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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봇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삿8:22-27)-2019.6.16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사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덧입고 이스라엘의 어두웠던 한 시대를 이끌어간 큰 용사요, 용기와 지략과 겸손한 신앙을 소유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습니다(22절). 그런데 그는 그들의 제안을 정중하게 뿌리쳤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이라는 말입니다(23절).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질투심까지 온유한 리더십으로 설득시키고 이해시켰던 그가 이번에는 백성들의 왕 추대까지 믿음으로 거절한 것입니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사사였고, 의의 칼을 들고 죄악을 척결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완전한 자가 없는 법입니다.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고 명암이 있을 뿐이지요. 우리 주변에 상당히 지명도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여 넘어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온갖 시험을 다 이기고 살던 사람이 별것도 아닌 일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합니다. 청렴결백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뇌물이나 이성스캔들에 휘말려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큰 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건널목에서 교통사고율이 빨간 신호등일 때 보다는 푸른 신호등일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아십니까? 빨간 신호등일 때는 피차가 조심하지만 푸른 신호등일 때는 긴장이 덜하기 때문에 사고가 더 많이 난답니다. 운전자들이 도로 폭이 좁은 도로보다는 넓은 도로에서 사고를 더 많이 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만큼 평안할 때 사고 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본문은 기드온의 일생에 옥의 티와 같은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금으로 만든 에봇 사건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예복 중에 하나입니다(출28:6-8, 39:2-5). 에봇은 제사장이 직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입는 옷이며,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우림과 둠밈이라는 판결 흉패를 넣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긴 겉옷위에 입는 조끼 같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히 섬기기 위해서 입기도 했으며,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할 때 입기도 했습니다. 에봇은 아무나 사사로운 용도로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의복에는 그 사람의 신분이나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옷을 입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타락은 수치심을 가져왔고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옷을 입습니다. 또한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도 옷을 입습니다. 옷을 입어 추위와 더위를 이기고 적응해갑니다. 그래서 옷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인간은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옷을 입어야 합니다. 특별히 제사장의 예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옷이요, 신적인 권위와 영광이 부여되는 옷입니다. 때문에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께서 친히 디자인 해 주신 것입니다. 제사장의 에봇은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니요, 아무 때나 입는 옷이 아니며, 아무렇게나 입는 옷도 아닙니다. 에봇은 입을 사람만 입어야 합니다. 에봇 자체를 경건의 도구로 여기거나 우상시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에봇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에 에봇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성공주의 신화입니다
우리가 보통 기드온하면 생각나는 트렌드가 있습니다. 300명의 용사입니다. 그는 300용사를 가지고 메뚜기 떼와 같은 미디안 백성을 물리친 전쟁의 영웅입니다. 분명히 기드온은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혜성처럼 나타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낸 사사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기드온의 무용담은 유쾌하고 통쾌합니다. 물론 기드온을 큰 용사로 만들어 사용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시지만 기드온도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로부터 추앙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대스타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사람은 형통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될 때 그 시선처리를 잘해야 합니다. 기드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소심하고 겸손한 기드온에게 탐심이 찾아든 것입니다. 승리한 기드온에게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지요.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22절). 자손대대에 걸쳐서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물론이거니와 아들과 손자까지 세습하여 자기들을 다스려 달라고 주문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겸손하게 거절합니다. 통치권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23절). 거기까지는 정말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자꾸만 딴 마음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을 청구하겠다고 제안합니다(24절). 전쟁터에서 탈취했던 금귀고리를 모두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던 기드온이 왕 같은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 안에 권세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전승기념비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초심과 중심입니다. 기드온의 초심은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웠던 일 같습니다. 사람이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울 때는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 수중에 돈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니까 자꾸 딴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 안에 감추인 본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 권세, 부귀를 이용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기드온도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받게 되자 초심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귀고리를 요구하는 그의 처신은 바르지 못했습니다. 그의 좋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발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가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금귀고리가 무려 1700세겔이요, 그 외에 장식과 패물과 의복과 사슬들이 상당했습니다(26절). 그는 그것으로 에봇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섬기면서 올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초심을 잃어버리고 결정적인 실수를 유발한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을 때는 의롭고 경건했으나 심판이 끝난 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추태를 부렸습니다. 다윗도 사울에 좇길 때는 경건했지만, 왕권이 안정되자 간음하고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고기를 배에 가득히 잡은 후에 오히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겸손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 생활하는 요령이 생기고 자꾸 변질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처음 직분을 맡을 때만 해도 얼마나 순수했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얼마나 게으르고 능청스러워졌습니까?
