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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인생은 순간이다
- 삶이라는 타석에서 평생 지켜온 철학 -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무엇이든 자기가 지금 베스트라는 확신이 들 만큼 열심히 하면
기회는 언젠 간 기회는 오게 되어 있다. 운도 내 편이 된다. - 분 문 중에서. 야구 감독 김 성 근
독서 자료 보냅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이 수 영
■ 김성근 지음
0 대한민국 최장수 야구 감독
0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 꼴찌를 못 면하던 팀의 감독을 맡아 가 을 야구까지 진출
0 SK 와이번스 사령탑을 맡아 감독 1년차 우승
0 감독 재임 내내 5번 한국시리즈 진출 및 3번 우승
0 삼성 라이온스, 한화 이글스 감독 역임
0 김성근은 야구를 하며 자연스럽게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많은 선수를 만 나고 가르치며 인간의 잠재능력이 얼마나 무한한지 깨달았고, 자식을 위해 더 엄격해질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을 가슴에 새겼다.
0 김성근은 이 책을 통해 ‘인생은 순간순간의 축적’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담담 한 응원을 건넨다.
■ 들어가며
원래 나는 야구장으로 가는 길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사람이다. 문제가 있으면 하루 종일 고민하고, 그러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다음날 야구장에 가서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가 맞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으니 야구장에 가는 길은 언제나 희망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설렘 속에서 야구장에 갔다. 그런데 일본에 있다 보니 갈수록 야구장에 가기가 싫어지는 것이었다.
‘안돼, 그래도 가야지, 이러면 안 된다’ 스스로를 이렇게 설득하다가 결국은 왕정치 회장에게 더는 못 하겠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는데 JTBC <최강야구>에서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사실 처음에 섭외가 들어왔을 때는 거절했었다. 그래봤자 동네 야구 정도의 의식이겠거니 싶어서 내가 뭘 하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안 하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방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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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봤는데 생각보다 선수들이 아주 진지하게 야구를 하는 것이다.
그래, 야구를 한번 해 보겠다고 오케이를 내렸다. ‘최강야구의 목표는 승률 7할’이라는 PD의 말도 마음에 들었다.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게 수치로 나타나나까. 고민 끝에 수락하고서 왕 회장께 최강야구와 함께하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최강야구에 처음 와서 선수들에게 한 말은 사명감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요즘은 비유하자면 교과서와 참고서가 없는 세상이다. 과거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법이었다. 답을 모르겠으면 책을 보면 되는 식이다. 그런데 지금은 각자 자기가 가진 재능을 찾아 그걸 자기 나름대로 꽃 피워야 한다. 자기가 답을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나는 야구라는 것으로 인생을 전하고 싶었다. 단순히 이기고 지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절망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야구에는 ‘다음 경기’가 있지 않은가.
한 번에 성공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실패하고, 도전하고, 길을 찾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공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듯이, 야구도 숱하게 실패하고 좌절해도 다음 경기를 위해 묵묵히 내 일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나는 야구에 사력을 다하며 살았다. 야구를 위해서 살아왔고 야구밖에 모르고 살았다. 말하자면 야구는 내게 인생의 전부다. 야구란 정말 인생과 똑같다. 사람이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를 실행하며 살아야 한다. 그냥 사는 인생은 없다.
내가 야구를 하며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항상 ‘왜?’라는 생각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라.
타협하고 후퇴하지 마라.
시선은 늘 앞으로, 미래로.
그렇게 나는 오늘도 야구를 하며 살아간다.
2023년 11월 김성근
◎ 1장 이겨내기 위한 의식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베스트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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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 어깨 부상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 -
“무엇이든 자기가 지금 베스트라는 확신이 들 만큼 열심히 하면 기회는 언젠간 오게 되어 있다. 운도 내 편이 된다.”
야구나 인생이나, 한시도 멈춰있는 순간이 없다. 순간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기본은 똑같다. 강물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흘러가는 강물은 겉으로는 똑같아 보여도 사실 전부 다르다. 수질이 다르든 온도가 다르든 순간순간 모두 다른 강물이 흐르고 있다. 단 1mm라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고려해서 손을 뻗어야 물고기 한 마리라도 낚아챌 수 있듯이, 우리 삶의 움직임에도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1962년 나는 처음으로 가슴에 ‘korea’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얹고 마운드에 발을 디뎠다. 1961년 한국으로 건너와 교통부에 입단하자마자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고 그해 12월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해 자유중국(지금의 대만)으로 향하면서였다.
0 한국, 일본, 필리핀, 자유중국, 네 나라 참가
0 첫 날은 선발 투수로 출전, 7회까지 두 개의 안타 허용
0 둘째 날은 구원투수로 무실점을 하며 호투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왼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팔꿈치에서 시작된 통증이 왼쪽 팔 전체로 퍼져 나갔다. 스포츠 의학이 발달한 지금 같았다면 쉽게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트레이닝 코치는커녕 통증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아프면 화끈거리는 약을 바르고 경기에 나갔고, 아이싱을 하는 대신 뜨겁게 달군 돌로 찜질을 했다. 방법을 완전히 잘 못 안 것이다.
한 번 나빠진 팔 상태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1966년을 끝으로 나는 완전히 투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1루수로 포지션을 바꿨지만 그 역시도 오래 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야구로 최고가 되겠다고 영주 귀국을 했던 게 1964년인데, 결국 내 선수 생활은 그로부터 4년 만에 마무리 되었다. 짧디짧은 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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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행 본사로 돌아가 도장을 찍으라는 곳에 도장을 찍는 것이 전부였다. 같은 은행원들도 ‘김성근은 쪽발이라서 한국말을 못한다’며 수군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렸다. 야구를 위해 살고 야구를 하다 죽자고 결심했는데 여기서 끝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은행은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은행에 다니면서도 매일 뛰며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오늘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면 어느새 내일은 온다
기업은행 감사였던 이창현씨가 내게 자신의 모교인 마산상고 야구부의 감독을 맡아 달라며 나를 기업은행 마산지점으로 발령을 내준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기업은행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마산상고 감독으로 다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생을 살아보니, 기회란 흐름 속에서 언젠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사인할 때 쓰는 나의 좌우명 ‘일구이무 一球二無’란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는 뜻이지만, 이는 곧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회란 인생사에서 세 번은 온다. 단지 사람마다 그걸 붙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 차이는 바로 ‘준비’에서 온다. 준비가 된 사람은 기회가 오면 잡을 수 있고, 기회를 잡은 사람은 준비가 된 사람인 것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기회란
흐름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제나 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는 그런 기회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어니, 기회라기보다는 마치 순리처럼 내게 찾아온 일들이었다.
