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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시의 공간 : 경북 영천
길 위의 시인들
──경북 영천
함종호
나는 지금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려 합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는 여행. 여행이란 익숙한 생활공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어서 더러는 낯선 경험과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마주하면서 당황스러움과 불편함에 맞닥뜨리게 되기도 하죠. 그렇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생활공간 속 삶이란 매 시간 틀에 박힌 일상의 연속 아닙니까. 틀에 박힌 일상 속에서 ‘나’는 없기 마련이죠. 왜 정해진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해야 하고, 혹 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왜 정신없이 뛰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불필요합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상의 삶을 심지어 마치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규칙이나 운명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기조차 합니다. 어쩌면 생활공간 속 삶에 의문을 품는 순간 사회로부터 격리될지 모릅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남들은 ‘나’에 대한 자각 없이 잘 살고 있는데, 굳이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의 핀잔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의 핀잔이 거듭되면 이젠 불안이 엄습하기 마련입니다. 이러다가 뭔가 잘못되는 것 아냐 하는 식의. 이런 불안이 익숙한 생활공간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곤 합니다.
이런 여행도 있습니다. 즐기고 놀기 위한 여행. 사람들은 이런 여행을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죠. 즐기고 놀기 위한, 그래서 재충전을 위한 여행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다시 익숙한 생활공간으로의 복귀를 뜻합니다. 원활한 복귀를 위해선 즐기고 노는 과정에서도 생활공간이 강요하는 룰을 어겨서는 곤란합니다. 사회적 관습에 대한 회의와 그에 뒤따르는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은 익숙한 생활공간이 요구하는 사항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생활공간으로의 원활한 복귀를 방해할 뿐이죠.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게 될 때, 그 순간부터 일상의 반복은 매우 피곤해지고 불편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을 통해 자아를 확인할 수 있고, 그 힘으로 다시 일상의 삶에 매진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즐기고 노는 과정에서 잠시 잊고 있던 자아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일컬어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즐기고 노는 과정으로써의 쉼은, 그런데 생활공간이 요구하는 사항과 자신의 자아관이 어떤 식으로든 화해됐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봐라. 네가 그간 생활공간이 요구한 룰을 열심히 따른 대가가 바로 이것이다!”와 같은. 즐기고 노는 여행이 주는 달콤함은 일종의 대가로 주어질 뿐이지 그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달콤함에 취해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는 잃어버리고 말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달콤함이, 그 화해가 자기 자신의 희생과 포기를 의미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에 대한 용인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이 속한 생활공간의 부조리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결국 즐기고 노는 여행은 자기 자신과 생활공간에 대해 나름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다시 익숙한 생활공간으로 돌아오라는 강력한 유혹인 셈입니다.
좀 전에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지금 떠나려는 여행은 막연히 즐기고 놀기 위한, 그래서 재충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 익숙한 생활공간으로의 원활한 복귀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서 내게 익숙한 생활공간은 어떤 곳이고, 그 곳에서의 삶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행은 남들과 다른, 그래서 핀잔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려고 하니? 굳이 숨겨진 본질을 들춰내서 뭘 할 수 있는데?” 등의 핀잔 말입니다. 이렇게 핀잔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볼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나를 격리 대상자로 취급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나 자신을 부정하고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더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듯, 내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이를 부정하고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더 나의 삶을 복되고 아름답게 영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내가 시를 읽는 이유이고, 몇몇 시편들을 지금부터 떠나는 여행의 길잡이로 삼은 이유입니다.
영천의 시인들, 즉 김나영, 서영처, 백무산, 송재학 등의 시인이 한결같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참으로 힘든 삶이죠?”, “그래도 잘 살아야겠지요?”, “이렇게 살아보면 어떨까요?” 등등. 생활공간 안에서는 늘 사람들의 시선에 사로잡혀 입 밖으로 큰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까짓거 다 제쳐 놓고 떠나는 마당에 한번 호기롭게 외쳐봅시다. “자 떠나봅시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정표 삼아.