때문에 형통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건강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만족을 느낄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육적으로 형통할 때 영적으로는 긴장해야 합니다.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찾아들 때 조심해야 합니다. 성공주의는 우리가 버려야 할 신앙의 독소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성공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목회자가 성공주의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면 세속화 됩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교회와 목사를 타락시킨 주된 요인입니다.
(2) 신앙의 부적입니다
물론 기드온이 금귀고리를 청구한 것은 그것으로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모은 금귀고리는 중수가 무려 1700세겔입니다. 1세겔이 10그램이니 약 17Kg 이나 되는 엄청난 물질입니다. 오늘날처럼 금값이 비싼 시대에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착용하던 거룩한 예복입니다. 그가 무슨 목적과 용도로 만들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미디안 군대를 쳐부수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기념비 같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솔직히 금으로 만든 에봇은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통의 무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만든 에봇은 입는 용도가 아니라 자기의 성읍에 보관하기 위한 장식용 에봇이었던 것입니다(27절). 두고두고 보관하며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지요. 정신적인 위로를 받으려는 심리로 만든 것이었을 테지요. 하지만 이것이 나중에는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던 사실을 아십니까?(27절). 마치 신앙의 부적과 같이 우상숭배의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할만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십계명중 제2계명).
사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을 만들어서 가시적인 신앙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영적인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불필요한 선입견과 편견을 조장하여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생활하는 데 올무가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때문에 카톨릭처럼 성화나 성상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연상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꼼수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시도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입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면 안됩니다. 이른바 기독교의 부적들을 만들면 안됩니다. 예컨대 성경도 한번 읽지 않는 사람이 운전대 앞에 성경책을 두고 다니면서 정신적인 위로를 삼으려는 시도가 우리 신앙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말씀을 믿고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성구 하나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그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도 없으면서 대문 앞에 붙여진 교패 하나로 정신적인 위로를 얻으려는 행동이 우리들의 신앙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기독교의 세속화는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하게 십자가에 불을 밝히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언젠가 신문을 통해 교회의 종탑의 LED 조명으로 인한 지역주민들과의 마찰이 만만치 않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조명을 법적으로 제제할만한 법규가 없어서 지역사람들과 갈등이 심각하답니다. 오죽하면 그 지역주민들이 이사를 가려고 집을 내놓는 사례까지 있다합니다. 과연 이럴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신앙에 맡깁니다.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역주민들을 껴안고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아닙니까? 지역주민들과 대립하면서까지 십자가 종탑의 불을 밝혀야 깨어있는 교회일까요? 십자가의 종탑에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복음이 제한을 받는 것일까요? 한번쯤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는 제발 본질이 아닌 문제로 세상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세속화 물결이 은근히 침투하여 성도들을 세속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경영하려는 시도를 많이 합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본주의입니다.
절대 속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대신할만한 어떤 형상이나 조형물을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으로 즐기는 신앙이 아닙니다. 때문에 어떠한 거룩한 분위기나 환경을 통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시도도 해서는 안됩니다. 나중에는 그것들이 우리 신앙의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와 주의 종들이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여주기 위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난리를 부립니다. 교회의 타락은 인간의 육신적인 눈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시도를 할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의 사례를 보십시오. 심지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전마저도 올무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도 신앙의 부적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성전을 신앙적인 표준으로 삼을 정도로 자랑하고 다녔지만 하나님을 자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외형적인 성전의 위용만을 자랑하고 그것을 신앙화 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올무가 된 것입니다. 성전자체가 그들에게 우상이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일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할만한 그 어떤 것들 때문에 정작 하나님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면 버려야 할 부적들입니다. 비록 그것이 교회일지라도 말입니다. 비록 그것이 십자가의 형상일지라도 말입니다. 절대 기독교의 부적들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기드온이 만든 에봇 역시 경건을 가장한 기독교의 부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드온의 입장에서는 큰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승전비 하나 정도는 세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탐심입니다.
