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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3:1-35
▣ 가이사랴로 보내어진 바울-사도행전 23장-
1. 바울과 공회(23:1-11)
다음 날, 수비대는 바울을 유대인들의 공회의 공식 모임에 데리고 갔다. 이 집단은 베드로와 요한(4:5-), 열 두 사도들(5:21-), 스데반(6:12-)을 심판했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재판하였었다.
바울은 이 모임에서 고향에 온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한 때 활동적인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는데, 자신의 공적생활과 양심은 아무 흠이 없이 깨끗하다는 말부터 시작한다. 이 말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격분하여 바울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다. 그리스도도 이와 유사한 취급을 당하셨다(요 18:22).
3절에 나오는 바울의 반응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정죄함으로써 육신적인 망설임에서 행동하고 있었다고 말하며, 다른 이들은 바울이 그의 말로 의롭게 되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를 친다는 것은 불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악인인 것이다. 역사는 아나니아가 이 민족의 역대 대제사장들 중에서 가장 악한 대제사장 중의 하나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다른 제사장들에게서 돈을 훔쳤고, 자기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모든 정치적인 수단을 강구하였으며, 결국에는 암살을 당하였다.
“회칠한 담“(3절)은 에스겔 13장 10절 이하를 언급한 듯하며, 여기서는 이 나라의 위선적인 통치자들이 회칠하였으나 일어설 수가 없는 담에 비교되고 있다.
바울은 누가 대제사장인지 알았겠는가? 어떤 이들은 사도의 눈병 때문에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임은 의회의 정기 모임이 아니었으며 로마 수비대장이 유대인들을 소환하여 모인 것이었다. 따라서 대제사장이 그가 보통 입는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며 늘 앉는 자리에 앉지 않았을 것이다.
또다른 가능성은 바울이 그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슬쩍 출애굽기 22장 28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대제사장이 그 나라의 참된 통치자가 아님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바울은 이 공회의 의견이 갈라지도록 하기 위해 “정치적인“ 접근법을 사용하여, 엄격한 바리새인들이 진보적인 사두개인들과 대항하도록 하였다. 이방인들의 위대한 사도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역자가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외쳤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나중에 감옥에서 그는 빌립보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며(3장) 이 모든 것을 “배설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참 문제가 되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일어난 논쟁은 그의 생명을 위험으로 몰고 갔으며, 수비대장이 다시 그를 구해내야 했다. 희망이 없어 보였으나, 그 날 밤에 주께서 은혜로써 그의 곁에 서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그는 로마로 가야 할 것을 알았다!"
행 23:12-22
2. 바울과 음모자들(23:12-22)
한 경건한 유대인을 죽이려고 40여 명이 음모를 꾸밀 때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이 범죄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살인자들로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정하고 계셨으며, 그의 사자를 인간들이나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데려가려 하셨다.
비록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불순종하여 예루살렘에 왔으나 주께서는 은혜스럽게 그의 잘못을 전환시키셨다. 바울은 그의 실수로 인해 고난을 당해야 했던 것이 분명하지만, 종말에는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는가!
우리는 바울의 누이나 조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들이 신자였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음모를 좌절시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떠나게 하는 데에 이들을 사용하셨다. 우리는 로마 수비대장의 정직성과 청렴결백함에 칭찬을 금할 수 없다. 그는 그 소년이 전한 소식을 거절했을 수도 있으며, 그보다는 유대인들의 거짓말을 믿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였다. 하나님의 종들이 정직하고 충성된 불신자들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으며 보호를 받는 일이 자주 있다. 바울은 이제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졌으며, 이 일은 얼마 전에 주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당하셨던 일이었다.
행 23:23-35
3. 바울과 수비대장(23:23-35)
수비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였다. 벨릭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사도가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구해냈다는 말을 한다. 문제가 된 것은 로마의 법이 아니라 유대인의 법이며, 자신은 바울이 체포되거나 죽을 일을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말도 하였다. 그는 바울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게 하려고 벨릭스에게로 보내어 재판을 받게 하였다.