노인이 길을 간다 허리춤 <소생접골원> 안에 쓸만한 햇살 꿰차고 길을 간다 갈수록 늘어나는 물음표와 난수표 같은 세월 등에 들춰 업고 길을 간다 수많은 목표물과 버팅겼을 저 등, 수천 번 시위를 받아 안았을 저 등, 수많은 과녁을 교정했을 저 굽은 등에 햇볕이 파스처럼 달라붙어 있다 조금 전 접골원을 나온 저 노인 지금은 어느 과녁 조준하기 위해 발길 옮기는 중일까 얼마나 무거웠으면 저리 늘씬 휘어졌을까 저 활, 시위가 팽팽하다 목표물에 가까이 온 모양이다 과녁이 활을 점점 세게 끌어당기고 있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과녁인 저 노인, 잔뜩 휘었다
──김나영, 「활」 전문
저 길고 짧은 길들 잔뜩 하늘로 매단 악기는
한 그루 실한 나무다
물관 체관으로 양분을 빨아
푸르디푸른 잎사귀 천정으로 피워올린다
열 손가락 발가락 닮은 페달이
노 젓듯 부지런히 흙 속을 파고든다
바람은 몸 깊숙이 박힌 管을 휘저으며
육신의 동굴마다 박쥐들을 깨워 날려보낸다
상하수도와 가스관, 통신케이블 관
누군가 지하에서 불어넣는 숨소리로 도시가 울고 있다
묘지마다 부풀어오른 봉분들의 긴장 좀 봐
달리는 자동차 우는 아이들 굴착기의 굉음,
빌딩의 막대그래프가 춤추며 출력을 그려낸다
파이프오르간이다
아픈 짐승들처럼 먹구름 몰려오고
고층아파트는 오디오 스피커처럼 늘어서서
하모니를 뿜어낸다
도시의 거대한 뿌리,
지하철이 철컥철컥 옥문을 잠그며 지나간다
──서영처, 「파이프오르간」 전문
길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입니다. 길은 이렇게 저렇게 정해진 틀에 맞춰 고정된 형태로 구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길이 세상 이곳저곳을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특정한 형태로 정체되어 있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관계적인 양상으로 볼 때 길은 만남이 목적일 수도 있고, 헤어짐이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것은 생명을 맞이하는 길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나서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엄연히 경계가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명확한 경계가 그어지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경계와 탈경계의 공존, 그 이상한 현상이 길의 내밀한 존재성입니다.
길이 가지고 있는 그 이상한 존재성은 그 길을 따라 걷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만, 보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 길에서는 종종 펼쳐지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여행의 묘미는 바로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사실 일상적인 생활공간 속에서의 길은, 그리고 길을 걷는 것은, 한가로운 사색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쫓겨 이리저리 바쁘게 휘젓고 다닐 때 길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생활공간 속에서 한 발 비켜서면 그 곳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게 달랑달랑 붙어있는 가게 간판 아래로 팔짱을 낀 채 서로 환하게 웃음 지으며 걷는 청춘 남녀가 있는가 하면, 그들이 걷는 발 옆에 거무튀튀한 외투를 입고 공손히 아주 공손히 절을 하듯 두 손을 내밀고 엎드려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사람 바로 코앞 보도블록 사이로 들풀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 모두가 내가 살고 있는 생활공간의 한 풍경임을 우리는 자주 잊곤 합니다. 이들 풍경 사이로 우린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 것일까요?
