어." 가라는 거야?" 슬아가 앙칼지게 대꾸했다. 그녀는 배우처럼 굴었다. 침대 밑에 있던 녀석이 당황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참 정말 안 갈래?" "우리 오늘 밤은 여기서 자. 난 지금 돌아갈 수도 없단 말야." "참, 대신 아침에 일찍 나가야 된다. 약속이 있어." "그러지 머." 나는 옷을 벗는 시늉을 했고 슬아는 그 사이에 재빨리 옷을 입었다. 그리고 우리는 태연하게 침대 위에 누웠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말을 시켰다. 침대 밑에 있는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잠들 때까지 침대 밑의 사내를 기다리게 성깔에 안 맞는 짓이었다. 나는 정면 대결을 원하는 놈이지 뒤통수를 갈기는 짓은 싫었다. 슬아가 잠자코 있으라고 손을 잡았지만 내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어이, 침대 밑에 있는 친구. 그만 나와 침대에서 편히 주무시는 게 어떨까?" 잠잠했다. 슬아가 내 뒤에 바싹 붙어서 겁먹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웬만하면 나오쇼. 사내가 쩨쩨하게 숨어 있어서야 쓰겠소. 술이나 한잔 합시다." 침대가 흔들렸다.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왼손에 날선 칼 한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듬직한 체구에 긴 머리였고 청바지 주머니가 불룩했다. "왼손잡이시군. 과일은 준비가 안 됐으니 치우시지 그래." 신호 같았다. 슬아가 두어 발자국 옆으로 비켜섰다. "과일 없다고 했잖아. 거기 얌전하게 앉아서 침대 밑에서 느낀 얘기나 하지." 사내는 말이 없었다. 표정이나 자세가 보통 칼잡이는 아닌 것 같았다. "가만 있어 봐. 할 얘기가 있을 거 아닌가. 침대 밑에 있으면 그렇게 희한한 얘깃거리가 있었을 거 아닌가, 이 사람아." 사내는 그래도 말이 없었다. 칼든 손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 순간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걸 느꼈다. 우습게 넘길 칼잡이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왠만한 녀석이라면 일어서지도 않겠는데 녀석의 동작이나 눈빛은 전문가 같았다. 나는 재빨리 허리띠를 풀었다. 녀석이 칼을 휘둘렀다. 매서운 바람소리가 일었다. 공격의 심도로 미루어 살상의 뜻보다는 체포의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칼을 피하며 나는 허리띠로 사내의 무릎을 감아 내던졌다. 칼을 쥔 손목의 급소를 뒤꿈치로 때렸다. 칼날이 바닥에 누웠다. 뒤꼭지를 잡아 앉혔다. "으으윽 으으으...... ." 사내의 신음소리가 절규처럼 들렸다. 급소를 맞고도 버둥대는 걸 보면 보통 단련된 사내는 아니었다. 나는 사내가 벙어리라는 걸 눈치챘다. 급소를 누르고 물었다. "애들 어딨어?" 고개를 저었다. 동물처럼 신음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사내였다. 혈을 지그시 눌렀다.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고개는 연신 흔들었다. 이 정도면 입을 열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벙어리가 확실했다. 사내는 조정하는 애들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나를 묶어서 어떻게 처리할지도 모른 채 숨어 들어온 것 같았다. 이 사내를 보낸 것은 일본애들의 치밀한 작전 같았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든 뒤를 캐나갈 수 없게 하겠다는 전술 같았다. 몇 번 드세게 다루었지만 이 벙어리 사내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국인이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놈을 위해 칼잡이 노릇을 한 번만 알았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사내의 왼팔 혈을 조금 더 풀어 주었다. 괘씸한 생각을 하면 한동안 손목을 못 쓰게 해 주고 싶었지만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몇 푼에 팔려야 하는 사내가 안 됐다 싶었다. 그리고 사내는 동족이었다. 비록 일본측의 앞잡이 노릇을 하곤 있지만 내 동족이며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사내였다. 더구나 동족의 언어마저 잃어 버리고 살아야 하는 벙어리였다. "가라. 그리고 명심해라. 굶어 죽더라도 일본 놈 앞잡이는 하지 마라." 사내는 왼팔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어 주자 뒤돌아 꾸벅 절을 하고 복도를 뛰어갔다. 알아들었을지 모른다. 일본 애들의 "이젠 어떻게 하지?" 