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도 |
예비자 |
세례자 |
공소 수 |
신자 수 |
1890~1891 |
103 |
39 |
30 |
1,249 |
1891~1892 |
120 |
55 |
19 |
1,143 |
1892~1893 |
147 |
56 |
22 |
1,301 |
1893~1894 |
143 |
65 |
24 |
1,335 |
그러나 1894년에 몰아닥친 ‘동학 농민 혁명’으로 인해 내포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내포 지역에서는 2월부터 박인호(朴寅浩, 1855~1940, 현 삽교 하포리 출신)를 중심으로 한 동학군이 크게 일어나서 8월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실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9~10월에는 면천, 고덕, 신례원(관작리), 예산, 홍주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10월 27일에 벌어진 신례원 관작리 전투는 관군 5천여명과 동학군 3만여명이 맞붙은 대규모 전투였고, 10월 28일에 있었던 홍주성 전투 역시 동학군과 일본군 및 관군이 사력을 다해 싸운 대규모 전투였다.
‘동학(東學)’이라는 이름 자체가 ‘서학(西學=천주교)’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동학군의 폐정 개혁안 중에는 외세의 침입에 대한 저항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동학군들은 천주교에 강한 반감(反感)을 품고 성당과 교우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신자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며, 양촌과 간양리 본당 모두 파괴․탈취 당하였다.
예산의 향토사학자 박성묵의 <간양리 동학군 후손 구술 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왜 간양골 본당이 동학 농민군에게 그렇게 처참하게 습격을 당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간양골 입구에 밀양 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동학에 귀의하였고 동학의 중간 책임자인 접주(接主)가 있을 정도로 세력이 강하였다. 이들과 간양골 본당에 드나드는 천주교 신자들과 평소에도 마찰이 있었고, 이러한 불편한 관계가 동학혁명 때 불상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파스키에 신부의 1894년 보고 자료를 통해 당시 ‘간양골에서 가져갔거나 파괴된 물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항목 |
금액 |
항목 |
금액 |
미사경본 1 (금박 제본) |
11.11불 |
적포도주 70병 |
13불 |
감실 1 |
5불 |
큰 조선 가구 1 |
220냥 |
제대 융단 1 |
7불 |
참기름 (10병에 16냥) |
160냥 |
8피트짜리 영국제 쿠션(융단) 1 |
6불 |
관기와 기타 기구들 |
20냥 |
색 돗자리 4 |
4불 |
식기류와 취사 도구 |
100냥 |
기타 돗자리 (대략) |
3불 |
조선 의류 |
100냥 |
제대 |
10불 |
모기장 (4불) |
80냥 |
문 |
4불 |
합 계 |
90.31불 |
퀴클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는 교구장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같이 서울로 피신하였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병이 깊어져서 본국 프랑스로 귀환 치료를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이로써 간양골 본당은 설립된 지 5년만에 폐지되어 양촌 본당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1895년에 주한 프랑스 공사의 항의로 정부의 조치가 이루어져서, 황매실(합덕읍 석우리(재오지)) 구 힐라리오 회장의 주선으로 덕산 현감이 복구 비용을 풍족하게 대주어서 양촌과 간양골 성당의 건물과 집기 등을 복구하였으나, 간양골 본당은 양촌(→ 합덕, 1898년 본당 위치 옮김)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퀴클리에 신부 혼자서 훨씬 넓어진 본당을 관할하기가 벅찼기 때문에 1896년에 공세리 본당이 분리되어 드비즈(Devise, 成一論, 1871~1933)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1897에는 공주 본당이 분리되어 기낭(Guinand, 陳普安, 1872~1944) 신부가 부임하였다. 퀴클리에 신부는 1904년까지 양촌(합덕) 본당 주임으로서 열정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다.
3. ‘간양리 공소’ 시대(1894~1949)
한때 본당이었던 간양골 공소는 이후에도 주변의 다른 공소들과 더불어 순교 신앙의 전통을 간직한 채 충실한 신앙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였다. 다음은 1894~1924년 동안 본당 신부들이 보고한 ‘교세 통계표’에서 간양리 관련 내용을 모은 것이다.
