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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문경산악체전] ☆… 새재는 우리의 본향이고 새재사랑산악회의 정신이다.
♣ 문경새재는 장대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잠시 숨결을 고르는 곳이다.
☆… ‘문경새재’는 저 동쪽의 태백산-소백산에서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의 기골이 용출하는 조령산의 한쪽 마루를 넘는 재이다. 새재는 단순한 고갯마루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 치솟은 산군들이 소쿠리처럼 싸안고 있는 산세가 깊고 장엄하며 계곡이 수려한 명승이다. 그래서 새재의 권역은 하나의 거대한 산채를 이루는 천혜의 요새와 같다. 조령산은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1,017m의 산이다. 새재 또는 한자어로 조령(鳥嶺)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梨花嶺) 사이의 ‘새(사이)재’, 새로 된 고개의 ‘새재’ 등의 뜻으로 풀기도 한다.
♣ 문경(聞慶)은 ‘기쁨의 고을’이고 새재는 ‘청정의 본향’이다.
☆… 문경(聞慶)은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유래된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한양에서 내려오는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상주목(尙州牧) 문경현(聞慶縣)은 그런 면에서 늘 새로운 정보에 항상 민감하고 그것으로 삶의 생동감이 발현되는 지역이다. 그런 면에서 문경은 기쁨과 상서로움이 충만한 고을이라고 할 수 있다. ‘새재’는 바로 그 경서(慶瑞)의 현장이다. 경상도 관찰사나 목사가 부임할 때 그의 첫 발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곳이 바로 여기요, 영남의 이름 없는 서생이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에 올라가 과거에 급제하면 먼저 그 희보(喜報)를 제일 먼저 보내고 그것을 접하는 곳이 문경이다. 그래서 새재를 지나는 이 길은 영남에서 한양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다니기에 편한 길이다. 그 중에서 새재는 한양 천리의 노정 가운데에서 가장 험하지만 깊고 그윽하게 아름다운 길목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군자의 은거지가 되기도 하고 그 지세가 험하므로 가난한 백성이 숨어살며 지나는 행인의 봇짐을 털기 위해 길목을 지키기도 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방어의 요충지였다.
☆… 원래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길은 새재의 동쪽에 위치한 ‘하늘재’였다. 하늘재는 옛날에는 계립령(鷄立嶺), 대원령, 지릅재 등으로 불렀으나 요즘에는 거의 모든 지도에 하늘재라 표기하고 있다. 하늘재는 백두대간의 포암산(布岩山, 961.8m)과 부봉(917m)-주흘산 영봉(1108m)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525m이다. 옛날에는 북방의 문화가 이 고개를 통하여 영남으로 전해졌다.
‘하늘재’는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삼국시대(156년) 때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하였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빼앗긴 하늘재를 다시 찾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으며, 신라 최후의 왕자, 비운의 마의태자가 나라의 패망을 가슴에 안고 삼베옷을 입은 채, 누이인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에 은둔하기 위해 넘었던 고개가 바로 이 하늘재였다. 마의태자는 하늘재 너머 깊은 산중에 내세의 중흥을 기원하기 위해 미륵불을 축성하고 머물렀던 곳이 바로 월악산 송계의 미륵사지가 아닌가. 지금도 온전하게 남아있는 미륵불은 남쪽의 서라벌을 등지고 있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몽진(蒙塵)할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면서 잊혀진 옛길이 되었다.
♣ 문경새재는 천혜의 요새(要塞)이며, 나라의 중요한 요로(要路)였다.
☆… 새재는 분수령(分水嶺)이다. 한반도의 중추(中樞)인 장대한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목이다. 고개의 북쪽 계곡은 한강의 원류가 되고, 새재[제3관문]의 남쪽의 물길은 낙동강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갯마루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관문(關門)은 신라시대부터 국경 ·군사요충지에 외적의 방비, 입국자의 조사를 위해 두었던 성(城)의 출입문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조정은 문경새재에 관문을 축성했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이요,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이라 했으며,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주흘관(主屹關)은 제1관문으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오른쪽의 주흘산(1079m) 정상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와 왼쪽의 조령산 정상(1,026m)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이 만나는 자리에 위치한 관문으로 자연적 지형을 잘 살린, 그 규모가 아름답고 위엄이 있는 성문이다. 좌우의 성곽을 학(鶴)의 날개처럼 앞으로 뻗어내어 축성하고 그 성문 앞은 시야가 확연하게 열린 광장을 조성하여 모든 상황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은 오른쪽은 6개의 암봉이 용출해 있는 부봉(917m)-주흘영봉(9117m)에서 장대한 산줄기가 내려오고 왼쪽에는 조령산의 신선암봉(939m)이 뻗어 내려온 산의 절벽 아래 위치해 있다. 성문 앞에는 오른쪽 주흘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이 가로질러 나가고 있어 아름다운 멋을 풍기고 있기도 하지만 전술상 아주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성문 앞 계곡 위에는 조곡교(鳥谷橋)를 만들어 꽉 짜인 산세와 골짜기의 한 가운데를 장악하고 있는 성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주위에는 쭉쭉 뻗은 장송의 군락이 어울려 절묘하게 아름다운 풍모를 보이고 있다.
