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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문협 하반기 논산 문학답사
일시:2013년 10월 19일 토요일
답사 지역:충남 논산, 강경
* 논산 견훤왕릉
서초문인협회의 하반기 논산 문학답사는 서초구청 광장에서 오전 7시 30분에 집결하여 출발했다. 풍요로운 가을 들녘을 달려 맨처음 간 곳은 논산에 위치한 견훤왕릉이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왕의 릉은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다. 견훤왕릉이라는 명패를 보며 산길을 올라가서 만났다. 묘소 옆에는 후백제왕견훤릉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견훤은 신라 멸망기에 백제부흥을 위해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며, 새로운 통일국가를 주도한 사람이다.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 아들 십여 명이 있었는데, 특히 넷째 아들 금강을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려고 했다. 이에 그의 맏아들 신검이 금산사에 아버지 견훤을 유폐시켰다. 하지만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했고, 왕건은 견훤에게 상부라는 칭호를 주었다. 견훤은 936년 왕건에게 자신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여 결국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며칠 만에 황산,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의 어느 불사, 즉 개태사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장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조선초 편찬된 고려사에서 견휜의 무덤이 은진군 풍계촌에 위치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기서 은진군은 지금의 연무읍 금곡리가 포함된 지역이다. 금곡리 모칭이 마을 뒷산에 위치한 이 무덤은 실제 견휜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모칭이 마을 뒷산 정상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견휜릉은 봉분 직경이 10m, 높이가 5m 정도다. 1970년 견씨문중에서 분묘정비를 하여, 현재는 견훤왕의 비석도 세워져 있고 봉분과 묘 주변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있다. 정비 이전에도 석물이나 부대시설이 없었을뿐 봉분의 규모 자체는 현재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후백제의 아픈 역사와 견훤의 슬픔이 서린 묘소가 덩그러니 서서 큰 눈으로 외객을 맞이한다. 주변은 견훤왕릉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견훤에 대한 개인적 역사와 업적, 멸망까지 학창시절 배운 지식을 다시 다지는 유익한 여정이었다.
* 강상고등학교 탐방
강상고등학교는 예전의 강경상고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 소재하며 1920년에 강경상업고등학교로 개교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고등학교다. 일제 강점기와 동란의 혼란 속에서도 90여 년의 역사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개교 100주년을 앞둔 강상고등학교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금융분야의 핵심인재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훌륭한 금융인들이 이학교를거쳐갔고 정치가, 교육자, 문인 등 많은 사람들의 족적이 담겨 있는 교정을 탐방했다. 운종장 앞에는 스승의날 기념비가 있고 화단에는 김관식 시인의 '이 가을에'·시비가 있다. 또한 이 학교를 빛낸 사람들의 탑도 있다. 강상고 앞 바로 길 건너에는 일제시대 건물이 그대로 있는 강경초등학교도 있다. 한국의 혼이 담긴 강상고에서 잠시 일제 강점기의 소슬한 아픔과 역사를 조명하며 내 조국의 더 큰 발전과 애국을 다짐하는 여정이었다.
* 강경 발효젓갈 축제
이번 서초문협 가을 문학탐방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일정 중의 하나다. 강경 발효젓갈 축제는 올해로 17회를 맞은 충남 논산 강경의 큰 행사다. 지난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 동안 열린다. 오늘이 19일이니, 우리는 알맞은 시기에 이곳에 온 것이다. 젓갈을 사는 것도 좋고, 축제를 보는 것도 뜻깊은 여정이다. 강경 포구 부근은 에서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큰 잔치 분위기를 뭃씬 자아낸다.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도 알려서 한국의 웰빙식품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 금강변에 위치한 행사장 주변은 차들도 많고 복잡했다. 그래도 높이 뜬 새우 풍선과 홍보 안내문과 젓갈 축제장의 아름다운 정졍이 흐뭇하다. 젓갈 축제장을 지나 황산공원 전망대로 올라갔다.
* 강경 황산 근린공원
* 논산 명재 고택
명재 고택은 윤증 고택이라고도 불린다. 명재는 윤증의 호다. 숙종 때 소론의 지도자였던 윤증은 1629년에서 1714년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학자다. 윤증은 많은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소론의 수장으로 불리며 조선유학사에서 예학을 정립한 대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 고택은 그의 여러 제자가 추렴하여 그러한 스승을 모시고자 지은 것이지만 실제로 윤증은 고택 옆 아주 작은 초가집에 살았다. 명재 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전통 목조가옥으로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백제시대 노성산성이 있는 노성산을 배산으로 노성향교와 나란히 있다. 가옥은 상류 양반 가정의 표본이 되는 목조단층 건물이다.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품고 있는 한옥은 ㄷ자 형태의 안채와 ㅡ자 형태의 사랑채로 지어졌다. 사랑채는 시원스럽게 개방된 구조로 방안에서도 정원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지어졌다.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이어서 안이 쉬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지어졌다. 그러나 안에서는 대문 앞에 누가 들어오는지 알 수 있게 지어졌다. 언덕 위에는 장독대가 있는데, 장독대 사이로 바람이 흘러 나가는 한옥의 과학적인 지혜를 보여준다.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건축 등에서도 선인들의 호연지기 정신과 풍류를 가르친다.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과 바깥마당 그리고 우물이 있다. 연지 가운데에는 둥근 동산을 꾸미고 커다란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연지 끝자락에는 노성향교가 있다.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고전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다. 고택의 뒷산은 아름다운 노송이 장관을 이룬다. 집앞에는 가을의 놀놀한 들판이 비경이다. 안에서 보는 것보다 밖에서 보는 풍경이 더욱 수려하여서 무릉도원 같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잠시지만 머무는 동안 조선시대의 여인이 된듯 단아한 걸음으로 안마당을 거닐어보고, 대청마루에 올라가 집 뒤의 청청한 소나무 숲도 보며 흐뭇한 시간이었다. 집 앞의 연못은 떠나려는 발걸음을 잡는다. 배롱나무가 있어 더욱 나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많은 고택을 탐방했지만 오늘 본 명재 고택은 모든 아름다움을 갖춘 가옥이다.