슬아가 저질러 놓은 일이 크다 싶었는지 질린 얼굴로 물었다. "내가 먼저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 "보통 애들이 아닌 것 같은데." "특별하면 특별하게 해 줘야지." 우리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복도로 나왔다. "내 차는 제대로 왔겠지?" "왔을거야." "당분간 숨어 있을 생각해." "무서워 죽겠어." "내가 숨겨 줄 테니까 걱정말고. 너 하나 책임 못 질 수야 없잖아." 슬아는 팔을 낀 채 따라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슬아는 귓속말처럼 말했다. "어디선가 숨어서 우릴 볼 것 같애." "걱정 말고 따라와." 호텔 로비를 빠져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몰려드는 깊은 밤이었다. 한 녀석이 지나가는 것처럼 다가섰다. "애들 찾았냐?" "예." "몽땅 잡을 수 있겠지?" "그럼요."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삼선동 벙어리패도 끼여 있어요." "어느 쪽이냐?" "오십삼 호하고 커피수." "내가 아래를 맡을 테니까 너희들은 위를 맡아." "예." 녀석은 신이 났는지 뛰어갔다. 우리 애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애들을 많이 동원한 것 같았다. 나는 안내하는 녀석을 멀찌감치 따라 들어갔다. 슬아가 자꾸 몸을 웅크렸다. "이 여자를 내 차로 데려가라. 잘 지켜 줘라." 한 녀석이 슬아를 데리고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걸 확인하고 커피수으로 들어갔다. 나는 세명의 사내가 앉아 있는 차탁 옆으로 가 무조건 앉았다. "내가 장총찬요. 얘기 좀 합시다." 놀란 듯 벌떡 일어나는 녀석들의 옷을 잡아 앉혔다. 우리 애들이 옆으로 모였다. "당신들 찾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왔소. 그러니 얘길 해 봅시다." 겁먹은 듯하던 사내들이 주위를 훑어보고 "너희들은 나가 있어라."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몰려든 애들을 내보냈다. "반갑습니다. 난 아베요." 손을 내미는 사내는 복장이나 용모가 단정한 일본 애였다. 우리말 발음이 제법 똘똘했다. "그럼 당신들은 누구요?" 나는 그 옆에 있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사내들이 머뭇거렸다. "내 친구들입니다." "한국인요?" "그래요." "주먹깨나 쓰게 생기셨군 그래."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한 사내가 점잖게 말대꾸했다. 커피수엔 "나가실까요? 아베 선생." "왜요?" "여기서 시끄럽게 굴고 싶지 않소.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어딜 가자는 거요?" "조용한 데 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합시다." 아베란 사내가 제법 당당하게 나왔다. 옆에 있는 사내들도 기죽지 않으려고 어깨를 폈다. "아베 선생. 여기서 까불지 않는게 좋아. 따라와."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옆에 있던 사내가 차탁 밑으로 권총을 내밀었다. "까불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나는 피식 웃었다. "임마 너 한국 놈이지?" 권총 내민 사내가 코트를 벌리며 일어섰다. 권총 끝이 조금 보였다. "한번 쏴볼래? 이 넋 떨어진 새끼야." 나는 그 순간에 차탁을 밀었다. 그리고 뛰어 일어나며 세 녀석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카펫 바닥에 길게 뻗어 누웠다. 애들이 달려들어 권총과 칼을 빼앗았다. 커피수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기만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사내들은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애들이 재빨리 커피수 직원들을 잡고 뭐라고 말했다. 사복경찰관인데 범인을 잡는 거라고 거짓말 했을 게 빤했다. 애들은 세 사내를 밖으로 끌어내 차에 나누어 태웠다. 조금 뒤에 두 명의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나왔다. 우리 애들한테 "저쪽 계곡으로 끌고 와라." 나는 슬아만 태운 채 앞서 차를 몰았다. 애들이 급하게 O호텔 마당을 빠져나갔다. 꾸물거리다가 시끄러운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슬아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것인지 벌어진 일이 너무 엄청나서 그러는지 말이 없었다. "할 말 없어?" 나는 짖궂게 한마디 던졌다. "미안해. 정말...... ." "그런 것, 이제 잊어 버려." 나는 뒤차와 거리를 맞추며 속도계를 보았다. 오르막길이어서 속력을 더 낼 수 없었다. 