3관문 조령관(鳥嶺關)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여기가 경상도와 충정도를 가름하는 새재의 마룻길이다. 이곳의 관문은 한양의 문물을 접하는 첫 번째 성문이요, 적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오른 쪽은 백두대간의 마패봉이 이곳 조령관의 성문을 거쳐 왼쪽의 조령산 연봉으로 달려 나간다.
☆… 새재에는 세 곳의 원(院)이 있다. 조령원, 신혜원, 동화원이 그것이다.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조령원이 있어 경향을 오가는 관리들이 그 곳에서 유숙하거나 쉬어가며 말을 갈아타거나 먹이를 먹인다. 가장 높은 데 위치한 조령관문 아래에도 동화원이 있다. 그리고 1관문과 2관문 사이에는 주막이 있어 지나가는 길손, 일반인들이 이용한다.
♣ 문경새재는 과거길, 그 역사(歷史)의 현장이었다.
☆… 문경새재는 청운(靑雲)의 고갯길이요, 때로는 비운(悲運)의 현장이었다. 새재는 조선 태종 때 개설 되어 약 500여 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가장 번듯한 길이었다. 새재는 과거길의 중요한 고비가 된다.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을 품고 걸었던 간절한 소원이 깃들어 있는 노정이었다.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고개는 모두 3개. 추풍령과 문경새재, 죽령이 있었으나 문경새재가 열나흘 길로 가장 빨랐다. 반면 추풍령은 보름길, 죽령은 열엿새길. 하루 이틀 사이였건만 문경새재는 과거시험 치는 선비들이 유독 고집했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어 문경새재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지칭하는 문경새재 과거 길은, 문경의 지명과 관련하여 기쁜 소식을 품을 수 있어 영남은 물론 심지어 호남지방의 선비들까지 일부러 이 길을 찾아서 거쳐갔다고 한다. 그래서 새재는 선비들이 가장 호감을 가지고 상경하던 과거(科擧) 길이었다. 그러나 시험은 어느 때나 힘들고 어려운 것, 지봉(芝峰) 이수광(李粹光)은 <途中>(길을 가다가)이라는 제목으로 새재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고 청랑한 물소리를 들으면서도 과거 길(급제)의 아득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 선경후정의 시상이 아주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주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면서도 과거를 앞둔 사람의 막막함을 노래한 절창(絶唱)이다. (이 시비는 새재 입구의 <옛길박물관> 초입에 서있는 ‘선비의 상’ 앞, 원판의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景入詩中畵 산길 접어드니 경치는 시 속의 그림일레
泉鳴譜外琴 냇물 소리는 악보에 없는 거문고 가락이라
路長行不盡 길은 멀어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데
西日破遙岑 해는 멀리 서산마루에 걸려 있구나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등극하여 금의환향한 길목 또한 이곳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한양으로 진격해 가는 왜군의 주력부대가 지나간 길도 바로 이곳이 아닌가.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천혜의 요새인 이 새잿길을 적에게 내줌으로써 충주 탄금대에서 참패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그렇게 새재는 7년 왜란의 아픔이 서려있다.
♣ 문경새재의 산수(山水)는 아름답다
☆… 새재의 길을 가던 시인이 노래를 지어 남겼다.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嶺分南北與東西 路入靑山縹渺中) 아, 그렇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물이 맑다. 새재의 길은 그 좌우에 용립(聳立)한 거대한 산봉군의 위용만큼이나 산세가 빼어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사이를 흐르는 조령계는 수정처럼 맑은 물과 생명력이 넘치는 울창한 천연림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가슴에 스며오는 청정한 공기는 우리들의 심신을 정화한다. 그 숲길을 걷다 보면 가슴이 트이고 정신이 맑아지며 온몸에 생기가 샘솟는다. 새재의 길은 깊고도 그윽하지만 언제나 사람이 들고 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근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새재의 길은 청정한 산수를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이 아직 비포장도로의 ‘명품길’로 남아있게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박 대통령이 문경을 방문하였을 때 젊은 시절 자주 찾았던 새재를 탐방했다. 그런데 새재의 관문의 무너진 성벽 위로 차량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차량통행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지자체에서 꾸준히 성곽을 복원하고 문루를 보정하였으며 길을 정비하고 깨끗한 마사토 흙을 깔아서 쾌적하고 정취있는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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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재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흙길이 ‘명품(名品)’이다
☆… 제1관문에서 제3관문에 이르는 새재의 고갯길은 우리나라 '명품길 10선'에 들어있다. 새재의 본격적인 걷기는 제1관문(主屹關)에서 시작한다. 주흘관에서 제2관문(鳥谷關)에 관에 이르는 3.6km의 길은 잘 다져진 마사토가 깔끔하게 깔려 있다. 그 길의 왼쪽으로 조령계곡이요, 오른쪽으로는 주흘산의 산자락과 연해 있다. 길목에는 용추계곡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아름다운 계곡의 산수가 이어지고 이 길은 옛날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제3관문(鳥嶺關)까지는 6.3km이다. 마사토로 다져진 고갯길은 역시 풀향기 은은한 고즈넉한 산길이다. 이 길을 오가던 퇴계 이황 선생도 발걸음을 멈추고 <龍湫>를 노래하고 있다. 그 시비가 용추폭포 앞에 서 있다.