그러니 매일의 순간순간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을 핑곗거리로 삼지 않았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일이 와 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 그저 편하고자 한다면 죽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 잠재 능력을 깨우는 ‘의식’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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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에게 한계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나이 일테다. 벌써 여든이 넘었으니, 주위에서는 어떻게 그 나이에 야구장에서 종일 서 있고 게다가 펑고까지 쳐 줄 수 있느냐며 신기해 한다.
실제로 나는 전과 다를 바 없이 운동복을 입고 야구장에 간다. 땡볕 아래에서 선수들과 함께 서 있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선수들을 운동시켜놓고 나만 편하게 있지는 않는다. 몸이 좀 아프거나 노곤할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야구장에 가면 깨끗이 사라진다. 내가 공을 한 개라도 더 쳐줄 때마다 선수들의 폼이 단 1mm라도 나아지는 모습이 보이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100개든 1000개든 아무렇지 않게 펑고를 쳐주고 배팅 연습을 해준다.
펑고 : 야구에서 야수의 수비 연습을 위하여 공을 쳐주는 일 또는 타격 연습 을 위하여 공을 치는 일
선수들을 키우며 살다 보니 인간이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잠재 능력이라는 게 어마어마하다는 걸 나는 살면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식이 커질수록 잠재 능력도 조금씩 깨어나 꽃을 피운다.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생을 마칠 때 자기가 가진 잠재 능력을 100% 발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작 자기 능력의 20~30% 정도나 발휘하며 살까? 그러니 인간에겐 한계가 없다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70~80%의 능력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바로 스스로가 설정한 한계 속에서 사라진다.
■ 한 걸음 한 걸음 한계를 지워나간다는 것
어떤 한계를 마주하든 돌파하는 것은 ‘의식’의 문제다. “어떡하지‘ 하며 걱정하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매일 하루 두 번씩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한다. 산책도 하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한다. 한계를 없애는 작업이다. 나이라는 한계 역시 의식만 있다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다.
정신력도 마찬가지다. 여든이면 언제 치매가 올지 모르는 나이다. 그래서 나는 틈틈이 과일, 나무, 꽃, 선수 이름 등등 적을 수 있는 것들을 혼자 노트에 적어 내려간다. 어제는 열 개를 적었다면 오늘은 스무 개를 적으려고 해 보고, 또 내일은 서른 개를 적으려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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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고 짧게 살아라
-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훔치겠다는 마음으로
“세상살이를 하며 제일 약한 것이 남한테 해명하고 방어하는 사람이다.”
일본에 ‘야마다 히사시’라는 투수가 있다. 그는 강속구가 주무기인 직구형 투수여서 제구력은 나빠도 구속으로 타자들을 압도하곤 했다. 그러나 무릎을 다친 후부터 구속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야마다는 고민 끝에 변화구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서 팀의 대선배이자 자신과 같은 언더핸드 투수 아다치 미쓰히로에게 그의 주무기인 싱커를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다치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때 야마다 히사시는 어떻게 했을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훔칠 수밖에 없지.’
그렇게 결심한 그는 아다치가 불펜에서 투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곧장 포수 뒤에 서서 아다치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고 관찰해 기술을 훔쳐냈고, 나중에는 그의 한결같은 노력을 보고 아다치도 힌트를 알려줬다. 덕분에 야마다는 싱커를 완전히 자신의 무기로 만들어 전성기를 맞이한다.
얼마 전 한 선수가 내게 야단을 맞았다. 나와 배팅 연습을 500개 가까이 해서 손이 까졌는데, 그러고 학교에 가서는 “연습 많이 하고 왔으니 오늘은 쉬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마 아프기야 많이 아팠을 테지만, 반드시 해내고 싶다는 간절함, 절박함이 있다면 ‘아프니까 쉬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했겠나 싶다.
그러고서 며칠 후 연습을 하러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전에 연습했던 게 완전히 리셋(초기 상태로 되돌아감)이 되어 있었다. 가르쳐 줬을 때만 해도 굉장히 좋아졌었는데, 혼자 복기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경기를 치르다 보면 가끔 사인을 훔쳤느니, 안 훔쳤느니 하며 갑론을박이 일곤 하는데 그걸 보고 선악을 가릴 이유가 있나 싶었다. 사인을 빼앗았다면 그 사람은 관찰을 통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니 얼마나 대단한가. 반대로 사인을 빼앗겼다면 프로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랬는데 사인을 빼앗겼느니,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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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았느니 하며 남의 탓을 하는 건 나는 약하다고 본다. 세상살이를 하며 제일 약한 것이 남한테 나를 해명하고 방어하는 사람이다.
■ 끝장을 본 사람에게는 미련이 없다
어떤 투수들은 볼이 매번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나가는데 그걸 보면서도 아쉬움이 없다. 존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끝끝내 던져야 하는데 고작 몇 개를 던지고서는 힘들어 죽겠다고, 팔이 아프다면서 뻗어버린다. 사실 수준이 올라오지 못하면 속된 말로 팀에서 ‘모가지’를 당할 게 뻔한데, 그런 미래는 생각지도 못한 채 당장 힘들다면서 자기 팔만 아끼려 든다. 요즘은 누구나가 가늘고 길게 살려고 하지 않나 싶다. 그런 사람들은 어김없이 실패한다. 굵고 짧게 사는 게 오히려 길게 사는 법인데, 다들 그 사실을 모른다.