계곡의 좁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끝까지 올라갔다.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여름철엔 피서객들이 있겠지만 이런 겨울철엔 하나님. 본때를 보여 주겠습니다. 일본 애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철 없는 소녀들 빼다 팔아먹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야 없잖습니까. 벌써 하늘이 진노했어야 옳을 일인데도 하나님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악착같이 그런 신판 정신대를 막아야 할 내 동족들은 방관자가 되었으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내들도 많습니다. 돈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이 썩어빠진 사내들을 그냥 둘 수야 없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악마구리 같은 녀석들까지 사랑하고 있는겁니까? 농락당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벼락 맞아요. 다섯 명의 사내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슬아는 차창으로 얼굴을 내민 채 우리들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봐, 아베 선생. 이래도 바른 대고 대지 않을 거야?" "하겠다고 했잖습니까. 제발 이러지 마십쇼. 할 테니까요." "그럼 읊어봐라." 아베는 잠깐 뜸을 들였다. 다른 녀석들이 당하는 꼴을 보았기 때문에 혼이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아는 것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잔말 더 하면 불알을 뽑아 버릴 테다. 네 조상 놈들이 이 땅에 들어와 어떻게 했는지 넌 알겠지." "전 그런 감정 하나도 없습니다." "나도 없다. 그러나 너 같은 놈만 보면 피가 끓는다. 패죽이고 싶지만....." "우린 다른 건 몰라요. 다만 우리 조직만 압니다." "지금까지 네 손으로 팔아먹은 처녀들이 몇 명이냐?" "삼백 명도 안 됩니다. 다 자원해서 갔습니다. 물어보세요." "그렇다 치자. 일본으로 데려다가 어따 파냐?" "파는 게 아니라 취직시킨다고 했잖습니까." 술집이나 창녀촌에 넘기냐?" "...... ." "개새끼들...... ." 나는 또 사정없이 아베 녀석을 쥐어박았다. 데굴데굴 구르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무릎을 꿇고 코가 땅에 닿도록 빌기만 했다. "옷 벗겨." 애들이 달려들어 다섯 명의 옷을 다 벗겼다. "박아 버려." 사내들 다섯 명은 어스름 달밤에 계곡 물 속으로 처박혔다. 몽둥이 든 애들이 목까지만 물 밖에 나오도록 사정 두지 않고 갈겼다. "살려만 주세요. 다 말합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쇼." 아베가 이빨을 덜덜 떨며 무릎을 꿇고 꿇었다. "너희 네 놈은 쪼그려 앉아. 아베 이 자식은 무릎을 펴지 못하게 해라." 나는 내 동족이 아무리 밉더라도 무릎 꿇고 비는 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베 녀석이 먼저 쓰러졌다. 그리고 뒤따라 사내들이 주저앉았다. "건져내서 주물러 줘." "뒈지게 냅두죠." 애들은 중얼거리면서도 아베와 사내 녀석들을 꺼내 물기를 닦아 주고 주물러댔다. 옷을 겨우 입혀 놓자 아베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시면 뭐든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빨까지 딱딱 부딪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른 사내들을 먼저 차에 태우게 한 뒤에 아베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 두목은 너냐?" "예." "조직은 몇 개 파냐?" "세 갭니다." "다른 팀도 있지?"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파는 가격은 얼마씩이냐?" "대중 없습니다. 현지에서 결정하니까요. 그쪽 형님들이 정하니까요." "여기 데리고 있는 애들은 몇 명이냐?" "한 육십 명쯤 됩니다." "뭐해서 먹고 사냐?" "...... ." "너 뒈지고 싶지?" "아닙니다. 말씀 드린다고 했잖아요. 제발 저 좀 따뜻한 데로 데려가 주세요. 죄다 말씀 "좋다. 수 틀리게 나오면 넌 영광스럽게 시체로 돌아갈 거다." "제발...... ." 나는 녀석을 차에 태웠다. 훈훈한 기운이 있어도 녀석은 계속 떨었다. "춘삼이 형 있는 데로 와라." 나는 먼저 출발하며 일렀다. 애들이 모두 차에 올라탔다. 오늘 시작한 김에 조직의 뿌리를 아주 캐낼 참이었다. 슬아는 시무룩해서 차창밖만 쳐다보았다. 밤이 깊어 차량의 행렬이 많이 줄어든 거리였다. "아베 말고 또 있지?" "저 친구 말도 더 있어. 누군지 모르지만 저 친구가 쩔쩔매는 사람야. 덩치도 크고 미끈하게 생겼는데 만날 때마다 데리고 다니는 여자애가 달랐어." 