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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2일 주일 새벽기도회 ♣
성경:시편119:161-168(구896P)
제목:신앙 생활을 즐겁게 합시다
161.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164.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5.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66.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167.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8.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예배의부름:시편119:13-160
신앙고백:(사도신경)
찬 송:31장 (통46장)
성경봉독:시편119:161-168
말씀선포:신앙 생활을 즐겁게 합시다
합심기도:주기도:찬양:(찬양하라 내 영혼아 )
할렐루야!12월 두 번째 주일입니다.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온전한 성수주일하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시기를 기원합니다.예배 성공하십시오.
***{제목}***“신앙 생활을 즐겁게 합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시인이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악인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계속 간구하면서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결단을 보면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도 오직 하나님께 구원해 주실 것을 쉬지말고 기도하시고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을 즐겁게 합시다”(시편119:161-168)
어떤 곳에 기념할 만한 큰돌로 예배당을 짓고 있을 때 많은 석수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는 말이 “죽지 못해 이 짓 하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괴롭고 지겹겠습니까? 이 사람이 비록 돌을 다루는 기술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이 일로는 성공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지겨워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질문을 두 번째 사람에게 해 보았더니 이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서 일한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일하는 다른 의미는 찾지 못했고 단순히 먹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일로는 대성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셋째 사람에게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기쁜 마음으로 대답을 하는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석수장이가 되어서 그 기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좋은 일감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좋은 예배당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은 값이면 같은 품삯을 받아도 아니 혹시 적게 받아도 예배당을 짓는데 자기가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하여 자원해서 왔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술을 가지고 예배당을 짓는 일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하루 종일 기쁨으로 일을 하는데 그는 일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똑같은 일을 똑같은 시간에 했는데 왜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까? 이 마지막 사람은 그 일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이 너무도 영광스럽게 생각되어서 그 일을 즐겼습니다.
이 세 번째 사람은 틀림없이 그 일로 성공할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똑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면서도 즐기는 사람이 있고 아주 지겨워하거나 혹은 역겨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을 즐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앙 생활도 즐겁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1.말씀을 즐거워하는 생활(161-163절).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해야 되는 이유는 마치 공부하는 학생들이 책을 아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책을 무척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책을 한번 붙들었다 하면 끝장을 보고야 맙니다. 밤이 깊어 가고 그 책과 더불어 씨름을 합니다. 그들의 별명은 공부벌레라 합니다.
이 학생은 틀림없이 공부로 인해 성공할 학생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들은 책을 멀리 합니다. 책을 들려고 하지도 않고 어쩌다가 책을 붙잡으면 자기도 모르게 졸음이 옵니다.
그러니 이 학생은 공부 말고 다른 것으로 성공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은 반드시 책을 즐기고 또 책을 사랑하고 책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늘 읽으며 묵상하는 사람이 믿음 생활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과 사울 왕을 비교해 볼 때 목동과 왕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반대였습니다.
사울은 비록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목동인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즐거워하였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는 정금보다 귀하고 꿀 송이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상 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즐겁다는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의 이런 엄청난, 그런 훌륭한 믿음이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생활을 첫째로 삼는 것이 믿는 사람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사랑하며 살게 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삶은 말씀을 경외하는 삶을 말합니다.
161절에 보니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는 “고관들이 나를 무고히 핍박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경외한다” 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인은 핍박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할 수 없이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하나님을 잘 믿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방백들이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 때문에 핍박한다면 나는 더 잘 믿겠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무서워할 뿐이요, 너희의 말을 무서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너희들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 곧 경외입니다. 핍박 자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합치될 때에만 들어도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움직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움직일 사람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이 신앙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삶은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을 말합니다.
162절에 보면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는 주의 말씀으로 싸워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울 때 승리하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 그 자체도 기쁜데 많은 탈취 물을 얻는 기쁨은 더욱 큰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많은 탈취 물을 얻는 것처럼 주의 말씀이 즐겁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으로 승리한 자만이 느끼는 즐거움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삶은 말씀만을 사랑하는 삶을 말합니다.
16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면 그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지금 말한 대로 말씀을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말씀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163절에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라는 기록은 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싫어하고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랑할 줄도 압니다.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 죽도록 사랑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시인이 미워하는 것은 거짓을 미워하였습니다. 거짓을 미워할 줄 모르면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미워할 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거짓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까닭에 거짓을 미워해야 하겠습니다.
요즈음에 왜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합니까? 전화로 핸드폰으로 문자로 이메일로 광고로 거짓말을 해서 속이고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들! 다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거기에 넘어가는 사람들도 거짓을 사랑하고 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거짓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백화점의 왕이라 불리우는 미국의 존 와나메이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백화점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없을 때에 처음으로 백화점을 만들고 잘 되니까 각 도시마다 만들어 수십 곳의 백화점을 경영한 큰 사업가입니다.