가늘고 길게 살겠다며 어깨를 아끼고, 훈련도 안 하고, 등판도 안 시킨다. 그러면 선수로 살아남을 수 없다. 이름을 남길 선수로 자라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면 굵고 짧게 살겠다고 죽어라 연습하면 거기서 잠재 능력이 개발되고 비로소 꽃을 피운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식이 없으니 아무리 가르쳐도 다음날이면 다시 리셋이 된다. 누군가가 가르쳐 준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의식도 없다. 그것은 세대 차이가 아니다. 배가 안 고픈 것이다.
■ 왜 마흔에 은퇴할 생각부터 하는가
- 프로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
“나는 선수 시절에도, 야구 감독을 하면서도
힘이 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단 한번도.”
선수 시절, 일본의 여러 야구단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연달아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결국 내가 향한 곳은 고향 교토에 있는 ‘상호 차량’이라는 회사의 작은 사회인 야구단이었다. 사회인 야구단이라 함은 곧 직장에 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상호 차량은 자동차의 차체를 만드는 회사였다. 거기서 용접도 하고, 선반도 다루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했다. 아무리 사회인 야구단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회사원이니 직장에 출퇴근하며 일을 해야 했다. 훈련은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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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도중에 작업복을 입은 채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모교인 가쓰라 고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개인 훈련을 했다. 퇴근하고 나면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매일 매일 일하고, 퇴근하면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사실 나는 선수 시절에도, 야구 감독을 하면서도 힘이 든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게 뭐가 힘들어?”라고 되묻는다. 그런 내게 다들 신기하다고 하는데, 원래 모든 일은 힘이 든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의식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뭘 하든 의식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나는 나이든 선수들을 보면서 ‘의식의 차이’라는 걸 더 강하게 느꼈다. 우리나라 야구 선수들은 대체로 30대 중반부터 40대 초중반 사이에 은퇴를 한다. 그중에 보면 고관절이 딱딱해서 은퇴 시기가 빨리 찾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실 우리나라 야구 선수들의 고질병이다. 그래서 한화 감독 시절, 트레이너에게 한두 시간씩은 꼭 고관절 트레이닝을 시키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얼마 후에 연습하는 걸 보러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선수들은 대충하는 척만 하고 말 뿐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관리에 소홀하면 결국 선수 생명이 일찍 끝나고 만다. 그래 놓고서는 나이가 들었으니 은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이게 의식의 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 머릿속에서 ‘극복’이란 두 글자를 지우면
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극복이란 개념이 없다. 극복이란 힘들다는 의식에서 발생하는데, 힘들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니 ‘극복’이라고 할 리가 없다. 의식이 있으면 새로운 길이 보이고 한계도 뛰어넘을 수 있다. 전쟁터에 갔다고 생각해 보라 서로 죽자, 살자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한계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예순이고 칼을 맞댄 상대가 스무 살이면, ‘환갑인 내가 이런 젊은이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하고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있겠느냔 말이다. 그럴 리 없다. 누구나 살려고 한다. 그게 세상이고 경쟁이다.
일터란 프로의 세계이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젊은 세대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양보할 필요가 없다. 양보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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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야기는 프로의 세계에 없다. 힘이 있는 사람만이 남는 세계다.
‘이 정도면 되겠다’하는 정도의 의식으로는 프로의 세계에서 세상살이를 해내지 못한다. 이기지 못한다. 뭐든 끝끝내 해내고 말겠다는 의식이 있어야 위기가 와도 돌파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법이다.
■ 트라이, 트라이, 일단 트라이
- 지금의 김성근을 만든 60년 시나리오
* Try : 해보다. 시도하다. 애쓰다. ~을 해보다.
“지금까지 나는 가운데에 서본 적이 없다. 나 아니면 살려 줄 이가 없다는 마음으로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내 삶이었다.”
시행착오가 많은 인생이었다고 하면 으레 ‘그 사람은 실패했겠거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시행착오가 많았다는 것은 결국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실패하고 결과가 기대만큼 따라오지 않아도, 시련을 겪어도 전부 도전했으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만든 인생이니까. 시행착오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고민하고, 결과를 내면서 자기 길을 만들어갔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나는 시행착오가 많은 인생이야말로 베스트라고 생각한다.
나의 삶 역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수없이 많은 문제에 부딪혔고 배가 좌초하듯 무언가에 막혔다.
- 현역 선수 시절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 팔을 혹사한 탓에 전성기조차 짧았다.
- 프로 감독이 되어서도 번번이 한국시리즈 앞에서 좌절했다. 첫 우승을 한 것은 감독이 된 지 25년 만의 일이었다.
- 그래도 끈질기게 시도하고 시도했다.
1962년 한국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가운데에 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 아니면 살려줄 사람이 없다는 마음으로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내 인생이었다.
아무리 험준한 산이라도, 에베레스트 산이라도 길은 있다. 걸어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결국 길이 있다는 뜻 아닌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런 고통을 이겨내고 그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이 자기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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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의 위로 속으로 도망가지 마라
- 칼을 갈게 만든 최태원 회장 한마디
“내가 발을 디뎌야 걸어갈 길이 생기고
나라는 존재가 생기고, 나아갈 곳이 생긴다.”
2009년 SK는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갔지만 코앞에서 우승을 놓쳤다. 준우승, 뼈아픈 패배였다. 아프지 않은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올라간 한국시리즈였다.
끝내기 홈런을 맞고서 벤치 뒤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 자신에게 분하고 원통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게 리더의 책임이니 나는 울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구단에서 우승 축하 파티를 이미 다 준비해 놨고 구단주까지 오셨으니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회식을 했다. 그런데 그때 구단주였던 최태원 회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김 감독 잘했어요.”
그 말에 나는 머리가 완전히 픽 도는 것 같았다. 한이 맺힌 것이다. 패자는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열이 받아야 정상이다. 만약 회장님이 지금까지 뭘 했느냐고 야단을 쳤다면 내 기분은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질책을 하면 겸허히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패장에게 잘했다니, 엄청나게 열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한국시리즈까지 간 것만으로도, 그리고 7차전까지 간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며 위로해줬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에는 팀에 아프지 않은 선수가 하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만하면 잘했다고 위로한 것이지만 나는 달갑지 않았다. 위로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내가 생각하기엔 타협이기에 그랬다. 위로를 받고서 ‘그래, 괜찮다. 이 정도면 잘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타협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타협이란 생각보다 꽤 여러 군데에 있다.