알아서 숨겨 줄 테니까." "괜찮을까?" "믿어도 돼." "다혜한테 미안해." 순박한 계집애처럼 말했다. "다혜 얘기 그만해." 나는 화난 듯이 소리 질렀다. 한참 열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몰랐지만 호텔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직도 비행기를 타고 있을 다혜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춘삼이 형은 자리에 없었다. 나는 애들을 돌려보내고 몇 명만 자리를 지키게 했다. 탈진상태가 된 아베와 사내 녀석들이 체념한 듯 줄줄 쏟아 놓았다. 일본의 지시를 받는 총두목은 사사키란 친구였고, 아베는 한국말과 실정을 잘 알기 그들이 나를 노린 것은 한 개의 조직이 무너진 뒤였다. 삼선동 애들은 돈으로 매수하여 세력 다툼인 것처럼 위장한 것도 그들의 치밀한 계획이었고. 다혜 친구인 슬아를 매수한 것도 일본 유학과 경제적 도움을 미끼로 나를 유혹하게 한 뒤에 삼선동 애들에게 인계할 작전이었다는걸 알았다. 일본 조직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큰 것 같았다. 아베도 점조직에 불과해 사사키 이상의 조직과 규모는 알지 못했다. 답답한 건 나였다. 아베 일당을 잡았지만 철저한 점조직이어서 사사키란 총두목의 정체나 소재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아베가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일본의 연락처가 후쿠오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후쿠오카에 연락할 수 있겠지?" "사사키는?" "그건 어렵습니다." "좋다 연락해라. 내가 너희들 한국내의 조직을 풍비박산냈다고." "지금 연락하겠습니다." 아베는 전화를 붙잡고 수첩에 적힌 대로 전화를 연결했다. 일본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대충 설명하는 것 같았다. "직접 통화하고 싶답니다." 아베가 전화기를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임마 한국말로 해." 나는 소리를 꽥 지르고 전화기를 아베에게 넘겨 주었다. 그쪽 녀석은 한국 말을 할 줄 몰랐고 나는 일본 말을 알아 듣지 못했다. "그래, 너희들 조직의 씨를 말리겠다고 해." 아베가 일본 말로 지껄였다. 그리고 난처한 얼굴로 돌아섰다. "저 쪽에서 끝까지 복수를 하겠답니다." "개자식들. 정정당당하게 붙어보자고 해라. 뒤통수 치는 놈들 하곤 상종도 하기 싫으니까." "그럼 초청하겠답니다." 아베가 메모지를 내밀고 말했다. "날 오란 말이냐?" "사사키 형님을 만나시랍니다. 그러면 아주 정중하게 모시겠답니다." "좋다. 가겠다고 해라." 아베가 한동안 일본어로 메모를 끝내고 나더니 씨익 웃었다. "안부 드립니다." "고맙다 쪽발이들아. 이렇게 전해라." 아베가 씨익 웃더니 몇 마디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사키는?" "내일 제게 연락하도록 하겠답니다." "그럼 돌아가라." "저만요?" "빨리 꺼져 임마. 그리고 내일 이곳으로 연락해." 아베는 문을 열고 나갔다. 부석부석한 얼굴이 가련해 보였다. 남은 사내 녀석들은 겁먹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이젠 무릎 꿇어라." 사내들이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기운 빠진 표정이었다. "이 속 없는 자식들아. 무슨 짓을 못해서 짓을 해야 되는지 생각해 봐라. 일제시대에 정신대로 끌려간 여자들이 그만큼 당했으면 됐지 더 이상 어쩌라는 거냐? 네 여동생이 팔려갔다고 생각해 봐, 이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아. 쪽발이는 그렇다 치자. 너희들은 네 동족을 팔서 어쩌자는 거냐? 차라리 피를 팔아 목구멍을 지킬 일이지." "형님, 다시는 이런 짓 않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한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녀석의 턱을 올려붙였다. "전부 엎드려라." 사내들은 엎드렸다. 몽둥이로 화가 삭을 때까지 때렸다. 사내들이 쭉 뻗은 채 거품을 쏟았다. 그들은 그동안 처녀들을 팔아먹던 수법을 무용하는 여자들을 정당한 해외 취업이란 명목으로 불러내어 수속과 취업 알선비란 명목으로 돈을 착취한 뒤에 팔아먹는 수도 있었고, 아예 처음부터 바람난 계집애들을 모아서 몸 파는 걸 전제로 보내는 수도 있었다. 일본의 여자 값이 비싸다는 데서 한국 여자의 수입이 톡톡한 재미를 붙여 주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어쩌든 속아서 넘어가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의 여자장사꾼들은 걸러치기 수법으로 한국 여자를 다른 나라로 다시 넘기는 릴레이 판매도 한다고 했다. 