상황은 어떻게 진전이 되었던가! 이들 40인은 그들의 결의가 깨지기까지는 극렬한 욕구를 경험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가이사랴로 안전하게 보내어져 그곳의 벨릭스 총독 앞에서 유대인 고발자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왜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위대한 선교사로 사용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의 로마 시민권은 로마의 법과 군대의 보호를 받게 했으며, 이방인들에게 가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출생지와 시민권까지도 미리 준비시키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몇 번의 위기를 당할 때마다 주께서 나타나셔서 그를 지탱케 하셨다는 것에 주목하면 흥미있다.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공격해 왔을 때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확신을 주셨으며, 많은 개심자들을 얻게 하셨다(18:9-11). 그는 예루살렘에서 로마 사람들에게 체포되었을 때에 이와 똑같은 확신을 받는다(23:11). 로마로 가는 배에서 폭풍이 닥쳤을 때에 그리스도는 바울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주셨다(27:21-25).
우리는 바울이 시편 23편 4절의 말씀을 열심히 배웠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행 24:1-27
▣ 벨릭스의 앞에 선 바울-사도행전 24장-
1. 거짓고소(24:1-9)
바울은 이제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벨릭스는 드루실라의 남편이었으며(24절), 그녀는 세번째 부인으로서 헤롯 아그립바 10세의 막내딸인데, 아직 20세도 채 되지 못한 젊은 나이였다.
고소자가 출석하여 구두로 재판관에게 사실 이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더둘로는 이러한 구두 변호사였으며, 벨릭스에게 한 그의 말은 공허하고 거짓된 것이었다.
1절에 나오는 “닷새“란 말은 바울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기까지의 기간(8-12일째)을 뜻한다.
- 예루살렘에 도착함(1일째)-21장 17절
- 야고보를 방문함(2일째)-21장 18절
- 성전을 방문함(3일째)-21장 26절
- 성전에서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함(4-6일째)
- 성전에서 체포됨(7일째)-21장 27절
- 공회 앞에 섬(8일째)-22장 30절-23장 10절
- 유대인들의 음모, 바울이 가이사랴로 여행함(9일째)-23장 12-31절
- 벨릭스 앞에 섬(10일째)- 23장 32-35절
- 가이사랴에서 대기함(11-12일째)
- 본문의 재판(13일째)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고소는 세 가지로서, 인격에 대한 고발(“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정치적인 고발(“소요케 하는 자요“), 종교적인 고발(“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로 대별된다. 그리스도의 재판과, 그 때 그들의 고발을 비교해 보라(눅 23:22). 물론 이들은 어느 하나라도 증명할 수 없었다!
이들은 바울을 “염병“이라고 보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를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 보았다. 오늘날 불신자들은 그들의 “염병 같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최고의 친구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나오는 부자는 “염병 같은 나사로“를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전도하도록 해달라고 지옥에서 하나님께 애걸한다!
정치적인 고발 역시 거짓된 것이었다. 바울은 전혀 인간들의 정치를 변화시키려고 추구한 일이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예배할 것을 요구한 가이사의 요구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빌라도에게 외쳤었다(요 19:8-15).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하나의 이단으로 간주하였으며, 유대의 참된 신앙과는 다른 사람들의 그룹으로 보았다. 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이들은 여전히 성전 예배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직은 새로운 종교로서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한 이단 종파로 보았던 것이다. “나사렛“이란 단어는 경멸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더둘로는 용감한 군인 루시아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였다. 그가 6절에서 성전의 소요 사건을 “부드럽게“ 미화시키고 있으면서 7절에서는 루시아가 행한 일을 과장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왜곡시키거나 거짓을 진흥시키는 데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하나님은 바울을 구하는 데 루시아를 사용하셨으며, 유대인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그를 미워하였다. 인간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체하지만 이 마귀의 자녀들은(요 8:44) 살인자들이며 거짓말장이들이다!"
행 24:10-21
2. 신실한 대답(24:10-21)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설정하신 법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아첨하는 말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살전 2:1-6 참조). 그는 총독이 말하기를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정직하게 자신의 경력을 말했다.