■ 위로를 믿으면 강해질 수 없다
나는 남들의 위로에 위로받지 않는다. 믿지 않기 때문이다. 동정은 한 번뿐이지, 진심으로 동정하고 위로하던 사람도 한 번 넘어 두 번, 세 번 실패하면 비난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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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위로는 진심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거기에 도취되어서는 더욱이 안 된다. 나는 위로를 받아도 그저 담담하게 흘려들을 뿐, 거기에 위안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회장님이 나에게 잘했다고 위로를 건넸던 것은, 날 위로해 주려는 게 아니라 사실은 투지를 불태우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잘했다’는 그 회장님의 말을 듣고 두고 보라고 생각했다. 가슴에 독을 품었다. 만약 그 말을 듣고서도 위로를 곧이곧대로 믿고 “예, 감사합니다”하며 넘어갔으면 그다음 해에도 나는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남에게 위로받길 바라고 동정을 원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엔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남에게 기대봐야 변할 수 없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나 혼자의 몫이다. 나는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 어떻게 보면 이기주의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해명이라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해명은 곧 책임 전가와 같다. ‘이것 때문’이라고 무언가를 탓하는 것이니 그게 책임 전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파울은 실패가 아니다
- 고양 원더스 선수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감독에서 잘려도, 수없이 비난받아도, 나는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직도 야구를 한다.”
나는 감독을 한 대부분의 팀에서 속된 말로 잘렸다. 그럼에도 어떤 팀을 특별히 원망하거나, 안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것은 내가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전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야구장에서 일게 된 인생이다.
야구장에서는 타자가 파울을 치면 팬들은 격려를 하고 응원한다. 파울을 쳤다는 건 냉정하게 말하면 실패나 마찬가지다. 안타를 친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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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회는 계속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야구가 알려주는 인생 아닌가 싶다. 누구든 실패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라고.
내 인생도 그렇다. 나는 파울을 무지하게 친 사람이다. 프로야구팀 감독직에서 잘린 것만 일곱 번이니, 그것만 보면 얼마나 실패한 인생인가. 누구든 실패를 겪지만 포기하지만 않으면 기회는 온다.
고양 원더스 선수들에게 제일 알려주고 싶었던 것도 그것이었다. 고양원더스는 독립야구단으로,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선수들이 모인 팀이었다. 감독이 되고 처음 가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야구선수가 맞나 싶었다.
프로에서 방출된 선수, 트럭 운전수, 술집 알바생, 가르치고 가르쳐도 도무지 바뀌지 않아서 고민을 엄청나게 했다..
어느 날 고민으로 정말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을 새고 꼬박 생각했다. 그만 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런데 새벽녘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 선수들을 버리고는 절대 못 가겠다 싶었다. 그래, 다시 가자. 포기하지 말고 해보자. 그 이야기를 다음 날 미팅 때 선수들에게 털어놓았다.
■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쌓여 인생을 바꾼다
“지금 이 과정을 통해 성공하면 참 다행이겠지만, 혹시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희들이 도전하고 시도했던 정신 만큼은 잊어버리지 마라, 평생. 여기에서 가능성이란 걸 배워가라. 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 볼게.”
실패했을 때, 실수했을 때,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거기서 그냥 포기하는 사람과 ‘어떤 방법이 없을까?’하고 고민하는 사람 사이에는 갈수록 차이가 넓어진다.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식은 밥을 잘 먹는 사람이 출세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인생은 역경에 몰렸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역경이 왔을 때 포기하는 사람과 거기서 돌파구를 찾아내는 사람의 인생은 시간이 지나보면 엄청나게 벌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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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나는 비관적인 낙천주의자
- ‘어차피 안 돼’에서 ‘혹시’로, ‘혹시’에서 ‘반드시’로 -
■ 없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약하다
- 내리막길을 달리고, 돌멩이를 던지며
“근본은 비관적이지만 해결해 나갈 방법을 찾을 때는 긍정적으로, 나는 내성격 중 이런 점을 가장 좋아한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처음으로 투수로서 경기에 선 날이었다. 첫 두 타자에게는 연속으로 삼진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온 세 타자에게는 내리 볼넷을 내줬다. 결국 얼마 던지지도 못한 채 강판되었다.
투수로서 뿐만아니라 첫 타석에 중견수 앞에서 바운드 되는 안타를 쳤다. 누가 봐도 안타, ‘됐다’하고 신나서 1루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죽어라 뛰어서 1루에 도착하니 심판이 아웃 선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관중석에서도 덕아웃에서도 폭소가 터졌다. 평범한 주력이라면 충분히 안타가 될 타구였으나 내 주력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소질이 없는 선수였다.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도 포지션은 우익수였는데, 당시만 해도 좌타자보다 우타자가 많아서 우익수 쪽으로는 공이 잘 안 간다며 수비를 못하는 선수에게 우익수를 맡기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타순 은 9번. 그게 내 실력이었다. 주력도 나빴다. 100m를 고작 17초에 뛰었는데 야구선수로서는 모가지 수준이었다.