위의 시편들에서도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은 ‘길’입니다. 「활」에서는 등이 심하게 굽은 ‘노인’이 그 길을 걸어가네요. 그의 등이 구부러진 정도는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비견됩니다. 그의 등이 이토록 구부러진 데에는 “갈수록 늘어나는 물음표와 난수표 같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그가 경험했을 “수많은 목표물과 버팅겼”고, “수천 번 시위를 받아 안았”을 고난과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그의 등을 통해 발견되는 삶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 그를 비추는 ‘햇볕’은 ‘파스’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본래 ‘햇볕’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지요. 그런데 고된 세월을 살아온 노인에게 있어 ‘햇볕’은 더 이상 생명의 근원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단지 고된 세월을 견디는 데에 작은 도움만을 줄 수 있는 ‘파스’, 즉 진통제로써의 역할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마치 과녁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비견될 정도로 심하게 구부러진 그의 등, 다시 말해 그의 고난과 고통의 세월은 어쩌면 그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의 태도와 능력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를 시인은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과녁”이라는 표현을 통해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네요. ‘나’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러나 문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저버릴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이것이 길에서 마주친 노인을 통해 사고한 결과입니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나가봅시다. 과연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 한 개인만의 문제일까요? 길에서 만난 그 등이 잔뜩 구부러진 노인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인 셈이고,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비단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그 노인의 모습을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앞으로 도래할 우리 자신의 초상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버린다면 이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그리고 비겁한 태도입니다.
「파이프오르간」의 ‘길’에서는 길가에 늘어선 ‘나무’가 보입니다. 본래 나무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과 양분을 물관, 체관을 통해 이동시킨다는 사실은 매우 상식적인 것으로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들 물관, 체관에서 ‘관管’ 이미지가 부각될 때, ‘나무’는 ‘악기’가 되고, 급기야 그것은 둥글고 길며 속이 빈 관을 타고 흐르는 (피리)소리로 비유되며, 다시 속이 빈 ‘동굴’ 속 “박쥐들을 깨워 날려보내”는 소리로 변주됩니다. 이 과정에서 나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관’ 이미지가 하필이면 왜 어둡고 습한 동굴 속 박쥐를 깨우는 소리로 비유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은 2연에 소개된 우리가 살아가는 매우 익숙한 생활공간, 즉 도시에 관한 묘사를 통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도시엔 “상하수도와 가스관, 통신케이블 관” 등이 넘쳐납니다. 그 수많은 도시의 관들에 “지하에서 불어넣는 숨소리”가 더해지면 도시 곳곳은 울게 됩니다. 1연에서 ‘관’ 이미지를 통해 ‘나무’가 ‘(관)악기’가 되듯이, 2연에서는 도시 또한 거대한 악기(“파이프오르간”)가 됩니다. “묘지마다 부풀어오른 봉분들”, “달리는 자동차”, “아이들”, “굴착기”, “빌딩”, “고층 아파트” 등이 내는 소리로 넘쳐나는 것이죠. 빈 관에 소리를 불어넣으면 (관)악기가 비로소 생명을 얻듯이, 겉으로 보기에 도시 속 ‘관’들도 도시에 활기를 제공하는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묘지’, ‘아픈 짐승’, ‘먹구름’, ‘옥문’과 같은 시어들로 도시가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시인에게 도시 속 삶은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시의 거대한 뿌리,/ 지하철이 철컥철컥 옥문을 잠그며 지나간다”에서처럼, 어쩌면 우리는 익숙한 생활공간 속 도시적 일상에 갇힌 채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의를 위해 나아가는 행렬 아닌가
일렬로 묶인 죄수들처럼
전봇대는 현을 걸고
어두운 곡조를 허밍하네
우는 아이를 떼어놓고 돌아오는 길
무엇인가, 내 죄가 사무치네
나목들의 울음소리 빈 들판을 건너네
제단은 어디인가
엎드리고 싶은데
어두워가는 하늘을 이고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 서영처, 「전봇대를 따라갔네」 전문