* 논산 관촉사
관촉사는 고려 시대 창건된 사찰로,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는 곳이다. 보물 제 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 18.12m, 둘레 9.9m로 동양에서 가장 큰 석불이다. 관촉사는 어쩌면 은진미륵이 있어 더욱 빛나는 사찰이 아닌가 싶다. 거대한 석불이 자아내는 인자한 표정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관촉사 입구에는 벚나무가 늘어서 있어 매년 봄이면 벚꽃 장관이다. 은진미륵 바로 앞에 있는 4각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고려 968년에 광종 19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이다. 은진미륵을 비롯하여 고려의 역사가 담긴 사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산 높은 고세 있어서 오르내릴 때 아슬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불심도 닦았다.
*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은진미륵은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높이 18.12m, 둘레 9.9m로 동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보물 제 218호다. 6층 건물 정도의 높이의 거대한 불상은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나에게는 그 이름이 더 정겹다. 반야산 기슭 천년고찰 관촉사 법당 안이 아닌 뒤편에 겸손한 자태로 우람하게 서 있다. 고려 968년 광종 19년에 창건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조화롭지 못한 몸의 비율로 몸체는 하나의 기둥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내려와 있다. 얼굴은 몸 전체의 4분의 1이나 될 만큼 크고, 눈, 코, 입, 귀의 표현도 과장되어 있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어색한 편이다.
나에게 은진미륵은 대학 학창시절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논산이 고향인 친구를 따라 은진미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때는 허름한 산자락 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오늘 본 은진미륵은 풍요로운 산자락 아래 놓여 있다. 세월이 변한 것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들 역시 40년도 더 넘은 세월이니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꼭 보고 싶었던 은진미륵이었기에, 아니 학창시절의 추억을 더듬고 싶었기에 친구 얼굴을 떠올리며 우람한 입상 보살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 논산 개태사
논산 연산면 천호산에 자리하고 있는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사찰이다. 고려 936년 태조19년에 후백제를 무찌르고 창건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삼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세운 국가 사찰이다. 조선조시대에는 퇴락하여 폐사로 있던 것을 1930년 새로 지었다. 한적한 농촌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자락 아래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큰 감나무에 붉은 감이 가을 정취를 보듬고 있어 더욱 정겹다. 충남문화재자료 제247호인 5층 석탑이 길손을 맞이한다. 본전인 극락대보전에는 보물 219호인 4m 높이의 석불 세 개로 된 삼존불상이 서 있다. 통일 대업의 원대한 꿈을 성취한 기념으로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조성한 불상이다. 들어가서 앞뒤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본존 여래상은 사각형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얼굴이 둥근 역삼각형이다. 머리와 이마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눈과 눈썹을 가늘고 길게 표현해 매우 위압적인 인상을 준다. 굴곡이 없는 신체는 거의 원통형 기둥에 가깝고, 신체에 비해 양손이 너무 커 비례가 맞지 않는다. 오른손은 들어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배에 붙여 대의를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매우 투박하고, 신체 비례도 어색하다. 그러나 4m가 넘는 거대한 크기는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이상적인 크기인 장륙 1장 6척으로 현재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4.85m를 표현한 것으로 고려의 위대한 힘을 상징하고 있다. 충남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된 대형 철 가마솥 철확이 있다. 왕건이 500명 승려의 밥과 국을 끓여 먹이기 위해 만든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의 대형 무쇠솥이다. 개태사의 큰 규모를 드러내고 있는다. 천 년도 넘는 세월을 보듬고 있다. 군사들이 이 큰 가마솥에 지은 밥을 먹고 왜적과 싸워 이겼다는 전설도 담겨 있다.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지만 보존 상태가 좋다. 대홍수가 났을 때 이 가마솥으로 본당 앞을 막았다. 그로인해 불상은 안전했지만 가마솥은 떠내려갔다. 또한 가마솥으로 둑을 막으면 홍수피해를 막아주어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다. 솥 뚜껑은 어느 개천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왕건 영정이다. 개태사는 태조 영정을 모신 신전으로 매년 제사를 드리던 사찰이기도 하다. 독립된 한 채의 어진전 건물에 왕건 영정이 잘 모셔져 있다. 해는 저물어 가고 아늑한 곳에 위치한 개태사에서 고려의 정취를 보며 논산 문학 탐방을 마무리하였다. 논산과 강경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매운 유익한 문학 나들이다.