이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가 총독이 된 지 6, 7년이 되었는데, 이를 “여러 해“(10절)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의 고발에 대하여 사실로써 응답한다. 열 이틀 전에(앞의 진행 과정 참조) 그는 예배하러 왔던 것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어떻게 반란을 꾸밀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그가 문제를 야기했거나 성전에서 언성을 높였다는 것조차 입증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바울은 법정을 강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신앙을 간증하였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하지만 사실상, 이 “이단“이 구약 유대 신앙의 완성임을 바울은 계속 언급하였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처럼 구약 전체를 믿었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다. 그는 매일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노력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적대시하였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이 시험의 때를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도우려고 자기 민족에게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까! 17절에 나오는 “여러 해“는 3-4년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다섯 번의 다른 경우들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행 9:26 -주후 39년 /11:27-30 -주후 45년 / 15:1- -주후 50년 / 18:22 -주후 53년/ 21:17 -주후 58년). 그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5년 전의 일이었다. 고발자들은 그가 어떤 소요를 일으켰다는 증거를 내세울 수가 없었으며, 사실상 성전에서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사람은 그들이었다(21:27-)."
행 24:22-27
3. 어리석은 태도(24:22-27)
벨릭스는 “이 도“(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정을 내리기를 거절하였다. 먼저 수비대장이 출정해야 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결정을 연기하였다. 총독은 자유를 주고 친구들을 면회하게 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벨릭스는 또다른 재판을 열었으며, 이번에는 그의 십대(teen-age)의 아내인 드루실라도 함께 출두하였다. 그녀는 젊었지만 벌써 죄 가운데 살고 있었으며, 그녀의 친정 식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아마도 바울이 그녀에게 말씀을 전하기 전까지는 총독의 아내로서 허영과 과시욕을 즐겼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 앞에 서서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라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말했다!
바울은 왜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 면으로 논의를 이끌어 갔다.
- 의로움-이들은 지난 날의 죄에 대하여 어떤 조처를 취해야만 했다.
- 자중(절제)-이들은 오늘의 유혹에 직면해야만 한다.
- 다가올 심판-내일의 심판을 준비해야만 한다.
이 멧세지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벨릭스는 두려워 떨었다 ! 그러나, 벨릭스 총독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결정을 연기하고 바울에게서 돈을 좀 얻을 수 있을까하여 그를 “정치적인 앞잡이“로 이용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줄 구제물을 가지고 왔다고 시인했으며(17절), 벨릭스는 이 사도가 석방되기 위해 뇌물을 쓰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벨릭스는 그를 2년간 더 가두어 두었고, 그리고는 총독직을 떠났다.
우리는 바울이 거짓 고발에 대처한 것에 대해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참으로 본이 되는 행동이었다. 그는 정직하게 사실에 직면하여진리가 제시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의 관심은 자기 목숨의 안전에 있지 않았고 인간들의 영혼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바울이 이방인들과 왕 앞에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었다(9:15). 이번의 경우는 그러한 약속의 한 가지 성취였다.
오늘날 많은 죄인들은 더둘로와 같다. 아첨을 하며 진리에 직면하기를 거절한다. 또 어떤 이들은 벨릭스와 같아서 진리를 듣고 이해하며 죄인임을 깨닫기도 하지만, 순종하기를 거절한다. 또 다른 이들은 드루실라와 같다. 말씀을 듣고 그녀의 남편이 깊게 감동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의심할 나위없이 그녀의 젊은 나이의 죄가 벌써 마음을 굳게 했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21년 후 베스비우스화산의 폭발 때에 죽었다고 말해 준다."
행 25:1-27
▣ 베스도 앞에 선 바울-사도행전 25장-
1.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함(25:1-12)
24장에 나오는 재판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누가는 가이사랴에서의 바울의 활동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바울이 마침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갔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새 총독 베스도는 좀더 존경할만한 인물로서, 바울에 대한 거짓 재판을 꺼려했다(16절 참조). 예루살렘을 공식 방문하는 동안에 베스도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것을 보았다(24절).
대제사장과 최고 치리자들조차도 바울에 대해 거짓말을 하여,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재판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이들은 도중에 바울을 죽이려는 과거의 속임수를 또 쓰고 싶었던 것이다(23:12-). 그 40인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기를 갈망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
하나님은 베스도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제안을 거절하도록 인도하셨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보호하셨다. 인간이 궁리를 하지만 결말은 하나님이 지으신다. 우리는 그의 정직함과 공정성을 인해 그 이방인 총독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을 10일간 방문한 후에 가이사랴에 돌아온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다. 또다시 유대인들은 입증해 보일 수 없는 불평들을 안고 왔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로마로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기를 얼마만한 인내로 기다려야 했던가 ! 애굽의 감옥에 있던 요셉처럼 말씀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시험을 받고 시련을 당하였다(시 105:17-20).