흔히 도시의 발달은 길가의 ‘전봇대’로 상징됩니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전선들은 도시의 밤을 밝히고, 삶의 터전인 공장을 가동시키고, 각종 재화를 생산하는 원동력입니다. 도시 속 삶의 풍요로움은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전봇대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위의 시에선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전봇대’를 “제의를 위해 나아가는 행렬”로, “일렬로 묶인 죄수들”로 묘사하네요. 그것은 마치 어둡고 깊은 원죄의식에 사로잡혀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러 가는 형상으로 비춰집니다. 즉 도시 속 삶의 풍요로움을 비추는 빛 이면에 감춰져 있는 어두운 존재의 심연을 드러내줍니다. 도시화가 겉으로는 번영과 풍요를 보여주지만, 또한 동시에 각종 병폐들―실업, 소득불균형, 주택, 교통, 환경 등의 분야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듯이. 이러한 역설적 문제 상황은 곧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도시에 내재된 원죄의식과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곤 이내 그것은 의식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나’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으로 환원됩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 말이죠. 이러한 모습은 위 시의 “어두워가는 하늘을 이고/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라는 시구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시인은 마치 원죄의식을 씻고자 하는 구도자의 모습처럼 ‘제단’을 향해 나아가며 ‘나’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집 식탁은 종섭이네 이사 갈 때 버리고 간 거다
아이 책상도 그때 버리고 간 걸 십 년째 쓰고 있다
지금 쓰는 컴퓨터 책상도 언제 어디선가 주워온 거다
우리 집에서 오로지 새 것은 아들과 딸뿐인 것 같다
먹고 살 만한데 자꾸 헌 것을 주워오는 남편에게
우리가 거지냐고 이제 그만 주워오라고 핏대를 세우면
쓸 만한데 어떠냐고 며칠 전에는 4단 책장을 주워와서는
그것도 두 단이나 떨어져 나간 걸 씩씩하게 주워와서는
거실에 턱 내려다 놓고 책을 꽂으란다
그 궁상맞음을 태평양 건너 시어머니께 불어 제꼈더니
어머니 집 소파도 시아버지가 주워온 거란다
궁상맞은 집안 내력이 부아에서 체념으로 바뀌는 순간
사방 모서리가 닳고 닳은
이제는 뻑뻑해서 잘 여닫히지 않는
남편이 이십 년 전 길 가다 주워
집안에 들여다 놓은
헌 서랍장만 같아서
나는
──김나영, 「내 이미지에 대하여 3」 전문
도시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활의 편리와 인간의 복된 삶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재화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바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들인 셈입니다. ‘새 것’에 대한 동경은 이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즉 끊임없이 재화에 대해 욕망하는 것. 그러나 일상생활의 피로와 고단함도 여기서 기인합니다. 재화는 늘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어서 갖고 싶다고 해서 무한정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화 절약과 재활용이 한때 미덕으로 간주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위 시 「내 이미지에 대하여 3」도 “궁상맞은 집안 내력”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네요. ‘남편’은 “먹고 살 만한” 집안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남이 버린 각종 가구를 주워와 재활용해 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나’(아내)가 “우리가 거지냐고 이제 그만 주워오라고 핏대를 세우”며 핀잔을 늘어놓아도 ‘남편’은 “두 단이나 떨어져 나간” “4단 책장”을 “쓸 만한데 어떠냐고” 항변을 합니다. 이 정도면 절약정신을 강조하는 일반 가정에서라면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방 모서리가 닳고 닳은/ 이제는 뻑뻑해서 잘 여닫히지 않는” ‘헌 재활용 가구’에 비유되면서, 그리고 ‘나’(아내)가 “이십 년 전 길 가다 주워/ 집안에 들여다 놓은/ 헌 서랍장”에 비유되면서,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극대화됩니다. 낡고 헌 재활용 가구로 ‘남편’과 ‘나’가 인식되는 지점에서 그것은 도구화된 인간의 한 단면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본질적 가치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그 본질적 가치는 마치 재화가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 즉 도구적 기능에 의해 훼손되어 버리고 만 것으로 묘사되네요. 