■ 비관 속에서 더욱 깊이 뿌리내리는 아이디어
나는 한국 실업팀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새 옷을 사서 입어봤다. 그 전까지는 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기만 했다. 형수가 만들어주는 내 도시락 반찬은 오직 간장뿐이어서, 반 아이들이 가난하다고 놀려대는 통에 그게 싫어 학교에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아주 가끔 우메보시(매실절임)라도 올려주는 게 가장 호사스러운 도시락이었다. 그만큼 우리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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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가난하니 아르바이트도 안 해본 게 없었는데, 고등학교 학비를 벌기 위해 자전거에 우유 300~400병을 싣고 배달할 때도 ‘목적지까지 오늘은 어제보다 5초만 더 빨리 가보자!’ 하며 내 나름의 즐거움을 찾았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그걸 스스로 타개할 아이디어를 찾는 게 나의 삶이었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투수를 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우리 집에 글러브나 야구공 같은 진짜 야구용품이 있을 리 없었지만, 투수로 시합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을 뿐 부족한 환경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찾았다. 어떻게 연습할까 생각하다가 찾은 방법은, 집 앞에 흐르는 가스라 강에 가서 돌멩이를 수도 없이 던지는 것이었다. 잡지나 신문에 실린 투수들의 사진을 보고 잘하는 투수들의 투구 폼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보고, 하루에 돌멩이를 200개씩 던졌다. ‘가졌냐, 못 가졌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된다, 안 된다’를 따지지 않았다.
슬프든, 가난하든 그 속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슬프다면 그걸 즐거움으로 바꿔나갈 수 있도록, 가난하면 가난함을 도리어 날 성장시킬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근본은 비관적이지만 해결할 방법을 찾을 때는 긍정적으로, 나는 내 성격 중 이런 점을 가장 좋아한다.
■ 최악을 가정하고 최선을 준비한다
- 어떤 위기가 와도 당황하지 않는 법
“마음속으로 그 비관들을 역전시킬 최상의 방법을 준비해 놓는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위기가 오지 않는다.”
인간의 인생은 비관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매일, 매번 슬픔과 마주해야 하니 그렇다. 그러나 슬픔과 마주칠 때마다 슬퍼하고 투덜대기만 하면 진전되는 게 없다. 또한 슬픔을 만난다고 해서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 속에는 반드시 길이 있어서 슬픔을 헤치고 가면 길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야구를 할 때면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곤 한다. ‘홈런 맞으면 어떡하지?’, ‘혹시 실책이 나오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이번 투수가 점수를 못지키면 다음에는 누구를 써야 하나?’ 이렇게 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어마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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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상상한다. 이것 자체만 보면 비관이다. 하지만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까지 생각이 뻗을 때면 나는 엄청난 낙천주의자가 된다.
최악의 싱황을 가정해 놓으면 팀이 3연패, 5연패를 해도 ‘아, 그렇지, 올게 왔구나’ 싶다. 기다렸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니 무슨 일이 생기든 흔들리지 않는다. 위기가 올 것쯤이야 이미 알았고, 준비도 해놨으니 오히려 거기서 동력이 생긴다. 그래, 가자.
야구뿐 아니라 인생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일교포라는 이유로 일본의 야구단 입단 테스트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셔야 했을 때도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사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데 차별이 아예 없을 수가 없다. 그렇게 비관하고 있었으니 진짜 비관적인 일에 마주했을 때도 별다른 동요 없이 그다음 방법을 준비할 수 있었다.
■ 이길 때는 비관주의자, 질 때는 낙천주의자 마음으로
태생이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이 오면 당황한다. 처음 자기 머릿속에 구상하지 않았던 게 나타나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얼뜨기 같이 굴다가 십중팔구 거기서 다 무너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온갖 상황을 미리 상상해 놓는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이 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한국어에 보면 ‘어차피’, ‘혹시’ 그리고 ‘반드시’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차피’속에서 ‘혹시’를 만들어 내는 게 최고의 인생이라고 본다. ‘어차피’는 안 된다는 뜻,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이고 ‘혹시’는 조그만 희망이다. ‘혹시’라는 가능성이 생겨나면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그 조그만 희망에 기대를 걸어봐야 할지, 아니면 안 될 게 뻔하니 깨끗이 포기해야 할지 그 사이에서 헤매는 것이다. 나는 ‘어차피’ 속에서도 ‘혹시’라는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상상하고 그것들을 ‘반드시’로 만들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내는 것, 그게 내가 여태껏 해온 일이었다.
‘달리기 시간을 재면서 우유배달을 한다면 혹시 돈도 벌고 다리 근력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특출나게 뛰어난 투수는 없어도, 투수 여럿을 쓰면 혹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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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들이 모여 ‘김성근이 감독을 맡으면 반드시 새로운 야구를 한다’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길 것 같을 때는 비관하고 질 것 같을 때는 오히려 낙관하는 것, 그게 무엇이 다가올지 모를 인생의 순간순간에 가장 최선의 ‘준비’인 것이다.
■ 부정을 긍정으로 스위치!
-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배운 ‘아직’의 힘
“안 될 때, 실패할 때, 아플 때는 자기도 모르게 성장하고 있어, 단지 그 아픔을 실패로 끝내느냐, 시행착오로 바꾸느냐하는 문제지.”
2007년 한국시리즈 당시 우리는 1차전과 2차전 모두 패배했다. 한국시리즈 1,2차 전을 다 지고서도 우승한 케이스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포스트시즌 경험이 많아 노련한 두산이었기에 매스컴도, 야구계도 전부 SK의 패배를 예측했다.
모든 잘못은 내가 한 것 같고, 내가 무능한 탓 같았다. 그런데 내가 리더이니 그걸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었다. 혼자 감독실에서 새벽까지 끙끙 앓았다. 그런데 두 시 반쯤 되었을 무렵, 문득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2패 했어도 아직까지 괜찮지 않나?’
그 ‘아직’이라는 단어가 퍼뜩 떠오른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전전긍긍하다가 ‘아직 기회가 있다’로 바뀌니 의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덕에 그다음 시합부터 내리 이겨서 우승할 수 있었다. 나는 우승에는 ‘아직’이라는 마음가짐이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고양 원더스에 갔을 때도 내가 선수들에게 처음 한 말이 ‘과거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고양 원더스 선수들은 주로 구단에서 방출을 당했거나 드래프트 때 지명되지 못한 경우들이다 보니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 실수를 했든 실패를 했든 그런 건 다 버려라. 그때의 생각, 방법이 나빴을 뿐이지 너희가 나쁜 게 아니다.”