그것이 인정되어서 미국 제23대 대통령 벤자민 헤리슨이 그를 체신부 장관으로 발탁을 했습니다.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할 때에 이 사람이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주일 날마다 고향에 돌아가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도록 허락해 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장관을 사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조건을 수락한 후에 이 사람이 세 가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수많은 백화점을 거느리는 사업가, 두 번째로는 체신부 장관, 세 번째는 학생 4천명을 수용하고 있는 주일학교 부장입니다. 혼자서 어떻게 이것을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이 세 가지 일을 어떻게 혼자서 다 합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부업과 본업이 있어서, 본업과 부업을 분명히 구분해 놓기 때문에 간단하다” 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럼 장관님의 부업과 본업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내 본업은 주일학교 부장이요, 장관의 일과 백화점 경영하는 것은 나의 부업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일학교 부장을 위해서 먼저 시간을 바칩니다.
다른 것은 시간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합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성경에 보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할 것이 있고 나중에 할 것이 있습니다. 존 와나메이카는 백화점, 장관, 유년부 부장 셋 중에서 먼저 택하고 먼저 구한 것이 유년부 부장이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전부 나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이 항상 요절이요, 생활의 표준이요, 표어였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성경 한 절을 사랑한다는 말은 성경 전체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업가로도 성공했고, 장관으로도 성공했고, 주일학교 부장으로도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즐거워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매일 성경을 읽으시고 말씀을 묵상하십니까?
말씀을 즐거워하는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2.찬송을 즐거워하는 생활(164-166절).
우리가 찬송을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찬송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하기 위해 빌립보에 갔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무당 귀신이 들려 점을 차는 한 젊은 여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점쟁이는 어떻게 점을 잘 치는지 그 주인이 수지를 단단히 맞추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러 다니는데 무당 귀신 들린 여인이 좇아 다니면서 귀찮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게 되니 그 여인이 점을 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 주인은 졸지에 사업이 망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소를 당했습니다. 붙들려 가서 수 없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혀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찬송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밤중쯤 되어 기도하고 찬미하매 모든 죄수들이 듣더니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찬송 부르기 전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기도가 다 끝난 후에 찬송을 어떻게 크게 불렀던지 모든 죄수가 다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습니다. 찬송의 역사입니다.
찬송의 역사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간수가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할 때에 바울이 “자결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바울 앞에 와서 엎드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전부 씻기고, 싸매 주고 음식을 차려 잘 대접한 후 그날 밤 온 식구가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에 자주 장사하던 여자 루디아와 그 간수가 빌립보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찬송 한 마디가 일으킨 엄청난 결과요, 역사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성도들이 즐거워해야 될 일은 찬송 부르는 일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찬송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찬송을 불러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164절에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장 부르는 사람도 쉽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도 찬송가 일곱 장 부르는 사람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부르는데 그 이유를 시편 기자는 의로운 규례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의로운 규례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법은 있을수록,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좋은 법은 춥고 배고픈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법이 보호해 주지 않는 한, 강자가 약자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아도 말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대형마트들이 치킨을 싸게 팔고 피자를 싸게 파는 것 때문에 영세 사업가들은 울고 있는 것입니다. 대기업이나 대형마트들이 독점을 하여도 아무런 제제를 하지 못한다면 좋은 법이 아닙니다.
나라의 법이 우리의 가정을 지켜 주고 우리의 재산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질서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좋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생활을 풍성케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의로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법이 인간의 사회생활을 밝게 해주고 생명을 풍성케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 때문에 하나님을 하루 일곱 번씩 찬송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찬송할 재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법이 주는 혜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또 찬송을 불러야 할 이유를 165절에 보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큰 평안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앞에 놓인 장애물을 치워 주시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행진할 때 홍해라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큰 장애물이 가로놓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모세라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창칼을 가지고 지금 따라 옵니다. 즉 죽음이 따라 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동풍으로 역사 하시니 큰 홍해 바다에 물 벽이 생기고 그 가운데 길이 나면서 육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즉 바다 가운데 육지로 건너게 되었습니다(우리나라 바다 가운데도 이런 바다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에 제부도를 한번 가보십시오).
건너간 다음에 너무도 고맙고 감사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칠 줄 모르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뒤에는 죽음이 따라오고, 앞에는 장애물이 놓여서 평안은 고사하고 지금 죽기 일보 직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다 치워 주시고 도와 주셔서 구원 얻고 찬송을 부르게 했다는 말입니다.
주의 법대로, 말씀대로 사는 사람, 즉 주께서 가라는 대로 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큰 평안을 주시는 바 장애물을 치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사랑하시고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장애물을 물리쳐 주시고 큰 평안을 주심으로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찬송을 불러야 할 이유를 166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찬송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찬송이요, 구원 까닭에 부른 찬송입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보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즉 다니엘의 세 친구가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결박을 당한 채 전혀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세 사람을 넣었지만 넷째 사람이 나타났는데, 넷째 사람은 사람처럼 보이는 신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결박을 다 풀어 주셨습니다.