우리 인간은 도시화, 문명 발달이라는 기치 아래 도구화된 채 소모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집에서 오로지 새 것은 아들과 딸뿐인 것 같다”는 시적 진술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적인 인식을 동반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니까 아직 어려서 ‘새 것’이라기보다는 도구화된 재화 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앞으로 더 효용적인 가치가 많은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시에서 ‘나’(아내)가 경험하는 비애와 애처로움은 ‘헌 서랍장’으로 상징되는 나이를 먹어 늙었다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이 자신을 “길 가다 주워 집안에 들여다 놓”았을지 모른다는 자괴감으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자신이 한집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존재론적 가치의 측면에서 사랑받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단지 ‘낡았지만 필요한’ 효용적 가치의 측면 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을 때 밀려오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자꾸 헌 가구를 주워오는 ‘남편’과 이를 핀잔하는 ‘나’(아내) 사이의 갈등과 ‘헌 서랍장만 같은’ ‘나’(아내)와 ‘새 것으로서의 아이들’ 사이의 대비를 통한 한 ‘궁상맞은 집안’의 일상적인 가정사를 이야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풍요로움과 편의로 대표되는 익숙한 생활공간에 내재된 물욕과 이로 말미암아 도래한 도구화된 인간상에 대한 현실 비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된 시 「활」을 기억하십니까? 삶의 고통과 고난에 의해 마치 팽팽하게 활시위가 당겨진 것처럼 등이 구부러진 노인 말입니다. 그 심하게 구부러진 노인의 등이 활시위가 되어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과녁”인 자기 자신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여기서 자기 자신을 향해 활시위가 당겨져 있다는 것은 그가 온갖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한평생 인간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채 도구화된 가치 속에서 왜곡되고 변형된 삶을 살아온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파이프오르간」에서처럼, 그런 ‘노인’과 같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피폐화된 도시 풍경을 마주하였을 때 자기 자신, 또는 내가 살아가는 익숙한 생활공간에 대해 회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새들에게도 처음엔 손이 있었다
높은 언덕에 살던 그들은
바람과 이웃해 살았으므로 알고 있었다
저 허공에도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갈 수 없는 이유를
자신을 땅바닥에 바위처럼 붙들어둔 것은
중력장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손이라는 것을
새들에게도 원래 수천개 손이 있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이 천개
자신이 가진 것을 잡고 있는 손이 천개
자신이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이 또 천개
존재는 소유의 물목에 있기에
그러나 새들은 알고 있었다
땅의 길을 걷는 자는 숲속에서
숲을 보지 못하듯이 길 위에서는
길의 숲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길에도 길의 숲이 있음을
새들은 알았다
새들은 자신의 손들을 놓기 시작했다
수천개의 손을 다 놓았다
그 모든 손들을 다 놓았을 때
허공은 오히려 바위계단처럼 견고하였다
새의 손은 그 허공을 밟고 일어설 발이 되었다
그 수천개의 손이 바람의 계단을 밟을
바람보다 가벼운 발이 되었다
길이 어두운 것은
길의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았다
──백무산, 「길의 숲―방하放下」 전문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시편들에서 익숙한 생활공간(도시)에 내재된 삶의 부정성을 마주 대하기 조금 거북했다면, 잠깐 쉬었다 가면 어떨까요? 애초에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길이 아니었던가요? 여행길에 지친 육신을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나무 그늘이 있는 곳이면 좋겠고, 이왕이면 주변 자연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고, 거기에 풀벌레 소리나 새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잠깐 동안 쉴 자리를 보는 것인데도, 이런! 자꾸 욕심이 생기네요. 인간의 욕심이란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위의 시 「길의 숲―방하」에서는 신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네요. 우리 인간에 대해 오늘날과 같은 냉철하고 분석적인 존재론적 사유가 만들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존재 증명을 신화적인 이야기에 기대어 행했다고 전해지지요. 상상에 의해 구현되는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편들에게서 이와 같은 신화적 상상력은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이 시에 동원된 신화적 상상력은 ‘허공의 길’과 ‘땅의 길’ 간의 대비를 통해 전개됩니다. 이 시에서 신화적 상상력 속 새들은 과거 ‘땅의 길’에서 살았었는데, 그 시절엔 본래 “수천개의 손”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이 천개/ 자신이 가진 것을 잡고 있는 손이 천개/ 자신이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이 또 천개” 등과 같이 그 손의 개수만큼 새들은 소유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손’이 잡고 있는 소유의 무게에 짓눌려 하늘을 날지 못하고 ‘땅의 길’에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내 삶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수천개의 손을 다 놓”는 순간, 다시 말해 소유욕을 전부 내려놓은 순간, 그 수많은 ‘손’들은 ‘발’이 되어 하늘로 비상할 수 있었다는 시적 표현에서 발견됩니다. 