연도 |
교우수 |
고해자 |
영세자 |
대세자 |
견진자 |
예비자 |
냉담자 |
주임신부 |
1894~1895 |
95 |
70 |
3 |
1 |
퀴클리에 | |||
1897~1898 |
76 |
56 |
7 |
10 |
2 |
퀴클리에 | ||
1898~1899 |
76 |
55 |
4 |
2 |
3 |
2 |
2 |
퀴클리에 |
1899~1900 |
193 |
141 |
12 |
6 |
3 |
6 |
3 |
퀴클리에 |
1900~1901 |
88 |
60 |
5 |
2 |
2 |
5 |
4 |
퀴클리에 |
1901~1902 |
114 |
51 |
9 |
2 |
3 |
4 |
6 |
퀴클리에 |
1902~1903 |
78 |
58 |
3 |
1 |
2 |
2 |
퀴클리에 | |
1903~1904 |
88 |
57 |
2 |
2 |
3 |
4 |
1 |
퀴클리에 |
1909~1910 |
50 |
41 |
1 |
2 |
4 |
1 |
크렘프 | |
1910~1911 |
51 |
49 |
크렘프 | |||||
1911~1912 |
40 |
34 |
1 |
6 |
크렘프 | |||
1912~1913 |
45 |
36 |
2 |
5 |
크렘프 | |||
1913~1914 |
84 |
37 |
1 |
2 |
1 |
크렘프 | ||
1914~1915 |
50 |
41 |
4 |
1 |
6 |
크렘프 | ||
1915~1916 |
49 |
38 |
4 |
1 |
크렘프 | |||
1916~1917 |
49 |
39 |
1 |
라리보 | ||||
1917~1918 |
59 |
42 |
1 |
박우철 | ||||
1918~1919 |
41 |
42 |
백남희 | |||||
1919~1920 |
41 |
33 |
크렘프 | |||||
1920~1921 |
64 |
46 |
크렘프 | |||||
1921~1922 |
50 |
38 |
2 |
페랭 | ||||
1922~1923 |
53 |
38 |
2 |
페랭 | ||||
1923~1924 |
50 |
40 |
5 |
1 |
1 |
페랭 |
1922년 페랭 신부의 연말 보고서에는 ‘두곡리, 수철리, 봉소리, 구룡리와 더불어 간양리 공소가 아이들의 영세 문답 교육을 잘 하고 있는 공소’로 나온다. 1928년 예산 본당 초대 구천우 신부의 연말 보고서에도 ‘대치리와 간양리의 교우들은 그들이 모두 법대로 수계한다는 점에서 지시에 대한 순명에 있어서 다른 공소들보다 아주 낫다’고 적고 있다. 이때는 대개 수철리의 신자들이 고개를 넘어 간양리 공소로 와서 예절이나 미사를 드렸다.
이렇게 충실한 신앙이 보금자리였던 간양리 공소가 폐지된 것은 해방 후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6.25) 때문이었다. 향토사학자 박성묵의 <수철리 황기완 공소 회장 구술 조사 자료> 등에 의하면, 해방 후 간양리와 인근 도고의 신유리(느랭이), 대술 궐곡리(고새울) 등지에는 공산당 활동을 했던 이가 많았다. 그래서 간양리와 수철리는 한국전쟁 때 공산당(빨치산) 세력의 게릴라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어서 간양리 공소 건물은 이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여, 군경의 공격 목표가 되기도 하였고 미군기의 폭격도 당했던 곳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예산 본당 주임 정에밀리오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여 미사를 드릴 때 황기완의 부친 황만호는 간양리 공소 회장으로서 복사를 하였지만, 전쟁 중에는 공산당의 종교 탄압과 양측의 전투 때문에 공소에서 예절도 드리기 어려웠고, 간양리 공소 건물은 점점 파괴되어 결국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전쟁 후 간양리 공소 강당 복구를 포기하고, 흩어진 집기들을 모아 근처에 파묻고, 중요한 물건은 잘 보관하다가 나중에 파스키에 신부가 사용했던 제대 판목은 서울 절두산 성지로 옮기고 미사종은 예산 본당 10대 주임 손만재 신부(1972~1977 재임)가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간양골 입구 마을에 사는 김회장(궁평리 김종호씨 조부), 박순종(바오로) - (아들)박우경 - (손)박재오 등의 집에서 예절이나 미사를 드리면서 간양리 공소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이 지역 공소 신앙의 중심지는 수철리 공소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간양리 공소는 점점 약화되다가 1962년에 공소 자체가 신례원 창소리로 옮겨졌고, 1977년 신례원 본당으로 승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신례원 본당의 뿌리는 간양리 본당(공소)인 것이다. 황만호 공소 회장은 이후 수철리로 이주하여 거기서 계속 공소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4. 수철리 공소에 대하여