특별히 사사시대는 기회만 주어지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던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기드온의 인본주의가 시기적으로 잘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혼합주의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그것이 우상의 올무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자신들을 구원한 신이라고 섬기던 것처럼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신앙적으로 올무가 될 만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문에 아무리 거룩한 생각일지라도 에봇을 만들어서 기념하려는 의도는 버려야 합니다. 에봇에 대한 미련을 버리십시오.
(3) 신앙의 편의주의입니다
현대인들의 여러 가지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나친 편의주의입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성도들이 편의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성막이 있는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성읍 오브라에 만들어진 에봇 하나 때문에 가정 제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다고 했습니다(27절). 이제는 그들이 굳이 실로에 갈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보다 쉽고 빠르고 간편하게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은 세상의 물결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하기 위해 교회가 세상과 사람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고 세상에 민감합니다. 시대의 조류에 민감하고, 사람들의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이처럼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죄악입니다. 자기 기준이나 수준에 맞는 신앙생활은 절대 위험합니다. 기드온의 결정적인 실수가 결국은 영적파탄을 초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타락하면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럽습니다. 훨씬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은 기드온처럼 에봇에 대한 미련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대신할만 한 것은 에봇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에봇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이 에봇이요, 명예나 권세나 정욕을 사랑하면 그것 역시 에봇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을 위한 바벨탑을 쌓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에봇은 우상은 아닙니다. 거룩한 제사장의 예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신할 만큼 가치를 둔다거나 영향력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신종 우상입니다. 누가 감히 자기자식을 우상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미안하게도 하나님의 자리에 자식을 놓아두면 우상이 됩니다.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비록 거룩한 예복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 중에 하나는 지나친 편의주의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꾸만 편하고 쉽고 빠른 것에 길들여져 갑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나친 편의주의는 결국 우리들의 헌신을 빼앗아 갑니다. 희생을 빼앗아 갑니다. 섬김과 봉사까지 모두 다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일 듯 말듯하게 교회가 세상적인 편의주의를 수용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타락시켰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예배의 편의주의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교회는 몸만 가면 예배를 드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눈만 가지고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어떤 교회는 대부분의 헌금도 온라인으로 드립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의 교회도 대부분의 십일조가 은행계좌로 들어온답니다. 글쎄요!! 저는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방에서 봉사하는 인력까지 사람을 사서 쓴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헌신과 희생을 돈과 바꾼 것입니다. 성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랍니다. 타락한 편의주의입니다. 미안하지만 요즘에는 기독교 케이블 방송을 통해 예배를 때우는 자도 많습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대신 때우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머잖은 장래에 손안에 든 스마트폰을 가지고 아무 곳에서나 예배를 때우는 교인들이 나타나겠지요. 정말 비참한 시대가 금방 올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때운다고 표현합니다.
예배는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헌신과 섬김, 성도의 교제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는 예배는 구경하는 예배요, 때우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드려야 합니다. 기드온의 에봇 사건이 지나친 편의주의를 만들어서 결국 하나님 신앙의 올무가 되었기 때문에 에봇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바르지 못한 에봇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문에 엄청난 고통과 비극을 초래했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음을 기억하십니까?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한 반석위에서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에봇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미련을 버리십시오. 지금 우리 안에 영적인 것을 빙자한 에봇이 숨어 있다면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에봇을 태워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것이 내 신앙의 독소가 되고, 하나님께 나가는 데 엄청난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2019.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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