그 고난의 현장에 뛰어 들어서 그들을 지켜 주시고 불러내사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않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즉 주님이 구원하시는 구원입니다. 왕이 그들에게 나오라고 했다고 해서 왕이 구원해 준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풀무불이 칠 배나 더 뜨거워서 감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서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었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풀무 불같은 지옥밖에 갈 수 없는 인간을 예수 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주의 구원 까닭에 찬송하였고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찬송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 구원을 감사하며 항상 찬송하고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을 밤낮 불어야 합니다.
예화)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원수가 되어서 싸우는데 적군이 들어 왔다 하면 모두 둘러엎고, 재산을 빼앗아 가고 젊은 사람들은 다 군대에 잡혀갔습니다. 그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청년 하나가 겨우 빠져서 도망하여 광야를 헤매는데 먹을 것도, 잠 잘 곳도 없었습니다. 너무 기진맥진하여 이제는 죽는가 싶었는데 저녁이 되어 어두워 갑니다. 멀리서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면서 찬송 소리가 가냘프게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그리고 갔습니다. 과부 하나가 어린이 하나를 데리고 가난하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저녁 가정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정 이야기를 다 하고 함께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난하지만 함께 살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같이 지내자는 과부의 말이었습니다. 그 때 들었던 찬송이 338(통364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였었는데 그 찬송에 은혜 받고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함께 지내면서 무사히 난리를 피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찬송을 평생 자기의 찬송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이 난리가 끝난 다음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나중에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찬송 하나가 그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찬송 한 장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목사가 되게 하는 결심을 일으켜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찬송은 자신에게도 은혜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놀라운 은혜를 끼쳐 주는 것이므로 언제나 찬송을 즐기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결단 하십시오. 하루에 일곱 번씩 찬송하겠노라고!
3.믿음을 즐거워하는 생활(167-169절).
마지막으로 믿음을 즐거워하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즐거워해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대학 교수 한 분이 있는데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예수를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자기 전공 분야에는 조예가 깊어 예수는 안 믿어도 목사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초청되어 강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이 강의가 끝난 다음 실토한 바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장로요, 어머니가 권사요, 나는 교회 학교도 열심히 다녔는데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아서 못 믿겠습니다." 라는 실토였습니다.
아무리 믿을래야 안 믿어져서 못 믿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기 조상들과 부모들이 다 예수 믿어서 그 분들 따라 교회 나가 예배하고 설교를 들어 봐도 허무맹랑한 소리만 하고 있어서 듣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믿을 마음이 안 생기고 성경을 읽어보아도 이치에 맞는 소리는 하나도 없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믿는 것입니다. 그 교수는 선물로 받지 못했으니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믿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167절에 보면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즉 주님의 약속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168절에는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즉 내 행위가 모두 지켜보시는 주 앞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 앞에서 주님의 약속을 지키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169절에서는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마지막에는 나를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로 끝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깨달음이 얼마나 좋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때부터 오늘까지 4천년을 믿어 오는 중에서도 예수가 그리스도인 줄을 지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 본문의 시인은
“주여! 깨닫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이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깨달으면 믿음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인 줄 깨닫는 것은 세상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예화)
미국에 백만 장자로 이름난 스티븐 지라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본래부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토요일에 직원들을 모아 놓고 내일이 주일이지만 회사 일이 급하니 다 나와서 일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오겠다고 했는데 청년 하나가 용감히 일어서더니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교회에 나가 봉사해야 할 것이 있어서 못 나오겠다고 잘라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즉 믿음 때문에 직장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때 미국에도 직장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 육 개월이 지나자 다급해집니다. 그때 이 청년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에게 믿음 때문에 잃은 직장을 되찾아 주옵소서” 라는 내용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지라드 사장의 친구인 필라델피아 은행 총재가 은행 지점을 개설하고 사람을 구해야 되어서 사장인 친구에게 그 회사에서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라드 사장이 회사에서는 보낼 사람이 없고 육 개월 전에 쫓아낸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쫓겨난 사람은 자기에게도 필요 없다고 은행장이 거절했습니다.
우리 회사에는 필요 없지만 자네 회사에는 적격이라는 것이 지라드의 말이었습니다. 즉 예수를 얼마나 지독하게 믿는지, 또 고지식하게 믿는지 그런 사람에겐 전 재산을 맡겨 놓아도 틀림없을 것이니 마음놓고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로 당장 지점장 발령이 났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까닭에 잃었던 직장을 더 좋은 직장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즐거워 한 사람입니다.
***{결론}***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불신자들보다 더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움속에서 산다면 그 모습을 보고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 믿는 성도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불신자들이 궁금해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배우지 못했어도 행복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속에서 주님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인은 말씀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일곱 번씩 찬송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을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도 본문의 시인처럼 즐겁게 믿고 즐겁게 봉사하며 즐겁게 전도하고 즐겁게 물질을 드리고 나누시며 즐겁게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시편119:161-168절입니다. 오늘 주일이라 바쁘다고 말씀 묵상을 뒤로 미루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백화점 왕 워너메이커처럼 먼저 말씀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일예배 성공하시고 가정예배도 성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만나군인교회에 많은 장병들이 나와 예배드리고 찬양 가운데 말씀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되게 해달라고 중보의 기도를 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