이로써 허공에 난 길을 걷게 된 새는 ‘땅의 길’을 걷던 시절 “숲속에서/ 숲을 보지 못했”고, “길 위에서는/ 길의 숲을 볼 수 없”었던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숲’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에서 ‘숲’은 일차적으로 세계의 총체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길이 어두운 것은/ 길의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인식 태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반성을 촉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수천 개의 손’으로 상징되는 물욕에 사로잡혀 근시안적인 삶의 자세로부터 벗어나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고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갈 때 지향점이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세계는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더라도 뭐 어떻습니까. 신화적 상상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꿈꾸는 세계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화적 상상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와 일정 거리를 두고 우리 스스로가 현실세계를 냉철하게 진단하고 반성토록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만약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한 황무지가 있다면
언제까지 걷다가,
걷다가 어느새 모래 흘러가는 강이 준비한 배를 보리라
모래 같은 책의 첫 페이지가 기다리리라
낯선 모래 서가 뒤에는
바람 때문에 짐작할 만한 목마름이 맨 처음
바람 때문에 책은 운명을 급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황무지는 장삼이사의 내면이면서
책의 속살인 것, 그 연약함이여
황무지가 폐허가 아니라 심연이라고 믿는다면
신기루야말로 책의 저자들
지평선까지의 거리인
뒤표지의 기다림을 생각한다면
혼자 있기 위해 필요한 몽리면적을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사막은 자꾸 넓어져야 한다
선인장의 뾰족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앎은
각주가 많은 흉터이다
책갈피로 오래 사용한 모래 언덕 너머
뭉치고 흩어지는 구름의 판본에는
가둘 수 없는 정신의 배후인 의심이 있다
먼지투성이 의심들!
──송재학, 「황무지에로의 접근」 전문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번 갖게 되면, 더 갖고 싶어지고, 더 갖게 되면 가진 것을 놓고 싶지 않게 된다고 말입니다. 소유에 대한 갈망은 참으로 욕심꾸러기입니다. 그런데 가득 채워진 곳간에 다시 물건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곳간을 비워야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가진 것을 놓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또 다른 것을 갖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죠. 「황무지에로의 접근」에서 보이고 있는 시인의 태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네요. 흔히 ‘황무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쓸모없는 ‘폐허’로 생각되지만, 이 시에서는 존재의 ‘심연’과 같은, 마치 생명의 원천수를 의식 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생성의 근원지로 인식되네요.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황무지’에서야말로 타오르는 “목마름”이 생겨날 수 있으며, 그 ‘목마름’에 의해 ‘책’으로 상징된 인간 본연의 “가둘 수 없는 정신”이 비로소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배후’엔 “의심”이 놓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심’이란 그 어떠한 것에도 확실한 믿음을 품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 아닌가요? 생성의 원천지로써 ‘황무지’는 얼핏 보기에 쓸모없이 버려진 폐허와 같은 땅일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기에 비로소 의심이 자유롭게 피어날 수 있으며, 그 의심의 힘에 의해 비로소 인간 정신은 풍요롭게 될 수 있다고 시인은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의 숲―방하放下」와 「황무지에로의 접근」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소유에 관한 사유를 소유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오늘날 우리의 생활공간을 지배하는 소유욕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신화적 상상의 세계를 포함한 시적 세계는 현실논리를 강조하는 우리의 생활공간과 엄연히 구분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적 세계가 현실세계와 다르다는 이유로 홀대하거나 가치 폄하를 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객관적 거리가 생겨나고, 그 거리에 의해 비판과 반성이 행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도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다름으로 인해 가능한 비판과 반성. ‘나’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비판과 반성을 행함에 있어서 삶의 익숙함, 일상의 똑같은 반복은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입니다. 삶의 익숙함과 일상의 똑같은 반복은 타인과 ‘나’를 자꾸 동일한 것으로 인식시켜 타인과 구분되는 주체의 고유한 본성을 잊게 만들곤 합니다. 이들 시에서 다름은 ‘새는 본래 손을 가지고 있었다’, ‘황무지는 생성의 원천지이다’ 등과 같은 시적 사유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곧 소유 의식에 대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관점을 시사합니다. 소유에 대한 맹목과 집착을 버리는 것. 늘 다른 것을 추구하는 시세계의 측면에서 볼 때, 맹목과 집착은 오로지 하나에만 매진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저와 꼭 닮은