巨石贔贔雲溶溶 큰 바위 힘이 넘치고 구름은 도도히 흐르고
山中之水走白虹 산 속의 물 내달아 흰 무지개 이루었네
怒從崖口落成湫 성난 듯 낭떠러지 입구에 떨어져 웅덩이 되더니
其下萬古藏蛟龍 그 아래엔 옛적부터 이무기[蛟龍] 숨어있네
蒼蒼老木蔽天日 푸르고 울창한 노목들 하늘의 해를 가리었네
行人六月踏冰雪 나그네는 유월에도 빙설(氷雪)을 밟는다네
湫邊官道走玉京 깊은 웅덩이 곁에 국도는 서울로 내달린다
日日輪蹄來不絶 날마다 수레와 말발굽이 끊이지 않는데
幾成歡樂幾悽苦 즐거웠던 일 그 몇 번이며, 괴로웠던 일 또 몇 번이던가
笑撫乾坤睨今古 하늘과 땅이 웃으면서 어루만지고 예와 오늘을 곁눈질하네
大字淋漓寫巖石 큰 글자 무르녹은 듯 바위에 쓰여 있으니
後夜應作風和雨 다음 날 밤에는 응당 풍우가 내리리라. -이황 <龍湫>
☆… 조령계(鳥嶺溪), 계곡의 물소리를 벗 삼아 정갈한 흙길을 걸어 보라.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걸으면 더욱 좋다. 마사토의 깔깔함이 발바닥으로 전해진다. 발바닥의 경락을 자극해서 건강에 아주 좋다. 지기(地氣)가 몸에 올라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맑은 기운이 샘솟는다. 청정한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면 온몸이 쾌적하다. 일상의 바쁜 심사를 다 내려놓고 명상하듯 가뿐한 걸음걸이로 걷는다. 왼쪽의 높은 하늘 위로 솟아있는 조령산의 위용이 마음 든든하다. 길의 좌우의 수림(樹林)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잣나무, 박달나무, 층층나무, 굴참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들이 울창하게 분포되어 있다. 걷다가 잠시 길옆에 놓인 벤치나 정자에도 앉아 보는 맛도 괜찮다. 여기서는 서두름이 아니라 ‘느림의 미학(美學)’이 생명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 계속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계곡의 청랑한 물소리가 노래하듯 따라온다. 이윽고 양쪽 계곡길이 돌아가면 갑자기 주위가 좁아지며 조곡관의 날렵한 모습을 나타난다. 성문 앞에 조곡교(鳥谷橋)가 개울 위에 걸쳐 있다. 조곡관을 지나면 비로소 인적이 뜸해진다.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으로 이어지는 길은 고즈넉하다. 여기서부터 서서히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저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옆으로 낙락장송의 장엄경이 이어지고 울창한 수목 사이로 새재의 경내의 꽃술 같은 부봉의 위용이 드러난다. 숲은 깊어지고 숲 냄새가 가슴속 깊이 밀려든다.
그리고 새재를 지나다녔던 선비와 시인묵객들의 시들이 정갈한 글씨체로 돌비에 새겨져 있다. 옛과거길을 따라 시비를 읽어 가면 고인들의 서정과 숨결을 교감하는 맛이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은 ‘회계로 인끈을 속에 품고 돌아가는 길 / 시냇물 속에는 남은 단풍 뒹굴고 있네’라는 시를 남겼다. 영남학파 소세양(蘇世讓)은 ‘돌길 따라 구름 위로 올라가니 / 굽이굽이 삼십 리나 이어졌네 / 사람들은 높은 나무 끝으로 지나고 / 말은 푸른 병풍 속으로 들어가네’라고 넘기 힘든 고개인 새재를 읊었다.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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