베스도가 지닌 “정치가로서의 기질“은 이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지를 물어보는 데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도 역시 벨릭스처럼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였으며 새로운 총독으로서 좋은 인상을 주려 했다(24:27).
이제 바울은 로마에 관한 그리스도의 약속에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해전에 그리스도는 그에게 예루살렘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하셨었다(22:17-18). 지난번 선교 여행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성령의 경고에 불순종하였다.
하나님은 바울의 실수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전환시켰으며, 바울은 조심스럽게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그의 종을 보호하여 로마로 데려가 최후의 몇 해를 그 곳에서 사역하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모든 로마 시민들은 가이사에게 호소할 권리가 있었으며 로마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바울은 이제 이 권리를 사용하였다."
행 25:13-22
2. 바울이 베스도를 당황하게 함(25:13-22)
새 총독은 이제 정말 문제거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바울은 주목받는 죄수였고, 그의 재판에는 유대 지도자들과 전 민족이 관계될 것이었다. 만일 베스도가 정직히 행하여 바울을 석방한다면 유대인의 분노를 초래할 것이었는데, 새로운 총독으로서 그는 그들의 선의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의 문제는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오면 해결될 것 같았다. 이들은 노련한 지배자들이며 정치가들로서, 아그립바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아그립바의 아들이었고, 버니게는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의 언니였다. 헤롯의 가족은 국제결혼을 하여 여러 해 동안 죄 가운데 살았다.
베스도는 바울에 관한 소송을 곧장 아그립바에게 내밀지 않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이 문제가 자기에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경험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듯이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접근이 아그립바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술책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베스도는 이 모든 문제를 “미신의 문제“(19절)라고 불렀다 !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력이 없으며, 종교란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베스도는 이 사건에 예수 그리스도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울은 예수께서 살아계시다고 말했으며 유대인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베스도는 아그립바가 바울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정말 이유를 말해 주었다. 즉, 총독은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야만 하며, 그에게 불리한 어떤 고소 사실이 없는 것이다 !(27절)"
행 25:23-27
3. 바울이 왕실을 대면함(25:23-27)
다음 날 의식이 장관을 이루며 진행되는 가운데 왕실 사람들이 법정에 모였다. 세상에는 만족하게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 있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겉치레와 교만에 대해서는 쉽게 싫증을 낸다. 오늘날 종교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법의나 허례, 촛불, 깃발 등을 볼 때에,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성을 볼 수 없게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해진다.
베스도가 바울을 소개하는 말을 보자. “이 사람을 보라 !“ 하지만 바울은 그모임에 참석한 어떤 위대한 사람들보다도 고상한 사람이었다 !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열심있는 대사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왕이요 제사장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시며 하늘의 소명을 주시고 영광된 소망을 주신다 !
바울의 재판은 그리스도의 재판과 별다를 것이 없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죽을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석방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수비대장 루시아는 바울에게 불리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으며(23:29), 베스도는 바울이 죽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고 시인하였다(25:25). 아그립바조차도 이 판결에 동의하였다(26:31). “죄목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죄인을 가이사에게 보내겠는가?“라고 베스도가 묻자,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말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 실천적인 교훈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삽입 부분“에 속하는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천적인 교훈을 발견한다.
바울은 감옥에서 2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보내야 할 그의 생애에 대한 준비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 일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킨다.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는 언제나 참된 신자들을 박해한다. 바울은 직접 이러한 일을 해보았던 사람이었다(행 9장/ 빌 3장).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는 사단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어디까지든 굴종한다. 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주장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고전 4:1-2 참조).
구원받지 못한 정부 지도자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사용되는 때가 자주 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을 즐겁게 하는 일과, 법을 정직히 따르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계획과 유대인들의 계획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로 전환시키셨다.
바울은 정직한 삶을 살았으므로 누구도 그를 고발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이다.
세상의 지위나 인간의 허식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 우리는 왕 중의 왕을 대신하고 있으며, 지상의 어떤 치리자보다 높은 곳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