아이 하나 안고 왔는데
자세히 찬찬하게 주의깊게 들여다보니
닮은 것 이상이다 아비보다 더 아비답게 생겼다
아하, 아이가 원본이다
시간은 꼭 아비에게서 아이에게로
흐른다는 생각은 일종의 관습
화석에서 자주 미래가 발견되기도 한다
종종 미래를 표절하기도 한다
아직 제본되지 않아 낱장으로 떠도는
미래가 불쑥 면을 바꾸기도 한다
돌연변이란 미래의 표절이다
간혹 광장에서 미래의 표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걸, 도둑처럼, 이라고 말한다
깨어 있으라,
과열된 꿈 때문만은 아니다
──백무산, 「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는 것, 즉 비판과 반성의 정신은 현실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관습과 통념조차도 다르게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아이가 아비를 닮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이 시는 이것조차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네요. 이는 ‘아이’가 “아비보다 더 아비답게 생겼다”와 “아이가 원본이다” 등의 시적 표현에서 단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시간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간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뒤집어 미래의 시간이 과거에 이미 도래해 있다는 생각이 놓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유해나간다면, 우리가 꿈꾸는 ‘꿈’은 과거나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를 향한 희망을 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미 실재하고 있는 것을 앞서 반영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 시는 ‘원본’과 ‘표절’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네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미래로부터 과거로 시간이 흐른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표절(미래)’이 ‘원본(과거)’보다 더 진짜의 것이 됩니다. 여기에 사회 변화에 변혁의 문제를 한번 적용해봅시다. 사회 변화와 변혁은 일반적인 통념에 부딪혀 방해를 받곤 합니다. 일반적인 통념에 준하여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 변화와 변혁은 아직은 낯선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이 시에서처럼 뒤바뀐 시간상에서는 미래에 변화된 모습은 진짜의 것이기 때문에 현재 변화와 변혁을 부르짖는 것은 매우 타당하고 당연한 것이 됩니다. 이 시가 “돌연변이”, 즉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변화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두고 “미래의 표절”이라고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사회 변화와 변혁을 부르짖는 ‘광장’에서의 외침이 있다면, 그것은 한때 타오르다 식어버리기도 하는 “과열된 꿈 때문만은 아니”라 그것이 뒤바뀐 시간상에서는 현실이고, 진짜의 것이고, 타당하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깨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가 꿈꾸는 모든 ‘꿈’은 은밀히 “도둑처럼” 오지만, ‘반드시’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원도 부론 가는 초행의 밤길에서는 의혹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령 어렴풋한 택시의 전조등은 안개와 이정표를 뒤섞으며 그 길이 내가 다시 밟은 땅이란 걸 강조한다 안개 속에서 강을 건너온 날것들은 따뜻한 날숨을 지니고 있는 법! 첩첩 산의 무섬증조차 포구 같은 친숙한 발바닥을 내밀고 굽은 길 지나면 은빛 저수지가 솟아오르듯 반사하고 메밀밭과 그나마 서로 붐비는 서너 가구의 불빛과 함께 묻어오는 개 짖는 소리, 골짜기 길을 따라 문막 귀례의 처음 이름조차 익숙해져 안개 속으로 숨는 그 마을은 죽은 고모가 살던 곳이나 외할머니의 訃音이 닿는 곳, 급한 물살이 새벽까지 강바닥을 긁어대며 물길을 바꾸는 곳, 안개를 벗어나 부론에 이르면 환한 면소재지는 그러나 얼른 낯선 얼굴로 돌아와 그 심한 공복감으로 씹는 늦은 닭고기는 오래 질긴 것을
──송재학, 「안개 속으로 숨는 마을 중에는」 전문
하염없이 길을 걷다보니 어느덧 벌써 피곤하고 나른한 오후입니다. 아니, 오후이기 때문에 늘 이렇게 길을 걷는 것이고 그래서 피곤하고 나른한 것일까요? 길을 걷는 단순한 행위에서조차도 뭐라 특정한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합니다. 도대체 왜 나는 길을 나선 것이었을까요? 익숙한 생활공간에서도 이렇게 뭐라 단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단순한 행위들이 연속됩니다.