간양리 공소와 수철리 공소는 고개 하나 넘어 긴밀하게 연락하며 마치 한 공소처럼 생활하였다. 1900년대 초 퀴클리에 신부가 작성한 공소 통계 자료에 ‘드른리’라고 나오는 곳이 수철리로 보인다. 1901년 연말 보고서에서 퀴클리에 신부가 간양골 산뒤 ‘뒤란 공소’에 있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뒤란 공소’는 수철리의 별칭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구합덕본당 100사 자료집》에는 ‘드른리’를 수철리, 신례원을 지칭한다고 엇갈리게 해석하였으나, 증언 내용과 지형 상의 특징, 문헌에 간양골, 고새울, 수골 등과 같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드른리’는 수철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황석두(루가) 순교 성인의 손자인 황만호는 부친 때 박해를 피해 충북 연풍에서 이주해 온 아산 만보골, 숫골에 살다가, 일제 강점기에 (청년 시절에) 도고 신유리(느랭이)를 거쳐 간양골로 이주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거기서 밀양 박씨 부인을 맞아 결혼하여 살다가 앞서 본 바와 같이 한국전쟁 후 간양리 공소 강당이 폐지된 후 수철리로 이주하였다. 황만호와 그의 아들 황기완은 대를 이어 공소 회장직을 수행하며 순교 성인의 후손으로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960년 황기완의 주도로 수철리 ‘새터’에 15명의 목조 회칠흙벽 함석 지붕의 강당을 신축하였다. 황기완의 친구 목수 두 명(
맺음말
[간양리 본당터]는 박해시대 교회사와 그 이후의 공소 사목의 역사에서 매우 가치 있는 장소이다. 이런 고귀한 신앙의 보금자리터를 매입하여 관리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우리는 숭고한 순교 신앙의 전통 하나를 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더 시간이 가기 전에 매입․관리하여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은 신례원 본당을 비롯한 예산 지역 신자들의 숙원을 풀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간양리 본당터]는 반드시 수철리 공소와 연계하여 가꾸어 나가야 한다. 모든 공소들을 다 되살릴 수는 없지만, 몇몇 중심지였던 공소와, 강당 건물이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은 적극 보존하고 개발해서 후세 순례와 신앙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신암면 조곡리 공소 강당도 잘 보존하고 가꿀 필요가 있다. [간양리 본당터]에 경당을 짓고 간양골과 수철리 새터를 연결하는 옛 산길을 복원하여, 신앙 선조들의 소박하고 고귀했던 삶을 되새기며 묵주를 들고 순례하는 상상을 해 본다.
첫댓글 몇번은 더 봐야 알 듯 하군요..ㅋㅋ
내포교회사에서 빼놓을수없는 귀중한 자료로 생각됩니다 !
좋은글 감사...
임시 교구장 코스트 신부는 1889년 파스키에(주약슬)신부를 간양골 본당신부로 임명 하였고, 명을 받은 주약슬 신부는 부임하여 성사를 집행 하였을 터인데! 따라서 성사 ((보례 및 영세입교기록,병자,종부.혼배 기타)) 를 집행한 기록이 있을 터인즉 ^ ^ ^ 그 기록은 현제 어느 성당으로 가야 볼 수 있는지요?
간양골 성당이 생기기 전부터 한 교우가 간양골 성당 관내(신례원과 이웃한 마을인 궁평리)에서 거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교적을 찿을 수 가 없기에 그 후손이 문의 하는 것이오니 자세한 답변 부탁 드립니다.
공세리성당과 합덕본당을방문해 보심이좋을듯합니다
한가지 더말씀드리면 솔뫼성지에있는 내포교회사연구소의도움을받아보심도좋을듯합니다
그렇다면 전문 기관인 [내포교회사연구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듯 하네요 ! ! !
자세한 안내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