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을 잊을까?
허연옥
단풍이 소란 떨며 반기는 날
홀가분한 가방 걸머지고 차에 오른다. 서둘러 일어난 사람을 배려한 촉촉한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면하고, 단풍 따라 남으로 간다. 잦은 비가 비껴갔는지 붉게 물든 산이 설레는 가슴에 달려와 안긴다.
밀양을 향한 버스는 여정을 당겨가며 졸음도 잊은 듯 신명 나게 달린다. 두 시간 남짓 달린 차가 밀양 땅에 멈추었다. 코로나를 잊은 듯 몰려온 여행객, 단풍처럼 차려입고 셀카에 빠져 사진을 박는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표충사는 바람도 비껴가고, 산새가 아늑한 보금자리 같다. 대웅전 염불소리 염원으로 울려 퍼지고, 범종은 끼니를 기다리며 묵언 중이다. 대나무가 산사태를 막았는지 대웅전을 싸고 숲을 이루고 있다. 그래선지 창건을 한 원호 대사가 죽림사라 불렀다는 표충사. 3층 석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던 황면선사가, 오색 기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 중창했단다. 나병에 걸린 흥덕왕의 아들을 쾌유시켰다는 약수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는 맑은 물이 정자 앞을 흐르고 있다. 영정사, 재약산이라 칭호 했다니 빼어난 약수일까 생각이 든다. 찬서리 맞은 국화 향이 희미하게 스치고 간다. 아쉽지만 남은 여정을 등에 메고 절을 나왔다.
삼대루로 매겨진 영남루에 이르자 갓을 쓴 선비들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걸어온다. 진주 촉석루, 대동강 부벽루와 함께 삼대루로 장관을 갖고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영남사가 폐사되고 남은 흔적 위에 밀양군수 김 주가 신축을 했단다. 공민왕 14년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기록했다는 정자에 한복 패션쇼를 한다며 조선을 닮은 여인들이 치맛자락을 휘감고 정자를 오른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듯 저무는 해를 붙들고 눈요기를 하고 싶다.
조선시대 밀양군에 온 손님을 치른 밀주관의 부속건물이었다는 보물 147 호 정자. 기둥의 폭이 넓고 마룻바닥이 어느 정자보다 넓고 높다. 탁 트인 정자 앞으로 흐르는 밀양강을 붙들고 풍류를 읊은 시인들을 떠올리며 밀양 땅에 정이 들고 말았다. 선조들의 뜻이 흐르는 시 한 수 붙들면 좋으련만. 발길은 얼음골로 해를 끌고 간다. 떼 지은 뭉게구름이 짙은 가을을 떨구고 있다.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 하여, 알프스라 부르는 얼음골에 호기심이 당겼다. 케이블카가 힘겨운 산을 오르며 단풍구경에 빠져 있다. 코로나로 밀렸던 여행객이 쏟아져 나온 듯한 케이블카 승강장.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 전망 좋은 찻집에 앉아 케이블카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즐겼다. 바쁜 일상을 제치고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게 얼마만인가. 카페라테 한 잔이 목을 타고 들뜬 여정을 식히고 간다. 바빴던 일상이 가을 속으로 스며들고 내 여정은 하루가 아쉽다.
휴식을 취한 버스는 피로를 떨구었는지 개운한 여행객을 싣고 고향으로 달린다. 어둠이 내려앉는 가을산은 취침을 준비하느라 웅성거리고 있다. 피곤이 밀려오는 여정 위에 음악이 흐르고 지친 눈이 감긴다. 꿈속에서 밀양의 맛 자랑 달착지근한 염소 불고기를 맛보았다. 영남루에 서서 조선의 옷 치맛자락을 여미며 기행문 한 편 줄줄이 외워 본다. 케이블카를 타고 울긋불긋한 가을산의 얼음골을 구경하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상주 문학의 단골 식당 아귀찜에 짐을 내려놓고 칼칼한 입맛을 채웠다. 여행을 주선한 선배님들의 고마움에 감사하며, 또다시 돌아올 호기심 당기는 탐방을 꿈꾸며 멈춘 곳은 표충사처럼 아늑한 나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