이는 선수들을 처음 만날 때면 내가 항상 하는 말이다. 모든 일이 그렇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도 바뀐다. 모든 일에는 항상 실패가 붙어 다닌다. 야구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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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이닝, 스물일곱 개의 아웃카운트, 가장 최소한이라고 해도 팀에는 스물일곱 번의 찬스가 오고, 똑같이 스물일곱 번의 핀치가 온다. 아니, 사실 찬스의 순간도 핀치의 순간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순간순간의 기회에 매번 성공하는 사람도, 반대로 매번 실패하는 사람도 없다.
■ 통산 1384승이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의 영광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성공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사실 제일 위험한 게 이미 낸 성과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겼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하고 도취되어 있으면 바로 약해진다.
실패에 붙잡혀 있든, 성공에 도취되어 있든 과거에 매여 있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또 없다. 나 역시 감독으로서 1384승을 올렸지만 그게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야구는 매일 시합을 한다. 오늘 이겼다고 만족해서 훈련을 게을리하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진다.
오늘은 이미 도망갔으니 과거는 매일 지워나가야 한다. 연승하고 있다면 언젠가 연승이 끝나리라 각오하고, 연패하고 있다면 반드시 연패를 끝내겠다고 각오하는 것이다. 인생은 오늘, 그리고 앞뿐이다.
“이긴 것은 지나간 것, 대비해야 하는 것은 내일의 것,”
■ 끝끝내 0.1%를 찾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
누구에게나 하나씩 품은 꿈이나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걸 이룰 방법은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하고, 길을 찾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그런데 아직 길을 찾아가는 과정인데도 놀고 싶다거나 쉬고 싶다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는 등산가들을 생각해 보라. 올라가는 도중에 동상에 걸려 손가락, 발가락을 자르는 걸 감수하고도 도전 또 도전하는 것이다. 힘들어서 못 하겠다거나 쉬고 싶다는 의식은 그들에겐 없다.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뭐든 이룰 수 있다.
산이란 멀리서 보면 낮지만 가까이 갈수록 높다. 꿈도 똑같다. 가까이 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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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숨이 차고, 힘들고, 괴롭다. 그럼에도 한 발 한 발 디뎌가는 속에 미래가 있다.
젊은 나이이니 당연히 놀고 싶을 것이다. 애인도 사귀고 싶고, 술도 마시고 싶다. 노는 것 자체는 좋다. 그러나 노는 와중에도 내 앞의 문제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만약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각났다면 그 즉시 일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앞서가니 뒤서거니 하다가도 끝까지 0.1%를 찾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
나는 꼴찌팀에 가더라도 0.1%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 사람들이 김성근의 야구는 옛날 야구네. 일본식 야구네 별 소리를 다 하며 비난을 해도 나는 내가 찾은 0.1%를 믿고 해 왔고, 그걸로 싸워 결국은 이겼다. 그 0.1%를 찾아야 한다.
■ 리더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다
- 리더로서 가져야 할 낙관의 덕목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수들의 미래가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고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리더는 부모와 같다고 말해왔다. 리더는 인내해야 하고, 솔직해야 하고, 공평해야 한다. 부모와 똑같다. 아이는 걸음마 연습을 할 때 엄청나게 많이 넘어진다. 채 한두 걸음도 걷지 못한 채 넘어지고, 으앙 하고 울어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늦게 걸음마를 떼는 아이도 많다. 그러나 오래 걸린다고 해서 부모가 ‘이 아이는 아예 못 걸을 것이다’하고 포기하나? 그런 부모는 없다. 아이가 제힘으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준다. 리더도 그렇다.
SK 때 이ㅇㅇ이라는 투수에게 희귀병이 찾아온 적이 있다. 손가락에 피가 통하지 않는 ‘혈행장애’라는 병이었다. 나는 내가 병원비를 내서라도 그를 낫게 해주고 싶었다. 다행히 구단에서 도움을 줬고, 일본에는 혈행장애를 치료해 본 병원이 있다기에 내가 직접 수소문해 그를 데려갔다.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그 뒤로도 다섯 곳이나 가봤다.
마지막 병원에서조차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선수는 크게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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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다행히 군복무 중에 어느 정도 호전되어서 선수 생활을 짧게나마 더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리더들을 보면 버림이 너무 빠르지 않나 느낄 때가 많다. 우리 사회 자체가 참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부족하다. 금세 버리고, 바꾸고, 버리고…. 야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 조직에도, 정치에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 리더로서 실격이다.
■ 내겐 ‘가장 기뻤던 순간’이 무수히 많은 이유
재일교포로 가족 하나 없이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왔을 때는 오직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말도 안 통하고 글자도 못 읽으니 기댈 데라곤 야구밖에 없었다. 모든 의식이 생존에만 몰려 있었던 시기였다. 감독을 시작했을 무렵도 마찬가지였다. 야구 잘해야지, 이겨야지, 이겨서 야구로 나를 증명해야지, 오로지 그 생각으로 악착같이 야구를 했다.
하지만 선수들을 키우며 점점 의식이 옮겨왔다. 리더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항상 선수의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야구를 하며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아마 ‘처음 우승했을 때’ 정도의 답을 기대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기쁘다기보다는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안도감, 혹은 허탈감이 더 컸다.
내가 가장 기뻤을 때는 쌍방울 시절이다. 만년 꼴찌였던 팀을 리그 2위까지 만들었던 것은 우승보다도 값졌다. 선수마다 가능성을 찾아주고 결과를 냈을 때가 가장 기쁜 것이다.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면 성장하는 순간이 눈에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진다.
결국 야구를 하며 가장 보람찬 순간이란 선수들을 키워냈을 때, 사람을 살렸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선수가 절망했을 대도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길이 없나 낙관주의자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리더는 절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인내하고 기다린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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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개척자 정신
- 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꾸는 것이 내 인생이었다
■ 나이를 먹을수록 물음표를 달아야 한다
- ‘최강야구’라는 김성근의 새로운 도전
“집에 있는 게 아니라 야구장에 서 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새로운 야구를 할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쾌락이다.”