여기 또 길을 나선 사람이 있네요. “강원도 부론 가는 초행”길이랍니다. 그는 아마도 ‘택시’를 타고 가는 모양입니다. 그가 탄 택시는 ‘안개와 이정표가 뒤섞인 밤길’을 ‘전조등’을 밝히며 달려갑니다. 그는 안개와 이정표가 뒤섞인 밤길이 곧 자신이 ‘다시 밟을 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개와 이정표가 뒤섞여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이정표가 방향과 거리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표지를 뜻하는 것임에 비해 안개는 이를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방해꾼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 시는 이처럼 상반된 것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 여럿 있네요. 이러한 모습은 “첩첩산”과 “은빛 저수지” 간의 관계에서 각각 발견되는 어둠 이미지와 빛 이미지의 대비에서,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익숙하다고 하거나(“처음 이름조차 익숙해져”) 환한 장소가 낯설다(“환한 면소재지는 그러나 얼른 낯선 얼굴로 돌아와”)고 말해지는 것에서, 한자리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죽은 고모가 살던 곳이나 외할머니의 부음이 닿는 곳”) 등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그렇다 보니 ‘강원도 부론 가는 초행길’은 급격한 변화(“급한 물살이 새벽까지 강바닥을 긁어대며 물길을 바꾸는 곳”)와 많은 “의혹”들로 넘쳐납니다. 그리고 ‘의혹’이야말로 지금까지 살펴본 여타의 시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이 시에서 이토록 상반된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은 ‘강원도 부론 가는 길’이 단지 ‘초행길’이기 때문일까요? 어디 그곳뿐이겠습니까? 다르게 보면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익숙함, 똑같은 것의 반복 등을 벗겨내고 보면 사실 세상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익숙하고 일상적인 세계와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 중 어느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짜 모습일까요? 어쩌면 이 물음은 한낱 우문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진짜 모습이라니요, 그런 것은 애초에 없습니다. 단지 조금이라도 진지하고 진실하게 살기 위해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다르게 보기, 즉 여행이 필요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여행길에서 만난 시인들처럼, 여행을 통해 굳이 삶의 확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저 우리 스스로 익숙하고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일상에 깊이 빠져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비판적인 성찰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조금은 고단하고 불편할지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기 위해, 조금은 ‘나’의 삶을 복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비판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왜 넌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니?”와 같은 핀잔은 그러니 가볍게 웃어넘겨 보자고요.
그런데 혹 눈치 채셨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시들은 모두 마침표가 쓰이고 있지 않다는 점 말입니다. 마침표가 없으니, 여전히, 앞으로도, 이들 시인은 길 위의 여정을 계속할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시인이라는 족속들은 한결같이 왜 이 모양일까요? 고단하고 불편하게.
함종호 / 저서 『시, 영화, 이미지』가 있으며, 논문 「‘날이미지시’의 환유 양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