동남아 지역에 손을 뻗쳐 여러가지 형태로 여자장사를 하는 애들이기 때문에 조직력은 대단한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대식구가 먹고 살진 못할 거 사내들은 처음에 버티다가 못 견디겠는지 마약 밀매와 밀수행위까지 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아베 녀석은 끝까지 밀수와 마약 밀매를 숨겼었다. 그들이 끝까지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사업의 극비라는걸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어쩌면 마약 밀매와 밀수를 위장하기 위해 여자장사를 법망의 교묘한 탈출과 조직력으로 이끌고 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극악한 일까지 서슴없이 해치울 수밖에 없는 애들이었다. 그러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아서 자잘한 심부름이나 폭력의 전위부대로 그들의 방패 구실밖에 하지 못하는 애들이었다. 중대한 밀수나 마약 밀매를 다루는 건 사사키의 개인조직이나 비밀조직들이 한다는 것도 조직력으로 대응하는 방법이나 그들의 패거리가 되어 비밀을 캐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내애들을 야무지게 다루어서 보냈다. 엉금엉금 기어나가는 애들을 쳐다보며 쪽발이들에게 더 증오심이 복받쳐 올라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걸 과시하면 사람 값이 싼 우리나라에 들어와 쾌락을 맛보는 게 부족해 이젠 아예 비밀조직을 이용해 처녀들을 사가는 짓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순진한 처녀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 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아베 녀석과 사내애들이 주절거린 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굴욕적인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정한 용모와 차림새가 일급 신사였다. 아베가 그 옆에 앉아서 통역을 해주었다. 사사키도 한국 말을 조금씩은 하는 것 같았지만, 끝까지 일본 말로 나를 상대했다. "당신을 이 자리에서 한 방에 없애 줄 수 있지만 참는 거요. 이유는 단 하나요. 당신을 없앴다고 해서 그 조직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오." 나는 모질게 말했다. 사사키는 껄껄 웃었다. "우리도 당신을 감쪽같이 없앨 수 있었소. 우린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살려두는 겁니다." 아베가 내게 전한 답변이었다. 나는 한 대 올려붙이려다 참았다. "형님들이 뵙잡니다. 초청장을 갖고 떠났답니다." 아베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 애들은 나와 결전을 벌이지 않고 타협하기 위해서 정중하게 초청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애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가겠소." 나는 무서운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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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인간시장(5권) 53. 왜놈 앞잡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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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1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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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안당
08.05.13 01:21
첫댓글
흐미야~ 일본까지 진출을해 소탕 작전을 벌리겠네요...취직이나하지,,,,ㅎㅎ 감사합니다
미혜
08.05.20 08:44
잼나게 잘봤읍니다~!
새처럼
12.09.04 11:49
좋은글 김사헤요 ^^^
그리운남촌
14.08.27 15:53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0 19:00
감사
오아시스
20.03.02 19:35
잘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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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흐미야~ 일본까지 진출을해 소탕 작전을 벌리겠네요...취직이나하지,,,,ㅎㅎ 감사합니다
잼나게 잘봤읍니다~!
좋은글 김사헤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