최강야구 감독을 한 것도 일종의 새로운 흐름 속에 나를 놓아둔 일이었다. 누군가는 “김성근도 결국 TV 예능 프로그램이냐” 하며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프로에서 은퇴하고 더 쉬운 길로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최강야구 감독직은 내 야구 인생을 통틀어 제일 어려운 과제이기도 했다. 야구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최강야구 선수들에게는 야구를 전부로 여기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생업도 따로 있고, 나이도 많이 먹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최강야구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최강야구 연습을 하면서 각자 자기 자리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전까지 ‘김성근의 야구’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니 어느 면에서 나는 이제 선수들에게 맞춰주고 있는 셈이다.
■ 새로운 흐름 속에서 새로운 나를 찾는다
내가 최강야구를 하는 목적은 선수들을 새로운 무대에 다시 올려놓는 것이니, 방법이 어떻든 새로운 흐름에 맞춰 선수를 키우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새로운 흐름 속에서 내 나름대로 돌파할 방법을 찾는 게 내 일이고, 내가 살아온 길이었다. 세상이 변했다고 혀를 차며 한탄할 게 아니라 계속 나 스스로가 세상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빠릿빠릿하게 체크해야 한다.
‘앞으로 가야 한다’, ‘전진해야 한다’ 오직 그것만 머리에 새기며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재미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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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에서는 오로지 시합에서 이기는 것과 선수들을 키우는 것에만 의식이 몰려 있었지만, 이제는 야구장 펜스 너머로 팬들이 보인다. 최강야구를 보고 야구가 좋아졌다고,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해주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나는 아직도 야구 공부를 계속한다. 책도 무수하게 읽는다. 10년 전, 5년 전, 심지어 3년 전에 했던 야구와도 다른 게 많다. 그러니 계속 공부할 수밖에 없다. 집에 있는 게 아니라 야구장에 서 있는 것, 그리고 여전히 새로운 야구를 할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쾌락이다.
■ 육체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 세 번의 암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
“세상살이라고 하는 건 항상 현실과의 싸움이다.
현실과 타협해 버린다면 승리하기는 어렵다.”
한 TV 방송에서 암에 세 번이나 걸렸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처음 암이 찾아온 것은 쌍방울 감독 시절이었다. 구단에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혼자 수술을 하러 갔다. 선수들에게 “나 어디 좀 잠깐 다녀 온다”라고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수술한 병원이 강남 삼성병원인데, 그곳 복도에서는 잠실야구장이 보인다. 수술한 다음 날부터 창 너머로 잠실구장을 바라보며 이만한 물통을 몸에 달고 복도를 마구 걸어댔다. 그 복도가 거의 100m 가까이 되는데, 거기를 왕복 스물다섯 번을 걸었다. 그러기를 하루에 네다섯 번씩 했다. 피가 뚝뚝 떨어져도 그냥 걸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때 내게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일절 없었다. 야구 하고 싶어서 오로지 야구장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피가 흐르고 고름이 터져도 이를 악물고 걸었다. 오죽하면 암에 얼렸단 말을 듣고 맨 먼저 든 생각이 ‘이제 야구 못 하면 어떡하나’하는 것이었을까. 다른 건 아무것도 겁나지 않았다. 암이 두 번째 찾아온 SK 감독 시절에도 똑같이 몰래 수술했다.
프로에 있던 내내 병에 걸렸다거나 수술을 했다거나 하는 건 모두 함구했다. 경쟁에서 한 발짝 떨어진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는 수술한 다음 날부터 다시 경기장에 나갔다. 기저귀를 찬 채 타이레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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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알인가, 여덟 알인가를 먹고 연습장에 나가 펑고를 쳤다.
■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산가의 마음으로
살아보니, 정신에 목적의식이 있는 사람은 육체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이걸 반드시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육체가 아픈지도 모른다. 아픈 것도 잊고 펑고를 치다 보니 피가 터져 나중에는 기저귀로도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 정도여도 야구를 하고 있을 때는 아픈 것조차 몰랐다. 할 일이 급하니까 아픈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아파서 무언가를 못 하겠다는 건, 마음속에서 ‘아파서 안 되겠다’는 식으로 이미 타협을 하고 있으니 육체에 지배당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아픔이 핑계가 되는 것이다. 야구 할 때는 아프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간암 수술을 했을 때는 시합하고 방에 들어오자 마자 문을 잠그고 바로 픽 쓰러졌다. 트레이너에게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끙끙 앓았다.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릿속에 오로지 ‘이겨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한 것이 관악산 등반이었다.
아마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등산가들과 같은 마음이지 않았나 싶다. 등산가들은 가만히 있으면 얼어 죽어버리니 정상에 올라가든, 내려가든 무언가 행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 만족은 영원히 없다
- 코나미컵 패배에서 SK가 배운 집념
“내게 홈런을 치는 순간은 앞으로의 고민이 시작되는 순간이지, 기쁜 순간이 아니어서 그렇다.”
2007년 SK는 페넌트 레이스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1차전, 2차전에서는 패했지만 연달아 4승을 올리며 통합 우승까지 일궈냈다. 그러니 2패를 먼저 떠안고서 4연승을 이뤄낸 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기록이다.
포스트시즌이 마무리된 후 SK 선수단을 이끌고 코나미컵(2007 아시아선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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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에 나섰다. 첫 시합은 순조로웠다. 일본 주니치드레곤스에게 이기며 사상 최초로 일본의 클럽팀에 이긴 기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뒤이어 중국의 차이나스타스에게도, 대만의 퉁이라이온스에게도 연달아 이겼지만 결승전, 주니치와의 리매치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내일 한국에 안 간다. 애들 귀국 안 시킬 거야. 우리는 고치(일본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간다.”
그 다음 날 곧바로 한국에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취소했다. 처음에야 다들 놀랐지만 아무도 내게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선수단도 다 같이 독을 품은 것이다.
“얘들아, 이제 우리는 퍼팩트가 목표다. 완벽하게 하자. 이 캠프는 그걸 위한 캠프다.”
■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다음’을 만든다
그렇게 곧바로 일본 고치에 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연습을 했다. 그때 SK 선수들의 의식이 전부 살아났다. 만족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운 것이다. 그 캠프 덕분에 SK는 2007년에 이어 2008년, 2010년에 우승하며 소위 말하는 ‘SK 왕국’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성공하는 사람은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거기서 ‘편하다’ 생각하는 순간 끝난다. ‘이 정도면 잘했다’고 생각하면 기회를 잃어버린다.
빨리 피는 꽃은 예쁘게 피어도 금방 시들어버리니 열심히 피운 보람이 적다. 꽃을 일단 빨리 피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 번 피운 꽃을 오래도록 예쁘게, 길게 살아 있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 살아 남는 것이 상식이다
- ‘벌떼 야구’라는 나만의 승부수
“비상식적인 승부수를 던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살아남는다면 그 방식은 곧 상식이 된다. 나는 여태껏 그런 방식으로 살았다.”
나는 쌍방울 감독 시절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가장 많이 들은 것이 ‘김성근의 야구는 야구도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때까지 다들 하는 야구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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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니까 하는 말이었을 테다. 내가 봐도 그랬다. 선발 투수라도 안타 몇 개만 맞으면 곧바로 내리고, 이닝을 쪼개가며 투수를 바꿔대니 다들 ‘저 감독은 지금 뭘하는 건가’ 싶었을 것이다. 심지어 한 경기에 투수 아홉 명을 쓴 적도 있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비난은 거세졌다. 투수를 혹사시킨다는 둥, 얄미운 야구를 한다는 둥 욕을 숱하게 먹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생각 끝에 내놓은 비상식적인 아이디어였다.
상식 속에 있는 사람은 남하고 아무리 경쟁해 봐야 이길 수 없다. 그런 건 백날 해도 승부수가 되지 못한다. 상식을 쓰면 상식적인 결과밖에 더 얻을 게 있겠는가?
김성근의 작전 야구는 재미가 없다는 둥, 얄밉다는 둥 비난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갔던 팀들에서 승리할 방법을 찾다가 만들어 낸 새길이었다. 바깥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우리’라는 팀 속에서 찾은 길이었다.
■ 긴 터널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비정상적인 승부수를 띄우면 처음에는 비난도 함께 따라온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유별나게 튀는 걸 좋아하지 않고, 일반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여태까지 없던 일을 하면 비난받는 경우가 많다. 결과가 어떻든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괴상한 방법을 써서 좋은 결과를 만들면 거기에 대한 질투심이나 반발심도 있을 것이다.
벌떼 야구 역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중간부터 승부를 보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불펜 투수가 승리투수가 되는 일이 잦았는데, 매스컴은 그걸 꼬투리 잡아 비난했다. 내가 일부러 어떤 특정 선수의 승을 챙겨주려고 내보낸다는 둥, 기록을 만들어준다는 둥 세상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자금은 야구가 그렇게 바뀌어 있다. 투수 여러 명을 쓰는 게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에도, 일본에도 그런 면이 있다. 결국 그때까지 상식이 아니었을 뿐 내가 시도한 방식은 ‘새로운 야구’였던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아이디어와 프로세스뿐이라면 세상은 나를 써줄 이유가 없다. 자기 존재 가치라는 게 있어야 일을 시켜주는 법이다. 물론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길에는 리스크가 많다. 위험하기 짝이 없고, 극단적으로는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도전할 수 있는 발상, 도전하는 행동, 도전을 계속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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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도전하는 열정 네 가지만 있다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내 길을 찾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 주머니에 10원 한 장만 있어도 이길 방법은 있다
- 무일푼으로 세상에 당당히 서는 법
“핑계 속으로 도망치는 인생은 언젠가 앞길이 막히게 되어 있다.”
나는 쌍방울 감독 시절 현대와 경기할 때 퇴장을 엄청나게 당했다. 아마 그해 가장 많이 퇴장당한 감독이 나일 것이다. 팬들도 야구계도 나는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사실 그건 다 일부러 하는 항의였다. 팀의 사기를 위해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당시 현대와 쌍방울의 기량 차이는 엄청났다. 전력이든 뭐든 누기 봐도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고, 구단 운영비도 몇 배나 차이가 났다. 우리가 100원짜리 팀이라면 현대는 10,000원짜리 팀이었다. 쌍방울 선수들이 5천~6천 원짜리 밥을 먹을 때 현대 선수들은 2~3만 원짜리 밥을 먹었다. 어디 그뿐인가. 묵는 곳도 달랐다. 현대 선수들이 쓰는 숙소는 무궁화 네다섯 개짜리, 요즘 말하는 특급호텔 같은 곳이었다. 반면 쌍방울 선수들이 쓰는 숙소는 방 안에 가만히 있어도 복도에 누가 지나가는지 옆방에서 뭘 하는지 다 들릴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선수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을까? 투지를 불태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심판과 일부러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내가 그라운드로 나가 심판에게 항의하자 벤치에 늘어져 있던 선수들이 조금씩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 다음에 항의를 하고 경고를 받으니 선수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게다가 퇴장까지 당하니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제야 ‘그래 됐다’ 싶었다.
세상에 나에게만 너무 가혹하다고 느껴진다. 한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방법을 찾아내야지, 없는 걸 탓하는 사람은 약하다. 욕을 먹는 길이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돌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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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서랍에는 무수한 아이디어가 있다
- 매일 아침 서울숲을 걸으며
동이 트고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아침 산책은 지도자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않은 나의 루틴이다. 비가 오든 땡볕이 쬐든 늦게까지 회식한 다음 날이든 똑같다.
일본에 가 있을 때는 코치들이 술을 새벽 서너 시까지 마신 다음 날에도 똑같이 아침 산책을 하는 나를 보며 “이야 김 상, 안 힘드십니까, 대단하십니다”하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왜 힘 안 들겠는가, 그래도 매일 아침 반드시 걷는다.
축축한 흙을 밟으며 야구를 생각한다. 60여 년간 야구와 동고동락을 했어도 매일 새로운 고민과 마주한다. 그래도 걷다 보면 반드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산책 속에 아이디어가 나오고 몸도 좋아진다. 일석이조 아닌가.
다음에 2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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